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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삶,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 작성일 2009-08-25
  • 조회수 402


 

 


 

 

과거는 우리의 현재를 비춰주는 실존적 시간

 

  보르헤스(왼쪽 얼굴 사진)의 단편 「기억의 왕 푸네스」에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기억의 소유자인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낙마 사고 이후 절대적인 기억 능력을 갖게 된 이 소년은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모두 기억하는 ‘기억의 왕’입니다. 중요한 약속을 잊어버려서 낭패를 당한다든지, 물건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해 안타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이 소년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전날의 24시간을 완벽하게 기억합니다. 그런데 전날의 24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24시간이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는 전날을 기억하기 위해 오늘을 보내고,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내일을 보내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이러한 기억의 능력은 대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기억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면, 적어도 시험문제를 풀거나 일상생활을 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또 기억은 인간의 정체성 문제와 직결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기억을 잃어버려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과거는 우리의 현재를 비춰주는 실존적 시간의 응집물이기도 합니다. 과거 없이 현재가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SF영화에서 기억의 유무가 인간과 사이보그를 나누는 기준으로 등장하거나, 사이보그에게 항상 ‘기억’을 삽입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특히 민족이나 국가처럼 개인의 단위를 넘어선 기억은 그 공동체의 정체성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푸네스의 경우가 그렇듯이, 우리는 기억하는 동안은 결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24시간을 기억하는 데 써야 하니까요. 보르헤스의 소설은 우리가 기억에 집중하는 한 생각하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하면 결코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억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쩌면 보르헤스는 ‘기억’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망각’의 중요성을 일깨우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제를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만이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 수 있을 테니까요. 첫 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 결코 두 번째 사랑을 할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중요한 모든 것을 망각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지요. 그것마저 잊으라고 말하는 것 ‘폭력’입니다. 그런 기억은 대개 잊으려고 노력해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또 잊어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그 기억의 시간에 자유로울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늘 한 지점에서 다시 출발하게 되는 무한의 반복에 붙들리게 됩니다. 니체의 말을 빌려 이것을 ‘망각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경우 ‘망각’이란 머리가 나빠서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나, 또는 현실에 순응하기 위해 자신의 과거 모두를 부정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이 구분되지 못할 때, ‘망각 능력’이란 한낱 말장난에 불과하게 됩니다. 

 

어떤 시간도 완전하게 ‘매장’될 수 없다

 

 이제, 기억에 관한 두 편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윤고은(오른쪽 얼굴 사진)의 「타임캡슐 1994(웹진 《문장》20089월호)입니다. 뉴밀레니엄을 전후해서 타임캡슐의 제작이 유행하던 때를 기억하시는지요?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 후세의 인간들이 타임캡슐을 열어 보고 지금의 한국인들이 어떻게 살고 생각했는가를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 타임캡슐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타임캡슐은 아마도 1994년 11월 29 서울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남산골 전통정원에 매장된 타임캡슐일 듯합니다. 이 소설에서 ‘타임캡슐’은 매장된 시간, 즉 기억을 의미합니다.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를 교직합니다. 그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사백 년 후에 개봉되어야 할 타임캡슐이 십 사년 만에 썩어서 개봉되고, 그렇게 개봉된 타임캡슐을 복원시켜 다시 매장하는 일을 맡은 ‘나’의 직업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결혼 4년 만에 남편이 죽고,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이와 ‘나’가 ‘노크’라는 장치를 통해서 맺고 있는 ‘나’의 일상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남산골에 매장되어 있는 타임캡슐이 심각하게 부식되어 발굴되어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나’는 그 타임캡슐의 복원 작업에 투입됩니다. 오랜 시간 동안 환경가속화 실험과 극한 실험을 통과한 타임캡슐이 부식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시간도 완전하게 ‘매장’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을 이기는 건 없어. 우리가 하는 건 모두 방부제일 뿐이야. 방부제를 넣었다고 안 썩나? 부식을 미룰 뿐이지.” 그렇습니다. 어디에도 완전한 밀봉이 없듯이, 어떤 기억도 온전하게 밀폐되어 보존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부식된 타임캡슐이 들어올려지던 날, ‘나’는 타임캡슐이 묻혀 있던 구덩이에서 남편의 죽음을 떠올립니다. 매장되었던, 망각되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입니다.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불러옵니다. 남편의 두 번째 아내였던 ‘나’는 자신과 남편의 딸아이 사이에 ‘노크’라는 장치를 만들어둡니다. 그녀에게는 ‘노크’가 ‘엄마’라는 말보다 중요했고, 그것은 “모녀지간을 보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딸아이가 밤바다 어둠을 무서워하며 ‘나’의 방으로 들이닥치고, ‘나’는 남편과의 관계, 아니, 아이와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없던 문턱을 만들고, 아이에게는 노크하는 습관을 강제합니다. 물론, 잠결에 부모의 방으로 건너오는 아이가 매번 ‘노크’를 하기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무의식에 속하는 것이니까요. 남편은 불과 4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함께하다 죽었고, ‘나’는 아이와도 헤어지게 됩니다. 고모에게 맡겼던 아이가 엄마를 찾기 위해 가출을 한 것이지요. 그러니 ‘아이’라는 존재는 ‘나’의 의식의 층위에서는 지워진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지워진 기억이 타임캡슐과 동시에 의식의 밑바닥, ‘기억의 저편’에서 되살아난 것입니다.

