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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빅과 다이아몬드

  • 작성일 2020-09-01
  • 조회수 1,429

[2020년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큐빅과 다이아몬드



이민우




등장인물


여자1(1인 2역) – 1970년 청계천 봉제 공장 여공이자 2020년 쥬얼리 공장 노동자
여자2(1인 2역) – 1970년 청계천 봉제 공장 여공이자 2020년 쥬얼리 공장 노동자
여자3(1인 2역) – 1970년 청계천 봉제 공장 여공이자 2020년 쥬얼리 공장 노동자
남자(1인 2역) – 1970년 청계천 봉제 공장 남공이자 2020년 쥬얼리 공장 사장



배경


1970년 청계천 봉제 공장
그리고 2020년 종로 쥬얼리 공장



무대


한 공간에서 1970년과 2020년을 동시에 보여준다.
1막은 1970년 청계천 봉제 공장이고
2막은 2020년 종로 쥬얼리 공장이다.


여러 작업대들이 오와 열에 줄 맞춰 반듯하게 무대 중앙에 위치한다.
작업대에 의자는 없다.
무대 뒤편으로는 큰 싱크대가 하나 자리하고 덮개로 덮여 있다.
싱크대 안에 말통을 서너 개 준비해야 하며 말통은 2막부터 쓰인다.
큰 시계 하나가 무대 위 천장에 걸려 있다.


1막에서는
작업대들 위로 미싱기가 하나씩 놓여 있다.
작업대 미싱기 옆으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곰 인형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머리가 아직 안 달려 있는 곰, 팔이 안 달려 있는 곰, 다리가 안 달려 있는 곰,


그리고 눈깔이 하나도 없는 곰 인형들이 작업대 위에 널려 있다.
2막에서는
작업대 위에 미싱기 대신 보석 세공기가 놓인다.
곰 인형들도 큐빅이 가득 들어 있는 상자들로 바뀐다.


조명은 무대 전체를 비추는 전체 조명 외에
각 작업대와 무대 뒤편 싱크대 그리고 인물들이 등·퇴장하는 무대 입구 위에
핀 조명이 각각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핀 조명들의 경우, 셀로판 등을 활용하여 형형색색의 효과가 가능토록 한다.


배우들의 의상은 남자가 2막에서 반드시 잘 차려입은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점
외에는 연출 재량에 맡긴다.
소품 역시 1막에서 여자2가 들고 있는 반지와 2막에서 여자1이 들고 있는 반지가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다. 반지 자체가 꼭 등장하지 않아도 되며 이는 연출 재량에 맡긴다.
미싱기나 보석 세공기 그리고 곰 인형들과 큐빅이 가득 든 상자들 역시 연출에 따라 실제 소품 없이 공연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1막

- 1970년 청계천 봉제 공장 -


전체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고
작업대 위에 아직 미완성인 곰 인형을 안고 누워 있는 여자1의 모습이 보인다.
그 옆으로는 다른 미완성인 곰 인형들이 널려 있다.
전체 조명이 다 밝아지고
여자1, 눈을 비비면서 하품을 한다.
기지개를 켜며 누워 있던 작업대에서 일어나는 여자1


여자1    (안고 있던 곰 인형을 보며) 잘 잤니?
      아직 팔이 없어서 인사를 못 하는구나.
      오늘 이 누나가 팔 달아 줄게.
      누나가 팔 달아 주면 잘 때 꼬옥 안아 주는 거다. 알았지?
      (곰 인형을 안으며) 사랑해.
      (옆에 놓여 있는 다른 곰 인형 얼굴들을 보며) 너도 사랑해.
      너도 사랑하고
      너도 사랑해.
      너는 오늘 목을 달아 줄게.
      너는 귀를 달아 주고.
      조금만 더 참아.
      조금만 더 있으면 어른이 되는 거야.
      설레지? 어른이 된다니까!
      어른이 되면 마음대로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여행도 갈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대!
      사랑이란 대체 뭘까? 막 설레겠지?
      이 가슴 한구석이 엄청 뜨거워진대.
      언니들은 되게 아프다고도 하던데……. 진짜 아플까?
      궁금해? 궁금하지?
      그래! 내가 너희들 가슴도 만들어줄게!
      나중에 너희 주인을 만나면 주인에게 받을 사랑을 느낄 수 있게.


갑자기 흥겨운 음악이 나오며
전체 조명이 꺼진다.
빨간색, 노란색 등 형형색색 핀 조명이 무대 입구 위에서 켜진다.
핀 조명 아래 서 있는 여자2의 모습이 보인다.


여자2    (뇌쇄적인 표정에 간드러진 목소리로)
      지금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계신가요?
      아니면 아름다워지고 싶으신가요?
      (손가락에 낀 반지를 관객들을 향해 보이며)
      빛나는 인생! 아름다운 사람이 되세요!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는 것!
      당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다이아몬드!


음악이 멈추고
화려했던 핀 조명이 꺼진다.

다시 전체 조명이 켜진다.
천장 위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는 여자2


여자2    9시 2분?
      젠장- 또 지각이네.
      (시계를 올려다보며) 한 번만 봐주세요.
      겨우 2분이라고! 겨우 2분!
      (사이)
      오늘도 대답이 없네.


자기 작업대 뒤에 서서 일할 준비를 하는 여자2


여자2    하긴. 언제 우리 사정을 봐준 적이 있었나.
      좀 봐줘라! 좀 보라고!
      (반지 낀 왼손을 시계를 향해 들어 보이며)
      여기를 좀 보세요. 나를 좀 보라고요.
여자1    (여자2 옆으로 다가오며) 언니. 지금 오는 거야?
여자2    2분 늦었어. 짜증나.
여자1    잠은 어디서 잤는데?
여자2    (손에 낀 반지를 보며) 어디에서 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디든 지붕만 있으면 됐지.
여자1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여자2    걱정?
      왜?
      뭘 걱정하는데?
      넌 여기서 매일 잠을 자고 싶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자고.
      침대도 아니고 작업하던 작업대 위에 누워서 자는 거.
      나는 이제 안 할래.
      (사이)
      너 내가 어제 야근 안 하고 데이트하러 가서 시샘하는 거야?
여자1    (여자2 작업대 위에 쌓인 곰 인형을 가리키며) 언니, 이거 진짜 언제
      다 할 건데?
여자2    정말 끔찍해! 소름 끼쳐!
      저 팔다리 없고 눈깔도 없는 병신들!
여자1    그러니까 빨리 일을 해서 이 아이들이 사랑받을 수 있게 해야지.
여자2    사랑?
      흥! 그래 봤자 애들 인형이야!
      저건 모가지도 뽑혀 있잖아!
여자1    아직 목을 안 단 거야. 뽑힌 게 아니라고.
      나중에 누군가 사랑해 줄 아이들인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야지
여자2    네가 사랑이 뭔지는 알아?
      (반지를 보이며) 자! 이거 봐라!
여자1    이게 뭐야?
여자2    봐봐!
      뭐 같아?
여자1    반지 너무 이쁘다.
      남자친구가 준 거야?
여자2    (고개를 끄덕이며) 다이아몬드야! 다이아몬드!
여자1    (크게 놀라며) 다이아몬드?!
여자2    다이아몬드 본 적이나 있어?
      어때? 엄청 이쁘지?
여자1    세상에! 이게 말로만 듣던 다이아몬드구나.
      세상에!
      그러면! 남자친구가!
      청혼 받은 거야?
여자2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만 기다려.
      여기서 사라져 줄 테니까.
여자1    어머나! 축하해!
      어떻게 고백했는데? 응?
여자2    어제 저녁에 말이야.


전체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 뒤편 싱크대 위로 핀 조명이 켜진다.
핀 조명 아래 남자와 여자3이 서 있다.
[여자2의 대사에 따라 몸짓을 하는 남자와 여자3.
지문 외에 구체적인 행동은 연출 재량이다.]


여자2    종로에 있는 반쥴에 갔거든.


싱크대를 가운데 두고 나란히 서로 마주 보는 남자와 여자3


서로를 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여자1    세상에! 반쥴? 그 경양식집?
      부럽다!
      뭐 먹었어? 뭐 먹었는데?
여자2    스테끼!
      우아하게 스테끼를 썰어 먹었지.


