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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그래픽노블 이야기 3〉 – 공동의 작업, 사이의 장르 - 이동은 ‧ 정이용의 작품 세계

  • 작성일 2021-09-01
  • 조회수 1,316

[리뷰 - 그래픽노블]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오늘의 그래픽노블 이야기 3〉

공동의 작업, 사이의 장르 - 이동은 ‧ 정이용의 작품 세계


김유진




1. 글과 그림이 만나는 공동 작업


이동은과 정이용의 그래픽노블을 처음 접했을 때 두 작가의 역할 구분이 궁금했다. 그림책이든 그래픽노블이든 대개 글 작가와 그림 작가를 구분해 ‘모모 글, 모모 그림’으로 표기하지만 그들이 출간한 모든 책에는 그들의 이름만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 날개에 적힌 작가 프로필을 꼼꼼히 읽고서야 이동은 작가가 글을, 정이용 작가가 그림을 담당하겠구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최근작인 『진, 진』과 『토요일의 세계』에서는 둘의 프로필마저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쓴다. “주로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이동은이 글을 쓰고,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정이용이 그림을 그린다”라고.)
글과 그림으로 각자의 역할을 분리해서 내세우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그들의 실제 작업 과정이 단지 역할 분담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긴밀한 공동 작업이기 때문일 거라고 예상했다. 이 글을 준비하며 인터뷰를 찾아보니 역시 그랬다.
《씨네 21》(2021.1.13) 인터뷰에 따르면 이들의 작업 과정은 이렇게 진행된다. 이동은이 완성한 시나리오를 한 번에 주면, 정이용이 그 원고를 피드백 하고, 그렇게 수정해서 완성한 원고로 함께 콘티 작업과 캐릭터 디자인을 한다고 한다. 이후 정이용이 매일 이메일로 원고를 보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고.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긴밀하고 탄탄한 공동 작업인 셈이다. 의견을 조율하는 좀 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위 인터뷰를 직접 인용하는 게 나을 듯하다.


정이용
시나리오를 받아 작업하면서 디테일을 고치는 일이 꽤 있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납득이 되어야 그릴 수 있어서 납득이 되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고 이동은 작가에게 설정을 바꾸자고 할 때도 있다. 편집적인 것을 바꿀 때는 이동은 작가에게 이야기한다.


이동은
정이용 작가가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주로 의견을 주는 부분은 어떤 인물의 감정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불친절하다는 식이다. 그런 질문은 영화 작업을 할 때 키 스태프나 배우들이 하는 질문과 비슷하니까 시나리오를 보완하거나 보완하기 싫으면 싸우거나 한다. 정이용 작가의 그림 해석에 생각이 다를 때도 있다. 〈환절기〉에서 용준과 수현 외모가 비슷하게 그려졌다. 영화는 단역이 잠깐만 나와도 구분이 되는데, 만화는 인물마다 그림체로 구분이 확실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낸다.


- 〈씨네 21〉(2021.1.13) ‘만화 〈진, 진〉 펴낸 이동은· 정이용 - 감정을 절제하고 덜 보여주는 것이 더 어렵다’


첫 책 『환절기』의 공동 작업이 우연히 시작되었다 해도 2013년 출간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방식의 공동 작업을 지속하며 장편 5권을 출간한 건 놀라운 일이다. 무엇보다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일 듯하다. 수많은 책들의 판매 부수와 인세를 계산해 보면 작가들이 한 권의 책에 들이는 시간과 노동은 최저 시급도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이토록 품이 많이 드는 공동 작업을 지속할 수 있던 이유는 뭘까.
물론 이들의 그래픽노블은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영화의 사전 작업으로서의 의미나 필요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 글과 그림이 만나고 조금씩 새롭게 변화하면서, 자신의 작업이면서도 자신만의 작업은 아닌 결과를 보는 특별한 기쁨 때문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작품이 놓이고 수용되는 장에 있어서는 대중예술인 영화에 비해 그래픽노블, 책, 출판이라는 형식이 좀 더 작가 자신에게 가까운 작업으로 다가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동은, 정이용 작가에게 그래픽노블은 영화의 사전 작업 내지 중간 단계 이상의 의미일 듯하다. 창작 단계상으로는 그래픽노블이 영화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래픽노블을 창작하는 시간과 노동은 오직 그래픽노블만의 것이다. 늘 일정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준 5권의 장편이 그 사실을 대변한다. 그들은 그래픽노블 작가이며, 품도 많이 들고 쉽지 않은 공동 작업으로 창작을 지속하고 있다.