 

  “아기의 울음소리도, 라푼젤의 머리카락도 아니지만 예기치 않은 일은 전혀 엉뚱한 경로로 다가왔다. 십팔 분의 재생 시간이 다 돌아가도록 고요한 화면을 내뿜는 CD 한 장. 이 무명의 기록은 수장품 목록에 없는 것이다. 복본도 있을 리 없다. 애초에 무엇을 담았던 것인지 기억하는 사람도 없으며, 어떻게 목록에 없는 것이 캡슐에 담겼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원래 없어야 정상인 물품이 분명 타임캡슐 안에서 나왔다. 텅 빈 CD를 다시 작동시킨다. 화면은 열심히 무언가를 읽어내려고 하지만,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진 위는 문장 웹진에 실린 윤고은 단편소설 <타임캡슐>의 표지 그림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합니다. 아니, 불완전한 채로 완전합니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를 재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꿈-작업’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기억은 항상 과거를 재구성하면서 현재화하는 창작의 과정입니다. 기억이 결코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는 것, 작가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타임캡슐에 공 CD 한 장을 슬쩍 끼워 넣습니다. 손상된 영상물의 복원을 맡은 ‘나’는 수장품 목록에도 없는 CD 한 장을 발견합니다. ‘목록’이 과거의 재현에 해당한다면, 목록에 존재하지 않는 CD는 기억의 불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이름은 없고 실체는 있는 수장품”,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억이 아닐까요. “들어가지 말았어야 할 물품, 필요하지 않았던 물품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이 소설에서 공 CD는 우리가 1994년을 의심하게 만드는 매개물이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정작 기억의 불완전함을 노출시키는 그 CD에는 어떠한 기록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그 CD에 어떤 내용이 꼭 들어 있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CD자체가 기억의 불완전함을 증명하는 증거이니까요. CD를 멸균기 안에 넣고 살균을 한다고 해서 기억의 불완전함이 사라질까요? 결국 ‘나’는 폐기처분할 방법을 몰라 CD를 가방에 넣고 다니다 다시 타임캡슐에 넣습니다.