서 있는 상태로 서로 마주 보고 스테이크를 썰어 먹는 시늉을 하는
남자와 여자3


여자1    스테끼!
      세상에! 말로만 듣던 스테끼!
      진짜 어른이 되면 먹을 수 있는 게 많구나.
여자2    그렇게 스테끼를 다 먹으니까
      남자친구가 다가오더니


여자3에게 다가가는 남자


여자1    몰라!
      부끄러워!


여자3 가까이로 밀착하는 남자


여자1    어떡해! 어떡해!
      뽀뽀? 뽀뽀?
여자2    (반지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며) 이 다이아 반지를 내 손에
      끼워 준 거야!


여자3의 손을 잡는 남자
핀 조명이 꺼진다.
전체 조명이 다시 원래대로 밝아진다.


여자1    자세히 좀 볼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반지를 보며) 신기하다.
      너무 신기해.


남자와 여자3이 가까이 다가온다.


남자    뭐 해? 일 안 하고?   
여자3    뭐야? 반지네?
      웬 반지야?
여자1    남자친구가 줬대요!
여자3    남자친구?
남자    그 은행 다닌다는 사람?
여자2    (으쓱대며) 어제 남자친구랑 반쥴 갔거든.
여자1    다이아 반지에 반쥴까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언니가 너무 부러워요!
      나도 빨리 어른이 돼서 사랑을 해야지.
남자    다이아?
      이거 다이아몬드야?
여자1    남자친구가 청혼했대요!
여자3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여자2를 보며) 결혼하는 거야? 날짜는?
여자2    아직 안 잡았어.
남자    청혼 받았다고?
여자2    왜?
      질투나?
여자1    너무 이쁘지 않아요?
      반짝반짝 빛나요!
여자3    (다소 심드렁하게) 그래?
      반짝반짝 빛나나?
여자1    다이아몬드잖아요.
      너무 아름다워요!
여자2    (어깨를 으쓱하며) 이쁘지?
여자1    네! 너무 이뻐요!
여자3    이게 진짜면 대체 얼마야?   
여자1    다이아몬드라는 게 엄청 비싼 거잖아요.
      세상에! 저건 과연 얼마나 할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꿈꾸는 삶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겠죠?
      부러워요! 정말 부러워!
      남자친구분이 신사분이신가 봐요.


여자2    고마워.
      결혼식 때 꼭 놀러 와.
남자    결혼하는 건 확실한 거야?
      날짜도 아직 안 잡았다며?
여자2    왜 그러는데?!
남자    이거 다이아가 아닌데.
여자2    뭐?
남자    이거 다이아몬드 아니야.
여자1    다이아몬드가 아니라고요? 진짜요?
여자2    무슨 소리야?
남자    다이아몬드가 아니라고.
여자2    이거 다이아몬드야!
남자    아니야.
여자2    뭐라는 거야?
      그럼 이게 뭔데?
남자    큐빅.
여자1    큐빅이요?
여자2    아니야!
      남자친구가 분명 다이아몬드라고 했다고!
남자    큐빅이야.
      자세히 보면 달라.
여자2    니가 뭘 안다고…….
      니가 무슨 보석 전문가야?
여자3    나름 전문가 아니야?
      쥬얼리 공장으로 이직한다고 지금 보석 공부하잖아.
여자2    말도 안 돼.
      (사이)
      어설프게 몇 개 배웠다고 어디서 아는 척이야!
      남자친구가 분명 다이아라고 했단 말이야!
남자    미안해.
      그런데 큐빅이야.
여자1    다이아몬드가 아닌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여자2, 내밀었던 손을 슬며시 뺀다.


여자1    전 잘 모르겠어요.
      진짜 다이아일 수도 있잖아요.
남자    겉으로 보면 둘 다 똑같아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달라.
      투명한 정도나 깎인 면이 다르거든.
여자1    그래도 이렇게 반짝거리는데…….
남자    그러니까 더욱더 다이아몬드가 아닌 거지.
      원래 큐빅이 더 반짝반짝 빛나고
      정작 다이아몬드는 생각보다 어두워서 큐빅보다 광택이 덜해.
      다이아몬드처럼 보이는 게 오히려 다이아몬드가 아닌 거지.
여자1    진짜예요?
      확실해요?
여자3    이 녀석 요즘 보석 공부하고 있다니까.
      여기 이 봉제 일은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을 해서.
여자2    (여자3의 말을 끊으며) 아니야!
      이거 다이아야! 다이아몬드라고!
      (사이)
      (여자3을 쳐다보며) 너도 똑같이 생각하는 거야?
      너도 이게 큐빅인 것 같아?
여자3    정신 차려.
여자2    뭐?!
여자3    남자친구가 은행원이라며.
여자2    그런데?
여자3    은행원이 무슨 돈이 있어서 다이아 반지를 사냐?
여자2    그럼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여자1    거짓말? 남자친구가 사기꾼인 거예요?!
여자3    (여자1을 한 번 쳐다보며 눈치를 주고) 청혼은 하고 싶은데
      돈은 없고 그래도 사내라고 다이아라고 말한 것 같은데.
남자    너무 마음에 두지 마.
      남자들 원래 그래.
여자3    어쨌든 그래도 결혼하는 건 맞잖아?
      결혼할 거잖아?!
      그 남자랑 결혼하고 싶은 거 아니야?
남자    반쥴도 갔다며.
여자1    스테끼 먹었대요! 스테끼!
남자    남자친구가 노력 많이 했네.


여자3    그래, 좋게 생각해.
      그 반지가 다이아몬드는 아니지만
      남자친구가 널 좋아하는 건 사실이고
      너도 남자친구 사랑하잖아.
남자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는 거.
      그것 하나만 확실하면 되지 뭐.
여자2    그래?
      (사이)
      지금 나한테 확실한 건
      남자친구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여자3    다이아몬드를 원해?
      다이아몬드가 반짝반짝 이쁘기는 하지.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스스로 빛나지 않아.
      너 스스로가 빛나면 큐빅도 다이아몬드가 될 거야.
      (사이)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도 결국은 그냥 한낱 땅속의 돌멩이.
      그래서 우리 모두는 보석보다는 태양이 되어야 해.
      스스로 빛나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여자2    (상기된 표정으로) 잘난 척하지 마!
      나는 새벽에 나와 일하고 밤늦게 집에 가.
      태양은 고사하고 별똥별 하나 제대로 보기 힘든데
      겨우 힘들게 얻은 희망을 그렇게 밟아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는 여자2


여자2    (반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들 손가락이나 잘려라!


무대에서 퇴장하는 여자2
천장 위 시계가 ‘댕-댕-’ 하고 울린다.


남자    빨리 일이나 하자.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고.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돼.


각자 자기 작업대 뒤로 가 서는 여자1과 여자3


여자1이 미싱기를 돌려 작업을 시작하는 와중에


남자는 여자3에게 다가간다.


남자    말이 좀 심했어.
      꼭 그렇게까지 얘기를 했어야 했어?
      남자친구에게 선물 받은 거라고 좋아서 들떠 있는데.
여자3    웃겨!
      큐빅이라고 먼저 산통 깬 게 누군데!
남자    질투해? 부러운 거야?
여자3    혹시 다이아몬드이었을까 봐?
      나는 뭐 쟤처럼 사내의 사랑에 목을 매거나
      분수에 맞지 않는 다이아몬드를 바라지 않아.
      허황된 꿈을 꾸지 않는다고!


