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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연구자 김연갑 선생님과의 만남

  • 작성일 2007-12-18
  • 조회수 970


 

 

        

그 누구에게 배운 일이 없음에도 우리는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가끔 흥얼거린다. 또 그 노래가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흥얼 따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아리랑이야말로 우리가 몸으로 들어서 배우고 익혀 또 다시 누군가에게 불러주는 자장가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이처럼 아리랑은 노래이면서, 아쉬움이면서, 따뜻함이면서 미련이 한데 어우러진 우리들 속의 한 노래가 아닌가 싶다. 이것이 아리랑에 대한 이제까지의 내 생각이었다. 이런 아리랑을 나는 과연 어데서 불러본 적이 있을까? 아직은 아리랑을 목 놓아 부를 만한 어떤 계기가 나에겐 특별히 없었던 듯하다. 그렇게 오래된 노래를 어찌 내가 한 순간에 알아차릴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아리랑은 나와 같은 젊은 세대의 노래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저 아리랑은 전통문화복원을 위한 수많은 프로그램의 배경 음악쯤으로 듣고 있었던 같다. 그래서 아리랑 연구자이자 운동가이신 김연갑 선생님(아래 사진)을 만난 것은 이전까지 알고 있었던 아리랑에 대한 나의 이런 관념을 수정할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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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선생님. 방송(KBS1 라디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해설)이다, 원고 집필이다, 공연기획이다 해서 바쁘시지요. 근황이 어떠신지요? 요즘은 어떤 일에 관심을 두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 네, 안녕하세요. 북한은 2002년부터 ‘아리랑 축전’이라는 행사를 준비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당시 대집단 체조라는 대규모 행사를 하면서 ‘태양’이라든가, ‘빛’이라든가, ‘별’이라는 것을 상징화하여 북한 통치자들을 부각시켰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 상징들을 사용하는 대신에 ‘아리랑 민족’이라는 표현을 썼지요. 이는 엄청난 변화예요. 우상의 대상이 한 개인에서 민족으로 바뀐 것이죠.

1990년 남북이 단일팀으로 구성되어 단가(團歌)를 만들었고 이후 남북한이 ‘제3국에서 함께하는 모든 일에서는 아리랑을 부르자’ 했던 이 단가는 동서독이 통일이 됐을 때 그들의 단가가 어느덧 국가(國歌)가 된 것처럼, 우리에게도 통일 이후에는 이 단가인 아리랑이 국가(國歌)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저는 통일 이후에는 이 아리랑이 새로운 국가(國家)의 국가(國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시절,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과 북의 통일 문제를 넘어 분단으로 인해서 희생된 러시아 동포, 중국 동포, 일본 동포들을 어떻게 우리의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일 것인가의 문제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지요. 다행스럽게도 이들 교포 2세, 3세들은 우리말을 잃어버리긴 했으나 아리랑만큼은 거의 잊지 않았지요. 통일 이후엔 이 아리랑이 이들을 껴안는 어떤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은 아리랑을 국가(國歌)로 하자고 합의를 보았다고 하네요. 다만 가사의 일부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란 표현이 마땅치 않으니, 이 문제는 서로 연구해서 잘 풀기로 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지극히 사적인 얘기 같지만 이런 대화를 나눈 그분들의 위치는 결코 사적이지 않았죠. 이런 것으로 보면 아리랑은 남북문제를 푸는 아주 중요한 ‘동질성의 고리’ 인자가 아닌가 싶어요. 도대체 아리랑이 무엇이기에 그 바쁜 와중에서도 두 분은 아리랑 얘기에 몰두했을까요?

또 판문점이라고 하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냉정한 사안들이 오가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아리랑’이라는 단가(團歌) 문제만큼은 남북 모두의 의견합치를 보았을까요? 이제까지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그 어떤 회담도 1안부터 시작해서 5안까지 이르러서도 합의가 안 된 일이 많아요. 그런데 유독 이 단가(團歌) 문제만큼은 똑같이 1안으로 제출되어 받아들인 것이죠.

1953년 7월 17일 휴전회담 시, 중공군, 북한군과 미군이 휴전협정 사인을 하고 악수도 나누지 않고 묵묵히 헤어져 돌아서는데, 양측 군악대가 동시에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었다고 해요. ‘아리랑’이 그날 있었던 휴전협정의 ‘마지막 도장’을 찍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남측이 참여하지 않은 사인, 합의, 휴전협정은 결국 미완성이었는데 양쪽에서 아리랑을 연주함으로써 오늘의 이 역사적인 문제는 중공군과 미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문제’라는 것을 회담장을 차지한 중공군과 미군에게 각인시켜 준 거죠.

민족문제에 있어서도 아리랑은 묘한 염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민족의 문제를 아리랑으로 풀어라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이 문제에 매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남과 북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이 아리랑을 ‘어떻게 함께 나눌 것인가’, 그리고 DMZ라고 하는 냉전을 상징하는 공간을 어떻게 새로이 상징화할 것이냐, 하는 등등의 고민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지난해에 ‘제1회 DMZ 아리랑 평화 페스티벌’이라는 축제를 열었죠. 정말로 아리랑만을 가지고 한 공연이었죠. 내리 2시간을요. 역사 이래로 이런 일은 없었죠. 하나의 단일한 노래로 축제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아리랑은 가능했어요. 왜냐하면 북한 아리랑도 있고 울릉도 아리랑도 있고, 진도, 밀양, 기타 등등 50여 가지의 아리랑이 있었으니까요. 또한 그날의 아리랑은 여러 장르로도 확산이 되는 날이었지요. 소리 공연에서 회화까지 모두 펼쳐졌지요. 타악기 공연, 아리랑 회화, 현대무용, 전통무용 등 동서양 악기가 한데 어우러진 퓨전 아리랑 등이 신명나게 소개되었지요.

 

 

선생님이 하시는 방송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의 해설은 재미있는 일인 것 같은데요?

