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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시선으로 지금, 여기를 다시 본다면

  • 작성일 2020-10-01
  • 조회수 878

[리뷰 – 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체호프의 시선으로 지금, 여기를 다시 본다면

윤성호 희곡집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김나볏




고전 명작은 계속 길어 올려도 끝없이 차오르는 샘과 같은 매력을 지닌다. 시대를 뛰어넘어 인생의 희로애락, 삶의 정수를 빠르게 간접 경험하게 해주는 데 고전만 한 것이 없다. 밀도 있게 파헤친 인간의 심연, 캐릭터 간 긴밀한 관계 설정, 짜임새 있는 이야기 등을 바탕으로 한 미학적 완성도는 오늘의 독자들을 고전으로 이끄는 힘이다. 하지만 이처럼 생명력이 긴 ‘깊이’의 매혹에도 불구하고 막상 고전을 집어 든 독자는 쉽사리 글 속으로 빠져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름 아닌 시공간의 장벽 때문이다. 더구나 외국 고전문학의 경우엔 낯선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번역이라는 프레임이 때때로 방해물로 작용해 읽는 속도가 느려지기 일쑤다. 특히 러시아 문학을 접할 때 이 같은 어려움은 배가된다. 길고 어려운 러시아인 등장인물들의 이름까지 더해지면서 진도를 빼지 못하고 책장을 하염없이 앞뒤로 넘겨 본 경험을 한 독자들이 아마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국내에서 무대 상연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희곡의 경우 해외 고전을 동시대 한국 관객 눈높이에 맞춰 재창작한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단연 재창작의 빈도수가 높은 작품은 셰익스피어, 체호프의 작품들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면서는 체호프를 다시 읽어내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대표적인 사실주의 희곡으로 알려진 체호프의 작품 속에서 의외의 동시대적 요소를 발견해 낸 창작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무대화에 대한 의욕을 보인 결과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재창작물로 윤성호 작가의 희곡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201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전문사 연출과 공연으로 처음 공연된 이후 같은 해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되고, 2018년에는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다시 무대화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며 윤성호 작가의 필력을 널리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출판사 이음에서 낸 희곡집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은 가장 최근 무대에 오른 두산아트센터 공연 대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체호프 희곡 속 소통의 단절 문제 담은 재창작물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모티프로 삼고 있다. 윤성호 작가는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을 쓰면서 체호프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되 원작 속에서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되고 단절된 사람들의 모습, 그 가운데 느끼는 허무와 외로움을 길어 올리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손을 댔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시공간적 배경을 19세기 말 러시아 농장의 풍경에서 동시대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계간지 《시대비평》을 내는 한 잡지사로 옮겨온 점이다.


원작인 「바냐 아저씨」는 시골에서 영지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 바냐와 바냐 누이동생의 딸 소냐를 주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죽은 누이동생의 남편인 교수 세레브랴코프가 젊고 아름다운 옐레나를 데리고 오면서 조용한 이 시골 마을에 변화가 생긴다. 바냐가 옐레나를 향한 연심에 애달파하며 세레브랴코프에 대한 불만을 키워 가는 사이, 소냐가 열렬히 사모하는 바냐의 친구인 의사 미하일은 남몰래 옐레나와 눈이 맞는다. 옐레나를 둘러싸고 애정 문제가 얽히고설킨 가운데 과거 이 집안의 희망으로 여겨졌던 세레브랴코프는 돌연 땅과 저택을 팔고 나가겠다고 폭탄 선언한다. 가뜩이나 마음의 상처로 고통받고 있던 바냐는 분노를 못 이겨 세레브랴코프에게 결국 권총을 겨누지만 총알은 비껴가고, 결국 세레브랴코프와 옐레나가 이곳을 떠나면서 남은 사람들은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이후의 삶은 이전의 삶과 같을 수는 없다. 바냐와 소냐가 남은 이곳 시골 마을은 이전보다 더한 허무와 외로움으로 가득 찬다.


