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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

  • 작성일 2022-10-14
  • 조회수 85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장편)]



두 친구




장은영






1. 사진관에서 만난 사람


“저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히카다 선생님의 말에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윤서가 제대로 말했다. 조선인도 천황폐하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황국신민서사」를 꼭 외워 오도록 한다. 알겠나?”
“네.”
나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선생님께 칭찬도 받고, 아이들에게 난 다르다는 것도 보여 주고 싶었다. 공부를 못하는 조선 아이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게 싫었다. 일본 아이보다 더 일본인 같은 모범생이 되고 싶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미자네 집으로 왔다. 「황국신민서사」 외우는 걸 서로 봐주기로 했다. 나는 눈을 감고 「황국신민서사」를 외웠다. 미자는 귀를 쫑긋 세우고 내가 틀리는 곳이 없는지 듣고 있었다.
“짝짝짝!”
갑작스러운 박수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우리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아버지”
미자가 달려가 안기자 아저씨가 덥석 안았다. 아저씨는 나를 쳐다보았다.
“미자 친구니? 잘하는구나.”
“고맙습니다.”
아저씨는 웃으면서 사랑채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다시 마루에 앉았다. 이번엔 미자 차례였는데 미자는 자꾸만 더듬거렸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들었다.
“어휴, 왜 이렇게 안 외워지지?”
미자가 투덜거리며 일어나더니 변소에 갔다 온다고 했다. 미자가 집 안으로 사라진 사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원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크고 작은 돌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석탑 하나가 서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오래된 석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득 아버지가 골동품을 모은다던 미자의 말이 떠올랐다.
정원을 벗어나 담 모퉁이를 돌아가니 사랑채 마루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하얗고, 푸른 그릇들을 들고 뭐라고 하는데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막 몸을 돌리는데 어떤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얼마 전에 총독부의 고위 관리께서 초상화가를 찾아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혹시 주변에 아는 화가가 있습니까?”
“글쎄요. 그런데 왜 총독부에서 초상화가를 찾지요?”
“제 생각에는 관리들을 그려 총독부에 걸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초상화가를 물색해서 눈도장을 찍으면 여러 가지 이권에 개입할 수 있을 겁니다. 모두들 여기저기 손을 써서 찾아봅시다.”
나는 사람들이 맞장구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안채 마루로 갔다. 주위를 둘러보던 미자가 나를 보고 달려왔다.
“윤서야,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몰랐어.”
“그랬구나. 어서 와 이거 먹어. 어머니가 공부 열심히 한다고 챙겨 줬어.”
미자가 가리키는 접시에는 여러 종류의 양과자가 가득했다. 색깔도 알록달록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뭘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하나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미처 씹지 않았는데도 사르르 녹았다.
양과자를 다 먹고 난 후에도 우리는 계속 「황국신민서사」를 외웠다.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외운 뒤에야 미자네 집을 나섰다.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종로로 갔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기와집 처마 아래에 ‘부인 사진관’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조선 최초의 여자 사진관, 그 주인공이 우리 엄마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엄마가 보자기 속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어? 그거 아직도 안 버렸네.”
“버리긴,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건데.”
엄마가 액자를 꺼내서 닦았다. 액자 속에 환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게 내가 몇 살 때였더라?”
“음, 내가 처음 사진을 배웠을 때니까 한 4년쯤 전인가 보다. 시간 참 빠르다. 네가 벌써 열두 살이라니.”
“그러게. 근데 엄마, 그때 사람들이 나더러 혼이 빠져나가서 죽을 거라고 했었어. 사진 찍었다고.”
“내가 어렸을 때도 사진기를 나무에 비추면 나무가 말라 죽는다고 했었어. 셋이서 사진을 찍으면 가운데 사람은 죽는다는 말도 있었다니까.”
엄마의 말에 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겁이 나서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졌다.
“근데 갑자기 이 사진은 왜 꺼냈어?”
“나중에 사진관을 열면 네 사진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겠다고 다짐했거든.”
“왜?”
“사람들이 내가 하고 싶은 걸 막는 게 싫었어. 그래도 순간순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 그때마다 네 사진을 보며 날 다잡았거든. 사진관을 열어 네 사진을 꼭 사진관에 걸어야지 하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여자라도 뜻을 세우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 왔어. 너도 그렇게 살기를 바라. 그러니 내가 먼저 포기하면 안 되잖아.”
“엄마가 말 안 해도 다 알거든요. 잠도 안 자고 찍고 또 찍고 했던 거.”