 

= 김태준의 1934년 지론을 보면, <청산별곡>의 여음(餘音, 후렴)은 결국 아리랑과 상통한다고 보고 있지요. 내용의 선후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리랑과 <청산별곡>은 직결되어 있지요. 그렇다고 보면 아리랑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불려온 노래입니다.

좀 다른 얘기지만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이 매듭이 좀 단단히 묶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를 풀어내는 어떤 단서를 우리 조상들이 분명 우리에게 남겼을 거라는 것이죠. 단서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랜 기간 방치해 뒀거나(무심했거나) 그 열쇠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 자신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죠. 이런저런 공부를 하다 보니, 38도선이라는 것도 임진왜란 때 이미 중국과 일본이 암암리에 얘기했던 부분이란 것까지도 알게 됐죠.

역사에 고비가 생기는데 그 고비의 원인은 훨씬 앞선 역사에 이미 있어요. 우리가 그것을 못 찾았기에 고비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지요. 지금 하고 있는 라는 프로그램은 고대사 부분부터 다뤄 지금은 신라시대까지 내려오고 있어요. 방송을 하면서 저도 많이 배우고 있는 프로예요.

아리랑에 대한 제 생각은 이래요. 사람들은 아리랑이 자신과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잘 안 들어요. 또 아리랑과 관련해서 얘기를 하다 보면, 특히 학술적인 얘기가 나오면 일반인들은 ‘아리랑이 뭐 이렇게 어려워!’ 하면서 불편해해요. 역사에 대한 관심도 이와 비슷한 것 같아요. 동북공정과 같은 문제는 일반인들은 알기 힘들어요. 연구자들끼리만 소통하는 얘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문제를 다수의 국민과 함께 나눌 수 있을까요? 아리랑 석박사학위자들이 얘기하듯이, 아리랑의 작시법이 따로 있어서 우리 할머니들이 그 옛날의 ‘아라리’를 불렀을까요? 그건 아니지요. 아리랑과 관련한 여러 논문은 언뜻 보면 제 자신도 모르는 얘기가 많아요. 그 논문을 우리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죠. 그렇다면 그걸 내가 공부를 해서 마치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이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알려주자는 것이 제 소임이지요. 저는 그런 마음으로 역사와 더불어 아리랑을 함께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2006년에 있었던 ‘제1회 DMZ 평화 페스티벌’은 어떻게 해서 열렸나요?

 

= 북한의 경우는 아리랑 축전을 하는데, 그럼 우리 쪽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에 상응하는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죠. 그런데 이미 우리의 경우 이러저러한 축제를 합쳐서 거의 6백 몇 개가 넘는 축제가 있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아리랑이라는 축제를 던져놓아도 보통 사람들은 시큰둥한 거예요. 다만 북한 아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만 갖고 있더라고요. ‘자, 그럼 우리 남쪽에서 이러한 아리랑 축제를 만들 테니까 당신들이 한번 와서 보시오. 그리고 이 축제를 보고 북한 아리랑과 한번 비교해 보시오.’ 하는 마음이었지요. 기준이 있어야 북한이 잘 한다, 못 한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준비를 한 것이 ‘제1회 DMZ 평화 페스티벌’이었죠. 그런데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는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장소 마련도 힘들었죠. 아리랑을 사랑하는 이들의 염원이 있었기에 성사될 수가 있었죠. 축제는 2002년부터 준비해서 2006년인 작년에 이뤄졌죠. 그것도 강원도가 DMZ지역을 관광화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어서 가능했지요. 그렇지 않았으면 아리랑 공연은 힘들었어요. 아리랑 축제의 마당에는 장사익, 김영임 선생님을 비롯하여 팔도 아리랑, 진도, 밀양, 정선 아리랑 등이 선보였죠.

 

 

선생님은 언제부터 아리랑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요?

 

= 전 어려서부터 아주 가난하게 살았어요. 어머니가 피난 와서 절 낳으셨죠. 당시에 할머니는 며느리인 어머니한테 왜 이 어려운 시국에 애를 가졌느냐고 하셨대요. 어서 애를 떼라고 호통을 치셨나 봐요. 농사일로 정신없는데 며느리가 애를 가졌으니 화가 나신 거예요. 어머니는 아이를 떼려고 많은 노력을 한 것 같아요. 결국은 아이를 못 떼고 낳은 거죠. 그 덕에 제가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어머니는 보리밭에서 일하시다 방으로 뛰어 들어와서 절 낳으시고 스스로 태를 잘랐다고 해요. 그리고 다시 밭에 가서 일하셨대요. 그런데 그날 일을 하시다가 목이 말라서 벌컥벌컥 들이켠 찬물 때문에 산모와 저는 한 삼 년을 앓아누웠다고 해요. 그 이후로 젖도 제대로 못 먹고, 전 잔병치레를 참 많이 했고요. 또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는 가난 때문에 불화가 많았대요. 집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까 할머니는 당신의 친정집으로 절 데려가는 일이 많았어요. 할머니의 친정집은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가는 아주 먼 곳에 있었지요. 마냥 걷다 날이 저물면 전 할머니와 성황당 같은 데서 잤어요. 또 어떤 날은 절에서 잘 때도 있었고요. 당시의 저는 또래 아이들보다는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구나 하는 느낌이 있어요. 할머니가 주무시면 혼자서 스님이 염불하는 거나, 혹은 성황당에 사람들이 모여서 노는 것 등등의 일들을 죄다 봤죠. 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절에서 스님이 몇 시에 일어나 뭐 하는지를 세세하게 다 알고 있었죠. 그래서 학교 들어가서도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여선생님이 오늘은 어떻게 꾸미고 오시는지 이런 데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대신 음악은 좀 좋아했던 것 같아요. 당시 제 둘째 형님이 큰형님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서울시청에서 구두닦이 일과 이발 일을 하셨어요. 그 형님이 일 년에 두세 번씩 고향으로 내려오셨죠. 형님은 오실 때마다 인형하고 미군들이 갖고 노는 트럼프 같은 걸 갖고 왔어요. 그런데 하루는 형님께서 하모니카를 내 앞에 꺼내놓는 거였어요. 그 하모니카 소리가 참 좋았어요. 그런데 형님은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올라갔으니까 아는 노래가 없는 거예요. 단 하나, 아리랑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 아리랑이 당시 제가 아는 음악의 전부였죠. 그때 제가 다니던 학교의 담임선생님은 6. 25때 부상을 입으신 분이었어요. 손가락이 하나도 없는 분이셨죠. 그래서 풍금을 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음악을 들을 수 없었죠. 그리고 전교생이 30명인 시골 학교다보니 2학년부터 졸업할 때가지 한 분이 다 가르쳤죠. 그래서 제가 아는 음악이란 것이 ‘애국가’, ‘3.1절 노래’, ‘8.15노래’, ‘교가’, ‘아리랑’이 전부였지요. 그리고 이 중에서 제가 하모니카로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이었죠. 이처럼 아리랑은 제 유년기에 있어서 세상의 전부였죠. 지금 생각하면 그 처음의 아리랑은 참 칙칙한 아리랑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아리랑이라는 것은 꼭 그런 느낌만은 아니더라고요. 당시 저는 형님을 생각해서라도 뭔가를 해야지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아리랑을 부르곤 했지요. 아리랑은 내 가슴속으로 칙칙하게 왔지만 결국에는 내가 일어설 때는 반드시 이 아리랑으로 일어서리라 생각했지요. 지금은 할머니들이 3.1운동 현장에서, 또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왜 이 아리랑을 그토록 불렀을까 하는 수수께끼를 조금은 알 듯싶어요.