무대로 다시 들어오는 여자2
다들 여자2를 쳐다본다.
말없이 자기 작업대 뒤에 서서 미싱기를 돌리며 작업을 시작하는 여자2


남자    (다시 여자3을 보며) 근데 오늘은 왜 또 늦은 거야?
      너 또 그 사람 만나고 오는 거야?
      이름이 뭐더라…….
      김태일? 이태일?
여자3    전태일.
남자    맞다. 전태일.
      (사이)
      너 그 빨갱이 짓 계속할 거야?
여자3    나 빨갱이 아니야.
남자    전태일 그 친구가 빨갱이 아냐?
      근로기준법이니 뭐니 떠들어대면서
      괜히 여기 청계천 들쑤시고 있잖아.
여자3    형!
      형은 여기 노동자 아니야?
남자    난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사람이야.
      미래를 계획하면서.
여자3    그러니까!
      여기 청계천 봉제 공장 사장들이 형처럼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잖아!
남자    아니지.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있는 거지.
여자3    형!
      우리는 노예가 아니야!
남자    그래! 노예 아니지!
      우리 돈 받잖아.
여자3    그러면 휴일은? 휴가는?
      퇴근시간이 제때 지켜진 적은 있어?
      나는 아주 기본적인 걸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근로기준법.
      우리가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라고.
남자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다 아는데…….
      근로자의 기본적인 권리도 일단 일자리가 있어야 말할 수 있는 거 야.
      세상에 착하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고 완벽한 조직이 어디 있겠니?
      나도 회사에 불만 많고 사장 별로 안 좋아해.
      하지만 나한테 일자리를 줬잖아.
여자3    회사가 우리 때문에 돌아가는 거지
      우리가 회사 때문에 사는 게 아니야.
남자    기다려. 기다리면 돼.
      곧 좋아질 거야.
여자3    기다리라고?
      무조건?
      언제 좋아질 줄 알고?
      그사이에 내 손가락이 하나 잘리고
      옆에 서 있던 동료들이 하나 둘 사라지면 어떡하라고?
여자2    (주머니에서 반지를 다시 꺼내 멍하게 쳐다보며) 큐빅? 큐빅이라고?
남자    내가 쥬얼리 공부하면서 배운 게 하나 뭔지 알아?
      세상 모든 귀중한 건 시간이 만든다!
      보석 하나가 만들어지려면 땅속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있어야 하는지 알아?
      (작업대 위 곰 인형을 만지며) 이 작은 인형 하나도 시간이
      필요하잖아.
여자3    여기 쌓여 있는 곰 인형들을 언제까지 다 해야 하는지 알아?
      오늘 다 해야 해! 오늘 다!
      오늘 다 못 하면 퇴근도 못 해.
      나는 내 인생을 땅속에 묻어 놓고 기다릴 수가 없어.
      시간이 지금도 쫓아오고 있다고. 나는 도망치고 있고.
      내가 땅속에 묻힐 것 같아. 여기 있는 모두가 지금 그렇다고!
여자1    (자신이 작업 중인 곰 인형을 들어 보이며) 팔 붙였다!
      어때? 팔 생기니까 좋아?
      (곰 인형을 한번 안아 본 후) 이제 가슴을 달아 줄게.
여자3    형도 다이아몬드를 원하는 거야?
      형도 다이아몬드가 가지고 싶어?
      그래서 쥬얼리 세공을 배우는 거야?
남자    사람은 항상 미래를 대비해야 해.
      지금 봐. 우리나라도 매년 발전하고 사람들 씀씀이도 점점
      커지고 있잖아.
      앞으로는 다들 금붙이 하나씩은 다 가지게 될 거야.
여자2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쳐다보며) 다이아몬드가 아니라고?
남자    생각을 해야 해. 항상 생각을 해야 한다고.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나도 다이아몬드를 손에 끼거나 목에 걸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여자3    다이아몬드를 손에 끼고 목에 건다고?
      그러니까 결론은 형도 다이아몬드를 원한다는 거구나?
      (사이)
      다들 금붙이 하나씩 가지게 된다?
      허황된 꿈을 가진 사람이 여기 하나 또 있네.
여자2    그 사람은 나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건가?
      (사이)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이제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은 건가?
남자    (시계를 가리키며) 넌 저 시계를 보면 뭐가 떠오르냐?
여자3    형은 뭐가 떠오르는데?
남자    (시계를 보며) 시간.
      시간은 금이야.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야 비로소 금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조금만 참으라고.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는지
      알아?
여자3    난 아버지.
남자    아버지?
여자3    며칠 전에 주무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봤는데…….
      나한테는 시간이 없어.
      아버지 등이 하루하루 점점 더 무너지고 있다고.
      땅속에 묻히기도 싫고 그럴 여유도 없어.
남자    그래서…… 이 세상을 뒤집어 보겠다는 거야?
여자3    나는 시간이 없거든.
      시간이 지나면 금이나 다이아몬드는 점점 커지겠지만
      나나 우리 아버지는 죽어.
여자2    (작업 중인 곰 인형을 바라보며) 나도…… 결국은 그런 건가?
여자1    (또 하나 완성된 곰 인형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또 붙였다!
      너도 팔다리가 다 있으니까 좋지?
      이제 가슴을 달아 줄게.
      앞으로 사랑이 뭔지 알게 될 거야.
남자    인생은 마술이 아니야.
      한 번에 모든 걸 바꿀 수는 없다고.
여자2    나도 그냥 장난감에 불과한 걸까?
남자    허황된 꿈을 꾸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다.
여자1    또 하나 완성!
      (또 완성한 곰 인형을 쳐다보며) 어때? 다리 생기니까 좋아?
      도망가면 안 돼!
      (옆에 다른 미완성 곰 인형을 집으면)
      이제 네 차례다.
      언니가 예쁘게 어른으로 만들어줄게.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여자2


전체 조명이 붉게 변한다.
바닥에 쓰러지는 여자2
모두 놀라 여자2에게 달려간다.
붉은 조명 아래서
바닥에 엎드린 채 고통을 호소하는 여자2


여자3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여자1    언니! 괜찮아요? 괜찮아?!
여자2    손가락! 내 손가락!
      내 손가락!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자2


여자2    어디 있어?!
      내 손가락 어디 있어?!
남자    잘린 손가락!
      바닥에 잘린 손가락을 찾아!


여자2의 잘린 손가락을 찾기 위해 무대 이곳저곳을 뒤지는 여자1과 여자3
남자는 여자2를 부축한 채 지혈한다.


여자1    언니!
여자3    찾았어?
여자1    여기요!


여자2의 반지를 집어 들어 보이는 여자1


여자3    그건 반지잖아!
      손가락을 찾으라고! 손가락!


반지를 말없이 쳐다보는 여자1
‘댕-댕-’ 하며 시계가 울린다.
조명이 전체적으로 어두워지며
흥겨운 음악이 나오기 시작한다.
마술사가 마술 쇼할 때 나오는 음악 (E)
화려한 핀 조명이 켜진다.


여자1    (관객들을 보며)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환상의 연금 마술쇼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형형색색의 핀 조명이 무대를 비추는 가운데
여자2는 여전히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고


여자3은 손가락을 찾아 헤매고 있다.
관객들 바로 앞까지 다가가는 여자1
남자는 여자2를 들쳐 업으려 시도한다.


여자1    안녕하세요. 공연 보러 오셨나요?
      오늘 쉬시는 날이세요?
      부럽네요. 쉬는 날 이렇게 여유 있게 연극 공연도 보러 오시고.
      저도 쉬고 싶네요. 쉬고 싶어요.
      재미있게 보시다가 가세요.
      (다른 관객을 보며) 안녕하세요. 옆에 애인인가요?
      부럽습니다. 진짜 부럽네요.
      사랑하세요?
      사랑하시는 거죠?
      (사이)
      저도 빨리 사랑이라는 걸 해보고 싶네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다들 참고 기다리면 어른이 된다지만 어디 참을 수가 있어야죠.


남자가 여자2를 들쳐 업고 서둘러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여자3도 따라서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여자1    (손에 든 반지를 높이 들어 보이며)
      자! 여러분 여기 큐빅 반지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무릇 귀중한 것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저는 당장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이 큐빅을 다이아몬드로 바꿔 보겠습니다.


무대 뒤편 싱크대로 가는 여자1
싱크대 덮개를 열고 관객들을 쳐다본다.


여자1    자! 이제 이 반지를 여기에 잠깐 집어넣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놀라지 마십시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이 큐빅은 다이아몬드로
      저 작업대 위에 인형들은 모두 팔다리가 붙어 여러분에게
      달려가 안길 것입니다.
      그러면 연금 마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화려한 조명 아래
긴장감을 돋우는 북 치는 소리가 음향 효과로 나온다. (E)


싱크대 안에 반지를 넣는 여자1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싱크대 안에서 연기가 피어 나온다.
순간 음향과 조명이 모두 꺼진다.


짧은 정적이 흐른다.


시계가 ‘댕-댕-’ 하고 울리고
여자1의 작업대 위만을 핀 조명이 비춘다.
작업대 위 누워 있는 곰 인형의 모습
들뜬 표정으로 반지를 들고 작업대 위 곰 인형에게 다가가는 여자1
반지를 곰 인형에게 끼워 주려고 하는 여자1


여자1    뭐야?
      너는 손가락이 없잖아.
      (사이)
      무슨 짓을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다이아 반지는 못 끼는 거야?


