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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서 본 ‘권태’의 의미

  • 작성일 2006-02-27
  • 조회수 2,645






“폭 좁은 철도를 끼고 있는 어느 초라한 기차역에 우리는 앉아 있다. 다음 기차는 빨라야 네 시간이나 지나서 온다. 기차역 일대는 삭막하기만 하다. 우리는 배낭 속에 책 한 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 꺼내 읽어 볼 것인가? 아니다. 그러면 어떤 물음이나 문제에 관해 골똘히 사색에 잠겨 볼 것인가?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기차운행 시간표를 훑어보거나 또는 이 역과 - 우리는 더 이상 잘 모르는 - 다른 낯선 곳과의 거리가 다양하게 표시되어 있는 안내도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러다 우리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겨우 15분이 지났다. 그래서 우리는 국도 쪽으로 건너가 본다. 우리는 그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녀 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이제는 국도변의 나무들을 세어 본다. 다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처음 시계를 보았을 때보다 5분이 더 지났다. 이리저리 거니는 것도 싫증이 나 우리는 돌 위에 앉아 갖가지 형상들을 모래 위에 그려 본다. 그러다가 우리는 문득, 우리가 또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반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 죽이기는 계속된다.”
     


누구나 한번쯤은 체험해 보았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 글은 일생을 오직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만 사유하는 데 보냈던 독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 1888~1976)의 저서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서 하이데거는 ‘삶의 무의미성’과 그것의 극복을 ‘권태(倦怠, Langweile)’의 문제와 연관하여 다루고 있지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권태란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염려하는 현존재(Dasein; 하이데거가 ‘인간’을 부르는 말)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기분(Grundstimmung)’인데, 그것의 구조는 ‘붙잡고 있음(Hinhaltende)’이자 동시에 ‘공허 속에 놓아둠(Leerlassende)’이라는 겁니다.

하이데거는 위에서 우리가 어느 초라한 기차역에서 빨라야 네 시간이나 지나서 오는 기차를 기다릴 때를 예로 들었지요. 이때 우리는 기차 시간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데, 이것이 우리를 권태롭게 하는 권태의 존재론적 구조랍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이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시간 죽이기(Zeitvertrieb)’를 시작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이 가진 근원적인 모습이 아니던가요? 우리는 - 누구 하나 예외 없이 - 언제 올지도 모르고 또 무엇인지도 모르는 죽음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요? 그래서 하염없는 권태 속에서 시간 죽이기를 해야만 하는, 참으로 권태로운 존재가 아니던가요? 그래서 하이데거도 권태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라고 규정한 것이 아니던가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하이데거가 제시한 바로 이 ‘예사롭지 않은’ 권태에 관한 문제들을 - 제가 아는 한 - 그 어떤 작품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희곡이지요. 1953년 1월, ‘바빌론’이라는 파리의 한 소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이 작품 속의 두 주인공은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일’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연극 내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 죽이기’를 하지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일단’ 그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루함을 느끼지요. 하지만 그 지루함이 왠지 전혀 낯설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흥미롭지 못한 작품들이 주는 지루함과 다른 점이죠. 알고 보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주는 지루함은 단순히 ‘흥미 없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근본적 구조에서 나온 ‘권태’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이 작품은 우리 모두가 언제나 외면하고 살지만 사실인즉 항상 끌어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그래서 폐관 직전에 있었던 바빌론 소극장에서의 공연만 400회를 넘기고, 곧이어 수십여 개의 언어로 번역, 공연되어 20세기를 대표하는 희곡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 아닐까요?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은 사건도 이야기도 없는 이 연극을 보며 한없이 지루해하지만 결코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한번 보시죠.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세계와 삶의 무의미성   

  
                           