   

‘아리랑연합회’ 출범과 그동안 협회가 이룬 성과들이 궁금합니다.

 

= 1994년 무렵부터 전국적으로 ‘기행문’이 유행이었습니다. 유홍준, 고은, 신경림 선생님 등의 활동이 많았던 시절이죠. 그 무렵 고은 선생님이 주축이 돼서 ‘아리랑 기행단’이 만들어졌어요. 또 국립극장 단장이셨던 허규 선생님과 나운영 선생님 같은 분들은 이미 ‘아리랑 모임’을 만들어 스터디를 하고 있었지요. 이런 분위기의 결과로 1995년 국립극장에서 제1회 아리랑 축제라는 것이 열렸지요. 당시 고은, 허규, 나운영 선생님이 모인 자리였는데, 그 자리에서 이 아리랑을 하나로 통합해서 ‘전국아리랑보존협회’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얘기가 나왔죠. 한 선생님이 그렇다면 젊은 친구인 김연갑이 이 아리랑을 앞장서서 끌고 나가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셨죠. 그래서 회장 없는 사무국장체제로 ‘아리랑보존연합회’라는 것이 만들어진 것에요. 이후 정식으로 발족이 되었고요. 그러니까 ‘아라랑보존협회’는 고은, 허규, 나운영, 최서면 박사, 김연갑, 정선의 김병하, 진도의 박병훈 선생님들, 이런 분들이 아리랑으로 만나 만든 것이죠.

법인 차원에서 한 일들이 참 많아요. 그 중에서 진도, 밀양, 정선, 영천, 울릉도, 제주 지역에서 아리랑 축제가 열릴 수 있도록 했지요. 지역공동체의 한 구심력을 갖는 노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요. 또 아리랑이 보다 많이 불리는 지역의 노래를 축으로 축제 같은 행사를 만들어보자 해서 시작한 일이죠. 아리랑이 주제가 되는 축제를 위해서 저는 전국 팔도를 열심히 돌아다녔죠. 물론 정선 같은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해오던 행사였지요. 이런 경우에는 그 축제의 외연이 확대되고 내연이 충실한 축제가 되었지요. 진도아리랑 축제, 밀양아리랑 축제, 성북아리랑 축제, 영천아리랑 축제 등은 원래 다른 이름의 축제였는데 ‘아리랑 축제’라는 이름으로 승격돼서 독립한 경우라고 볼 수 있죠. 또 그동안 아리랑을 주제로 한 국제 학술대회를 10여 회 정도 했어요. 이것도 나름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또 개인적 일들이기는 하지만 아리랑 관련 자료집 및 기타 책들을 10여 종 출간했고요. 또 그동안 이곳과 인연을 가지셨던 분들이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결과도 있네요. 그동안 여기서 아리랑을 주제로 한 논문을 써서 박사 4명, 석사가 20명이 나왔죠. 협회차원에서 이 분들에게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했으니까요.

 

  

 <사진 위는 아리랑 음반들>

 

'신아리랑' 듣기

'밀양아리랑-양악편성' 듣기

'본조아리랑을 주제로 한 환상곡' 듣기

'밀양아리랑스트링100' 듣기

'폴모리아 - 아리랑' 듣기

 

 

‘아리랑’은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아리랑의 맨 끝부분을 이야기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아리랑의 처음을 얘기하라면 못 할 것 같아요. 제 자신도 참 묘하더라고요. 다만 요즘에 이르러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남과 북, 그리고 35개국에 흩어진 우리 동포들에게 너희들이 생각하는 단 하나의 민족의 노래를 꼽으라고 했을 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리랑을 꼽았다는 사실에요. 저는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제가 확실히 조사를 해봤어요. 아리랑은 가장 흔한 노래이지만 결국에는 맨 마지막에 우리가 한국인이며 조선인이며 까레이스끼의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는 노래, 그런 노래가 아리랑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리랑은 ‘존재 증명의 노래’라고 볼 수 있어요.

노수복이라는 정신대 할머니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긴 채, 필리핀에서 40년을 살아오신 분이었죠. 그런 할머니께서 ‘내가’ 조선 여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마지막 방법으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해요. 또 훈 할머니도 그렇고 심지어는 입양아 수잔 브링크 양도 우리말을 잃어버렸지만 자신이 어렸을 때 들었던 아리랑은 기억해서 우리와 같은 민족임을 증언했어요. 결국 우리가 한국인이며 북한인이며 일본에 있는 조선인이며 러시아에 있는 까레이스끼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증명서가 곧 아리랑이라는 것이지요. 어느 누가 그 어디서 아리랑을 부르면 우리는 그를 한국인, 혹은 조선인으로 인정해 줄 거라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아리랑이라는 것은 노래, 혹은 민요라는 것에 국한시켜서 해석하지 않아요. 아리랑은 우리의 상징 그 이상이에요.

