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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무렵」외6편

  • 작성일 2023-04-21
  • 조회수 1,176

입동 무렵

고명자


복숭아나무와 밤나무 사이 하늘빛이 차갑다

해가 종잇장처럼 얇아졌다

빈 거미줄에도 음영이 생겨서인지

빛은 이리저리 꺾이다 휘어지다 지금

거미집 모서리에서 눈부시게 서늘하다

허공을 깁는 기술 하나가 生의 전부

집주인의 긴 발이 눈에 밟힌다

우리 동네 수선집 여자의 바느질 솜씨와 견줄 만했는데
재봉틀 하나의 옹색함으로도 잘 웃는 여자
해가 갈수록 몸이 쪼그라들어
저러다 재봉틀 아래로 굴러떨어지면 어쩌나
동네 사람의 덧댄 말로 꿰매지는 여자

빛이 닿지 못하는 곳이 늘어나자

나무도 스스로 알아서 제 몸의 저수지를 닫는다

하늘이 새파랗다 빈 가지들 깊숙이 파고드는 것 같다

겨울을 가로질러 위태로울 저 은실 금실들

지나간 사랑이래도 걸어 둬야 할 것 같아

허공을 쓱쓱 비벼 대는 소리에 귀라도 환히 열어 두어야 할 것 같아


1989. 3. 노동문학 창간호에 대한 보고서


13페이지는 뜯겨 나갔다
창간 기념 시 김지하의 「저 풀꽃 속에서도」는 꽃자리도 함께 뜯겨 나갔다
저, 구로공단 열여섯 살 시다에게, 피혁노동자에게, 용접공에게, 겹겹의 꽃향기 속에
빛의 소굴인 저 풀꽃 속에서 노무현 그 사람이 「매 맞는 노동자의 희망」을 외치고 있다
시간은 책 속에서 빛바랬지만 젊디젊은 박원순의 얼굴이 김지하, 김근태, 노무현, 이오덕 선생이 핏대를 세워 괄 괄 괄 괄 외치고 있다
사람은 영혼으로 완결되는가
저, 탄광 속에 매몰되었던 광부 2명이 아흐레만에 구조된 소식을 듣는 아침

1989년 3월판 노동문학 창간호
폐지 줍는 노인에게서 5천 원을 드리고 사들였다
늙은 노동자의 수레에 실려 노동의 역사가 거리를 지나는 찰나
아뿔싸, 정직한 내 몸이 노동을 기억해 낸 것이다
표지에는 단발머리 소녀가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자운영꽃밭에 서 있다
청계피복, 꼭 그때의 나 같은 여자아이가

내 손보다 훨씬 컸던 재단 가위로 자투리 헝겊을 오리고 있었지
즐거운 놀이로만 알았던 세상, 평화, 평화시장
큰 손이 내 뺨을 한 대 갈겼던가
1989년, 노동이란 뼈아픈 이력을 저 풀꽃 속에 던져 버렸지

책을 버린 사람도 노동자였을까
문학이라는 폐광산
폐지 줍는 노인의 수레에 슬쩍 던져 놓고
노동에서 몸이 분리된 채 연기로 사라진 것일까

‘특별 발굴 장시’ 16연 220행의 「막장에서 부는 바람」 19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 때 분신자살한 강원탄광 탄부 성완희 씨를 기리기 위해 쓴 이청리 노동자시인 검은 막장, 검은, 먼지, 검은 기침, 검은 각혈을 내뿜으며 빛의 세상을 행해 쏟아 내는 뜨거운 항변
시인의 충혈 된 눈동자가 삼십육여 년 만에 내 손으로 건너왔다
지하 190미터 갱도에서 221시간 만에 구조되어 어젯밤 살아 돌아온 그 광부는 아니시겠지

「채송화는 더위에 지지 않는다」 건축노동자 김용만의 시, <어찌 니 앞에 내 가난을 부끄럽다 하고 /오늘 내 노동을 부끄럽다 하리> 너무 일찍 부끄러움을 알아 지금도 부끄러움밖에 모를 것 같은 구로노동자문학학교 학생 김용만, 서늘한 눈빛의 윤동주를 닮은 듯하다

32살의 농촌 총각 고재종 시인의 「삼동」 <시래기 한 줌 박고지 한 줌 /장에 내다 파는 어머니/ 이고 가시는 저 하늘 /삭풍에 잘 닦인 청청한 항변 같다> 속속들이 들어박혀 자라는 청대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흙에 묻혀 살아도 빛이 나는 시인이다