무대 뒤편에서 여자2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조명이 서서히 다시 꺼진다.


여자1    기다려 봐.
      내가 너한테 다시 마법을 걸게.
      기다려 봐.


곰 인형에게 기합을 넣는 여자1
모든 소리와 조명이 사라지고 암전


2막

- 2020년 청계천 쥬얼리 공장 -


밝아지면
작업대 위의 곰 인형들은 다 치워져 있고
대신 큐빅들이 상자에 한가득 들어 있다.
미싱기는 보석 세공기로 다 바뀌어 있다.
무대 뒤편 싱크대 위에는 말통이 여러 개 놓여 있다.
말통에는 각각 뜯어지기 직전의 낡은 라벨지가 붙어 있고
라벨지에는 ‘염산’, ‘청산가리’, ‘취급 주의’ 등의 글씨가 쓰여 있다.


여자1과 여자3이 작업대 위에 누워 있다.


여자1    (누워 있는 상태로) 아무도 안 오네요.
여자3    (역시 누워 있는 상태로) 그러게…… 한 명도 안 오네.
여자1    다들 모르는 거 아닐까요?
여자3    아니야.
      다 알아.
      알기는 다 알아.
여자1    그런데 왜 아무도 안 오죠?
여자3    겁먹어서 그래.
여자1    사장님이 그렇게 무서워요?
여자3    사장이 무섭다기보다는
      삶이 무서운 거지.
      자기들 인생 말이야.
      다들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껏 주체적으로 살아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끌려 다니기 시작하거든.
여자1    저도 그렇게 될까요?
여자3    그렇게 될 거야.
      여기서 일하면 다들 그렇게 돼.
여자1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해요?
여자3    괜찮아?
여자1    배고파요.
여자3    기다려 봐.
여자1    기다리라고요?
      선배님도 사장님하고 똑같이 말하네요.
여자3    나이 탓이지 뭐.
      나도 모르게 기다리는 것을 제일 잘하게 되어버렸어.
      기다리는 것만큼 제일 많이 해보고 익숙한 것도 없네.
여자1    사장님은 그런데 왜 안 기다려 줘요?
여자3    왜? 사장이랑 무슨 일 있었어?


누워 있다가 상체를 일으켜 앉는 여자1


여자1    (천장 위 시계를 가리키며) 제가 분명히 저 시계를 보고 퇴근할 때
      카드를 찍었거든요.
      그런데 왜 마음대로 조퇴했냐고 엄청 뭐라고 하는 거 있죠!
      난 분명히 저 시계 보고 7시 딱 돼서 카드 찍었다고요.
      그런데 왜 사람 말을 안 믿는 건지…….
여자3    (역시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여자1    비밀이요?
      뭔데요?
여자3    저 시계 2분 빨라.
여자1    네?!
여자3    넌 7시에 카드를 찍은 게 아니라 6시 58분에 카드를
      찍은 거야.
      그러니까 당연히 무단 조퇴한 거지.
여자1    그럼 시계를 고쳐서 시간을 바로잡아야죠!
여자3    그러니까!
      그것도 우리보고 하라는 거지!
      우리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데 말이야.
      나도 그렇고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시계를 만질 수 없거든.
      (사이)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 알겠지?
여자1    (다시 한 번 기침을 하며) 목이 간질간질해요.
여자3    환기가 안 돼서 그래.
      환풍기도 빨리 달아 달라고 해야지.
여자1    진짜 그동안 환풍기가 한 번도 없었던 거예요?
여자3    응.
여자1    한 대도요?
여자3    응.
여자1    몇 십 년 동안요?
여자3    응.
여자1    도대체 왜요?
여자3    모르지.
      (한숨을 쉬고는) 세상에는 말이야.
      시간이 지난다고 다 해결되거나 나아지지 않는 것도 있어.
      그래서   우리는 혁명을 해야 돼.
      침팬지는 가만히 있으면 진화를 해서 사람이 되지만
      우리 인간은 퇴보할 뿐이거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그냥 썩어서 묻히는 것뿐이야.
여자1    입에서 자꾸 뭐가 나오는 것 같아요.
여자3    피가 나오거나 그런 적은 없지?
여자1    네?!
      피를 토하기도 해요?
여자3    만약 각혈하면 꼭 얘기해. 알았지?
여자1    네…….


작업대 위 보석 세공기를 만지작거리는 여자1


여자1    배고파요.
여자3    잠깐만.
      더 기다려 보고.
      한 명쯤은 가입하러 올 것도 같은데.


작업대에서 내려와 서는 여자1
다시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


여자3    (작업대에서 내려와 여자1 앞에 서며) 괜찮아?
여자1    선배님.
여자3    왜?
여자1    제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
여자3    마술?
      좋아!
      어떤 건데?
여자1    (두 손을 펴 보이며) 자, 보세요.
      여기 두 손에 다 아무것도 없죠.
여자3    (고개를 끄덕인다.)
여자1    아무것도 없습니다.


억지로 기침을 하는 여자1
입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반지다.


여자1    (반지를 보이며) 짜잔! 어때요?
      신기하죠?
여자3    뭐야?!
      너!
      여기 있는 큐빅 삼킨 거야?
여자1    아니에요.
      눈속임이에요.
      미리 하나 숨겨 놓고 재빨리 입으로 뱉어내는 척하는 거예요.
여자3    깜짝 놀랐잖아!
      (사이)
      마술을 해?
      재주도 많다!
      보석을 토해 내네!
      (반지를 보며) 그런데 이거 뭐야?
      우리가 만드는 반지는 아닌 것 같은데…….
여자3    제가 만드는 거예요.
여자1    니가?
      따로?
      개인 작업이야?
여자3    네.
      취미 겸 작품으로 만드는 거예요.
      아! 그래서 그런데
      어차피 파업 중이라 아무도 쓰지도 않는데
      (보석 세공기를 만지작거리며) 여기 기계 좀 써도 될까요?
여자3    세공하려고?
      이 반지?
      그래 뭐…… 상관없지.
      (사이)
      남자친구?
여자1    아니에요.
      그냥 저 혼자 만드는 거라니까요.
여자3    다시 보여줘 봐.