 

 

그동안 발표하신 ‘연구논문’과 ‘저작들’에선 무엇을 말씀하셨는지요?

 

= 남과 북은 1956년부터 단일팀을 만들려고 노력했지요.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단일팀 성사는 쉽지 않았지요. 그런 와중에도 남북의 단가는 아리랑으로 채택되었고요. 북한도 ‘아리랑’만큼은 거부하지 않았지요. 저는 이러한 아리랑이 북한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했어요. 이런 물음을 갖고 2000년부터 시작한 연구는 2005년에 이르러 <북한아리랑>이라는 책으로 결실을 보았지요. 북한은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독립활동을 하시던 분들이 아리랑을 많이 불렀던 점, 아리랑을 곧 항일운동의 동지로 보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아리랑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거예요.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중국동포들이 부르는 아리랑은 북한아리랑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국과 교류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중국동포들과 북한은 이전부터 계속 교류가 있었던 것이죠. 이런 교류로 인해서 중국동포들이 부르는 영천아리랑, 경상도아리랑, 기쁨의 아리랑, 장백산아리랑 등을 북한이 똑같이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죠. 사실 이런 아리랑들은 우리도 잘 모르는 아리랑들이죠.

북한은 항일운동가들이 부른 아리랑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반면 우리는 해방 후, 광복군이 주력부대로서의 역할을 못 하다 보니 중국에서 활동하던 노래나 그들의 문화가 군대문화로 연결이 안 된 것이죠. 그런데 북한은 중국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이들의 의식이나 체험이 북한에 그대로 접속된 것이죠.

 

밀양아리랑, 본조아리랑, 그 외에 중국동포들이 만들어 불렀던 영천아리랑, 청주아리랑, 경상도아리랑, 기쁨의 아리랑 이런 것들은 이미 일제 강점기 시절에 광복군들이 불렀던 노래들이에요. 이런 노래들이 북한에서는 그대로 유지가 된 것이죠. 그래서 아리랑을 보는 인식이 북한의 경우는 민족사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요. 반면 우리는 아리랑을 국악의 한 장르로 보죠. 그러다보니까 같은 아리랑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개념이죠. 우리는 예술성에 가치를 둬서 얼마나 전통적으로 부르느냐 하는 데 관점을 두죠.

북한에서는 우리의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에 대해 콧소리 내고 또 느려터진 아리랑이라고 하면서 그런 노래를 누가 따라 부르겠느냐, 부정적인 입장이죠. 그래서 그들은 진도아리랑 같은 경우에는 남도 육자배기조에 탁성을 빼버리고, 또 정선아리랑도 느린 매나리조를 빠르게 고쳐서 불러요. 이것은 북한의 음악 정책이고 그 극단성을 보여주는 사례이죠. 그쪽에서는 제일 먼저 아리랑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요. 북한은 <밀림아 이야기하라>라는 혁명가극을 필두로 모든 중요한 장면에서는 아리랑을 부릅니다. 그러다 보니 제일 먼저 아리랑을 자신들의 성음에 맞게 고쳐야 했지요. 그들이 아리랑 축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 중에는 ‘아리랑을 민족음악의 복판에 둬라’라는 교시가 있어요. 남북이 단일팀 단가로 아리랑을 제시할 때, 북한은 이렇듯 민족사적 입장에서 제시를 한 것이고 우리 측에서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쉬운 노래이니까 제시를 한 것이지요. 그 의도는 서로 달랐지만 어떻든 결국에는 민족의 노래라고 하는 최종적인 인식은 다 같이한 것 같아요. 이런 점을 저는 북한 아리랑을 연구하면서 재확인하게 되었죠.

  

앞으로 계속해서 연구해야 할 아리랑의 과제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 많은 외국인을 포함하여 우리 스스로도 의심을 갖고 있는 문제인데요, 우리의 아리랑이 과연 그렇게 오랫동안 몇 백 년에 걸쳐서 불러온 노래냐, 하는 의문이에요.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즉, 시대를 거듭해서 내려오게 된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는 숙제가 있는 것이죠.

가사의 적층현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이는 김시업 선생님의 책에도 나와 있지만 아리랑은 그야말로 4천에서 6천수의 노랫말이 적층된 것이거든요. 이것은 오디세이와 비교가 안 되는 이야기죠. 그 옛날의 노래가 지금까지 하나의 노래로 살아왔다는 것이죠. 적층이 마무리돼서 삼국유사에 남아있는 향가가 아니라, 그 시절에 불렸던 노래가 지금까지 변형돼서 지금까지도 정선이라는 그곳에서 불리고 있다는 점이죠. 이처럼 고대의 노래가 살아서 온 경우는 전 세계에 어디에도 없다는 일이죠.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아리랑은 고대의 노래죠. 정선에 가면 아리랑이라고 하지 않고 아라리라고 해요. 하지만 그 아라리를 우리는 아리랑이라고도 하고요. 그렇다면 아리랑과 아라리가 어떻게 같은 노래인가 하는 의문이 남죠. 정선 아라리는 우리가 부르는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월드컵 때 부르던 윤도현 아리랑과 다르다는 것이죠. 물론 가사는 민속음악이라는 것이 들고나는 것이니까 비슷한 것도 있고 같은 것도 있죠. 그럼 무엇으로 같은 노래라는 것을 입증하느냐의 과제가 있죠. 또 정선아리랑은 그 명칭을 아라리라고 한다는 점이죠.

