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장르 로맨스는 우리에게 어떻게 소개되었나 (로맨스 이야기 제2회)

  • 작성일 2008-04-17
  • 조회수 1,147



 지난 시간에 우리는 장르 로맨스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장르 로맨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하다! 외설적이다! 신데렐라 스토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편견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요? 이번 시간에는 그런 편견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장르 로맨스가 어떻게 우리에게 소개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장정일은 <삼중당 문고>(사진 왼쪽)라는 시서 이렇게 노래했답니다.

 ‘열다섯 살, /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라고.

하지만 만약 장정일이 여자였다면 이렇게 노래했을지도 모릅니다.

‘1980년대, /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하이틴 로맨스 / 무척이나 야했던 삼중당 하이틴 로맨스 /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하이틴 로맨스 /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하이틴 로맨스’라고.


번역 로맨스의 등장


 그러니까 로맨스라는 장르가 국내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 삼중당에서 나온 ‘삼중당 하이틴 로맨스’를 통해서였습니다. 앤 마아서의 <금지된 사랑>, V.윈스피어의 <타오르는 사막>, 플로라 키드의 <뜨거운 연인>, 로버타 레이의 <길들여지는 남자> 등이 1980년에 출판된 대표적인 하이틴 로맨스 작품입니다. 당시 수많은 여고생들이 200쪽도 안 되는 얇은 이 하이틴 로맨스에 빠져들었답니다. 왜 여고생들은 이 하이틴 로맨스에 그렇게 열광했을까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출판물이 많지 않아 여고생이 읽을거리가 없다는 것도 이 하이틴 로맨스가 쉽게 여고생들에게 인기를 끈 원인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이 시리즈가 인기를 끈 이유는 그 당시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이국적인 배경과 <목요일의 아이>, <내 이름은 마야>, <깨소금과 옥떨메> 같은 국내 소녀취향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성애 묘사가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80년대 남고생들이 와룡강의 도색무협에 빠져들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이틴이라는 이름을 달았는데도 파격적인 성애 묘사가 실려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건 이 하이틴 로맨스 시리즈의 원작이 되는 소설들이 할리퀸사(우리가 흔히 할리퀸 로맨스라고 불리는 로맨스 소설은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할리퀸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 된 로맨스 소설들을 뜻합니다.)에서 성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출판된, 그것도 노골적인 성묘사가 중심이 된 소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출판사에서 애들 보라고 만든 책이 아닌 책을 애들 책인 양 내놓은 것이죠. 이후 삼중당 하이틴 로맨스는 1986년까지 500여 권의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출판하며 큰 인기를 끕니다.


번역 로맨스의 난립

 삼중당 하이틴 로맨스 시리즈가 큰 인기를 얻자 80년대 중반에 역시 할리퀸사의 시리즈들(할리퀸사에서는 내용 및 분량에 따라 각 라인별로 다른 시리즈 로맨스 소설을 출간했습니다.)을 원작으로 한 수많은 시리즈물들이 출판됩니다. 엔 메이저의 <아버지의 연인>, 사라 로건의 <유혹의 페스티발>을 낸 ‘서울출판사의 프린세스 베스트셀러’ 시리즈, 도로시 코크의 <거짓 약속>, 바이올렛 윈스피어의 <흑기사의 고백>으로 대표되는 ‘문화광장의 투유북스’ 시리즈, 엠마다시의 <사랑을 거부한 사람>, 산드라 브라운의 <영원한 귀향>을 출판한 ‘창인사의 팅커벨 로맨스’ 시리즈가 대표적입니다. 이 외에도 ‘문화생활의 실루엣 로맨스’, ‘삼중문화사의 로맨스파워’, ‘현지의 ‘러브스웹트’ 등등의 시리즈물들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리즈들은 자극적인 작품을 무분별하게 중복 출판하고 저작권법을 무시하고 출간됐으며 판형과 수를 맞추기 위한 편집으로 인한 원작 훼손, 무단삭제 같은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번역 로맨스의 변화


 기존의 로맨스 시리즈들이 성인을 대상으로 한 할리퀸 시리즈들을 원작으로 한 반면 몇몇 출판사들은 다른 방식으로 여고생들의 관심을 얻는 데 성공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동광출판사에서 발행한 파름문고 시리즈입니다.

 파름문고에는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에리히 케스트너의 <헤어질 때와 만날 때> 등 익히 알려진 외국 작가들의 작품도 있었지만, 독자들을 사로잡은 것은 이미 만화로 친숙했던 <말괄량이 캔디>, <올훼스의 창>, <유리가면>, <유리의 성> 같은 작품들이었습니다.