더 가까이 다가가 여자1의 반지를 보는 여자3


여자3    혼자 공예품 만드는 거 좋아하는구나.
      보기보다 부지런하네.
      쉬는 날도 없이 맨날 야근하면서 이런 건 또 언제 만들었대?
      나는 집에 가면 그냥 쓰러져 자기 바쁜데.
여자1    선배님도 지금 이 노조 활동 하시잖아요.
여자3    이건 먹고사는 문제니까.
      너처럼 개인적인 취미로 하는 게 아니잖아.
      (사이)
      부럽다! 나도 취미 생활 하고 싶다!
      내 소원이 뭔지 알아?
여자1    사람들이 노조 가입을 많이 하는 거요?
여자3    아니야.
여자1    그럼 뭔데요?
여자3    듣고 비웃으면 안 돼!
여자1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왜 비웃어요?
여자3    내 소원은 사실 뭐냐면……
      비웃으면 안 돼. 진짜!
여자1    안 비웃어요.
여자3    그냥 한 시간만이라도 좋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커피숍에서 여유롭게 커피 마시는 거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사이)
      공감이 돼?
여자1    (고개를 끄덕이며) 저는 나중에 작은 공방을 하나 차리고 싶어요.
      제가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면서
      가끔 전시회도 열고…….
      그게 제 꿈이에요.
여자3    꿈이라…….
      너무 허황된 것만 아니면 되지 뭐…….
      나중에 공방 열면 나 초대해 줘. 놀러 갈게.
      그래서 세공하려고?
여자1    다른 것도 하려고요.
여자3    다른 거? 어떤 거?
      무슨 작업하려고?
여자1    (무대 뒤편 싱크대를 가리키며) 저거요.
여자3    주물?
      세척?
      (사이)
      괜찮겠어?
여자1    (다시 기침을 하며) 괜찮아요.
여자3    배고프다면서 아까부터 계속 뭘 뱉어내잖아.
여자1    배고프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아요.
      제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으니까요.
여자3    마술은 끝난 거지?
여자1    마술하는 거 아니에요.
여자3    세척하는 걸 꼭 지금 해야겠어?
      염산 만져야 하는데.
여자1    괜찮아요.
여자3    그럼 옷이라도 갈아입고 해.
      사장이 염산 만질 때 입으라고 긴 소매 옷 줬잖아.
여자1    안 주셨는데요…….
여자3    옷 안 줬어?
      긴 소매 옷!
여자1    안 받았어요.
여자3    옷 안 줬단 말이야?!
      염산 작업하면 화상 입으니까 긴 소매 옷 준비해서 달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여자1    (고개를 가로젓는다.)
여자3    나쁜 새끼!
      올해 새로 들어오는 신입부터 준다고 말해 놓고…….
      교섭하러 만났을 때 할 이야기가 하나 더 추가됐어!
여자1    그냥 할게요.
여자3    마술하는 시간은 끝났어.
      지금은 진짜야.
      진짜로 입에서 뭐가 나오면 어떡하려고 그래?
여자1    억지로 시켜서 만드는 게 아니라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사이)
      이 반지는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사실 회사 기계를 좀 썼으면 했거든요.
      지금 이때 아니면 언제 회사 기계로 제 개인 작품을 만들겠어요?
여자3    (말없이 한참 쳐다보다가) 지금 이때 아니면 건강 못 챙긴다.
여자1    안 아파요.
여자3    병원 가봤어?
여자1    병원이요?
      아픈 데가 없는데 굳이 뭘…….
여자3    (한숨을 쉬고는) 이번 달 생리했어?
여자1    …….
여자3    지난달은?
여자1    …….
여자3    얼마나 됐어?
여자1    석 달이요.
여자3    그런데 여태 병원을 안 갔어?
여자1    계속 야근했잖아요.
여자3    (반지를 가리키며) 그거 할 시간은 있고?
여자1    이건……
      저 이것 때문에 그나마 버티고 있는 거예요.
여자3    버틴다고?
      (사이)
      그동안 많이 힘들었어?      
여자1    그냥…….
      학교에서 배운 거랑 너무 다르니까요.
      근무시간도 그렇고 작업환경도 그렇고…….
여자3    (다시 한숨을 쉬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파업을 하고 노조 활동을 하는 거지.
여자1    돈도 너무 적고요.
      사실 파업 때문에 이번 달 월세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에요.
여자3    (고개를 끄덕이며) 넌 지금 이 파업하는 게 마음에 좀 안 들겠다?
여자1    아, 아니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에요.
여자3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돼서 괜히 미안하네.
      니 월급만큼은 어떻게든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여자1    감사합니다.
여자3    나야말로 고맙지.
      혼자 있으면 무서운데 옆에 이렇게 있어 주니까.
      사장이란 놈이 양아치여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갑자기 기침을 하면서)
      사내놈들은 하나같이 다 의리 없고
      우리같이 안 달려 있는 년들끼리 하나로 뭉쳐야지.
      (기침을 계속하며)
      애초에 우린 가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으니까. 그렇지?


말 끝나기가 무섭게 기침을 세게 하는 여자3


여자1    괜찮으세요?
여자3    (손사래를 치며) 괜찮아.
여자1    선배님은 병원 가보셨어요?
여자3    아니.
      실은 나도 병원 안 가.
여자1    선배님도 건강 챙기셔야죠.
여자3    전에는 매 달 갔어.
      그런데 이제는 안 가.
여자1    왜요?
여자3    (빙그레 웃으며) 안 가도 되니까.
      (사이)
      가서 하려던 거나 해.


싱크대로 다가가는 여자1
말통을 이것저것 만져 본다.


여자3    염산이랑 청산가리 잘 다룰 수 있지?
여자1    네.
여자3    세공학과 나왔다고?
여자1    네.
여자3    학교 어디?
      폴리텍?
여자1    네.
여자3    그런데 이거 쥬얼리 왜 배운 거야?
여자1    이쁘잖아요.
      쥬얼리!
여자3    이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쁘지.
      하지만 일은 전혀 안 이쁠 텐데.
      일에 만족감을 느껴?
여자1    (싱크대 안에 반지를 넣는다.) …….
여자3    학교에서 배운 거랑 다르지?
여자1    네.
여자3    거기 교수라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이렇다고 아무도 말 안 해주지?
여자1    네에…….
여자3    도망가면 안 돼.
여자1    …….
여자3    어? 대답 안 하네.
      도망가면 안 돼!
      (사이)
      조금만 참아.
      노조가 생겼으니까 이제 회사 마음대로 하지 못할 거야.
      야근수당도 받고 퇴직금도 받고
      노동절에 당당히 눈치 안 보고 쉴 수도 있고.
      (사이)
      너는 노조 가입 안 할 거야?
여자1    네…….
여자3    왜?
      노조 가입해야지.
여자1    아직 잘 모르겠어요.
여자3    지금 우리한테 제일 중요한 건 연대야. 연대.
여자1    연대요?
여자3    왜?
여자1    저한테는 아직 낯선 단어라서요.
여자3    낯설다…….
      지금 나한테 낯선 단어는 ‘휴식’과 ‘꿈’이야.
여자1    선배님은 원래 꿈이 뭐였는데요?
여자3    꿈?
여자1    선배님이 하고 싶으셨던 거요.
여자3    기억이 안 나는데.
      (사이)
      내가 뭘 하고 싶어 했더라…….
      뭐 재미난 생각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여자1    선배님도 제 나이 때 쥬얼리 일 시작하신 거예요?
여자3    나는 봉제 일부터 했었어.
여자1    봉제 일이요?
여자3    전태일 열사 알아?
여자1    유명한 사람인가요?
여자3    몰라?
      학교에서 안 배우니?
      따지면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이때, 무대 위로 여자2가 들어온다.
한 손에 붕대를 한 채로 무표정하게 터벅터벅 자기 작업대 앞으로 걸어간다.


여자3    세상에!
      이게 누구야!


여자2에게 다가가는 여자3


여자3    잘 지냈어?
      이게 얼마만이야?
여자2    (물끄러미 여자3을 보더니) 안녕. 오랜만이야.
여자3    (반기며) 잘 지낸 거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여자2    그냥…… 잘 있었어.
여자3    잘 왔어. 반가워.
      진짜 반가워.
여자2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마워.
여자3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야?
여자2    무슨 일은?
      일하러 왔지.
여자3    일?
      우리 지금 파업 중이야.
여자2    …….


상자 안의 큐빅을 하나 꺼내 보석 세공기 위에 올리고는
작업을 시작하는 여자2


여자3    괜찮아?
여자2    응?
      뭐가?
여자3    괜찮냐고?
여자2    (귀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그러니까 뭐가?
여자3    (붕대 감은 손을 가리키며) 괜찮은 거야?
여자2    괜찮아.
여자3    별일 없고?
여자2    (고개를 끄덕이며) …….
여자3    좀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여자2    나 일해야 돼.
      미안한데 나 일 좀 하게 방해하지 말아 줄래?
여자3    우리 파업 중이라니까.
여자2    내가 사장한테 들은 거하고는 다른데.
여자3    뭐?!
      (다시 기침을 심하게 하고는)
      사장이 뭐라고 했는데?
여자2    너야말로 괜찮니?
      남 걱정하기 전에 네 걱정부터 해야겠다.


이때, 헛기침을 하며 무대 위로 들어오는 남자
1막에서와는 달리 말끔하게 차린 양복 차림이다.
남자가 등장하자 바로 90도로 인사하는 여자1
여자3은 짝다리를 하고 팔짱을 낀 채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    (헛기침을 하고 나서) 뭐 잘 돼?
여자3    네. 잘 돼요.
남자    사람들 많이 왔어?
여자3    네.
      반응이 폭발적이네요.
남자    그래?
      (사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여자3    우리 요구 언제 들어줄 거예요?
남자    밥값?
      5,500원에서 1,500원 올려 달라고 하는 거?
여자3    사람이 사는 데 가장 기본적인 거예요.
      먹는 거.
      (여자1을 가리키며) 쟤도 아까부터 배고프대요.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 다시 목례를 하는 여자1


남자    그동안 5,500원으로도 문제없었잖아?
여자3    밖에 나가 봐요!
      5,500원으로 사 먹을 게 있나!
남자    그럼 도시락 싸서 여기서 먹어!
      외식하면 당연히 비싸지.
여자3    더 이상 여기서 점심 먹고 싶지 않아요.
      여기는 우리가 보석 세공하고 세척하며 일하는 곳이에요.
      먼지 날리고 냄새나고
      (싱크대 쪽을 가리키며) 저렇게 염산이랑 청산가리가 널려 있는데
      이런 곳에서 밥을 먹으라고요?
남자    그동안은 잘 먹었잖아.
여자3    더 이상은 안 돼요.
남자    왜?
여자3    그건
      (기침을 심하게 하고는) 그건 말이죠.