  타임캡슐이 등장한 이후 ‘나’는 심경변화를 경험합니다. 아이와 자신 사이에 함부로 넘어들 수 없는 거리(‘노크’)를 고집했던 그녀는 이제 ‘아이’를 기다리며 과거의 집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녀와 함께 생활할 때, 아이는 밤마다 그녀의 공간을 침범해 그녀의 잠을 방해했지만, 아이와 분리된 후, 편히 잠들지 못하는 건 아이가 아니라 ‘그녀’입니다. 그녀는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음으로써 아이가 찾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타임캡슐이 봉인된 판석 근처에서 ‘아이’를 발견합니다. 물론, 이 장면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어, 그녀가 아이를 만나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는가를 따져 묻기가 곤란합니다. 이 장면에서 아이는 자신이 ‘노크’를 했음을 분명하게 밝히지만, “그 한 마디에 내 모든 것이 무장 해제”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노크’에 관한 아이의 진술이 그녀가 지녀왔던 아이에 대한 태도, 그녀가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것을 적나라하게 밝혀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아이와 ‘나’ 사이에 거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로소 그 순간에야 그녀는 아이와 하나가 됩니다. 그들은 “노크도 문턱도 잠금장치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 꼭 그만큼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잠을 잡니다. 그녀와의 동침에서 아이는 성장하고, 그녀는 ‘이상한 오르가즘’을 느낍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심장의 ‘박동’입니다. “기억의 저편”, 망각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기억과 조우하는 순간, 그녀들의 삶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 구멍을 내는 상처로서의 기억

 

  정지아(사진 왼쪽)의 「순정」(《실천문학》 2006년 겨울호) 역시 ‘기억’에 관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빨치산이었던 6년 동안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죽음을 껴안고 사는 한 사내의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제목이 ‘순정’이니 주인공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빨치산은 그의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했던 시간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순정이란 항상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어리석은, 그렇지만 아름다운 시간이니까요. 소설의 주인공 강우는 머슴의 자식입니다. 그의 집안 내력이 머슴’이니, 그 역시 머슴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지요. 강우의 아비는 자식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여 군에 갈 것을 권유하고, 강우 역시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열일곱에 국방경비대에 자원입대합니다. 자원입대한 그는 여수 14연대에 배치되는데, 그곳은 당시 좌익의 힘이 강하기로 소문난 곳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주도 43항쟁 진압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이 부대에서 파병을 거부하는 집단적인 움직임이 발생하고, 이 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리산에 숨어들어 빨치산 투쟁을 합니다. 물론, 주인공 강우 역시 빨치산의 일원이 됩니다. 

  그렇지만 강우가 빨치산에 가입한 것은 실로 우연일 뿐 결코 이념적인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두 명의 인물을 만납니다. 한 사람은 빨치산 부대장 이현상인데, 그는 보급투쟁을 나서는 강우에게 “살길을 뿌리치지 말아라”라는 인간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고,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자신이 가진 마지막 식량을 어린 강우에게 내어줄 만큼 선량한 인물입니다. 그는 마음씨 여린 강우가 예술가의 자질을 갖고 있음을 알아봐 주었고, 추격대가 코앞에 닥쳐 패배가 확실시된 순간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우리 뜻도 이어지지 않겠어?”처럼 동료들을 억울한 죽음으로부터 구해내려고 힘쓰는 의로운 지도자입니다. 또 한 사람은 “군인들에게 발각될까봐 제 손으로 제 자식 입을 틀어막아 죽인 후”에 입산한 옥희 누님입니다. 이현상이 의롭고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이라면, 옥희 누님은 “노동자, 농민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믿음이제.”처럼 사회주의 이념의 세례를 받은 신념형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빨치산에서의 6년 동안 주인공 배강우가 이현상과 옥희 누님에게서 배운 것은 그들의 이념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였습니다. 한낱 머슴의 아들, 즉 머슴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관심을 쏟아주었고, 그의 여린 성품과 기질마저도 따뜻한 눈으로 지켜봐준 인물들이었으니, 그들에 대한 강우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사건의 발단은 주인공 강우가 자신의 고향마을로 보급투쟁을 하러 내려가면서 시작됩니다. 부대장 이현상은 이미 강우가 마을로 내려가면 돌아올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식량을 내어주면서 그를 가족의 품으로 보냅니다. 동료들이 먹을 식량을 구해서 산으로 돌아가려고 한 강우는, 그러나 마을에 내려오다가 정신을 잃게 되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그를 만류하는 가족과 경찰인 당숙의 위협 때문에 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그때부터입니다. 그는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과,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경찰이 된 자신에 대한 자학으로 삶의 나머지 시간들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탁자에 얼굴을 묻었다. 아버지처럼 따스하던 이현상의 마지막 눈빛이 사라지고, 옥희 누님의 목화솜 같은 환한 웃음도 아득히 멀어졌다. 그 너머로 옥희 누님의 웃음을 닮은 목화송이 같은 함박눈이 퍼붓고 있었다. 눈 사이로 스물둘의 젊은 그가 걷고 있었다. 왕시루봉을 넘을 때 그는 왜 그랬는지 퍼붓는 눈 사이로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돌아본 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천국이었다. 천국은 미래에 있지 않고 청춘을 바친 그 산속에 있다는 것을 젊은 그는 알지 못했다. 신념 때문이었든 함께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든 목숨을 건 청춘 자체가 천국이었다는 것을.