한편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의 경우 계간지 《시대비평》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김남건이라는 인물이 원작 속 바냐 아저씨를, 새로 입사한 젊은 기자 장샘이는 소냐를 대신한다. 또한 광고계에서 일하다가 《시대비평》의 새 편집장으로 부임해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려는 인물 서상원은 세레브랴코프를, 서상원과 내연관계에 있으며 서상원과 함께 부임한 그래픽 디자이너 팽지인은 옐레나를 대체한다. 또 과학철학을 전공한 김남건의 친구 박용우는 미하일을 떠올리게 한다. 즉, 원작 속 인물들과 완전히 다른 시대와 상황에 처한 현대인들을 한데 그러모으면서도 원작 속 인물들과 각각 묘한 대칭을 이루도록 설정했다. 19세기 말 대개혁의 시기를 맞은 러시아에서 농지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가 실용주의 시대의 도래 속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는 잡지사 사람들의 신세와 절묘하게 일대일 대칭 구도를 이루는 셈이다.


빤한 미래를 향해 걸어가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이라는 희곡의 제목은 가수 김광진의 동명 노래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노래는 작품 속에서 나이 많은 기자 조형래의 입을 통해 불리기도 한다. 사랑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몰라 씁쓸해하고 헤어지면 그저 잘 되기를 기도할 뿐이라는 김광진의 노랫말처럼, 희곡 역시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대상이 떠나가고 또 스러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해하는 정서를 가득 품고 있다.


희곡의 배경이 되는 출판사는 《시대비평》이라는 이름의 유서 깊은 인문·사회과학 계간지를 내지만 구독자가 줄면서 번번이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위태롭게 명맥을 간신히 이어 가는 잡지사 주변을 맴도는 이들 역시 우중충한 분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현재 팀장을 맡고 있는 김남건은 《시대비평》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지만 잡지의 미래에 대해 자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역시 이곳에서 오랫동안 몸담으며 회계 업무를 보고 있는 강수혜는 말수는 비록 적지만 김남건보다도 더 회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숫자를 들여다보는 일을 맡고 있어 누구보다 회사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가장 오래 다닌 이들이 지니는 태도를 통해 작품은 이 회사와 여기 머문 이들의 삶에 별다른 반전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나마 이곳에서 아직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인물이 바로 막내 기자 장샘이다. 매사에 투덜대는 김남건에 대해서도 진짜 멋있었던 분이었다면서 성실히 일하는 상사의 모습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지 않고 그의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틈틈이 애쓴다. 비록 아무도 본인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장샘이는 사랑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사모해 마지않는 박용우 앞에서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글들까지 읊어대며 잡지 기고를 독려하는가 하면, 팽지인에게 속마음을 터놓으며 용우의 마음을 대신 떠보기를 허락하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장샘이의 여러 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극의 쓸쓸한 분위기는 뒤바뀌지 않는다. 장샘이가 아무리 애써도 인문·사회과학이 존중받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시대비평》의 미래가 뒤바뀌긴 힘들 것이며, 또 박용우가 팽지인에게 관심이 있는 만큼 장샘이의 사랑은 결국 실패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은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게 있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일깨우며 인생에 대한 진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미래에 대한 슬픈 예감은 현재의 삶을 견디기 힘든 것으로 느껴지게 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김남건이 점차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그가 자신의 미래를 가장 정확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의 삶이 이들 중에서도 특히나 암울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청춘을 바쳐 일해 온 잡지는 통폐합되기 일보 직전이고, 다른 곳으로 이직하기에는 나이가 적지 않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여인은 신임 편집장과 지지부진한 불륜관계를 이어 가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그 와중에 자신의 친한 친구와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김남건에게는 사랑에서도, 일에서도 기회가 없다. 결국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인생에서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뿐이다.


다만 이 작품을 실제로 읽다 보면 인물들이 처한 우울한 상황에 압도되지 않고 충분히 즐기며 읽을 수 있다. 윤성호 작가의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은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희극적 분위기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희극적 느낌은 바로 등장인물 간 서로 어긋나는 대화,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은 희비라는 양가적 감정을 섬세한 언어로 조직해 내는 데 성공, 체호프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재창작물로서 전혀 손색없는 모습을 보인다.