“고마워, 딸. 그동안 바빠서 잘 챙겨 주지도 못했어. 그래도 엄만 항상 네 편인 거 알지? 엄만 네가 선택한 거면 어떤 거라도 믿고 응원해 줄 거야.”
엄마가 내 손을 잡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응, 엄마.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모범생 될게. 오늘도 미자네 집에서 「황국신민서사」 외우는 숙제하고 왔어.”
“뭐? 「황국신민서사」를 외웠다고? 그것도 미자네 집에서?”
“으응, 혼자 외우기 힘들어서 봐 달라고…….”
엄마의 얼굴이 굳어지는 게 보였다. 평소에도 엄마는 내가 미자네 집에 가는 걸 싫어했다. 미자 아버지가 일본 사람들에게 아부해서 이득을 얻는다는 게 이유였다.
“짜잔! 사장님, 제 사진을 어디에 걸까요?”
분위기를 바꾸려고 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심각하던 엄마의 표정이 풀어졌다.
“당연히 제일 잘 보이는 한가운데 걸어야지. 문을 열고 들어오면 한눈에 들어오게.”
엄마는 내 손에서 사진을 받아 벽에 걸었다. 나는 엄마 몰래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우리는 사진이 삐뚤어지지 않았는지 이리저리 옮기다가 사진을 걸었다. 엄마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가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하늘이 흐리더니 기어코 비가 내리네. 네 아버지가 카메라를 옮겨 오기 힘들겠다.”
“비가 와요?”
나는 창가로 쪼르르 달려갔다. 창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엄마가 가 봐야겠어. 카메라를 어떻게 가져오는지 걱정도 되고. 혼자 있을 수 있지?”
“걱정 마셔. 잘 지키고 있을 테니.”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찬찬히 사진관 안을 둘러보았다. 미처 정리가 되지 않아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엄마가 그동안 고생한 것을 봐 와서, 이곳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느낄 수 있었다. 쪽찐머리에 한복을 입고, 큰 카메라 뒤에서 셔터를 누르는 엄마 모습은 언제 보아도 근사했다. 이제 이곳에 오면 언제든지 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덜커덩!
문 열리는 소리에 뒤돌아섰다. 머리에 모자를 뒤집어쓴 남자가 보였다. 짙은 눈썹과 가지런한 입매가 고집스럽게 느껴졌다. 미간에 난 까만 사마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누 누구세요?”
발뒤꿈치에 힘을 세게 주고 떨리는 마음을 감추려고 애썼다.
“아무도 없나? 주인은 어디 있지?”
“잠깐 일 보러 나갔어요. 아직 준비가 덜 되어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어요.”
“넌 누구냐?”
남자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사진관 주인의 딸이에요.”
“이윤경의 딸이란 말이지.”
남자는 다시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엄마 이름을 한 자 한 자 말하는데 찬바람이 일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훑어보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내 가슴도 두근거리고 손바닥에 땀이 났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구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덜커덩!
또다시 문소리가 났다. 나는 엄마가 왔을 거라는 생각에 반갑게 고개를 돌렸다.
“편지 왔습니다.”
체전부가 머리에 ‘우’라는 글자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손에 편지를 쥔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 체전부의 팔을 잡았다.
“아저씨! 누가 보냈어요?”
영문을 모르는 체전부가 눈을 크게 떴다.
“최석주라는 사람이 보냈구나.”
체전부의 말에 모자 쓴 남자가 편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최석주가 네 할애비겠군.”
모자를 쓴 남자는 나를 보며 중얼거리더니 헛기침을 하며 사진관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제야 체전부의 팔을 놓았다. 체전부가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니? 저 사람이 무슨 해코지라도 했어?”
“그건 아닌데요. 갑자기 나타나서 빤히 쳐다보고. 이것저것 물어보고요.”
“아이고, 큰일 날 뻔했구나. 요즘 사진관마다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훔쳐 가는 도둑들이 많다더라. 사진 찍는 카메라랑 뭐라더라? 아, 맞다. 렌즈, 고것이 그렇게 비싸다면서?”
“예.”
나는 기운이 빠져 힘없이 대답했다.
“자, 이 편지 받고 내가 나가면 어른들 올 때까지 문 꼭 걸어 잠그고 있어라.”
체전부가 신신당부를 하고서 사진관을 나갔다. 나는 겁이 나서 재빨리 문을 잠갔다.
‘그 남자는 왜 엄마 이름과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이름을 물어본 거지?’
혼자서 머리를 굴려 봤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부모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진관에 도착했다. 엄마가 들어오자마자 나는 엄마에게 바짝 다가섰다.
“아까 어떤 이상한 사람이 와서 주인 어디 갔냐고 묻잖아. 무서워서 문 잠그고 있었어. 체전부 아저씨 말로는 렌즈 훔쳐 가려는 도둑일지도 모른대.”
“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응, 괜찮아. 별일은 없었어.”
“다행이다. 엄마도 도둑 이야기는 들었어. 정말 조심해야겠다.”
깜짝 놀라 나를 살피던 엄마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뒤따라 들어온 아버지가 꽁꽁 싸맨 보자기를 조심조심 풀자 카메라가 나타났다. 엄마도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엄마, 그게 뭐야?”
“응, 이번에 새로 구입한 렌즈야.”
엄마는 카메라에 렌즈를 끼우느라 분주했다.
“엄마, 이거.”
렌즈를 다 끼운 것 같아 체전부가 가져온 편지를 내밀었다. 엄마는 뿌듯한 표정으로 카메라 주위를 서성이다 내가 건네준 편지를 받았다.
“아까 체전부 아저씨가 주고 갔어.”
엄마가 봉투를 보았다.
“화호리에서 왔네. 아버님이 보내셨어요.”
“그래? 당신이 읽어 봐요.”
아버지의 말에 엄마가 편지를 뜯었다.
“아버님이 경성에 올라오신대요. 어머? 날짜가 내일이네요.”
엄마의 말에 아버지가 ‘무슨 일이시지?’라고 말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엄한 할아버지를 만날 생각을 하니 내 마음에 먹구름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2. 경성으로 온 할아버지


