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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기울기」 외 6편

  • 작성일 2023-08-23
  • 조회수 569

   에덴의 기울기

김휼


   쫓기듯 떠나간 동쪽이거나

   붉은 원죄를 간직한 당신 능선에 어둠이 내립니다


   손끝에서 겉옷이 흘러내려요

   알몸은 유혹적이에요 날로 먹고 싶은 경향이 있죠


   칼과 사과, 승자와 패자는 목 가까이로부터 결정됩니다


   드리거나 받는 형식을

   둥글기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속으로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과를

   사과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밤입니다


   에덴은 기울기가 심하고 굴러 떨어진 뒤 특히 빛이 납니다


   죄짓기 좋은 밤을

   무화과 잎사귀를 떼어 가리고 가뿐히 걸어갑니다


   눈먼 자의 달콤함과 새콤함으로

   과실은 무덤으로 난 비좁은 길을 가고 있으나


   너무도 붉어서 놓아 버린

   당신의 사과





 

   지평선, 가로는 선해요

 

 

   물과 땅은, 건너뛰는 법이 없어요

 

   그리하여 선(線)은 선(善)하다 할 수 있지요

 

   더없이 극진한 선(善)에 이르고자 했던 그가

   세상을 등지고 떠난 뒤

   가슴엔 순긋하게 실금 하나 생겼어요

 

   무수한 불덩이가

   의지 없는 세상이 열리고 닫히는 동안

 

   꼭 다문 입술에 사라진 이름을 묻고

   허밍으로 애가를 불렀어요

 

   쉽사리 열리지 않은 입이었다가,

 

   희비가 교차 되는 문이었다가,

 

   칼자국 흉터 같은 저 지평선은 이분할 수 없는 슬픔의 절취선

 

   하늘의 무게를 짊어지던 아틀라스의 비명 같아요

 

   누군가, 사라진 윤곽을 되찾고 싶었을까요

   한바탕 활극을 벌이고 간 자리에 핏물이 번지고 있네요

   스스로를 지우는 선한 선 위로

   눈시울 붉은 저녁이 몸을 누이고 있네요





 

   꽃게에게 해명의 시간을,



   어리숙한 변명이 자라기 좋은 우기입니다

   엄마는 이름 속에 꽃씨를 심어 주고 먼 길을 떠났죠 그 뒤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면 조금씩 눈을 뜨는 꽃씨, 꽃이 되는 꿈을 꾸며 살았어요 꽃,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요 온기 어린 미소를 불러내는 세상 환해지는 말인가요 꽃 피우기 좋은 조건을 찾아야 했지요


   변명은 측면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


   비경 속엔 항상 복병이 있듯 꽃자리 옆에 턱, 하니 자리하고 있는 것이 게, 라니요 꽃과 게는 좀 아니지 않나요 개나 소나, 개발새발, 게딱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될 것 같은 개(게), 가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아요 불면의 밤을 보내며 절반의 실패와 절반의 성공을 가진 이름을 궁굴렸어요 그렇지만 뭐, 다시 출발선에서 신발을 찾아 신었죠


   카이로스의 시간을 걸었어요 측면을 보며 가는 여정은 끝말잇기 같아요 예술적인 속도, 발목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다 옆길로 새기도 하고 지나가는 트럭에 집게발이 잘려 나가기도 했어요 밀려가는 자막 속 이름을 다 읽지 못하고 떠나보내듯 몇 번의 계절을 그렇게 보냈죠 그러다 스텝이 엉키는 풀섶에서 문득, 기준은 나여야 한다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죠


   옆으로 걷는 일은 슬픔을 밀어내기 좋은 방식이에요


   발이 많아도 앞으로 갈 발이 없는 나에게 정면의 삶은 신기루예요 화려한 조명도 색종이 흩날리는 무대도 나를 스쳐 갈 뿐이죠 발밑엔 꽃이 지고 있지만 목적지는 까마득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제가 보이지 않거든 이해해 주세요 꽃을 안고 세상의 측면을 다 읽어 낼 때까지 풍경 속을 걸어야 한다는 걸, 확고한 신념 같은 게딱지 속에 붉은 속살을 숨기고