변하지 못해 외롭고, 힘들고, 슬픈 사람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잡지가 어느새 힘을 잃는 것, 생기발랄한 젊음이 부지불식간에 사그라지는 것 모두 결국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생존을 위해 끝없이 투쟁해야 하는 정글과도 같은 세계에서 엄밀하게 말하면 작품 속 인물들 모두는 실패자다. ‘트렌디’한 잡지로의 변신을 강조하며 앞으로 광고 수주는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하던 서상원 편집장마저도 결국 《시대비평》을 지켜내는 데 실패한다. 서 편집장은 기존 직원들의 불만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장 앞장서서 대중잡지로의 변화를 모색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변화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자본 논리대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변화상을 일개 개인이 쫓아가기는 어려운 법이다. 게다가 과거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향해 가자고 부르짖고는 있지만 실은 서 편집장 본인 스스로도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이 같은 모습은 팽지인과의 관계에서 더욱 극대화돼 표현된다. 서 편집장은 이곳 남자들이 흠모해 마지않는 팽지인과 사귀면서도 뒤돌아서서 ‘지겹다’고 혼자 나지막이 읊조린다. 팽지인과의 관계마저도 과거의 습관에 불과한 껍데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일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서 편집장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기보다는 기존의 인맥으로 광고를 끌어오려는 데 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옛 관습에 젖어 일하는 것, 부인과 이혼하지 않은 채 팽지인과 습관적인 만남을 이어 가는 것 모두 변화된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채 지지부진하게 삶을 이어만 가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현실을 잠시 잊으려 몸부림을 치기도 한다. 가령 박용우와 팽지인이 서로에게 반하는 것이 이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박용우는 자신의 전공인 과학철학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팽지인과 모호한 선문답을 계속 이어 가다가 마침내 팽지인에게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기에 이른다. 둘의 연정이 불붙는 시점은 공교롭게도 《시대비평》 겨울호 원고가 마감된 직후 사무실 회식을 앞둔 시간이다. 《시대비평》 겨울호에 박용우의 글은 실리지 않았고, 팽지인의 경우 이번 겨울호를 마지막으로 《시대비평》 제호가 사라질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생에 대한 큰 열정이 가장 부족한 듯 보였던 두 ‘실패자’는 마침내 서로 키스하기에 이른다. 어쩌면 이들의 삶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어 줄지도 모를 이 키스는 그러나 역시 찰나의 순간으로 그치고 만다. ‘우리는 젊지 않다. 매일 끝나 가고 있다’며 박용우는 팽지인에게 키스를 종용하지만, 가장 긴밀한 소통의 순간 중 하나인 키스의 순간마저 김남건의 예기치 않은 등장으로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결국 키스는 그저 괴로운 삶을 잊기 위한 잠시 잠깐의 몸부림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극 속에서 비교적 잘나가거나 똑똑하거나 출중한 외모를 지닌 사람들마저도 결국 외롭고, 힘들고, 슬픈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서서히 드러난다. 하물며 주위로부터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사랑에 실패한 이들의 삶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팽지인의 인스타그램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연신 달던 김남건은 박용우와 팽지인이 나눈 키스의 목격자가 되고 만다. 그나마 진실을 알고 있는 김남건은 아무것도 모르는 장샘이와 비교하면 차라리 더 행복한지도 모른다. 장샘이는 팽지인과 박용우의 키스 사건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연심에 대한 박용우의 반응을 들었는지 알기 위해 회식 도중 팽지인에게 계속해서 안타까운 신호를 보낸다. 체호프 희곡 속 집안의 실질적 일을 도맡아하면서 사랑에 대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 소냐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처럼 이 작품 속 장샘이 사원 역시 예의 그 일관적이고 성실한 태도로 독자의 마음에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도태된 사람들과 잊혀 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바냐 아저씨」에서는 일터인 농지가 집 바깥에 존재했던 것과 달리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의 경우 주 무대공간인 일터가 전면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잡지사 사무실 공간 외에는 술집 정도를 전전하는 여기 이곳 사람들의 삶은 종일 일에 매여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냐 아저씨」의 경우 농지와 더불어 저택마저 넘어갈 위기에 처하면서 위기가 고조되고 급기야 바냐가 (비록 실패로 끝나긴 하지만) 과감히 총을 겨누기에 이른다. 반면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의 경우 《시대비평》과 《컬처 브랜딩》 간 통폐합 소식을 들은 후 이어지는 김남건의 폭주는 원작 속 바냐의 경우에 비해선 한참 못 미치는 정도의 술주정 수준에 그친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 속 바냐는 총기 소동으로 세레브랴코프가 농지와 저택을 파는 것을 일단은 막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김남건에게는 《시대비평》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방법도 명분도 없기 때문이다. 고작 사직서를 던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데다 던진 사직서도 다른 직원 강수혜가 조용히 주워들면서 희비극적 분위기가 고조된다. 김남건의 행위는 결국 무위로 돌아간다.


