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 작성일 2017-05-01
  • 조회수 842

[글틴 스페셜_제12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감상&비평 부문 수상작]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김성호



– 멀리 가는 이야기_김보영


내가 글틴에 온 지도 어느 덧 3년째이다. 이야기글에선 거의 뿌리를 내리다시피 살았는데, 나는 내 글을 평해 주시는 선생님이 어떤 소설을 쓰는지, 어떤 작가인지에 대해 아는 게 전무했다. 그저 담임선생님처럼 이름 석 자만 외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이번에야 그 선생님의 작품을 읽게 되었다. 나는 <멀리 가는 이야기>라는 단편집을 통해 김보영이라는 한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단편집은 다섯 개의 단편과 하나의 연작시리즈로 이루어진 SF소설 단편집이다. 평소에 장르문학이라면 판타지나 공포 쪽을 답습해 오던 나로서는 SF소설 입문작인 셈이다. SF라는 장르가 그리 내 흥미를 끈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과학을 싫어하는 탓에 SF소설은 뭔가 이해하기 복잡한 실타래로 여겨졌다. 책을 다 읽은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SF 입문작으로서 이 작품은 매우 적절했다. 기존의 SF에 대한 나의 편견과 벽을 허물어 준 고마운 소설이다.
흥미롭게 읽은 작품을 꼽아 보자면, ‘다섯 번째 감각’, ‘우수한 유전자’를 뽑을 수 있다.
‘다섯 번째 감각’은 비단 이 단편집을 떠나, 내가 읽어 본 소설 중 명작 반열에 올려놓아도 될 만큼 나와 꼭 맞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알 듯 말 듯, 오묘한 감각의 선을 독자의 머릿속에 그려내며 어딘가로 데려간다. 언니의 죽음과 언니가 사고 났을 때의 자신(주인공 연주)의 행동을 조사하러 온 경찰관, 그리고 경찰관이 말한 사이비종교. 이 세 개의 흐름이 맞물리면서 독자는 첫 문장부터 느꼈던 그 오묘함의 정체를 깨닫는다.
청각. 이 소설의 주제이자 설정이자 커다란 줄기인 ‘청각’이다.
이 세계에서는 말로 대화를 하지 않고 수화로 대화한다. 말을 하지 않으니 음악이 있을 리 없다. 그 사실이 이 소설의 첫 번째 반전이다. 나는 추측해 보았다. 귀라는 기관이 퇴화된 세계인가,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청력을 잃은 사람들의 세계의 이야기인가. 그러한 궁금증은 신흥 사이비종교의 특징이라던 ‘입을 오물거리는’ 행위에서 더 극대화된다. 입을 오물거린다, 이 표현이 얼마나 낯설던지. 우리는 흔히 소리 내어 의사소통을 하는 행위를 ‘말하다’로 표현한다. 말하기 이전에 입술이 움직이는 그 형태를 우리는 생각할 일이 거의 없다. 입을 오물거리는 것은 뭔가를 씹거나 먹을 때 주로 묘사하는 표현이다. 말을 하지 않는 소설 속 세계에서 음식을 섭취할 때를 제외하고 입을 쓰는 일은 없다. 경찰은 말을 하는 행위, 소리를 듣는 행위를 초능력쯤으로 간주한다. 소리를 듣고 소리를 내는 행위는 우리가 지팡이를 휘두르고 마법주문을 외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능력의 범주를 벗어난 ‘초능력’으로 여겨진다.
입을 오물거린다는 표현이 말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윤성이 등장할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주인공인 연주는 죽은 언니에게 온 편지에 적힌 주소로 찾아간 한 카페에서 윤성을 만난다. 그가 입을 오물거리는, 그러니까 언니가 살아생전 빠져 있었다는 그 사이비종교의 특징을 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윤성에게서 ‘행복해지는’ 박수 치기를 배운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녀에게(윤성과 같은 초능력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허공에 손을 맞부딪치는 것은 무의미한 행동이다. 윤성은 그녀를 자신과 같은 초능력자들의 아지트로 안내한다. 그곳 아지트에는 다양한 나이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녀는 거기서 죽은 언니가 살아 있을 때 했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이해하게 된다. 언니가 기괴하게 몸을 이리저리 놀리는 것은 ‘춤’을 추는 것이었고, 그 춤은 소리, 즉 ‘노래’에 맞춰 행해지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떠나간 언니의 빈자리가 있다. 윤성과 그들은 손으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귀가 먹먹해지는 공기의 파동을 이용하여 ‘입’으로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이 그녀에게 악기를 이용한 ‘노래’를 들려주었을 때, 연주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인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모르던 내 몸의 감각이 깨어난다면?
그녀는 그런 상황이었다. 평생 닫혀 있던 문이 갑작스레 열리며 쏟아져 들어온, 이(異)세계의 존재는 그녀의 청각을 일깨운다. 윤성은 그녀에게 당신도 언니처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녀는 아니라고 한다. 그녀는 완강히 그 사실을 거부한다. 연주에게 윤성과 그들은 경찰의 말마따나 ‘초능력자’, ‘외계인’쯤으로 보였을 터였다.
그때 경찰들이 들이닥친다. 경찰에게, 정부에게 ‘청각’은 사이비종교, 이단이다. 정부가 청력이라는 감각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은폐하고 있었는지 여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청각은 정부(권력)의 통제와 지배의 도구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정부라는 소수의 몇몇 사람들이 다수 인간의 한 감각을 통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멋진 신세계>를 떠올려 보면 그리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한 감각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손쉽게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겠는가? 