막이 오르면, 무대 위에는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한 그루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희곡에는 “시골길, 나무 한 그루”, 이 두 마디가 씌어 있지요. 거기에 등장한 블라디미르(Vladimir)와 에스트라공(Estragon)이라는 두 인물은 어디에서 오는지, 왜 오는지, 언제 오는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온다는 고도는 끝내 오지 않고, 그렇다고 별다른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요. 그 가운데 럭키와 포조라는 인물들이 그곳을 지나가지만 역시 아무런 사건도 없고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1막이 끝나고 2막이 다시 한 번 같은 것을 반복한 다음, 연극이 끝나지요. 그것이 전부입니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흔히 반(反)연극, 신(新)연극, 부조리연극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지요. 전통적인 연극이 무엇인가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연극을 반(反)연극 이나 신(新)연극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연극을 ‘부조리연극’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부조리(不條理)란 - 서영은의 「사막을 건너는 법」을 통해서 본 ‘거짓말’의 의미에서 이미 보았듯이 -  ‘조리에 맞지 않음’, 또는 ‘이성에 의해 파악되지 않음’, ‘비합리적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작가들이 부조리(l'absurdite)를 말할 때는 보통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삶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뜻하지요. 이들의 작품들, 예컨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와『구토』, 카뮈의 『이방인』이나 『페스트』등은 바로 이것을 철학적 또는 문학적으로 설명하며 이해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와 다르지요. 매우 특이한 이 작품은 부조리를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고 하는 대신 부조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관객들 스스로가 부조리와 맞부딪혀 그 자체를 느끼게끔 하는 형식과 내용을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연극을 예컨대 카뮈의 『칼리큘라』나 사르트르의 『출구 없음』(No Exit)처럼 ‘실존주의 연극’이라 하지 않고, ‘부조리연극’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런데 ‘부조리 그 자체’를 보여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베케트가 한 일은 - 제가 보기에는 - 적어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변화 없는 시공간(視空間)’을 창조한 일이지요. 전통적 연극에서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의 변화는 사건의 전개를 통해 표현됩니다. 하지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아무런 사건도 전개되지 않지요. 에스트라공의 말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끔찍한” 시공간에 두 사람이 그저 내던져져 있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무엇인가 대화를 나누고 행동을 하지만, 그 대화나 행동은 아무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지요. 때문에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 것이고 전통적 연극에서 보여주는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시간은 반복되고 공간은 고정되어 있지요. 여기에서는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자체가 부조리인 것이죠. 예를 들면 다음 두 대화들은 1막과 2막에서 똑같이 반복되는데,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시공간의 무의미성을 잘 보여줍니다.



에스트라공 : 자, 그만 떠나자.
블라디미르 : 안 돼.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에스트라공 : 참, 그렇군. 

……

에스트라공 : 자, 그럼 가볼까?
블라디미르 : 응, 가세나.
 (그들은 꼼짝 않는다.)



형식적으로 보아, 이 작품은 1막과 2막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막이 바뀌어도 역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요. 나무에 잎이 너댓 개가 돋아 있고, 럭키와 포조가 각각 눈이 멀고 실어증에 걸렸다는 것 같은 약간의 외관상 변화는 있지만, 그것들 역시 아무 의미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대에는 1막에서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행위가 반복됩니다. 베케트는 이렇듯 무의미한 대화와 행동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역사적 시간의 전개가 불가능한 시공간을 창조했지요.


‘부조리 그 자체’를 보여주기 위해 베케트가 한 또 하나의 일은 ‘성격 없는 인물’을 창조한 것입니다. 전통적 연극에서 인물은 성격에 의해 창조되지요. 하지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통적 의미에서 보면 성격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부조리하지요. 
연극에서 한 인물이 어떤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그가 하는 말과 행동(action)에 확실한 의미와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케트의 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어떤 의미도 목적도 갖고 있지 않지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블라디미르와 아스트라공은 그들이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고도가 누구인지, 그가 오면 어떻게 할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사실은 기다리는 것도 아니지요. 베케트의 두 인물은 고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 같지만, 이 기다림 역시 아무런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대사와 행동(action)이 없는 겁니다. 인물들은 단지 ‘수동적’ 또는 ‘반사적’으로 대화하고 행동을 할 뿐이지요. 



에스트라공 : 아이구 배고파!
블라디미르 : 당근이라도 먹겠나?
에스트라공 : 그것밖에는 없나?
블라디미르 : 순무도 좀 있을지 몰라.
에스트라공 : 당근 좀 줘봐. … 이건 순무잖아!
블라디미르 :  아, 미안하이! … 틀림없이 당근인 줄 알았어.

……

블라디미르 : 참을 수 없대.
에스트라공 : 더 이상은.                        
블라디미르 : 미치려나봐.               
에스트라공 : 끔찍한 일이야.



이러한 인물들에게 성격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베케트의 이 드라마는 매우 연극적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갈등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햄릿과 클로디오스왕, 오셀로와 이아고 사이에서 생기는 그런 대립이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프로태거니스트(Protagonist, 주인공)’도 없고, 이와 갈등하는 ‘앤태거니스트(Antagonist, 대립자)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베케트는 결국 ‘변화 없는 시공간’ 안에 ‘성격 없는 인물’들을 그저 내던져 놓은 겁니다. 마치 텅 빈 무대 위에 아무 대본도 없이 배우들을 올려놓은 것과 같지요. 이것이 베케트가 관객들에게 부조리를 그 자체로 보여주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황은 일찍이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이 “인간은 피투성(被投性, 내던져진 자)이다.”라는 말로 묘사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하이데거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에 의하면, 인간은 그 어떤 특별한 의미[本質]없이 그저 세계로 “내던져진 자”입니다. 이 “내던져짐(Geworfenheit)”에는 거룩한 신의 섭리도, 정해진 운명도 없지요. 인간의 모든 것은 오직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겁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그저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고 ‘현존재’라고 부르는 뜻이 여기에 있지요.
우리말로 ‘현존재’라고 번역되는 독일어 ‘Dasein’은 ‘거기(da)에 있는 존재(Sein)’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일까요? 하이데거가 말하는 ‘거기’란 인간이 아무 의미 없이 그저 내던져진 자리,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이 오직 자기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만 맡겨져 있는 자리, 베케트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인간은 일단 자신의 “내던져짐”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만 맡겨져 있음에 대해서 언제나 “불안(Angst)”해 하며 그것 때문에 항상 “염려(Sorge)”하지요. 이 불안과 염려는 일찍이 파스칼이 『팡세』의 제 1부, 「신 없는 인간」에서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라고 고백한 바로 그 두려움과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베케트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텅 빈 무대’ 위에 내던져진 ‘대본 없는 배우’처럼 ‘무의미한 시공간’ 안에 ‘성격 없는 인물’로 구성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겁니다. 실로 천재적이라 할 수 있지요.