 80년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말괄량이 캔디>나 <유리가면>, <올훼스의 창> 같은 순정만화들은 단순히 만화라는 인식을 넘어 시대를 함께 해온 친구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이 만화들을 글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당시 독자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만화들이 국내 작품이 아니라 일본 만화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독자들에게 파름문고는 큰 혼란을 안겨줍니다. 파름문고는 <말괄량이 캔디>의 경우 원작자의 명칭을 이시가라 유미코라고 표기했으며(실제 원작자명은 이가라시 유미코.), <올훼스의 창>의 저자는 마리 스테판바이드(실제 원작자명은 이케다 리요코), <유리가면>은 넬 베르디(실제 원작자명은 스즈에 미우치)), <유리의 성>은 프란체스 사앙(실제 원작자명은 와다나베 마사코)이라고 표기했으니까요. 저작권법이 정비되지 않은 국내 현실을 교묘하게 악용한 출판사는 원작자가 있는 작품을 번안해 실제 다른 원작이 있는 양 출간했으며, 이러한 출판 행태는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집니다. (동광출판사는 90년대 중반 김용의 소설이 인기를 끌자 30부작 <화산논검>이라는 작품을 김용의 이름을 붙이고 출간하기도 했답니다.) 이로 인해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정보의 부재로 인해 독자들은 실제 원작자가 누구냐를 두고 언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출판사를 통해 넬 베르디나 마리 스테판바이드에게 팬레터를 보내기까지 했었으니까요.


장편 로맨스의 등장


 90년대 들어 번역 로맨스는 분화하게 됩니다. 장르 독자들은 대부분 좀 더 많은 이야기, 좀 더 새로운 이야기들을 찾는 게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할리퀸 시리즈들은 200쪽이 안 되는 짧은 분량이었으며 강도 높은 성애 묘사가 인기를 끌자 할리퀸 로맨스를 내는 출판사들은 무분별한 중복 출판을 하게 되죠. 이러한 출판사의 출판 방향은 기존의 로맨스 독자들을 이탈하게 만듭니다. 결국 이런 독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번역 로맨스는 기존의 할리퀸 시리즈들과 신국판 일반 서점용으로 출판되는 장편 로맨스로 분화합니다.

 이러한 장편 번역 로맨스의 시작은 1992년 고려원에서 출간된 주디스 맥노트의 <파라다이스>로, 이후 고려원은 주드 데브의 <가슴에 핀 붉은 장미>(사진 위 우측)와 재키 콜린스의 <아메리칸 스타> 등을 출판합니다. 1994년 현대문화센터는 주드 데브루의 <검은 실루엣>을, 영언문화사는 조안나 린지의 <나만의 레지나> (사진 왼쪽) 를 국내에 소개합니다.  

 

고려원, 현대문화센터, 영언문화사는 이후 주드 데브와 주디스 맥노트 (사진 위)나 린지의 작품들을 경쟁적으로 출판하기 시작했으며(주드 데브루 45종, 주디스 맥노트 40종, 조안나 린지 35종), 로맨스 시장의 독자 추가 번역 로맨스에서 국내 로맨스로 옮겨지는 2000년 초까지 린다 하워드(<마지막 약속>, <황 속의 결혼식>), 라벨 스펜서(<사랑의 시작>, <마간의 무도회>), 노라 로버츠(맥그리거 시리즈), 산드라 브라운(<위험한 특종>, <사랑이 지나간 자리>), 리사 클레이파스(<레이디 소피아의 연인>), 카렌 마리 모닝(하이랜더 시리즈), 줄리아 퀸(<나를 사랑한 바람둥이>), 마샤 켄험(<물빛 안개 속으로>), 아만다 퀵(<사랑의 사기꾼>) 제인앤 크렌츠(<붉은 장미의 사랑>), 줄리 가우드(<웨딩>) 등의 작가들의 작품을 내 놓습니다.

 그리하여 한때 장편 번역 로맨스가 1년에 40종 이상 출간되기도 했으며 90년대 중반 주드 데브의 <계약결혼>이 10만 부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며 로맨스라는 장르를 일반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국내 로맨스물에 밀려 장편 번역 로맨스의 경우 거의 출판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저작권 정비로 인한 저작권료의 상승, 진한 성애 묘사로 인한 간행물 윤리위원회의 심의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구태의연한 스토리에 지친 국내 독자들이 국내 작가가 쓴 로맨스 소설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할리퀸 시리즈의 경우 신영미디어에서 출간을 하고 있긴 하지만 80년대와 같은 독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지는 못합니다.


 지금까지 국내에 장르 로맨스가 들어온 과정을 짧게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야하다! 외설적이다! 신데렐라 스토리다!’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르 로맨스에 가지고 있는 이런 편견들은 첫 시작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야하고 외설적이고 신렐라 스토리를 가진 장르 로맨스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장르 로맨스의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장르 로맨스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모든 추리소설엔 살인범이 나오고 모든 SF소설엔 외계인이 나온다고 믿는 것과 똑같은 생각입니다. 장르 로맨스를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먼저 이런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추천 콘텐츠

나는 광대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