누군가를 길들이거나 조종할 때, 물리적인 폭력과 억압보다는 정신적인 세뇌가 더 효과가 있는 법이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 인간의 본능적 감각을 통제하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의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과 사상, 나아가 본능까지, 진정한 인간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계의 정부는 청각을 통제하고 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의 감각 차단 세뇌의 발현일 수도 있다. 소리가 없는 세계는 많은 것이 은폐되기 쉽다. 죽어 가는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구원을 요청하는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나는 사람은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 그 존재의 ‘실체’와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눈으로 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맛보고, 들으면서. 그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린다면 그만큼 우리는 그 존재의 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들을 피해 윤성과 함께 도망친다. 침묵의 세계에선 도망가는 죄 없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무고한 사람들을 쫓는 이들의 군홧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육안으로 보이는 현실에서 그녀와 윤성은 범죄자이다. 정의와 진실은 침묵에 묻힌 상태이다.
연주는 자신이 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순간 ‘비명’을 질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꺄악, 그것은 침묵을 벗겨낸 감각의 본능이었다. 거기서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할 수는 없다.’ 때로 우리 사회에서는 그 지배를 시도하는 억압이 가끔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억압 속에서도 우리는 아직까지 우리의 감각을 잊지 않고 있다. 정의를 부르짖는 목소리와, 다른 사람들과 뜻을 같이하는 발소리, 의지에 가득 찬 노랫소리를.
그녀는 노래를 부른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소리를 내고, 음을 붙여 노래를 부른다.
우리에게도 소설 속 세계 사람들의 ‘다섯 번째 감각’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그 감각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뿐.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소름 돋는다.
‘우수한 유전자’는 짧고 강렬한 이야기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반전을 이해했을 때, 나는 누가 뒤통수를 세게 때리고 지나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소설에서 세상은 두 세계로 나뉜다. 고도의 과학기술과 문명을 이룩한 ‘스카이돔’ 시민들과 질병과 죽음이 만연한 원시적인 ‘키바’ 사람들의 세계이다. 주인공은 스카이돔에서 키바로 파견 나온 조사관으로, 자신의 눈에는 한없이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는 키바 주민들을 돕기 위해 왔다. 그곳에서 그는 마을 이장의 집을 방문하여, 스카이돔의 키바에 대한 물질적 지원에 대해 설명을 한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이유에선지, 이장은 자신들의 스카이돔을 위한 헌신과 조공을 흐뭇해하며 스카이돔의 어떠한 지원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지능지수, 교육, 실력 등에서 스카이돔과 키바의 경계를 가르는 건 ‘유전자 판별기’의 존재이다. 열성 유전자와 우수한 유전자를 판별하여 키우는 것이다. 주인공은 유전자 판별기 역시 단 한 사람도 사용하지 않은 키바 주민들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의구심만 가득하다.
소설 중간 중간에는 주인공이 쓴 듯한 기록 비슷한 것이 있다. 거기서 그는 키바 주민들을 향한 연민과 스카이돔 시민과의 차이 인정 등을 얘기한다.
주인공은 홍역에 걸린 아기를 치료하는 이장의 주술 행위를 가만히 지켜보지 못한다. 나서서 이장을 밀치고 아기를 구하려 한다. 하지만 아기는 이미 죽어 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주인공이 쓴 중간의 기록에서도 그는 아기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소설은 180도 고개를 홱 비튼다. 나는 후반부까지 그 중간의 기록이 스카이돔 시민인 주인공의 ‘키바 방문기’, ‘키바 시민들을 만나고 나서’ 따위의 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 기록은 정반대의 시선이었음이 드러난다. 키바 주민의 스카이돔에 대한 글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거기 나왔던 모든 연민과 차이, 분노는 모두 스카이돔 시민들에 대한 것이었다. 스카이돔은 화려한 문명이 발달한 세계가 아니라, 너무 연약하여 감히 그 돔 밖을 나올 수 없는 존재들의 인큐베이터에 불과했다.
여기서 나는 의문을 던진다.
‘원시적’이고 ‘문명적’인 것의 기준과 판단은 무엇이며, 우리가 무슨 기준으로 ‘열등’과 ‘우수’를 판단하는가? 결국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라는 것을, 소설의 마지막 반전은 말해 주고 있다. 우리가 원시인이라고 생각한 그들이 보기엔 우리가 ‘원시인’인 것이다. 그것은 모두 상대적인 개념이며, ‘남보다는 내가 낫다’는 식의 인간의 자기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한 허울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우리는 나날이 계속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문명의 도약’이자 ‘인류의 진화’라고 여길지 모르나, 그만큼 자연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후퇴이자 퇴화에 불과하다.