이제, 문제는 대본도 성격도 없는 배역을 맡은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한번 무대에 오른 배우는 아무리 무대가 비어 있더라도, 설사 대본이 없더라도, 그가 무대에 서 있는 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거지요. 연극이 끝나 그가 무대에서 내려가기 전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때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래서 ‘시간 죽이기’를 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보면,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시간 죽이기’이지만, 우선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지요. 기다리는 동안에라도 당장 지루함을 달래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블라디미르 : 이제 무엇을 하지?
에스트라공 : 기다리지.
블라디미르 : 기다리는 동안에 말이야.
         (침묵)
 


그래서 이들은 “시간 때우기 삼아서”, “일종의 휴식 삼아”, “기분전환용으로” 온갖 방법을 통해 ‘시간 죽이기’를 합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놀리던 포조와 럭키를 흉내내는 놀이도 합니다. 연극 속에서 다시 연극까지 벌이는 거죠.

이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지루해지거나 충격을 받게 됩니다. 지루해지는 것은 베케트의 인물들이 벌이는 ‘시간 죽이기’가 전통적인 연극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이끄는 몰입을 철저하게 거부하기 때문이지요. 충격을 받는 것은 그 ‘시간 죽이기’가 우리의 일상적 삶의 무의미함과 허망함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가 이 연극을 보았다면 매우 흥미로워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우리의 ‘일상적 삶 자체’를 이러한 ‘시간 죽이기’로 규정하고 철학적으로 분석한 장본인이기 때문이지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자기 자신의 ‘내던져짐’과 모든 것이 자기에게 ‘맡겨짐’에 대해서 언제나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현존재가 ‘시간 죽이기’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우선 남들이 보통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 즉 ‘평균적 일상성’을 따라 살아갑니다. “대개 사람들이 그리 하듯” 자기 자신보다는 자기 밖의 세상 모든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따라 “잡담”을 하고, 그들을 따라 “애매하게” 행동함으로써, 서로서로 동질화 및 평균화를 꾀한다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위안을 얻는 거지요.
하이데거는 이러한 일상적 삶을 “비본래적 삶(uneigentliches Leben)”이라고 불렀습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서 사는 “본래적 삶(eigentliches Leben)”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상사람(das Man, 世人)’이라고 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퇴락(頹落, Verfallen)’, 곧 ‘무너져 내림’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그저 남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말하고, 남들이 행동하는 대로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진정한 삶은 무너져 내린다는 의미이지요. 마치 베케트의 인물들이 ‘반사적’으로 말하고 ‘수동적’으로 행동하면서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분석한 ‘시간 죽이기’의 존재론적 구조이지요.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시간 죽이기’에 불과한 자신의 비본래적인 삶에 - 마치 그것이 자기가 선택하고 결단한 자시의 본래적 삶인 것처럼 - 위장도 하고 활기를 불어넣어 스스로를 위안도 한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 죽이기’에 분주히 몰입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기도 한다는 거지요.



블라디미르 : 사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좀 해 봐.
에스트라공 : 뭐라고 얘기하라는 거야?
블라디미르 :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해 봐.
에스트라공 : 나는 행복하다.
블라디미르 : 나도 그렇다.
에스트라공 : 나도 그렇다.
블라디미르 : 우리는 행복하다.
에스트라공 : 우리는 행복하다. (침묵) 이제 우리는 행복하니까, 이제 뭘 한다?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지.