미싱을 돌리고 있는 중년의 노동자들 속에 지식인 강은교 고형렬 윤구병 김홍신 고은이 함께
가로세로 낱말퀴즈의 막간 속에 봉제공장 노동자 임지선의 산문이
맹아학교 자원봉사자 정현희의 코끝 시린 산문이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유시민 작가가 함께
14년 동안 해고를 거듭하고도 편직공으로 거침없는 박선자의 소설이 시인 김창복과 함께
노동자 출신 작가 정호진과 「겨울속의 풀뿌리」 김근태 민주 운동가가 함께
각자의 처지가 절박해서 어깨를 내어 주고 기대오는 사람, 사람들
지금은 열심히 늙어 가고 있겠으나 불의에 저항하는 펜과 노동으로 단련된 그들의 근육과 등뼈는 진실이 왜곡되어 가는 어두운 곳에서 노동자들의 고됨과 고통을 떠받치고 계시리

절망으로 풀꽃이 만발했을 시절 지나
나는
책 주인은
폐지 줍는 노인은
뜯겨 나간 13페이지는
노동자인 자화상을 어느 벽에 걸어 두고 캄캄하게 살아온 것일까


국수.1


---평화의 아이들---


청계천 피복상가 침침한 복도에는
커다란 짐승의 아가리처럼 삼킬 것이 많았다
병든 낯빛 같은 희멀건 형광등 아래
덜 자란 계집애 사내애들이 모여들었다
순교란 말뜻을 모를 터이니 아무렴, 평화
평화시장은 사춘기들의 해방구
힐끗, 킥킥 눈빛만으로도 출신을 들켰다
모두 가난했으니
모두는 가난을 몰라
먼지 속에서도 웃는 철없는 아이의 생각으로
미싱 발판을 한번 올라타 보는 것
신나게 밟아 아무 곳으로나 나동그라져 보는 것
빚다 만 밀가 루반죽 같이 어정쩡했던 나도
국숫발처럼 늘어서서 국수를 기다렸다
아무렴, 철딱서니들이 떠받치는 평화라 할지라도
오 원짜리 점심이라니
설핏설핏 코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막장으로 기어들어 어제의 소꿉놀이를 이어 가듯
하나 둘 셋 구령을 붙여 국물까지 시원하게 들이켰다
국수 그릇이라도 깨물어 먹을 것 같은
월급 사천 원짜리 시다들
돈맛을 알아, 자본주의의 짜릿함을 알아 버렸다
처음은 다후다처럼 가벼웠지만
제풀에 휘감기다 온몸 쥐어짜는 땀범벅의 악몽
일으켜 세워 놓으면 배는 꺼져 버리고
금방 고파지는 무엇이 있어도 눈빛만은 모두 형형했다


국수.2


----평화의 어머니들*---

평화시장에는 평화가 없고
흰 머릿수건 두른 천사들
셈을 모르는 바보들
오 원밖에 모르는 천사 어머니들 계시네
미싱 기름독 오른 팔목을 긁적이며 순자언니가 지어낸 노래

그 정도의 계산은 시다, 재단 보조들도 할 줄 아는데
국수 장사의 속셈은 몰라도 되는 남의 일
풋내기들 점심 젓가락질은 시끄러웠고
국수를 건져 올리는 어머니들은 쉴 틈이 없다

양은그릇 부딪히는 소리의 중심에서 나도 수굿해 있었다
누구의 어머니인지 몰랐기에
고마운 줄 몰랐다
모르는 게 많아 미안해서 공손히 국수 그릇을 받았다
노란 반달 단무지에 입천장까지 환해졌다
굶주린 창자처럼 허리 접힌 복도에서
매연 뒤집어쓴 별들이 지쳐 보일 때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끼리
이해될 수 없는 것들끼리
퍼진 국수인 양 무심히 국수 가락을 씹었다

실밥은 왜 하필 밥이라고 하는지
밥이어야 하는지
얼마나 찰진 밥알이었는지
덜 여문 손톱으로 징글징글 떼어 내야 했다
실밥을 매달고 집으로 가는 등 뒤로
불 꺼진 평화시장은 얼마나 거친 물살이었는지
국수 어머니들은 그 후로 얼마나 지극한 강물이 되었는지

*평화의 어머니들----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위해 국수 급식소에서 봉사하셨던 어머님들과 전태일 열사의 이소선 어머니께 바칩니다.


쌔그랍다 라는 말*



야야, 니는 무슨 짓을 해도 이쁜거 니는 아나
짱배기에 까마구가 집을 짓드락 디비자고
눈티 밤티 되드락 울어 싸도 이쁘다
야야, 이거 다래라 카는 긴데 함 무바라
억수로 귀한기라