물끄러미 여자3을 쳐다보는 여자2
말없이 서로 쳐다보는 여자2와 여자3
싱크대에 청산가리를 부으려 하는 여자1


여자3    여기서 밥을 먹으면 청산가리를 먹는 것 같아.
      살려고 먹는데 먹을수록 죽어가는 것 같다고.
남자    그래서 갑자기 노조 만든다고 하고 파업하면서
      한꺼번에 바꾸겠다는 거야?
      인생은 마술이 아니야.


이때, 싱크대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난다.


남자    (싱크대에 서 있는 여자1을 보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여자1    (남자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며) 죄, 죄송합니다.
여자3    (여자2 쪽을 가리키며) 쟤는 지금 저기서 뭐 하는 건데?


여자1에게 다가가는 남자


남자    일하는 거야?
      파업 중이라며?
      다시 복귀하는 거야?
여자3    마술 하고 있어.
남자    마술?
여자1    보, 보여 드릴까요?
      (두 손을 펴 보이며) 자, 보세요.
      여기 두 손에 다 아무것도 없죠.


뒤로 살짝 물러나 팔짱을 낀 채 쳐다보는 남자


여자1    아무것도 없습니다.


억지로 기침을 하는 여자1
입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반지다.


여자1    (반지를 보이며) 짜잔! 어때요?
      신기하죠?
남자    뭐야?!
      여기 있는 큐빅을 삼킨 거야?
      이건 장난감이 아니야!
여자1    아, 아니에요.
      제 반지예요.
남자    니 반지?
      (사이)
      뭐야?!
      회사에서 지금 개인 작업을 하고 있는 거야?
여자3    내가 해도 된다고 했어!
여자1    연습도 할 겸 해봤어요.
      (싱크대를 만지며) 여기 오니까 다들 이걸 못 만지게 해서요.
남자    쓸데없는 잔재주가 있네.
      뭐 그래도 선배들보다는 낫네.
      입에서 보석도 토해 낼 줄 알고.
      (사이)
      오늘만 특별히 봐주는 거야!
      (싱크대를 가리키며) 한 번만 더 여기 오면 바로 다른 곳 알아봐!
      여자는 여기 앞에 서면 안 돼.
여자1    네?!
      왜요?
남자    여자가 할 일이 아니거든.
여자1    저 잘해요.
      학교에서도 많이 다뤄 봤어요.
남자    여기는 학교가 아니야.
      직장이라고. 직장.
      이제 막 어른이 되어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너는 지금 현실 세계에 살고 있어.
      마술 같은 가짜가 아니라고.
여자3    더 끔찍하지.
여자1    사장님! 저도 세척 작업 할 줄 알아요!
      염산이나 청산가리도 잘 다룬다고요!
남자    안 돼.
여자1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로요?
여자3    다른 이유가 있지.
여자1    네?
      어떤 이유요?
여자3    돈!
      세척 작업을 하면 돈을 더 받거든.
      지금 파업 중이니까 우리가 이렇게 있지만
      원래는 여자는 여기 못 들어와.
      여자한테 월급을 많이 주면 안 되거든.
      지독한 악독 성차별주의 사장 같으니!
남자    말조심해!
      나도 딸 키우는 아빠야.
여자3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여자2 쪽을 가리키며) 대체 지금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남자    파업은 끝났어.
여자3    뭐?!
남자    파업은 이제 끝이야.
      그 말 하러 왔어.
여자3    점심 식대는?
남자    좋아. 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여자3    뭔데?
남자    노조 만든 거 없애.
여자3    안 돼.
남자    그럼 점심 식대 따위는 없어.
      그리고 내 회사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어.
여자3    지금 협박하는 거야?
남자    협상하는 거야.      
여자3    나는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뿐이야.
남자    그래?
      나한테는 무리한 요구처럼 들리는데.
여자3    변했어.
남자    뭐가?
여자3    예전에는 너 이러지 않았는데.
남자    위치가 바뀌었잖아.
      우리가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는 같은 동등한 직원이었지만
      지금은 서로 다르잖아.
      나는 어느덧 어엿한 사장님이 됐지만
      누나는 아직 노동자잖아.
      그것도 내 밑에서 일하는. 내가 주는 돈으로 먹고사는.
여자3    니가 회사 차렸다고 도와달라고 해서 다니던 곳 그만두고
      옮긴 거야.
      (사이)
      너 맨 처음 일 배울 때 누구 덕에 공장에 들어왔는데!
      내가 도와줬잖아!
남자    확실한 건 지금은
      누나가 내 밑이라는 거지.
여자3    (순간 웃으며) 뭐? 밑?!
      너 참 진짜 많이 변했다.
남자    당연하지.
      사람은 변해야 해.
      지금이 무슨 70년대인 줄 알아?
      누나가 무슨 전태일 열사냐고?
여자3    시대가 변해도 사람 사이의 도리는 변하면 안 되지.
      아니, 오히려 더 진보해야 하는 거 아니니?
      나를 자르려면 잘라!
      노동자를 70년대처럼 대하는데
      나도 똑같이 70년대식으로 응답해 줘야지!
      나를 자른다고?
      노조를 왜 만드는데!
      너 같은 놈들이 쉽게 노동자를 못 자르게 하려고
      노조를 만드는 거야!
      좋아! 한번 싸워 보자!
남자    (여자1을 보고) 친구는 어떡할 거야?
여자1    네?!
남자    너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회사에 왔으면 일을 배워야 하는데
      나쁜 것부터 먼저 배우게 됐네.
여자2    (들고 있던 큐빅을 높이 들어 보이며)
      지금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계신가요?
      아니면 앞으로 아름다워지고 싶으신가요?
      빛나는 인생! 아름다운 사람이 되세요!
      아름다움은 당신의 것!
      당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사이)
      다이아몬드!
여자3    (약간 놀라며) 쟤 대체 뭐 하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다시 보석 세공기를 돌리며 작업을 하는 여자2


여자3    (여자2를 가리키며) 더 쉬어야 해.
남자    내가 말했잖아.
      파업은 끝났다고.
여자3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우리는 계속 투쟁할 거야.
남자    알아.
      (여자2를 힐끗 쳐다보고) 그래서 오라고 한 거야.
      누나랑 노조 한다는 사람들 다 잘라버리게.
여자3    그렇다고 아직 아픈 사람을…….
남자    나한테 오히려 고마워할걸?
      (여자2를 가리키며) 돈이 필요하대.
      (사이)
      소식 들었어?
여자3    소식?
      무슨 소식?
남자    이혼했대.
여자3    뭐?!
      언제?
남자    얼마 안 됐대.
여자3    왜?
남자    모르지.
      아마 유산한 것 때문일걸?!
      (사이)
      뭐 예상했던 일이긴 해.
      프로포즈할 때 남자가 가짜 반지를 선물했거든.
      다이아 반지라고 하고는 큐빅을 준 거 있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이었던 거지.
      맨 처음부터.
여자3    너나 약속 제대로 지켜!
      유산한 거면 니가 책임져야 하잖아!
      왜 유산했겠어?
남자    나 때문이라는 거야?
      (사이)
      그래서 책임지잖아.
      다시 불러서 일 시키고 월급 주려는 거야.


여자3을 보고 코웃음을 치고는 여자1 앞으로 다가가는 남자


남자    (여자1에게 손짓을 하며) 보여줘 봐!
여자1    네?
남자    니가 만들고 있는 거.


쭈뼛거리며 남자에게 반지를 건네는 여자1


남자    (반지를 받아 유심히 보며) 잘 만들었네.
      확실히 재주는 있네.
여자1    감사합니다.   
남자    (반지를 다시 여자1에게 돌려주며) 하지만……
      이건 애들 장난밖에 안 돼.
여자3    그냥 한 귀로 흘려.
남자    너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걸 팔 수가 있을까?
      아무리 정교하게 잘 만들어도 팔아서 돈을 벌 수 없다면
      최소한 여기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야.
      (여자3을 가리키며) 저 선배가 원래는 봉제공장에서 일한 거
      들었어?
여자1    네.
남자    나도 똑같아.
      나도 예전에는 봉제 공장에서 일했지.
      하루 종일 재봉틀을 돌리며 먼지를 먹어 가면서
      밤에는 작업대 위에 이불을 깔고 잤어.
여자2    (일하다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인형…… 곰 인형.
남자    하지만 이 쥬얼리 공장으로 옮겼지.
      왜 그런 줄 알아?
      재봉틀 돌리는 건 더 이상 돈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거든.
      그래서 지금 나는 어떻게 됐어?
      이렇게 사장님이 됐잖아!
여자3    말하고 싶은 게 도대체 뭐야?
남자    어른이 되라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
      (여자1이 들고 있는 반지를 보며)
      물건을 잘 만드는 것에서 잘 파는 것으로 사고를 바꿔야 해.
여자3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해!
여자2    우리 애한테 줄 곰 인형.