 

  대개의 경우 ‘기억’은 안정적인 일상의 삶에 구멍을 내는 상처로 등장합니다.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이 불쑥불쑥 우리의 의식을 뚫고 솟구쳐 올라와 우리의 현재를 교란시킬 때, 기억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강우의 경우는 정반대입니다. 아름다운 기억의 세계, 즉 ‘천국’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의 시간이 불행하게 되고 맙니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그럴수록 더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산에서의 지난 몇 년을 에라 모르겠다 짓밟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기억이 고통의 기원인 샘이지요. 이미 천국을 목격해버린, 그러면서도 결코 천국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인간에게 지금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의미한 시간의 연장일 뿐이겠지요. 그래서 노년의 강우는 몇 번에 걸쳐 ‘죽음’을 염원합니다. “잠이 들 때마다 그는 제 몸뚱이를 잡아당기는 늪 같은 잠의 바닥으로 한없이 추락하여 다시는 올라오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어쩌면 폭음을 일삼는 강우의 태도는 죽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복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강우의 심경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평생을 덫처럼 움켜쥔 육년의 세월이 아내에게는 금기의 대상이며 부정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천국에 대한 강우의 기억 외에도 주목해야 할 장면들이 있습니다. 먼저, 죽은 자식의 옷가지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오거리식당의 과부댁이 있습니다. “언젠가 과부댁이 죽은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끌어안고 눈물짓는 것을 본 후로는 한여름 갑사 저고리 앞섶 사이로 살진 젖가슴이 출렁거려도 회가 동하지 않았다.” 주인공 강우가 매일처럼 오거리식당으로 향하는 것은 술 때문만은 아닙니다. 소중한 천국을 잃어버리고 사는 강우와 남편과 자식을 잃고 사는 과부댁 사이에는 확인할 수 없는 교감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고순경이 있습니다. 한때 경찰이었던 고순경은 여순반란 당시 좌익이었던 친구의 도움으로 처형당할 위기를 벗어났는데, 그때 고순경은 경찰을 하지 않겠다고 친구와 약속을 했습니다. 좌익 측이었던 강우가 우익이었던 당숙의 도움으로 목숨을 보존했다면, 우익 측이었던 고순경은 좌익이었던 친구의 도움으로 목숨을 보존한 셈이지요. 그래서 고순경은 별다른 이유 없이 강우의 술주정은 물론, 술에 취한 그를 매번 집에까지 데려다 줍니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세 사람 모두 과거의 아픈 경험을 간직하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또 그들은 모두 그리움의 대상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과부댁은 죽은 자식을, 강우는 빨치산에서의 천국을, 그리고 고순경은 자신을 살리고 죽은 친구를 그리워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들 세 사람이 오거리식당에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 세 사람은 그리움의 대상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은 소중한 무엇인가를 가슴 한켠에 끌어안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의 태도라고 말입니다. 이들 세 사람의 태도에서 우리는 대상에 대한 순정을 느낍니다. 이것은 또한 기억의 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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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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