쌔그랍다꼬?
가스나, 요래 이쁜 말 안즉 쓰고 노는 가베
오야 오야 그래, 쫌 쌔그랍제 몸서리쳐감서 무보래이
쌔가 깨춤을 추제? 그 맛이 참 맛인기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고려가요 청산별곡 니 국어시간에 배앗다 아이가
거서 나오는 그 다래 인기라
과실 한 쪼가리에도 역사가 있다 아이가
니는 지금 조상님들의 한 가운데로 사뿐히 걸어가는 기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 살어리랐다
산에 드가가 나무열매 따 묵고 淸淸하게 살자
껄뱅이라 웃어 싸도 멋지다 아이가
그거 아나, 너거 아빠도 그래 살고 싶어 했다
추저분 세상에 발 담그지 말고 쪼매만 묵고 살자
너거 아빠의 그 맴 엄마가 좀 알아줬어야 했는데
이자 그래 말해가 무신 소용이고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리노라

가을빛에 몰캉몰캉 잘 익었데이
니 맹키로 예쁜 새댁이가 무슨 짚은 뜻이 있었는가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강원도 청정 산꼴짝에 드가 키웠다 카드라
요즘 너거들이야 지 살고 잡은대로 사는 세상 아이가
얼매나 좋은 세상이고
바바라 야야 니도 퍼뜩 시집가가 다래 같은 알라 좀 낳아도

*
쌔그랍다---시다, 시큼하다
짱빼기 --정수리
디비자고--디집어 자고
안즉---아직
함 무바라---한번 먹어 봐라
쌔--혀
배앗다--배웠다
드가가--들어가
껄뱅이---거지
추저분---더러운
인자는 ---이제는
맹키로---처럼
요즘 너거들----요즘 너희들
잡은대로---싶은 대로
바바라-- 봐라 봐라
퍼뜩---빨리
알라---아이


처녀들의 亂.1



한 땀 한 땀의

한 땀 한 땀의
읊조림
졸음은 처녀들보다 힘이 세
미싱 바늘에 손가락을 찔렸다
피댓줄에 머리카락이 돌돌 감겨들기도 했다

미싱 대가리와 너희는 용량이 같다
졸지 마라
다섯 달 치 월급 그 까짓것 줄 것이다 기다려 봐라
시간은 바이어스처럼 늘어나 매일매일 첫날이니
처녀들아 너희 흰 손가락을 바쳐라

졸음의, 시간의 특효약
약 종이에 베껴온 詩를 털어 넣고 오물거렸다
무엇과도 섞이지 않으려고 미싱 다이 한쪽에 詩를 감춰 놓고
혼자 곱씹는 행복 때문에 미안해졌다
詩에는 눈총과 소음과 먼지와 잠이 없다

처녀들의 햇무 같은 종아리에
파란 힘줄이 장다리꽃으로 번져 갔다
약종이처럼 창백한 얼굴에 마른버짐이 펴져 갔다

평화 시장은 불행을 가르쳐 주는 교실
교복이나 책가방 따위 필요 없다
시 한 편과 같은
그런 평화
졸음처럼 와 주시길 읊조렸다

땡땡이 가라 월남치마는 불티나게 팔렸다지만
지구의 모든 아줌마들이 환호했다지만
사장은 튀고 말았다
시다, 오바로꾸 미싱사언니들은 웅성거리다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도, 시는 나에게 분노를 알려주지 않았다


처녀들의 亂.2



스무 살들의 음모가 새벽 탈의실을 치고 들어왔다
노동자의 권리라는 낯선 말
언니는 붉은 머리띠의 전사, 우리의 타는 입술
그럼에도 콤베아 벨트 앞에서는
불량이 날까 봐 밤에도 졸지 않았다
휴식공간과 야간수당 생리월차가 주어진다 해
노동조합 가입 신청서에 립스틱 바른 막도장을 찍었다
내가 내 목을 친 양날의 칼이 될 줄 몰랐다

신나통에 코를 박으면
신나통에 불을 붙이면
우리 손목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야
내일이라는 수렁은 모르니 용감했다
옥상을 점령하고
담요와 라면 코펠 버너 의자 등 잡동사니를 쌓아 놓고
입구와 퇴로를 막아 버렸다
오층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뛰어내리지 못했고
너는 불을 지르지 못했다
전사언니는 코빼기도 뵈질 않았다
핏줄 터진 눈동자는 네가 아니었음으로
옥상이라는 이 바닥이 너무 무서웠음으로
야학 영어 선생님이 울며불며 달랬음으로
사흘 낮밤이 지나 우리는 우리를 열어야 했다
사당동 태림전자 아리따운 처녀들
투쟁은 실패했다

전사였던 언니가 우리를 팔아넘기고 튀었다
우리는 몽땅 해고되었다
눈 감고 읽고 졸며 읽고 밑줄 그어 가며 읊조리던
영어 단어장과 시 나부랭이와 교과서 따위
책상머리 슬픔에는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굽 높은 구두, 플레어스커트, 긴 생머리를 잃은
스무 살들의 뒷모습
처녀들의 영혼은 타다 말고 꺼져 버렸다
꽃다운 나이를 잊으려 우리는 더 꽃답게 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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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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