시계가 ‘댕-댕-’ 울린다.
전체 조명이 살짝 어두워지고
여자2 작업대 위 핀 조명이 점점 밝아진다.


여자3    우리는 여기 제품이 팔릴 수 있게 일하는 사람들이야.
      그러니 우리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어.
남자    월급 주잖아.
여자3    그건 당연한 거야!
      우리가 출근하면 당연히 일하듯이.
남자    또 점심 식대 이야기하는 거야?
      그것도 지금 주고 있잖아.
여자3    그 가격으론 아무것도 못 사먹어.
남자    도시락을 싸와!
여자3    난 더 이상 청산가리를 반찬으로 안 먹을 거야.
남자    예전에는 다 그렇게 했어!
여자3    니 입으로 말했어.
      사람은 변해야 한다고.
      사람이 변하듯
      여기 작업장도 바뀌어야 할 거 아냐!
남자    여태 아무도 불만을 가진 사람 없었어!
여자3    전태일 열사 잊었어?
      바로 여기 이 종로 바닥이었어!
여자2    (붕대를 한 자신의 손을 보며) 반지…… 반지…….
남자    노조를 그만둬!
여자3    그럴 수 없어!
남자    노조를 계속하면 누나는 해고야!
여자3    너도 노동자였어!
남자    난 살아남아 성공한 것뿐이야!
      본인의 나태함을 핑계 대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자3    나태?!
여자2    여보…… 여보…….
여자3    (천장 위 시계를 가리키며) 저 시계를 보면 뭐가 떠오르는지 알아?
남자    금.
      시간은 나를 인내시키고 단련시키고 값비싸게 해줬어.
여자3    그건 니가 저 시계를 만지는 사람이니까!
      저 시계는 나한테 무덤에 불과해.
      매일 매일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
남자    이제는 고장 난 시계 탓을 하는 거야?
      시계 하나도 알아서 못 고치면서!
여자3    시계를 내가 어떻게 고쳐!
      저 망할 시계를 우리가 어떻게 손을 대냐고!
      우리는 한 번도! 한 번도!
      시간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어!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써본 적이 없다고!
남자    좋아! 시계를 고쳐 줄게!
      그럼 됐어? 만족해?
      지각도 안 하고 조퇴도 안 하고 잘할 수 있겠냐고?!
여자3    상관없어.
      솔직히 이제는 저 시계가 어디를 가리켜도 나한테는 아무 의미 없어.
      앞으로도 난 쫓기고 있을 테니까.
      시간에 쫓겨 일을 해도 일은 끝나지 않아.
      시계가 7시를 가리켜도 나는 퇴근할 수 없어.
      다 끝날 때까지 새벽이 되어도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여기서 나갈 수도 없지.
      (사이)
      저 시계는 볼 때마다 또 무서워.
      항상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거든.
      보석 훔쳐갈까 봐.
      1분이라도 지각할까 봐.
      1분이라도 빨리 퇴근할까 봐.
      (사이)
      그 기분을 알아?
      모르겠지.
      아마 다 잊었을 거야.
      분명 기억하지 못할 거야.
      어른이 되었다면서 어렸을 때 어땠는지는 다 잊어버렸을 테니.
      불쌍한 놈.
      넌 올챙이 시절을 기억 못 하는 개구리에 불과해.
여자2    반지……
      내 반지 어디 있지?
      인형은?
      우리 애 줄 곰 인형은 어디 있어?
남자    그래서……
      노조를 계속하겠다는 거야?
여자3    계속할 거야.
남자    그럼 난 누나를 해고할 수밖에 없어.
여자3    하려면 해!
      여기 이 공장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난 계속 투쟁할 거니까.
남자    (손가락으로 여자3을 가리키며) 해고야! 나가!
여자3    봉제 공장에서…… 기억 안 나?
      마산에서 올라온 동료가 손가락 잘렸던 거.
      그때 네가 잘린 손가락을 찾고 그 동료를 들쳐 업고
      병원에 데려갔었어.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어?
남자    난 손가락을 잘리지 않았거든.
      그리고 난 손가락을 희생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어!
      사실 이제 더 이상 누나 같은 사람들의 손가락은 필요 없어.
      일은 기계가 하면 되고
      그 외에 손가락이 할 일은 나만 하면 돼.
      (사이)
      낮에는 너희들에게 지적을 하고 욕을 하고,
      밤에는 다이아몬드를 낀 채 눈부시게 빛나는 그리고
      용케 지금껏 살아남은 나의 인생을 찬양하지.
      그리고 지금의 성공을 놓치지 않게 계속 꼬옥 움켜쥐고 있을 거야.
      그래서 너희들은 나를 이길 수 없어.
      나는 꽉 쥔 이 손을 절대 펼 생각이 없거든.
      나를 이기려면 내 다섯 손가락을 다 잘라야 할 거야.


댕-댕’ 하고 시계가 울린다.
여자2 작업대 위 핀 조명이 꺼진다.
기침을 심하게 하는 여자3
시계가 한 번 더 울리고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는 여자3


여자1    선배님!


기침을 하면서 입에서 보석들을 토해 내는 여자3
보석들이 입에서 막 떨어져 나온다.
다급하게 여자3에게 달려가
여자3의 등을 두드려 주는 남자
다시 심하게 기침을 하는 여자3
입에서 또다시 보석들이 나온다.
바닥에 떨어져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들
단말마를 토하는 여자3
조명이 붉게 변한다.
바닥에 그대로 쓰러지는 여자3


여자1    선배님! 괜찮으세요?
남자    비켜 봐!


바닥에 떨어진 보석들을 줍는 남자


남자    (보석을 줍고 들여다본 후) 뭐야?
      큐빅이잖아.


쓰러진 여자3을 발로 차는 남자1
미동이 없는 여자3


남자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네.


그대로 그냥 무대에서 퇴장하는 남자
발을 동동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1
다시 한 번 시계가 울린다.
조명이 푸른색으로 바뀐다.


여자1    (여자3을 흔들며) 선배님! 선배님!
여자2    (여자2 작업대 위 핀 조명이 켜지며) 걱정하지 마.
여자1    네?
여자2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 죽어.
여자1    그래요?
      다, 다행이네요.
여자2    다행은 무슨…….
      너도 곧 저렇게 될 거야.
여자1    네?
여자2    갑자기 기침 나고 머리가 어지럽지 않아?
여자1    가, 가끔요.
여자2    축하해!
      너도 이제 진정한 종로 쥬얼리 노동자가 된 거야.
여자1    (다시 여자3을 흔들며) 선배님!
      정신 차리세요! 괜찮으세요?
여자2    곰 인형이 없어.
여자1    (다시 여자2를 보며) 네?!
여자2    다 없어졌어.
여자1    괜찮으세요?
여자2    (붕대를 쳐다보며) 반지도 없어.
여자1    (자신의 반지를 보이며) 이런 반지요?
여자2    반지를 가지고 있네…….
      (여자1을 한참 쳐다보고는) 니 꺼니?
여자1    네.
      제가 만들고 있는 반지예요.
여자2    넌 누구야?
여자1    새로 온 막내예요. 온 지 백일도 안 됐어요.
여자2    막내?
      백일?
      입원해 있을 때 들어왔구나.
여자1    다른 선배님들한테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이제는 괜찮으세요?
      다 나으신 거예요?
여자2    그 괜찮냐는 말 정말 지겹다.
      괜찮아?
      괜찮아요?
      괜찮니?
      (사이)
      이제 더 이상 그 말 하지 마.
      나 괜찮으니까.
여자1    사장님이 나오라고 해서 나오신 거예요?
여자2    일을 해야지.
      일 안 하고 뭐 하니?
      어서 일 시작해.
여자1    지금 파업 중이라서요.
여자2    파업?
      파업 끝났어.
      빨리 일해.
      쓰러진 쟤는 죽은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해.