   딸각딸각 걷는 내 구슬픈 워킹을


 




   사라지는 기분, 살아지는 기분,



   지는 해를 보고 싶어 차를 달렸다

   색들이 한 방향으로 고여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출구로 돌아가는

   입체적인 엔딩은 꽃들의 무덤 같았다

   아니 불을 먹고 영생을 갖게 된 불새의 기염이었다


   문득 불편한 속을 들여다보던 어느 한 날이 떠올랐다

   무표정의 의사가 링거 줄에 무언가를 투여하자

   나를 두고

   아득히 내가 사라지는 기분

   누군가 흔들어 깨워 겨우 나에게 돌아오던


   노을을 오래 바라본다

   마음 첩첩 흐르는 붉은 핏물은

   사라지기 좋은 성분을 가졌을까


   출구를 찾고 있는 이 있거든

   노을 앞에 서 보라

   나를 두고 사라지다 살아지는 야릇한 이 기분,

   저 노을을 능가할 출구는 없다





 

   


   침묵의 문장들



   붉은 말을 가진 자목련의 결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라져 가는 것들의 템포에 맞춰


   텅 빈 마음으로 하늘을 세우는 대나무의 자세를 배우러 갑니다


   가며, 아버지 기울어진 오른쪽 어깨를 떠올립니다


   멈춰 있는 바퀴의 참을성이 궁금해 한참을 멈추었어요


   어둠 속을 뻗어 가는 눈 밝은 뿌리는 절망에서 멀고


   탱자나무 가시 사이로 피는 꽃의 질서는 나를 말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종일 하늘을 품다 저무는 호수는 일기장에 무엇을 쓸까요


   굳어지면서 생기는 저 고요의 층위


   바위의 밀린 숨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봄의 입구에서


   열리지 않는 문의 안쪽을 생각하다


   애매할 때면 침묵을 앞세우는 말의 처지를 헤아려 봅니다





 

   돌의 기분



   울음을 재운 돌 속에선 종종 주먹이 나옵니다


   구르다 닳아진 돌이 숨겨 놓은 모서리를 알고 있나요


   나는 모서리를 숨기고 구르는 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서 구르다 차이기 일쑤입니다


   그것은 돌이 새가 되는 기찬 방식

   더러운 기분이 표출되는 허공엔 멍투성이입니다


   때론 부적절한 사랑에 나를 던지기도 합니다

   기운 사랑의 종말 앞으로 끌려온

   울고 있는 여인이여, 치욕을 줬다면 미안해요


   아무 데나 굴러다닌다고 중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공개할 수 없는 기분을 안고 바닥을 굴러도

   구르다 채이고 다시 굴러도

   골리앗의 이마를 명중시킬 단단하고 야무진 꿈은 쥐고 있어요


   가끔 부싯돌이 되어 당신 심장에 불을 켜고 싶은 나는

   모서리를 숨기고 구르는 돌

   종주먹으로 종종 오늘의 기분을 대신합니다






   달과 흰개미와 우물



   의혹의 눈빛이 따가운 나미브 사막


   은밀히 풀의 목을 따는 우리는 사막의 킬러들이다

   사막에서 실패하는 죽음이란 없다고 여기는

   나는 킬러들의 사수

   달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밤의 갈피에 몸을 숨기고

   구석진 어둠을 오려 복면을 한다


   오늘은 월식,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잠입하는 킬러들

   타는 가슴속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서라면

   풀의 목숨은 한낱 순명의 회로일 뿐이라 여기며

   강한 턱으로 밑둥을 자른 뒤

   유유히 행렬을 빠져나간다


   킬러들의 흔적이 아름답게 펼쳐진 요정의 원은

   둥근 신의 발자국

   가뭄 든 마음이 피워 낸 사막의 우물


   죽어야 사는 비밀을 그들은 어떻게 알아냈을까

   먹구름의 힘을 빌리지 않고 거사를 치르게 된 흰개미들

   달을 향해 손을 흔든다


   건기를 지나는 바람을 타고 킬러들의 행렬이 몰려온다


   온갖 잡초가 무성해져

   물 한 방울 고여 있지 않은 사막 같은 당신 마음속으로

   쉿, 달이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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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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