2. 문학과 영화 사이의 그래픽노블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이동은은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당부’가 당선된 이력이 있다. 시나리오 ‘당부’를 그래픽노블로 창작한 작품이 『당신의 부탁』(이숲, 2015)이고, 이 작품이 바탕이 되어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졌다.(이동은은 자신의 그래픽노블 『환절기』, 『당신의 부탁』, 『니나 내나』를 영화로 만들었다.) 당시 신춘문예 심사위원이었던 이유진 영화사 ‘집’ 대표와 이정향 영화감독은 심사평에서 “문장이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면서도 필요한 말은 다 전달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고 상찬한 바 있다. 심사평처럼 이동은의 문장은 재치 있고 간결하면서도 여운이 길다. 이러한 특징은 영화에서도 물론이지만 문자 언어에 좀 더 눈길이 머무를 수 있는 그래픽노블에서 더욱 돋보인다.
최근 출간된 청소년 성장 만화 단편선 『토요일의 세계』(라일라 외 공저, 창비, 2020) 수록작 「캠프」에서는 지금까지 장편들과는 다른 가볍고 발랄한 대사들이 우선 눈에 띈다. 여러 교회가 연합해 운영하는 하계 수련회에 참석한 고등학생 진석은 같은 방을 쓰게 된 유승과 이렇게 대화를 시작한다.


진석 : 완전 헬이야, 헬. 헬 캠프야. 갓 캠프가 아니라 갓 댐 캠프다.
몇 신지도 모르고, 여물 같은 밥이나 먹고… 이게 문명이냐? 원시인이지.
고인돌 원시인…
형제님은 어느 절에서 오셨어요?
유승 : 본동 제일교회
- 「캠프」, 57-58쪽.


문자 언어와 이미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를 독자가 자신만의 호흡으로 읽어내는 그래픽노블이란 장르는 이동은의 문장과 정이용의 그림을 음미하기에 적절한 매체가 된다. 이들의 캐릭터들은 대개 말수가 적다. 또한 영화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다른 그래픽노블과 달리 내레이션 없이 오직 인물의 대사로만 서사가 진행된다. 내레이션도 없이 말수가 적은 인물들로 서사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은 함축적이고 다의적인 대사와, 이 대사들과 정교하게 배치되는 이미지에 있다. 이렇듯 글 작가와 그림 작가가 끊임없이 의견을 교환하면서 완성시킨 공동 작업의 결과물은 그들의 작품 세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인물들의 짧은 대사는 서사의 핵심을 밝히거나 암시하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환절기』(이숲, 2013)에서 미경이 자신의 아들 수현과 친구 용준이 실은 오래 전부터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용준을 외면하다가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장면의 대화는 이렇다.