그렇다면 아라리와 아리랑이 어떻게 변해서 지금의 아리랑으로 왔느냐 하는 문제, 선율이 다른데도 어떻게 해서 정선 아라리에서 모든 아리랑이 확산됐나 하는 문제들을 우리 학자들이 계속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늘에서 밀양아리랑 진도 아리랑이 동시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이죠. 하나의 노래가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적으로 확장되었을 거라는 것이죠. 이와 같은 일이 전 세계에 또 어디에 있냐는 것이죠. 진도 사람들은 노래라고 하면 빠지지 않는데, 왜 우리가 다른 지역에서 부르는 아리랑을 끌어다가 진도아리랑이라고 부르냐는 것이죠. 자신들의 노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밀양 사람들, 경상도 사람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데요. 그 영남 사람들이 왜 굳이 다른 지역의 노래를 가져다가 왜 밀양아리랑이라고 했냐는 것이죠.

이런 문제가 수수께끼로 남아있어요. 어떤 이들은 ‘명칭의 자극전파’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요. 그 명칭이 어떤 유명한 사람이 쓰거나, 충격을 줬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흉내 내서 따라서 쓴다는, 명칭의 자극전파설로도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다른 노래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있어야 하는데, 기껏 육자배기하면 ‘자진육자배기’ 그냥 ‘육자배기’ 정도, 난봉가 하면 그냥 ‘난봉가’ ‘자진난봉가’ 정도예요. 그런데 아리랑은 어떻게 해서 50여 종류가 넘게 확산이 되었는가 하는 거예요. 그 옛날 조선에서 쫓겨나간 중국동포, 러시아동포들도 왜 아리랑을 부르냐는 것이죠. 이 수수께끼, 도대체 아리랑이 어떤 힘을 가졌기에 그럴까요? 이는 다양한 분야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풀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진 위는 영화 아리랑 개봉 80년 기념 토론회 참석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아리랑 연구자’로서 혹은 아리랑을 널리 알리는 ‘아리랑의 운동가’로서 그동안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 아리랑은 제 가슴 속에 있던 노래예요. 또 지금 하는 모든 일은 처음부터 내 일이라고 여겼던 일이에요. 저의 어려움은 남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어려움과는 좀 달라요. 저의 어려움은 다만 제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이라든가 제 스스로에 대한 어떤 좌절감이 오는 때이지요. 지금의 이 일을 어떤 소명의식, 혹은 애국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국고보조를 안 해줘서 무척 서운했을 거예요. 사실 저는 한 번도 지원금을 받은 적이 없어요. 또 신청하지도 않았고요. 지원금을 주는 곳에서 제 생각을 인정하고 돈을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보다는 더 중요한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들을 도와야죠. 결국 이 일을 하면서 오는 어려움은 앞서도 얘기했지만 제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에서 오는 어려움입니다. 보다 일찍 ‘한자’라든가 ‘역사’라든가 ‘민족’이라든가 ‘현장답사를 통해서 얻어야 할 지식’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매달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있을 뿐이에요. 이것이 지금의 제 숙제이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이 숙제를 좀 더 빨리 끝내기 위해서 시간을 아끼고 있어요.

 

 

반대로 이 일을 하시면서 보람 있는 일도 있었을 듯싶은데요?

 

= 1986년에 첫 사설집인 <역사의 노래 민족의 노래>를 고은 선생님, 박재삼 선생님의 격려로 출간하게 되었어요. 그 책이 나온 당시만 해도 분위기는 냉랭했어요. 이를테면 어떤 이들은 ‘아리랑 갖고 밥 먹는 사람이 있네.’ 이런 식이었죠. 특히 방송출연하고 나면 이런 식의 비아냥거림이 오랫동안 뒤따라와 곤혹스러웠죠. ‘야, 아리랑 갖고 무슨 연구를 하냐. 우습지 않냐?’ 이랬었죠. 세상 사람들이 아리랑에 대해서 너무 쉽게 얘기했었죠. 그러는 과정에 아리랑 연구자들이 하나둘씩 나오게 되었죠. 또 아리랑 학술대회가 여기저기서 열렸죠. 지금 생각하면 그래요, 내가 가장 앞장서서 이런 일들을 만들지 않았나 하고요. 그런 자그마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역할을 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제일 먼저 이곳에 몸을 담지 않았나 생각해요. 이런 점에서는 제 자신이 작은 점 하나를 찍지 않았나 싶네요.

그리고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저는 남들이 가보지 않은 국토를 내 발로 직접 다 밟아봤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80년대는 오늘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어요. 직행버스노선이 발달하기 이전이지요. 보통은 어딜 가든 시청, 도청쯤에서 내렸고 다시 또 군청소재지로 옮겨가는 버스를 갈아탔고, 또 거기서 다시 읍면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죠. 그 옛날에 진도를 가려면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 늦게 도착했죠. 그 과정에서 저는 버스에서 혹은 버스터미널에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 그 지역의 풍물을 다 익혔습니다. 지금은 다 없어졌던 80년대의 풍물을 제 몸으로 다 익힌 것입니다. 이 국토를 제 몸이 거의 다 밟아봤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이것은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이 제 자신의 보람이라고 생각해요.

 

<사진 위는 하이서울 페스티벌에서 열린 아리랑 축제 모습>


현재 ‘아리랑박물관건립’을 추진하고 계신 걸로 아는데요?

 

= 판문점이라는 공간은 아리랑과 관련해서도 특수한 역사성을 띠고 있어요. 그 공간은 휴전회담을 했던 곳으로 현재 북한 지역에 있죠. 그리고 현재 새롭게 만든 판문점은 UN이 관할하고 있는 판문점이에요. 그 판문점은 전 세계인들의 관광지가 되었죠. 우리나라에 온 관광객들이 그곳을 거쳐 가요. 진짜로 휴전을 협정했던 원래의 판문점은 세계인들이 못 가고 있죠. 그래서 제 주장은 남과 북이 협의해서 그곳을 아리랑박물관으로 만들자는 것이죠. 현재의 판문점 관광객들이 원래의 판문점인 그곳을 거쳐서 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죠. 그러면 북한도 관광수입을 올려서 좋고, 또 자연스럽게 DMZ인 비무장지대를 평화스럽게 소통할 수 있게 되잖아요. 이런 취지로 ‘아리랑박물관’을 원래의 판문점에 만들자는 거예요.