윤성호 작가의 희곡은 이처럼 도태된 조직과 그 속에 속한 모래알 같은 개개인의 행동과 감정을 세밀하게 기록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원작의 인물들만큼 감정의 파고 변화를 크게 겪는 것 같지는 않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인물 저마다의 마음속 내상은 원작 못지않게 깊게 느껴진다. ‘과거에 명분 있는 인문·사회과학 계간지를 냈지만 이제는 망해 가는 출판사’라는 구체적 배경이 인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선명하게 그려진 덕분이다. 이곳 출판사와 출판사 직원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과거의 영광을 잇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수많은 분야들, 수많은 일자리를 떠오르게 한다. 작가는 이 같은 배경 위에 인물들을 올리고 아주 오래된, 내재화된 무기력감을 전시한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반가운 점은 작가가 원작과 다르게 극을 꾸미는 데 몰두하기보다는 체호프 희곡 속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본 뒤 마치 번역이라도 하듯 오늘의 인물들로 빚어내는 데 열중했음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마치 체호프 원작이라는 원재료의 맛을 훌륭하게 살려낸 퓨전요리 같다고나 할까. 덕분에 작품을 읽다보면 체호프와 윤성호 작가 모두로부터 위로 받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원작의 아우라에 묻히지 않고 작가 특유의 감성적 언어로 이 작품만의 개성을 새롭게 창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김나볏
작가소개 / 김나볏

공연 보고 글 쓰는 활동을 시작한 지 10여 년째. 현실의 고민과 동떨어지지 않는 연극, 글쓰기를 지향한다.


《문장웹진 202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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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요즘 SNS에서는 시가 유행이라고?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요즘 SNS에서는 시가 유행이라고? - 문학예술 융합 인터뷰 : 포엠맥 편 채미나 좋아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잃을 게 없어요. 너무 겁먹지 마세요. 요즘 핫한 SNS인 인스타그램에서는 시가 유행이자 젊은 세대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시를 계속해서 읽던 마니아층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시를 즐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한 하나의 흐름 속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소규모 문학 매거진 포엠맥(@poemmag)과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안녕하세요! 우선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소개 먼저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포엠매거진이고, 인스타그램에서 한국 현대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소개할 것은 없습니다. 포엠맥을 운영하게 된 계기가 있으실까요? 스무 살 때부터 시를 엄청 좋아했어요. 꾸준히 읽고, 혼자 쓰다가 독립 출판도 하고요. 시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꼈던 것과는 별개로 전공은 패션 디자인을 선택했는데, 졸업하고 회사도 다녔지만 미련이 남더라고요. 시를 주제로 해서 콘텐츠화하고 싶다, 시의 매력을 더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퇴사하자마자 바로 포엠맥 계정(@poemmag)을 만들었어요.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저는 전에도 유튜버처럼 콘텐츠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그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혼자서도 디자인, 브랜드 마케팅, 카피라이팅, 큐레이션 등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원래부터 콘텐츠 제작 쪽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아니면 글을 쓰시다가 자연스럽게 넘어오신 걸까요? 처음에는 100% 쓰는 쪽에 더 가까웠어요. 스물부터 스물여덟까지 세 권의 시집을 독립 출판했어요. 처음의 꿈은 시인이었어요.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시인을 병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전업 시인은 힘드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저는 쓰는 쪽보다 사람들을 혹하게 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더 적합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글 쓰는 것만큼 디자인과 마케팅을 좋아하거든요.(하하) 시에 전념하면 두 가지를 놓치게 되는 것이 아쉬웠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총합해 본 것이 바로 포엠맥이에요. 저만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져서 더 애착을 갖게 되어요. 포엠맥을 운영하면서 좋았던 점이나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포엠맥을 운영하는 매일매일이 기뻐요.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도 즐겁고, 업로드 하였을 때 사람들이 반응을 남겨 주는 걸 보는 일도 즐거워요. 매 순간 행복하지만, 최근에는 열흘 정도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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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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