미경 : 언제부터야?
용준 : ?
미경 : 수현이랑.
어디가 좋았어?
용준 : 그게… 사실 수현이가 먼저…


미경은 수현과 용준의 자동차 사고 이후 우연히 용준의 카메라에서 둘의 사진을 보고, 그간 아들처럼 살갑게 대하던 용준에게 돌연 절연을 선언한다. 독자들은 그 이유를 궁금해 하다 용준이 직장 상사에게 사귀는 사람이 병원에 있다고 말하는 장면을 통해 용준과 수현의 관계를 명확히 알게 된다. 미경과 아울러 이제 독자까지 그들이 연인 관계임을 알게 된 후 남은 건 이제 그들의 관계가 미경과 용준 사이에서 어떻게 다루어질지 하는 것이다. 용준은 미경이 인지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될지, 용준과 미경의 유사모자 관계는 예전처럼 회복될 수 있을지 하는 점이다. 작품에서는 위의 인용 부분과 같은 미경의 짤막한 대사로 말문을 열고 화해의 장면을 만들어낸다.
대개의 그래픽노블이나 특히 웹툰 연재 후 책으로 출간된 그래픽노블은 하나의 컷에 머무르게 하는 여운을 그리 많이 만들어내지 않는 편이다. 이 여운의 길이는 문학 작품은 물론이고 영화와 비교해 봐도 그렇다. 그래픽노블의 호흡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빠르다. 독자 개인의 감상을 열어 두고 기다리기보다는 독자에게 많은 양의 정보나 서사의 전개를 전달하는 게 우선으로 보일 때가 많다. 전체 서사의 복선이나 암시를 말하는 장면은 물론 있지만 장면 하나에 담긴 다의성에 좀 더 눈길을 오래 두게 되는 경험은 드물다. 그런 점에서 이동은과 정이용의 그래픽노블은 장르 형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감상 형태에 있어서도 문학과 영화 사이에 있는 듯 보인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계속 찾아볼 수 있다. 최신작 『진, 진』(창비, 2020)에서 남편과 사별하고 언니와 식당 일을 하는 50대 여성 수진은 갑작스런 임신에 당황해한다. 식당에서 맴도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수진에게 언니는 밑도 끝도 없이 “임신이네”라고 말한다. 자신의 임신 사실을 혼자 고민하던 수진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지만 언니의 대사는 “고양이. 아무래도 젖도 불고 맞는 것 같아”(62쪽)라고 이어진다. 맥락도 없이 대뜸 던져지는 “임신이네”라는 대사는 이처럼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을 집중적으로 환기시키는 장치가 된다.
동상이몽의 대사가 만들어내는 극적 효과는 수진의 아들 성민이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여자친구 지원을 소개시키는 자리에서도 반복된다. 일찍 결혼하려는 성민이 마뜩찮은 수진은 식사 자리에서 시선을 내린 채 무심히 “얼마나 됐어요?” 하고 묻는다. 시선을 내린 수진은 보지 못했지만 독자들은 수진의 질문에 성민과 지원이 진땀을 흘리는 장면을 마주한다. 지원이 당황하며 “네…?” 하고 반문하자 성민이 “아아, 우리 한 일 년 됐나?” 하고 서둘러 대답하는 장면(148쪽)에서 독자들은 이들이 서둘러 결혼하려는 이유가 임신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게 되고, 이 사실은 이후 서사에서 확인된다.
이동은과 정이용의 그래픽노블에서 내향적인 인물들이 무심하고 짤막하게 내뱉는 대사들은 위의 사례들처럼 독자는 알고, 등장인물은 모르는 사실들을 환기시키는 장치로 기능하면서 서사의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앞서 살펴보았듯 『환절기』의 동성애, 『진, 진』의 임신 등 그 사실은 인물의 내면이나 인물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서사의 핵심이다. 『니나 내나』(애니북스, 2016)에서 재윤의 성 정체성 또한 독자들은 알고, 등장인물은 모르는 사실로 제시된다. 미정, 경환, 재윤 삼남매와 미정의 고등학생 딸 규림은 수십 년 전 집을 나간 엄마가 위독하다는 엽서를 받고 부산에서 파주까지 엄마를 찾아가는 와중에 차 안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미정 : 그래서 닌 진짜 사람 없나?
재윤 : 난 결혼 안 한다니까.
미정 : 니 어서 장가가 잘사는 걸 봐야 내가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긴데.
재윤 : 사는 거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아버지는, 자긴 또 어떻고?
미정 : 왜, 경환이는 그래도 잘살고 있잖아.
규림 : 내가 볼 때 삼촌은…
미정 : 뭐?
규림 : … 아이다
미정 : 뭐가 아닌데?
(규림을 향해 - 필자 주) 너거 학교에 좋은 선생 없나. 학교에 여자 샘들 많잖아.
규림 : 삼촌은 싫어할 것 같은데…?
- 『니나 내나』, 134-135쪽.


조카 규림은 눈치 챘지만 누나 미정은 알지 못하는 재윤의 성 정체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후 서사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는 재윤이 가족 안에서 더 이상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다른 가족들 역시 재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재윤의 형 경환은 커밍아웃한 재윤에게 “왜 굳이 말했는데? 안 해도 상관없잖아”(206쪽)라고 묻는다. 재윤은 “속이고 살기 싫었다, 나는 나라는 인간 자체가 거짓말 같다, 가만히 있어도 거짓말하는 그런 느낌, 속이는 게 더 피곤하다, 진짜가 아니니까”(207쪽)라고 대답한다. 한편 억지로 내림굿을 받기 위해 애쓰던 미정은 ‘신의 뜻’은커녕 동생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자신한테 도망치려 하는 거”라는 재윤의 말을 새기게 된다. 이렇듯 재윤의 성 정체성과 커밍아웃이 중요한 기점이 되는 서사 전개에 있어 인용 부분의 암시는 독자들에게 서사의 재미를 더한다.