  

<방송에 출연, 아리랑을 알리고 계신 김연갑선생님>

 

선생님은 아리랑 연구 이외 어떤 일들에 관심을 갖고 계신지요?

 

= 현재 아리랑은 연극, 영화, 문학 등 전 영역으로 확장된 것 같아요. 제가 조사를 해보니 일제강점기에 아리랑이라는 제목을 단 민요시는 모두 67편이나 되더군요.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의 시인들은 왜 이렇게 아리랑을 많이 썼을까? 이것은 굉장한 수수께끼예요. 당시의 아리랑 흡인력은 대단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무도 관심을 안 갖고 있죠. 나운규가 영화라는 신개념의 문화장르로 아리랑을 흡수했었죠. 이것은 아리랑의 혁명입니다. 또 박승희가 1931년에 <아리랑 고개>라는 연극으로 아리랑을 무대에 올립니다. 이것 역시 혁명이죠. 헌데 오늘날에 이들처럼 문화혁명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없어요.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라요. 결국 따지고 보면 북한의 <아리랑 축전>, 일본청년회에서 했던 <아리랑 페스티벌> 등, 몇 가지 열정을 제외하곤 남아있는 것이 없죠. 그나마 저 같은 아리랑 연구자가 발로 뛰어서 모은 자료가 조금 있을 뿐이죠. 그래서 저는 많은 장르의 예술가나 연구가들에게 저의 이 아리랑 문제를 던져주고 싶어요. 제 자신이 그들이 하는 일의 촉매 역할을 하고 싶어요. 이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리랑 연구 이외에 공식적으로 북한 음원을 저작권 계약을 맺어서 우리나라에서 <북한 아리랑> 음반을 냈습니다. 이는 남북교류에서 북한 음원을 최초로 낸 음반이에요. 우리가 그 역할을 했죠. 이후에 북한 아리랑 음반을 세 종류 더 내서 지금은 총 네 가지의 북한 아리랑이 나와 있어요. 이 일은 아리랑의 연구사뿐만 아니라 우리 음반사나 민속음사나, 남북교류사에서 중요한 기록으로 남을 일들이죠.

 

  우리 청소년들 가운데는 우리문화를 사랑하는 선생님 같은 아리랑 연구자가 되길 소망하는 친구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 선생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어떤 소양을 갖춰야 할까요?


 

= 소양이라기보다는 우리문화를 좀 더 관심 있게 보았으면 하고 바랄뿐이에요. 남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명확한 자신의 이해가 있기 전까지는 그저 남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하는 것에 불과하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청소년들은 내 어머니, 내 가족,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 일례로 내가 아는 노래의 가치를 명확하게 이해한 후에 다른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그것이 진짜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되지요. 지금 우리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외국의 어떤 노래, 어떤 좋은 물건이 진짜로 내가 좋아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냉철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남이 좋다고 하니까 나도 무턱대고 따라서 좋은 것은 안 돼요. 먼저 명확한 이해를 하고 그 후 바라봤을 때, 그때도 좋다면 그게 정말 좋은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 문화는 큰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먼저 살펴주었으면 해요.

 

 <아리랑 연구단체를 설립하는데 도움을 준 시은 고은 선생님(사진 오른쪽)과 함께>


선생님은 주로 어떤 분들과 교우하고 계신지요?

 

= 저는 8, 90년대 있었던 인문과학 학술 세미나 등에는 엄청나게 돌아다녔습니다. 관객으로 참여해서 공부를 한 것이죠. 그리고 지역의 향토학자, 또 지역의 소리꾼들을 수없이 만났죠. 이분들은 친하지 않으면 제 보따리를 끌러놓지 않아요. 그러니 제 쪽에서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죠. 그러다보니 인간적인 유대를 갖지 않을 수 없었죠. 서울 쪽으로 모시기보다는 제가 그분들이 계신 쪽으로 다가가서 얘기를 들었죠. 전에도 잠시 얘기한 바 있지만 전국토를 밟아가면서 그 지역의 대표적인 토속성을 지닌 분들을 만나봤죠. 그 교류가 제게는 소중한 일이었죠.

생전의 박재삼 선생님과도 교류를 했었는데요,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가슴에 남아요. 선생님은 슬픈 노래가 더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또 선생님은 자신의 시 가운데서도 슬픈 시가 더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또 아리랑의 경우 ‘나는 어딘지 모르게 슬픈 부분이 더 끌린다.’ 하셨어요. 그래서 당신은 정선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이 밀양아리랑보다 좋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또 서양음악의 1세대 격인 나운영 선생님도 가까이서 뵈었는데, 선생님은 서양 음악을 하면 할수록 우리 국악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토로하셨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국악을 다시 공부하셨죠. 그래서 아리랑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셨죠. 또 허규 국립국장님과도 만났죠. 우리나라 축제의 일인자라는 분이시죠. 이 분은 왜 아리랑을 축제화하는 것을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말씀을 하셨던 분이에요. 그래서 그 분은 뒤늦게 아리랑을 공부하셨죠. 이런 사연들로 함께 만난 분들이죠. 그리고 이 단체가 결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고은 선생님과의 교류는 참 소중한 만남이죠.

   

아리랑에 대한 오해는 없는지요?

 

= 혹자는 북한 아리랑에 대해 우려하는 얘기를 하기도 해요. 이데올로기적으로 너무 이용하고 있다는 얘기죠.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처럼 아리랑을 너무 학술적으로 접근해서 그 속에 묶어두는 것도 문제이지만 북한처럼 아리랑을 너무 현실 속에만 옭아매 놓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좀 그렇다고 봐요. 이것들로부터 벗어나는 다른 아리랑을 모색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아리랑의 세계성을 찾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야 세계인들도 우리의 이 아리랑을 인정하지 않을까요. 

 

선생님의 청소년 시절은 어땠나요?

