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광주광역시 러브앤프리(제1회)

  • 작성일 2020-10-01
  • 조회수 1,453

[책방곡곡]

 

 

 

광주광역시 러브앤프리(제1회)

– 재미, 먹거리, 친구! 그중에 제일 중요한 건? “친구!”

– 『더 셜리 클럽』(박서련, 민음사) –

 

 

사회/원고정리 : 윤샛별(러브앤프리 책방지기)
참여 : 강성희, 구희진, 윤송일, 최미나

 

 

 

 

 

    근대문화역사마을 양림동에 위치한 독립 서점 러브앤프리에 책을 읽는 청년 넷이 모였다. 그들은 광주 곳곳에서 독서 모임을 진행하는 사람들이다. 사회문제를 다루기도 하고, 여성으로 구성된 모임을 운영하거나, 평화를 주제로 만나기도 한다. 또, 온라인을 통해 책을 소개하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들과 사랑, 퀴어, 성장을 담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다. 그 첫 번째 책은 『채공녀 강주룡』으로 알려진 박서련 작가의 『더 셜리 클럽』이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지금의 여성들에게 『빨간 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 『소공녀』 같은 작품처럼 사랑의 긍정 에너지 때문에 읽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동화였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오늘은 사랑을 주제로 『더 셜리 클럽』을 나눠 보려고 한다.

 

사 회 : 『더 셜리 클럽』 어떻게 읽으셨나요? 민음사 젊은 작가 시리즈의 신작이기도 하죠. 표지부터도 참 예쁜 책인데요. 여러분 어떠셨어요?

 

구희진 : 저는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닌데 이 책은 단숨에 읽었어요. 읽는 내내 여행지의 길 위에 서서 책의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는 느낌이었어요. 코로나, 앞으로의 미래, 바이러스를 다루는 책들을 읽다가 『더 셜리 클럽』을 읽으니 세상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랜만에 두근거리는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받으면서 즐겁게 읽었네요.

 

강성희 : 저도 여행을 같이 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야기의 배경이 호주잖아요. 호주에서 또 다른 나라로 가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호주에 가본 적이 없는데 호주 권장도서 같았어요. (웃음) 호주가 그대로 와 닿았어요.

 

최미나 : 사회과학 분야 책만 읽다가 이번 소설을 읽으니 환기되는 기분이었어요. 표현이 쫀득쫀득한 느낌이 있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것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에서도 '보라색 목소리'였어요. 목소리에 색을 입혀서 표현하는 게 낯설지만 좋았어요. ‘나의 목소리는 어떤 색깔일까?’ 생각해 보게 됐고요. 미나 클럽도 있을까 찾아봤는데 없더라고요.

 

구희진 : 셜리 클럽이 호주에 진짜 있는 거 아세요? 박서련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본인이 실제로 호주 워킹홀리데이 경험이 있고, 그곳에서 열린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이 클럽을 본 거죠. 작가의 영어 이름도 셜리라서 ‘저도 셜리예요’ 외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아쉬움에서 이 소설이 출발했다고 해요. (모두 감동!) The Shirley Club을 검색하면 사이트도 나오고 셜리 할머니들의 모임 사진도 볼 수 있어요.

 

윤송일 : 저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각각 매력적이었어요. 전체적으로 밝고 가벼운 느낌인데 그 속에서는 인종과 성차별을 다루고 있잖아요. 전 세계적으로 이슈인데, 그걸 산뜻하게 읽을 수 있게 쓰여 있었어요.

 

사 회 : 네, 여행을 떠올리게도 하고요, 사랑, 성장, 관계도 생각하게 해요. 또, 혐오와 차별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기도 하죠. 좀 더 꺼내고 싶은 부분이 있으신가요?

 

강성희 : 셜리의 여정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 이야기로 느껴졌는데요. 셜리가 사랑하는 S도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고, 셜리가 좋아하는 보라색 목소리도 보라색이라는 색 자체가 파랑과 빨강이 섞여 있어 중성적이잖아요.

 

윤송일 : 맞아요. 셜리가 ‘화장실을 간 S를 기다리면서 S는 어느 쪽 화장실을 쓰는 걸까 궁금해 하다가, S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질문을 까먹었다.’(p.77) 라는 부분이 있어요. S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호감을 가지고 마음을 주는 게 드러나잖아요. 세세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짧은 문장 하나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최미나 : 저는 솔직히 남자인 줄 알았어요. (웃음) 역시 책을 읽고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좋네요. 지금까지 남자인 줄 알고 셜리와 S의 스킨십 이야기가 나왔을 때 진도가 상당히 늦구나,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다 함께 웃음) 그러면서 내가 전형적인 틀 안에서 보는구나, 아무 생각 없이 봤구나, 발견하게 되네요. 모호한 표현과 모호한 느낌들이 오히려 더 상상력을 자극하네요.