3. ‘공동’과 ‘사이’로 이야기하는 것 - 가족 그리고 소수자


정밀하게 진행되는 글과 그림의 공동 작업이 그래픽노블의 완성도를 높일 뿐 아니라 문학이나 영화와 유사한 집중과 여운을 남기는 고유의 스타일을 창작해 낸 것, 이것이 이동은과 정이용 그래픽노블의 특징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러한 창작 과정과 스타일을 통해 이야기되는 세계는 무엇인가.
이들의 작품에는 가족 내지 유사가족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작품에 등장하는 가족 중에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는 가족 형태는 없다. 『환절기』의 수현 아버지는 외국에서 생활하며 가족과 남남처럼 지내다 수현 어머니에게 이혼 요구를 받고 곧 이혼한다. 『당신의 부탁』의 효진과 『진, 진』의 수진은 남편과 사별했다. 부모의 이혼이나 죽음으로 등장인물들은 청소년기부터 편부 혹은 편모 가정에서 지낸다. 『환절기』의 용준과 수현, 『당신의 부탁』의 종욱, 『진, 진』의 성민, 진아와 현아, 『니나 내나』의 미정, 경환, 재윤과 미정의 딸 규림까지, 이들은 결코 가족 안에서 행복감이나 안온함을 느끼지 못한 채 외로워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의 삶을 수용하고 새 발걸음을 한 발짝 내딛는 계기 역시 가족이다. 『환절기』에서 미경은 결국 아들 수현의 연인이었던 용준을 아들처럼 받아들인다. 『당신의 부탁』의 효진은 사별한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종욱의 보호자가 된다. 『니나 내나』의 미정, 경환, 재윤 삼남매는 수십 년 전 다른 남자와 떠나버린 엄마를, 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돌아보며 가족 사이에서 벌어진 아픔을 치유한다. 『환절기』와 『당신의 부탁』은 유사가족이나 새로운 가족의 탄생으로, 『니나 내나』는 가족 간 화해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환절기』와 『당신의 부탁』에서 유사가족 내지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아들들의 소망이자 삶의 전환이지 어머니가 되는 여성들의 욕망인지는 의문스럽다. 『환절기』와 『당신의 부탁』 모두 작품의 초점화자는 미경과 효진이다. 그럼에도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서사의 완성이 이들의 욕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환절기』에서 미경이 용준을 유사아들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성 정체성에 대한 편견을 허물고 아들의 동성 연인을 수용하는 윤리적 결단과 중첩된다. 과연 미경에게는 유사어머니가 되는 인간적 행위와 동성애 혐오를 극복하는 윤리적 행동 중 무엇이 중요했을까. 두 가지 결단 중 무엇이 무엇을 이끌었을까. 식물인간이던 수현이 병상에서 일어나 건강을 회복한 이후 수현과 용준이 예전처럼 열렬한 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결말은 더욱 이 서사가 미경이 아닌 용준의 욕망처럼 보이게 한다. 용준이 계속 미경의 유사아들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받되 더 이상 수현의 연인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부탁』의 효진이 종욱을 아들로 받아들이는 과정 역시 효진의 욕망으로 보이지 않는다. 효진의 친구 미란은 종욱의 보호자가 되는 결정을 고민하는 효진에게 “법적으로만 따지자면 걔랑 아주 남남은 아니지. 맞아, 누가 걜 책임져야 하냐고 물으면 네가 될 수도 있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키우지 말아야 할 사람을 꼽자면 그것 역시 너야.”(76쪽)라며 현실을 일깨우는 지극히 온당한 충고를 한다. 그런데 효진은 이 말을, 자신이 아빠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십대 미혼모인 친구의 아이를 낳고 키우려는 종욱에게 똑같이 되풀이한다. “그래, 물론 누가 책임져야 한다고 물으면 네가 맞을 수도 있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키우지 말아야 할 사람이 누군가 따져 보면 그것 역시 너희들이야.”(264쪽) 효진은 자신이 종욱을 맡는 일은 종욱이 아기를 맡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합리적이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이를 받아들인다. 