 

=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일이 생겨서 못 다니게 됐고, 그 후 저는 서울로 왔지요. 그랬는데 서울서 다니던 학교가 폐교가 돼서 다시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죠. 저는 중학교를 3곳이나 옮겨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저의 청소년시절은 아이들이 경계해야 할 그런 곳을 다 경험한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일찍 경험한 그것이 제 경우는 도움이 되었죠. 빨리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봐요. 저의 유년기 체험처럼, 청소년 시절도 마찬가지예요. 이성문제, 방황, 기타의 문제로부터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 시절에는 고민이 참 많았어요.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곳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올 수 있었던 시절인 것 같아요.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후회되는 일들도 많아요.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시절에 읽어야 할 책을 많이 못 본 것 같아요. 분명히 그 시절에 읽고 느꼈어야 할 감수성이 있었을 거예요. 그 감수성을 그때 갖지 못한 게 후회가 돼요. 물론 그 시절 이후로는 많은 책을 읽고 있죠.

 

 

어린 시절 선생님에게 영향을 준 것들은 무엇이 있나요? 또 영향을 준 분들은 누가 있나요?

 

= 먼저 제 개인의 가족사는 제 인생에 있어 빛과 어둠으로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힘들었기 때문에 제 자신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한 부분이 있으니까요. 저는 어린 시절에 무척 외로웠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라디오 방송 듣는 걸 좋아했었어요. 특히 어린이 방송은 꼭 들었지요. 저는 어디를 가도 어린이 방송만큼은 꼭 챙겨서 들었어요. 저녁이 되면 라디오가 있는 집으로 뛰어갔죠. 나름대로 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였지요. 이 밖에도 어린이 신문, 어린이 잡지, 이런 것들을 좋아했어요. 지금의 제가 다른 여러 분야에 대해서도 나름의 소양을 갖춘 것도 그 시절에 읽었던 여러 문화, 문학, 음악 등에 관한 이런저런 글을 흥미롭게 읽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당시에는 책들이 귀했어요. 그래서 면에 가면 볼 수 있었던 어린이 신문을 많이 읽었어요. 각 신문사에서 펴낸 어린이판 신문은 무료로 제공했던 것 같아요. 그걸 많이 봤죠.

(사진왼쪽은 영화 아리랑이 첫 개봉되었던 극장 단성사)

그 밖에 저에게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나운규 선생님을 들 수 있을 것 같네요. 그의 괴팍함과 천재성을 좋아해요.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아리랑을 꿈꿨는지 참으로 신기해요. 그는 소학교 졸업반 때, 회령철도를 놓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부르는 그 가슴 절절한 아리랑을 가슴 속에 담았다가 후일 영화 <아리랑>을 만들었죠. 이런 사실은 그가 영화를 만든 후 밝힌 소감에도 나와 있어요. 그가 최초로 아리랑을 영화로 꿈꾼 것은, 그러니까 그의 나이 14살 때예요. 그 어린 시절의 꿈을 잃지 않고 후일 새로운 장르였던 영화로 만들었다는 것이죠. 이는 그에게 있어서 혁명과 같은 일이었죠. 저는 그의 이러한 예술성과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랑은 그의 영화에 나온 아리랑, 즉 나운규 작사의 아리랑이에요. 이런 점으로 보자면 나운규의 존재는 정말 대단한 것이죠. 이처럼 아리랑을 영화로 만들어서 전 국민에게 커다란 파급을 줄 수 있는 이는 없을 거예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이후 나운규의 아리랑이 유일할 거예요.  

 

아리랑이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아, 리, 랑이라는 이 3음. 우리가 ‘아이쿠!’ 할 때의 감탄사가 3음인데요, 이 3음절의 힘이죠. 또 ㅏ, ㄹ, l, o, 음소의 힘이죠. <청산별곡>의 ‘얄리얄리 얄라성’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음소의 친근감이 있는데 아리랑엔 이 음소의 결정체가 있죠. 우리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소, 음감의 결정체가 아리랑이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모두가 이 아리랑이라는 이 세음을 좋아하는 것이죠. 결국은 이 세음절의 흡인력의 힘이죠. 이것은 공기처럼 물처럼 오랜 시간이 흘러도 똑같은 힘을 갖고 있죠.

 

 

아리랑은 수없이 많은데 선생님께서는 그 중에서 어떤 아리랑을 제일 좋아하시나요?

 

= 제 입장에서는 어느 아리랑이 좋다 하는 말은 좀 힘들 것 같고요. 다만 80년대에 부산에 계신 한 분이 석사논문을 위해서 설문 조사를 했는데요, 그때 우리 국악 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아리랑이 92퍼센트가 나왔습니다. 반면 다른 가요부분에서는 제일 좋아하는 노래로 뽑힌 노래의 차이는 대략적으로 5~10퍼센트 정도였답니다. 하지만 국악부분의 아리랑은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서 1위를 했던 것이죠. 이 브랜드 파워는 정말 막강한 것이죠. 이런 의미로 보자면 우리가 월드컵 때 불렀던 본조 아리랑, 남북 단일팀 아리랑, 또 세계인들이 다 아는 아리랑은 노래 이상의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것이죠. 저는 이 아리랑을 우리 노래 중에서도 으뜸으로 인정하고 싶어요.  

 

아리랑과 관련하여 선생님의 일과가 바쁘신 것 같은데요. 앞으로 어떤 계획들이 있나요?

 

= 저는 앞으로 아리랑이 우리 민족문제를 푸는 단서가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측면에서 저는 우리 동포들을 포함한 일본, 러시아, 중국, 북한, 남한, 5개국 모여서 제대로 축제를 벌여보고 싶어요. 동포끼리 서로 만나서 어깨동무하고 신명나게 노는 축제의 장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죠. 러시아, 일본, 중국은 합의가 어느 정도 될 듯싶어요. 이분들은 이의가 없어요. 아리랑 하면 그저 눈물 흘리고 반가워하는데 반대할 의사가 없죠. 문제는 남과 북이 문제죠. 장소를 어디로 할 것인가, 어떤 주제로 할 것인가, 이런 합의가 이뤄져야 해요. 이와 같은 축제를 위해선 재정도 확보해야 하고 기획도 해야 하고 정말 바쁘죠. 이런 축제는 저 혼자 할 수 없어요. 여러 분의 힘을 합쳐야 해요. 다행히 일본의 청년이나 민단은 이런 축제의 필요성을 똑같이 인식하고 있기에 향후 잘 풀리지 않을까 싶어요.