 

구희진 : 모호하게 남겨 둔 덕에 오히려 우리가 인식하는 ‘사랑’의 모습이 얼마나 전형적인지 깨닫게 하는 것 같아요. ‘사랑’ 하면 이성애를 떠올리기 쉬우니까요. 이 책을 읽는 동안 제가 ‘사랑’이나 ‘관계’에 대해 얼마나 좁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게 됐어요. 셜리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이 포함할 수 있는 것들의 범위가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고요.

 

사 회 : 저도 공감해요. 우리가 규정하는 많은 것들을 일부러 배제하고 한 사람 자체에 집중하게 하는 이야기가 좋았어요. S의 성별에 대한 내용 외에 셜리가 모튼 할머니가 순두부를 닮았다는 표현이 나와요. 신체적인 나이로 인한 피부의 늘어짐과 살찜을 ‘순두부’라는 말랑말랑한 표현을 쓰고, 스키를 좋아하는 할머니가 ‘파도를 멋지게 타는 광경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순두부가 틀림없을 것이다’(87p) 라고 하는 것도 노년을 살아가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배제하는 거죠.

 

 

사 회 : 더 셜리 클럽에서 이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책 제목 그대로 ‘셜리’라는 이름으로 많은 인물이 등장해요. 같은 이름이라도 모두 다르죠. 어떻게 읽으셨어요?

 

최미나 : 제 이름은 흔한 이름이에요. 어딜 가나 ‘미나’가 있거든요. 중학생 시절을 떠올릴 때 ‘미나’, ‘민아’가 있어요. 그리고 ‘민하’도 있고요. 그때는 같은 이름이 있으면 미나 1, 미나 2, 키 큰 미나, 키 작은 미나로 불렸는데 저희 반에서는 저는 ‘까만 미나’, ‘그냥 미나’였어요. 나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싫어서 이름이 똑같은 게 싫었어요. 저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게 이름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셜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친구들이 가득 있는 다양한 셜리들이 이름은 똑같은데 다양한 포지션에 있는 거예요. 그게 든든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같다’라는 느낌과 ‘다르다’는 정체성이 동시에 같이 있는 느낌이었어요. 이제는 미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이런 형태로 만나 보면 좋겠어요.

 

구희진 : 우리가 자신을 소개할 때 가장 먼저 이름을 말하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름이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싶어요. 이름 그 자체로는 나라는 사람의 특성을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으니까요. 셜리라는 이름만 해도 1970년대 이후에는 잘 붙이지 않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이름이고, 미나 님이 태어나던 시기에는 ‘미나’가 유행했던 거죠. 그동안 우리는 누군가가 좋아 보여서 내게 ‘지어 준’ 이름으로 나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설명하려고 애써 온 건 아닐까 싶어요. 내게 붙여진 이름 대신 나라는 사람의 특성을 조금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이름을 ‘선택’해서 살아 봐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사 회 : 그렇네요. 등장인물 중 ‘S’는 유일하게 이름이 나오지 않잖아요. 그렇지만 어떤 인물일지는 충분히 드러나고 있어요.

 

강성희 : 학교 다닐 때 흔한 이름이 있잖아요. 민지나 지영이요. 그런 분들이 ‘내 이름은 너무 흔해’라고 하는데, 셜리 클럽에서는 할머니들이 굉장히 적극적이었어요. 모임을 만들고 같은 이름과 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잖아요. 중고등학교 때 다들 똑같은 머리를 하면서도 개성을 드러내는데, 셜리가 오히려 자기와 똑같은 이름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 자기를 찾아가고 있는 게 보였어요.

 

최미나 : 셜리 클럽의 모토가 있잖아요. “재미, 먹거리, 친구!” 할머니들이 입을 모아 Fun, Food, Friend라고 외쳤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건? “친구!”(p.141) 그 모습이 상상되면서 ‘친구’라는 걸 생각해 보게 됐어요. 사랑의 범주 안에서 요즘 들어 친구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이런 클럽을 만들어 보고 싶은 거예요. 주인공 셜리가 활발한 성격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혼자 호주에서 견디면서 생활을 잘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셜리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들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1인 가구로 혼자 살고 있는데, 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모임들이 있어서예요. 이것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사 회 : 셜리가 S에게 워크맨을 선물 받아요.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야기하죠.

 

강성희 : 맞아요. 요즘 레트로가 유행하면서 카세트테이프가 나오잖아요. ‘Track’으로 구성된 목차가 재밌었어요. 챕터마다 재생과 일시정지 버튼으로 구분하고요.

 

최미나 : 어머나, 이제 알았어요. 저는 그냥 넘겼어요. (다 같이 웃음)

 

사 회 : 셜리가 워크맨이 왜 자기에게 최고의 선물인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하는 사랑고백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어요. ‘들려주고 싶은 곡을 고르는 데 걸리는 시간, 말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는 시간, 같은 것을 고민하는 시간 같은 걸 빼도 상당히 시간이 들었을 거예요. 나에게 카세트테이프는 그런 의미가 있어요.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선물하려 할 때에는 먼저 똑같은, 때로는 더 많은 시간을 써야만 한다는 걸 알려주는 도구.’(p.90) 사랑을 빗대어서 사랑이란 결국은 그 사람에게 쏟아내는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여러분은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고 계시나요?