여자1 작업대 위 핀 조명이 켜진다.
작업대로 향하는 여자1


푸른 전체 조명은 꺼진다.
보석 세공기를 작동시키는 여자1
보석 세공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린다.


여자2    어때?
      일은 할 만해?
여자1    (작업대 뒤에 서서) 사실 잘 모르겠어요.
      파업을 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몰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어쨌든 전 돈이 당장 필요하거든요.
      파업을 하면 돈을 못 버니까 그건 걱정이에요.
      그런데 사실 여기 와서 너무 놀랐거든요.   
      출근은 칼같이 1분만 늦어도 월급 깎는다고 하면서
      퇴근시간은 지켜주지도 않지.
      야근을 해도 야근수당도 안 주지.
      밥은 화약 약품들 옆에서 먹어야 하고
      월차 같은 것도 없고…….
여자2    그래도 주변에서 부러워하지 않아?
      매일 다이아몬드나 금 같은 걸 만진다고.
여자1    이제는 보석을 만져도 아무 감흥이 없어요.
      다이아몬드를 봐도 그냥 똥 같아요.
여자2    똥?!
      (키득거리며) 똥 웃기다.
여자1    몸도 좀 아픈 것 같고…….
      노조가 필요하기는 한데…….
      겁나요. 솔직히.
      어쨌든 전 돈을 벌어야 하니까요.
      (사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여자2    (계속 키득거린다.)
여자1    선배님.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여자2    뭐?
여자1    행복하세요?
여자2    행복?
      (사이)
      행복이 뭔데?
여자1    그냥…….
      다들 쉽게 이야기하는 거 있잖아요.
여자2    우리가 남들 평범하게 다 말하고 사는 대로 사나?
여자1    복잡하게 말고요.
      그냥 쉽게요.
여자2    몰라.


‘댕-댕-’ 하고 시계가 울린다.


여자2    (유심히 시계를 보더니) 이상한데…….
여자1    (자신이 만든 반지를 한 번 보고 미소를 짓고는)
      선배님.
      결혼하신 적 있으시죠?
여자2    왜?
여자1    결혼하면 어때요?
      행복해요?
여자2    행복?
      (사이)
      응.
      행복해.
여자1    어떻게요?
여자2    (다시 시계를 보며) 뭔가 이상한데…….
여자1    선배님!
여자2    응?
      아!
      (사이)
      개새끼가 된 기분이야.
여자1    개새끼요?
여자2    따뜻한 집에 비바람 안 맞고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사는
      강아지 있잖아.
      그런 행복한 개새끼.
      아무 걱정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맨날 잠이나 자는…….
여자1    아…… 네…….
여자2    가짜야.
여자1    네?!
여자2    가짜라고.
      다 가짜야.
여자1    뭐가요?
여자2    이제부터 니가 겪게 될 모든 거.
      일하는 것부터 연애 그리고 결혼까지.
      알고 보면 다 가짜야.
      (사이)
      넌 꿈이 있니?
여자1    네…….
      (반지를 보이며) 전 공방을 차려서 제 개인 작품전을 열 거예요.
여자2    (유심히 반지를 보더니) 그건 뭐니?
여자1    뭐가요?
여자2    큐빅이니 다이아몬드니?
여자1    큐빅이요.
여자2    니가 만든 걸 사람들한테 보여줄 거니?
여자1    (고개를 끄덕이며) 네…….
여자2    그러면 큐빅이라고 말할 거야?
여자1    글쎄요…….
여자2    말하지 마.
      굳이 말할 필요 없어.
      사람들도 너한테 큐빅을 큐빅이라고 말해 주지 않을 거거든.
여자1    전 저만 만족하면 돼요.
여자2    넌 니가 만든 이 반지 마음에 드니?
여자1    그럼요.
여자2    그럼 나한테 줄래?
여자1    네?!
      아직 덜 만들었는데요?
여자2    (붕대 감은 손을 보이며) 내가 지금 반지가 필요해서 그래.
      우리 애한테 뭐라도 하나 줘야 되거든.
      그런데 아무것도 없네.
      아무것도 없어.
여자1    글쎄요…….
      아직 다 완성도 안 된 반지인데…….
여자2    부탁이야.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나한테 줘.
여자1    저도 어느새 정이 들어서요.
여자2    그럼 잠깐 빌려줘.
      바로 돌려줄게.
여자1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여자2    부탁이야!
      제발 그 말 좀 하지 말아 줘!


여자2에게 반지를 건네는 여자1


여자2    고마워.


이때, 무대 입구 위 핀 조명이 켜진다.
기침을 하며 몸을 움직이는 여자3


여자1    (여자3에게 달려가며) 선배님!


여자3을 부축해 일으키는 여자1


여자3    여기가…… 여기가 어디야?
여자1    공장이에요.
여자3    몇 시야?
여자1    (시계를 보려 하며) 지금이.
여자3    됐어!
      고장 난 시계!
      (기침을 다시 크게 하고는) 사장은?
여자1    가셨어요.
여자3    개새끼!
      개새끼!
      사장 어딨어?
      사장한테 가자!
여자1    안 돼요! 쉬셔야 해요!
여자3    안 돼. 쉬면 안 돼.
여자1    그러다 진짜 쓰러져 죽어요.
여자3    죽는다고?
      상관없어.
      내일 살려면 오늘 죽는다고 해도 좋아!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여자3
여자3을 부축하며 따라 퇴장하는 여자1
무대 입구 위 핀 조명이 꺼지고
이어서 여자1 작업대 위 핀 조명이 꺼진다.
홀로 무대를 비추는 여자2 작업대 위 핀 조명은 푸른색으로 바뀐다.


여자2    (반지를 보며)
      넌 다이아몬드가 아니야.
      그냥 큐빅이지.
      넌 아직 다 만들어지지도 않았어.
      아직 어른이 아닌 거지.
      (사이)
      바뀔 수 있을까?
      항상 궁금했어.
      그냥 가만히 있으면
      참고 인내하면 모든 게 완벽해지고 내가 꿈꾸던 대로 되는지.
      (붕대 감은 손을 보며)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손가락이 안 생겨.
      아무리 기다려도
      다이아몬드가 안 생겨.
      (다시 반지를 보며)
      확실한 게 뭔지 알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거.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금 내 주변엔 온통 거짓밖에
      없다는 거.
      너는 고작 큐빅에 불과하고 나는 손가락이 없지.
      나는 앞으로도 손가락이 없을 거고 너도 절대 다이아몬드가
      될 수 없을 거야.
      슬프지만 이미 다 끝난 거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천장 위 시계에 조명이 들어오고
‘댕-댕-’ 하고 시계가 울린다.


시계를 올려다보는 여자2


여자2    아무래도 시간이 잘못된 것 같은데……
      대체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언제로 돌아가야 바꿀 수 있을까?
      어느 때로 가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사이)
      한 가지는 확실해.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이대로 흘러가면
      그냥 사라진다는 거.
      없어지는 거야.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채.



이어서 무대 뒤편 싱크대 위 핀 조명이 켜진다.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는 여자2


여자2    아까 누가 마술을 했던 것 같은데…….
      나도 잠깐 해보고 싶은데.
      (말통을 두 손으로 들며)
      하면 바뀔까?
      바뀔까?
      바뀌었으면 좋겠다.   


머리 위에 말통을 붓는 여자2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조명이 꺼진다.

싱크대 위 핀 조명이 다시 들어오고
마치 마술처럼 여자2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채
싱크대에서 연기가 나온다.
조명이 다시 꺼진다.

음악이 나오고

전체 조명이 살짝 켜지고
작업대 위로 반짝반짝 무언가가 빛난다.

작업대 위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큐빅들이 조명에 반짝반짝 빛난다!
보석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아우라 같기도 한 것들이
무대 위를 반짝반짝 빛나게 한다.

음악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조명도 다시 서서히 꺼진다.

암전

END
















이민우

참여자 / 이민우

희곡작가. 극단 광야의 태양 전속 작가. 2017년 문예 계간지 《인간과문학》 희곡 등단. 2019년 세종시 세종문화재단 지역문화예술 특성화지원 사업대상 선정 희곡집 『광합성』.



《문장웹진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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