종욱이 미혼모인 친구에게 아기를 입양시키지 말라고 화를 내며 직접 키우라고 억지를 쓰는 일이나, 어린 시절 잠시 키워 준 계모를 찾으려고 헤매는 행동 모두 엄마를 애타게 찾는 종욱의 욕망이다. 하지만 효진은 종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데 충실하다. 거기에 효진의 욕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최신작 『진, 진』은 모두 여성 인물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시선의 전환을 보인다. 『환절기』와 『당신의 부탁』에서 초점화자였음에도 결코 주체적인 인물이 되지 못한 여성 인물들은 『진, 진』에서 비로소 주체성을 획득한다. 중년 여성 수진은 오랜 기간 홀로 키운 아들 성민도 결혼으로 떠나보내고, 잠시 만나던 남자와도 결연히 헤어지며 “내 인생만 생각”(185쪽)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 전진해 나간다. 청년 여성 진아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법적으로 마무리하고, 청소와 대리운전 기사로 밤낮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 가운데서도 동생 현아와의 미래를 희망한다.
수진과 진아는 모두 홀로 자녀나 동생을 돌보아 온 여성들로, 작품 곳곳에는 이외에도 여성 연대의 광경을 만날 수 있다. 여성 전용 고시원에서 관리자와 이용자가 고단한 서로의 생활에 관심을 두는 장면이나, 밤늦게 대리운전 기사 일을 마친 진아가 서울로 들어가는 수진 자매의 차를 얻어 타며 나누는 대화들이 그러하다. 『진, 진』은 수진과 진아, 두 여성 주인공의 이름에서 비롯된 제목인데 이들은 한밤중 차 안에서 잠시 만났을 뿐이지만 모든 여성들의 삶에서 계속 함께할 수 있을 듯하다. 수진이 임신한 상태로 결혼하는 성민의 여자친구 지원에게 “성민이 엄마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여자로서 하는 말”이라고 이야기하는 장면 또한 그렇다. “막상 닥치면 내 의지가 아니라 어디 끌려가는 것처럼 하게 되는 게 있더라고요. 결혼도, 임신도… 그래서 내 마음이 어떤지는 살피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책임감 때문에 하는 거면 꼭 한 번 다시 생각해 봐요”(184쪽)라며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며 결혼을 신중히 선택하라고 말하는 장면 또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진, 진』에서 가족과 여성 인물에 대한 시선이 변화할 수 있던 까닭은 이동은과 정이용의 첫 작품인 『환절기』부터 줄곧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을 견지했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서 살폈듯 『환절기』의 용준과 『니나 내나』의 재윤이 지닌 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은 서사와 캐릭터의 중심 요소다. 지금까지 언급한 작품들과 전혀 다른 분위기로, SF 설정인 『yoyo』에서도 주인공 여자와 남자가 만나는 카페에는 성 소수자 커플이 매번 등장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성 소수자는 이성애자만큼이나 가시화된 존재로 재현되며 긍정되었다. 『토요일의 세계』에 수록된 단편 「캠프」의 고등학생 주인공 진석 역시 성 소수자로, 진석이 교회 캠프에 억지로 입소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종교의 힘으로 교정하려는 가족들의 압박 때문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유승이 진석의 목 뒤에 있는 점을 두고 “너만의 꼬리 같은 거, 너만의 표식, 마크”(72쪽)라고 말하는 장면은 곧 진석의 성 정체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동은과 정이용의 그래픽노블은 『환절기』에서 성 소수자의 가족 되기에서 시작해, 『당신의 부탁』에서 아들의 어머니 찾기를 거쳐, 『니나 내나』에서 가족 간 화해로 이어지다, 『진, 진』에 이른다. 작품 발간 시기 순서로 볼 때 『진, 진』은 작품 세계의 뚜렷한 변곡점으로 보인다. 이 변곡점이 앞으로 어떤 공동 작업을 통해 그래픽노블과 영화로 이어지며 새로운 곡선을 그려 나갈지 궁금해진다.