하지만 이러한 ‘시간 죽이기’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진정한 자기로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삶은 인간을 점차 전락(轉落, Absturz)시킨다고 했습니다. ‘나쁜 상태로 굴러 떨어진다.’는 말이지요.
베케트도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등장인물들이 신체적으로 점점 불구가 되어가고, 의사소통은 더욱 불가능해지며, 절망은 한없이 깊어만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간 죽이기’를 통해 점차 퇴락해가고 전락해가는 모습이지요. 특히 흥미로운 것은, 1막과 2막에 똑같이 반복되는 대사들이 여러 번 있는데 이러한 반복이 오히려 등장인물의 ‘전락’을 드러내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에스트라공) 자, 그럼 가볼까? (블라디미르) 응, 가세나. (그들은 꼼짝 않는다.)”라는 대사는 1막과 2막의 끝에 똑같이 나오지만, 그럼에도 2막에서 이 대화가 가진 절망감과 허망함은 1막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이 깊어진다는 거지요.

 

 

전락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도 블라디미르나 에스트라공처럼 그냥 그렇게 ‘시간 죽이기’에 몰두하며 전락하는 수밖에 없을까요? 텅 빈 무대에 대본도 없이 올라선 불안과 염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에 분주하게 몰입하여 때로는 행복한 것처럼 스스로를 위안도 하고 위장도 하며, 그냥 그렇게 굴러 떨어져 내려야만 할까요? 아니면 다른 어떤 삶의 방법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베케트는 도저히 잠 못 이루게 하는 이 문제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쳐 무대 위에 올려놓았지만, 굳게 다문 입으로 대답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이데거에게로 돌아가 알아보려 합니다. 어쩌면 문제를 던지는 일은 작가의 일이고, 답을 하는 것은 철학자의 몫인지도 모르지요.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에서 권태를 ‘표면적 권태(oberflchige Langweile)’와 ‘깊은 권태(tiefe Langweile)’로 나누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또는 상대 때문에 생기는 이런저런 특수한 상황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지루해지는 것이 ‘표면적 권태’ 또는 ‘비본래적 권태’이지요. 이런 권태는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대항하는 ‘시간 죽이기’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비본래적인 일상생활에 몰입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권태를 잊는 것이지요.

“호기심(die Neugier)”이 가는 대로 관광, 관람, 패션, 레저, 관음증, 인터넷 서핑, 대중잡지 등으로 분주하게 옮겨 다니며, ‘누가 … 했대.’라는 어법으로 “잡담(das Gerede)”을 나누고 또 퍼뜨리면서, 시간을 죽이는 겁니다. 사회문제와 같은 자기 밖의 문제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문제마저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대신 잡담이나 호기심에 의존하여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런대.’하는 식으로 “애매(Zweideutigkeit)”하게 결정하면서 살아간다는 거지요. 물론 이러한 ‘시간 죽이기’는 그 대가로 퇴락과 전락을 반드시 치르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이에 반해, 아무런 이유가 없이 “아무튼 그냥 지루해(es ist einem langweilig)”라고 표현되는 무조건적인 권태가 있는데, 이것은 ‘깊은 권태’ 또는 ‘본래적 권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권태에 대해서는 ‘시간 죽이기’가 불가능하다는 거지요. 아무리 비본래적인 일상생활에 분주하게 몰입해 보아도 ‘깊은 권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 모두가 근원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권태가 바로 ‘깊은 권태’입니다. 알고 보면 이 권태는 언제 올지도 모르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죽음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인간적 상황이 가진 근원적이면서도 숙명적인 권태이지요. 따라서 이 권태는 그 어떤 ‘시간 죽이기’로도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시간 죽이기’가 실패로 끝나는 것도 그래서이지요.

하이데거는 ‘깊은 권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실존(實存, Existence)'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실존이란 다른 사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사람(世人)’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능성(Seinsknnen)’을 기획하고 그것을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하지요. 그는 이러한 행위를 ‘기획투사(企劃投射, Entwurf)’라는 용어로 표현했습니다. 기획투사는 단순히 미래의 계획을 세운다는 말은 아니지요. 기획투사는 자신의 존재가능성에 자신을 던져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기를 새롭게 구성하는 실존적 행위입니다. 한마디로 진정한 자기, 본래적 자기로 살아간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분명해진 것이 하나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 ‘세상사람’으로 살 것인가? 본래적 삶을 살 것인가, 비본래적 삶을 살 것인가? 전락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이 두 가지 길이 갈라서는 갈림길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현존재(Dasein)’로서 인간은 ‘언제나 그리고 매 순간마다’ 이 갈림길, 바로 ‘거기(da)’에 서 있지만, ‘세상사람(das Man)’으로서 우리는 그것마저도 망각한 채 매일매일 ‘시간 죽이기’에 몰입하여 분주하게만 살아가지요.

바로 이것이 우리들 모두의 가엾은 모습이랍니다. 그래서 한번 이런 생각도 해보지요. 어느 눈 내리던 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왠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차마 찻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자꾸만 걸었던 ‘아픈’ 기억은 분명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라고.



이제 결정 하시죠! 전락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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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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