이 두 작품은 내게 많은 생각거리와 문제를 던져 주었다. 이만큼의 깊이와 재미를 느낀 건 오랜만이었다. 특히 한국 작가의 작품으로서는 말이다.
다만 아쉬움도 존재한다.
‘촉각의 경험’ 같은 경우는 클론의 꿈을 통한 인간과 클론 사이의 교류라는 점이 흥미로웠으나, 이야기의 폭발성이나 극적인 부분의 부재를 느꼈다.
‘종의 기원’은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인간이 로봇을 탄생시킨다는 사실을 역으로 풀어낸 이야기이다. 로봇이 인간을 탄생시키고 파멸시키는 이야기. 그들이 ‘신’이라 믿는 존재는 인간일 테고, 그들은 자신들을 창조한 신을 창조하고 파멸시킨 셈이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주인공 케이 히스티온의 ‘종족 보존’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인간의 치명적이고 완벽한 아름다움의 상충됨은 모든 피조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갈등이 아닌가 생각한다. 피조물의 본능은 창조주에 대한 숭배와 헌신인가? 피조물의 창조주에 대한 시기심, 이라는 질문도 해보게 된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 시리즈는 주인공이 각각 겪은 에피소드를 기, 승, 전, 결의 순으로 엮은 것인데, 이해하는 데 시간이 다소 걸렸다. 우주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그만큼 더 신비스럽고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이 세계가 정확히 어떤 세계인지, 세계관이 모호한 점이 아쉬웠다. ‘기’ 부분의 이야기가 특히 그랬다. 굳이 말하자면 독자에 대한 배려가 조금 더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미묘한 점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렇지만 행성과 존재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남은 자들을 그린 이야기에 나는 본능에 이끌리듯 빠져들었다.
나는 한국 문학을 잘 읽지 않는 편이고, 더군다나 한국 ‘장르문학’은 읽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내게 우리나라 장르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SF의 매력과 개성을 실컷 뽐냈다. 단편집의 제목 ‘멀리 가는 이야기’처럼 우리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얼마나 삶의 영역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지 궁금하다. 작가의 다른 단편집과 장편소설을 읽을 날이 기다려진다.
좋아하는 한국 작가가 한 명 더 생겼다는 점이 독자로서는 기쁠 따름이다.











김성호
작가소개 / 김성호(글틴 필명 : 아그책)

1998년생. 2016년도 제12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감상&비평 부문 수상자
가좌고 문예창작동아리 '창작사모' 1기로 활동하였고, 청소년문화연대 웹진 '킥킥'에 <고3 아그책의 시사소년 표류기>를 연재하는 중이다. 현재 소설 플랫폼 '브릿G'에서 글을 쓰고 있다. 좋아하는 작가는 스티븐 킹과 정유정, J.K.롤링, 윤이형 등이다.
(위 작품은 2016년도 사이버문학광장 글틴 감상&비평 게시판 3월 월장원 선정작으로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입니다.)


《문장웹진 2017년 05월호》


추천 콘텐츠

아무 문제 없음

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 관리자
  • 2022-10-01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 관리자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