 

최미나 : 전 애인과 헤어지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그때 아버지가 옆에서 운전을 하고 계셨거든요. 물어볼 수 있잖아요. 무슨 일이냐. 왜 그러느냐. 아버지가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운전만 해주시고요.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어요. 또,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오빠가 한 명 있어요. 제가 벌이가 없이 공부하면서 프리로 있는데, 미나 돈 좀 주라고, 용돈을 주고 갔다고…… (웃음) 그 사랑을 제가 받았어요. 어려울 때 도와주는 그 사랑을 받았네요. (다 같이 웃음)

 

강성희: 셜리의 엄마 이야기가 참 좋았어요. 저는 친정이 멀리 있어요. 코로나 때문에 가지도 못하고요. 엄마가 갱년기인데 곁에서 시간을 같이 못 보내니까, 엄마한테 필요할 것 같은 사소한 것들을 다 챙기려고 해요. 필요할 것 같으면 다 배송 보내거든요. 무뚝뚝한 딸이라 전화도 잘 안 하지만, 이것만큼은 하려고 해요.

 

구희진 : 저에게 ‘보라색 목소리’는 남편인데요, 저는 그 사람이 정말로 좋아하는 한두 가지는 무조건 함께해 주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어요. 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상대방의 인생에서는 너무 큰 즐거움이라면 무조건 오케이하고 들어주는 거죠.

 

윤송일 : 보라색 목소리를 만났다는 말이 너무 좋네요. 셜리라는 인물은 S를 사랑하면서 상대방에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신뢰하고, 기다리고, 먼저 다가가 주는지, 그 사랑을 책 한 권에서 보여주고 있어요. 셜리가 공장에서 잘린 줄 알고 둘이 차를 타고 가는데 S가 운전이 서툴러서 손을 덜덜 떨면서도 셜리에게 힘을 주려고 하잖아요. 그런 순수한 느낌의 사랑이 좋더라고요.

 

강성희 : 마지막 즈음에 할머니에게 편지를 받잖아요. 그 편지에서 『더 셜리 클럽』이 전하는 바가 드러난다고 보거든요.

 

모 두 : 아, 맞아요. 너무 좋았어요. 읽으면서 뭉클했어요.

 

‘네가 찾는 사람도 혼혈이라고 했지. 여러 문화적 배경을 지난 사람들은 그 문화적 배경에서 보다 그들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 안에서 정체성을 찾게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가 된다. 네가 찾고 있는 사람에게 네가 주는 사랑이 그 사람을 완성해 줄 거다.’(p.199)

 

강성희 : 너는 S를 완성시킬 수 있어. 그 둘은 정체성을 서로 완성시켜 주는 존재구나 싶었어요.

 

사 회 : 오늘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눠주셨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신가요?

 

강성희 : 한 줄 문장을 만들어 봤어요. ‘셜리라는 별들이 모여 보랏빛의 사랑이라는 별자리를 완성한다.’

 

모 두 : 멋져요. 저희도 다 해볼까요?

 

윤송일 : 저도 메모해 봤는데요. ‘정체성은 타인과 나를 구분하거나 하나의 사회 공동체로 묶기 위해 존재하는데 셜리 클럽은 셜리들을 묶어 주고 이상적인 공동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왜 존재하는지를 보여준다.’ 저는 셜리 클럽 자체가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정체성을 선택하고, 그 정체성을 증명할 수 없지만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구희진 : 저는 작가가 자주 쓰는 말에 주목하는 편인데, 이 책에는 ‘다들’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와요. 저는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방향과 반대되는 것들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가끔은 “다들 그래~”라는 말 앞에서 무력해지기도 해요. 그런 저에게 이 책은 ‘다들’에 맞서서 ‘그런데 나는’을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다가왔어요.

 

최미나 : 이 책은 나를 만나기 위해 또 다른 셜리들을 만나는 여정이었어요. 그 안에 사랑도 있고 친구도 있고 혼란도 있고 위기와 고통의 순간도 많이 만났습니다.

 

사 회 : 네, 아름답게 사랑하자. 재미, 먹거리, 친구! 그렇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누군가의 여정을 여러분과 함께 나눴습니다. ‘Fun, Food, Friend!’

 

 

 

 

 

 

 

 

 

 

 

 

윤샛별

사회·원고정리 / 윤샛별

사랑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바람을 담은 서점의 책방지기입니다.

 

강성희
참여자 / 강성희

책에서 문장을 수집하는 디자이너이며 여성독서모임 ‘도그이어’를 운영합니다.

 

구희진
참여자 / 구희진

좋은 이야기에 매일 반하며 읽고 쓰는 온라인 책방 ‘언두북스’ 운영자입니다.

 

신해리

참여자 / 윤송일

퀴어이고, 개를 키우고, 음악을 합니다.

 

김수운

참여자 / 최미나

스스로 서있음과 함께 공부를 합니다. 실패와 실수를 환영하며 성장합니다.

 

 

   《문장웹진 2020년 10월호》

 

추천 콘텐츠

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