김유진
작가소개 / 김유진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동시인.
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 시집 『그때부터 사랑』, 그림책 『오늘아, 안녕』 등을 냈다. 대학과 여러 기관에서 아동문학, 동시, 글쓰기, 젠더 주제의 강의를 한다.


《문장웹진 202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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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중국에서 퍼지는 한국 문학의 ‘전파(電波)’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중국에서 퍼지는 한국 문학의 ‘전파(電波)’ 팅팅 중국에서의 한국 문학은 관련 연구자들에게 연구 대상이 되는 것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비주류 문학으로 여겨졌으며,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최근몇 년 동안 이러한 침체 상태가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이제 한국 문학은 중국 내에서 작은 붐을 일으키고 있다.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 이창동의 소설집 『녹천에는 똥이 많다』와 『소지』, 공지영의 장편소설 『도가니』, 한강의 장편소설 『채식주의자』, 김애란의 소설집 『너의 여름은 어떠니』 등, 중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작품들은 중국 인터넷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지난해 소설가 김초엽은 제34회 중국은하상(1985년에 제정된 중국 공상과학소설계의 최고영예상) 시상식에서 ‘최고인기외국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졌고, 중국에서 초청받아 북토크나 문학대회와 같은 문학행사에 참석하는 한국 작가들도 많아지고 있다. 아울러 한국 문학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찾을 수 있으며,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하는 목소리도 중국 독자들 사이에서 점점 커지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출판된 한국 문학 작품들은 한 가지 주제만을 다루지 않는다. 사회 속 약자의 인권, 청년들의 생활 곤경, 그리고 여성과 같은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은 중국 독자들의 큰 이목을 끌고 있다. 한국 문학이 자주 언급되는 요즘, 중국에서도 한국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블로그, 동영상, 팟캐스트 등 새롭고 젊은 방식으로 한국 문학 작품을 소개하고 전파하고 있다. 그중 팟캐스트는 최근 몇 년 사이 중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로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주로 2030 고학력 도시 청년들의 지식 공유,, 사회적 이슈 토론, 그리고 다원화된 시각의 탐구를 위한 플랫폼으로서 자리 잡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중국의 팟캐스트 사용자 수는 2억 3500만 명을 넘어섰으며, 그 수는 여전히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중국 팟캐스트 플랫폼의 문학 콘텐츠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소통의 장이 되는 새로운 아지트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 중, ‘운중전파’는 멀리 중국에 있는 청취자들과 국경을 넘어 함께 한국을 읽는 경험을 공유한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한국 문학을 소개해 드리는 팟캐스트 &lsquo

  • 관리자
  • 2024-10-01
요즘 SNS에서는 시가 유행이라고?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요즘 SNS에서는 시가 유행이라고? - 문학예술 융합 인터뷰 : 포엠맥 편 채미나 좋아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잃을 게 없어요. 너무 겁먹지 마세요. 요즘 핫한 SNS인 인스타그램에서는 시가 유행이자 젊은 세대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시를 계속해서 읽던 마니아층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시를 즐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한 하나의 흐름 속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소규모 문학 매거진 포엠맥(@poemmag)과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안녕하세요! 우선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소개 먼저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포엠매거진이고, 인스타그램에서 한국 현대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소개할 것은 없습니다. 포엠맥을 운영하게 된 계기가 있으실까요? 스무 살 때부터 시를 엄청 좋아했어요. 꾸준히 읽고, 혼자 쓰다가 독립 출판도 하고요. 시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꼈던 것과는 별개로 전공은 패션 디자인을 선택했는데, 졸업하고 회사도 다녔지만 미련이 남더라고요. 시를 주제로 해서 콘텐츠화하고 싶다, 시의 매력을 더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퇴사하자마자 바로 포엠맥 계정(@poemmag)을 만들었어요.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저는 전에도 유튜버처럼 콘텐츠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그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혼자서도 디자인, 브랜드 마케팅, 카피라이팅, 큐레이션 등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원래부터 콘텐츠 제작 쪽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아니면 글을 쓰시다가 자연스럽게 넘어오신 걸까요? 처음에는 100% 쓰는 쪽에 더 가까웠어요. 스물부터 스물여덟까지 세 권의 시집을 독립 출판했어요. 처음의 꿈은 시인이었어요.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시인을 병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전업 시인은 힘드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저는 쓰는 쪽보다 사람들을 혹하게 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더 적합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글 쓰는 것만큼 디자인과 마케팅을 좋아하거든요.(하하) 시에 전념하면 두 가지를 놓치게 되는 것이 아쉬웠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총합해 본 것이 바로 포엠맥이에요. 저만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져서 더 애착을 갖게 되어요. 포엠맥을 운영하면서 좋았던 점이나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포엠맥을 운영하는 매일매일이 기뻐요.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도 즐겁고, 업로드 하였을 때 사람들이 반응을 남겨 주는 걸 보는 일도 즐거워요. 매 순간 행복하지만, 최근에는 열흘 정도 행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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