이와 더불어 내년 6월 24일이나 휴전회담 기념일인 7월 17일에는 땅굴음악회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현재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땅굴은 파헤쳐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굉음으로 시달렸겠어요. 그 굉음에 시달렸을 땅굴을 아름다운 선율로 달래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요. 냉전의 공간으로 상징화된 그 파헤쳐진 공간에 평화의 음악을 채워보고 싶어요. 이런 일들을 준비하기 어제도 오늘도 참 바쁘지요.

 

  먼 훗날, 아리랑은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이 될까요? 혹시 이런 걸 생각해 보신 적은 있는지요?

 

= 통일이 되면, 고은 선생님은 국호(國號)를 아리랑으로 하자고 제안하셨어요. 아리랑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로 국호를 하자고 하셨죠. 그렇다면 저는 당연히 국가(國歌)도 아리랑이 되리라 생각해요. 통일이 되었을 때, 국호든 국가든 그것을 전 국민에게 교육을 시킬 땐, 엄청난 경제비용과 시간이 든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하지만 아리랑이 국호가 되고 국가가 된다면 이런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요. 돈과 시간을 줄일 수 있어요. 이런 면에서라도 아리랑은 당연히 국호와 국가와 돼야죠. 하지만 이런 경제적 효과보다 아리랑을 국호와 국가로 해야 하는 더 직접적인 이유는, 러시아 동포들, 중국 동포들, 일본 동포들 3세, 4세 이분들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생각이에요. 그분들이 볼 때, 자신들이 알고 있는 아리랑을 부르는 저 국가, 저 사람들은 자신들과 똑같다고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이죠. 그분들에게는 우리가 하나라고 하는 어떤 동질성을 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는 그 동질성의 대상이 아리랑이라고 보는 것이죠. 이런 점으로 보자면 아리랑은 정말 중요한, 우리 미래의 노래라는 것이죠. 

 

아리랑 연구자자가 안 되셨다면 선생님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 어려서부터 라디오를 들으면서 라디오에 나오는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리랑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더 행복하네요.

   

선생님 하시는 일이 정말 행복해 보이네요.

 

= 여기까지 오셨는데 아리랑이나 한 곡 듣고 가시지요.

 

 

인터뷰 후기

 

"박재삼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그의 시를 찾아서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은 자신의 시 가운데서도 슬픈 시가 더 좋다고 하셨다. 또 선생께서는 아리랑의 경우 ‘나는 어딘지 모르게 슬픈 부분이 더 끌린다.’ 하셨다. 시인은 분명 더 더 끌리는 쪽으로 향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선생의 시가 그런 것처럼 어떤 이의 증언은 한 시인의 표정을 더 더 슬프게 하는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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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갑 (金煉甲-kim yeon gab)선생님 소개

충북 청원생

(재)국제한국연구원 기획실장

(주)한국문화정보 조사부장

사운연구소 연구부장

현 국가상징연구회 연구위원

현(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현<아리랑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사무국장

현<아리랑세계화위원회> 사무총장

 

■ 편·저서

민족의 노래 아리랑(86, 현대문예사)

한국·한국인(87, 현대문예사)

아리랑-그 맛, 멋, 그리고.....(88, 집문당)

팔도아리랑기행(94, 집문당)

애국가이야기(97, 청송출판사)

진도아리랑(95,범우사· 박병훈·김연갑 공편)

정선아리랑(95, 범우사, 김연갑·김병하 공편)

아리랑이 보고 싶다(99, 미래출판사)

아리랑환타지(99, 미래문화사)

애국가작사자연구(00, 집문당)

북한아리랑연구(02, 청송)

아리랑의 시원설(2006, 명성)

 

■ 논문

아리랑 역사성과 통일성(90, 통일원)

애국가의 민요론적 접근 시론(민요론집 94)

북한의 아리랑 실상과 의미(2001, 미래출판사)외 다수

정선아리랑제(06, 강원민속학회)

국가 애국가의 역사성과 정통성 연구(‘06 토론회)

외 다수

 

■ 주요 방송 진행·집필

고대유리의 비밀-리포터(94 KBS 1TV)

직지의 비밀-집필(95 KBS 1TV)

아리랑 대탐험-집필(00년 1월~12월·KBS·R)

우리노래 기행-집필(00년 10월~2001년 10월 BBS)

아리랑의 재발견 3부작-집필(04 국악방송)

영남의 아리랑-집필(06 대구KBS-R)

역사를 찾아서-진행(KBS-R 현)

아리랑을 찾아서-해설(삼척MBC-R 현)

애국가의 재발견 3부작-집필(삼척MBC-R)

 

■ 주요 아리랑축제 기획

‘02 통일아리랑축전(02년/서울 인사동)

‘03 6.15남북 공동성명 2돌기념 음악회(인사동)

99~02 지역축제와 도시축제의 만남(정선·밀양·진도)

‘06 DMZ 아리랑평화 페스티발

 

■ 주요 음반 공동기획·해설·음원제공

 

한반도아리랑(신나라레코드)

북한아리랑(신나라레코드)

일본으로 간 아리랑(신나라레코드)

한반도아리랑(신나라레코드)

다시 찾은 아리랑(신나라레코드)

탄생대구아리랑(신나라레코드)

3대가 부르는 진도아리랑(신나라레코드)

3대가 부르는 정선아리랑(신나라레코드)

아리랑교향곡(신나라레코드)

본조아리랑의 수수께끼(신나라레코드)

아리랑 랑낭(신나라레코드)

겨레의노래 아리랑(중앙대학교)

3대명창 정선아라리(신나라)

북한명창 아리랑전집(신나라)

김산의 아리랑(신나라)

 

■ 신문연재

그것은 정설인가?(87년 스포츠서울)

한국의 명저(91년 스포츠조선)

한국의 최초(93년 스포츠서울)

김연갑의 우리노래 찾기(02-현 국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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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대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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