“잘했다. 최윤서, 너는 일본인이라고 해도 되겠다.”
「황국신민서사」를 다 외우자 히카다 선생님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는 선생님의 칭찬에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미개한 조선을 발전시키려는 대일본 제국의 노력이 이렇게 실행되는구나. 앞으로도 더 열심히 공부해 주기 바란다. 자, 모두들 박수!”
조선 아이들뿐만 아니라 일본인 아이들의 힘찬 박수를 받으며 나는 자리에 앉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뻤다.
학교가 끝나자 신바람이 나서 집까지 뛰어왔다. 대문을 열자 부엌에 있는 엄마가 보였다. 나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나 히카다 선생님한테 칭찬받았다. 나더러 일본인 같다고 그랬어. 내가 「황국신민서사」를 제일 잘 외웠거든.”
“쉿, 윤서야. 조용히 해. 할아버지 오셨어.”
엄마의 말에 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엄마가 숭늉 그릇을 들고 부엌을 나섰다. 나도 엄마의 꽁무니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님, 어디 가시려고요?”
“그래, 초상화 그리는 붓이 필요해서 종로에 나가 볼 참이다.”
“네. 아버님, 윤서가 학교에서 돌아왔어요.”
엄마의 말에 나는 할아버지에게 다가섰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오냐. 근데 일본인 같다고 칭찬받아서 좋으냐?”
“네?”
할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망설이는데 엄마가 나섰다.
“아버님, 얘가 아직 철이 없어서…….”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너희들은 뭘 한 게냐?”
“죄송합니다.”
“사진관도 좋다마는 자식 교육에도 정성을 들여야지.”
“네, 아버님.”
할아버지는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집을 나섰다. 엄마는 인사를 하며 배웅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공부 잘해서 선생님께 칭찬받았는데 할아버지는 괜히 야단만 치고.”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는 나를 안고 달래 주었다.
“할아버지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게 싫으신 거야. 네가 일본인들에게 교육받고 칭찬받는 게 속상한 거지.”
“그럼 어떡하라고. 만날 야단맞고 혼나라고?”
“아이고, 우리 윤서가 뿔이 단단히 났네. 그만 화 풀어.”
엄마가 내 눈을 보며 달래는 바람에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엄마, 오늘은 사진관에 안 가?”
“이제 가야지. 할아버지 식사 챙겨드리느라고 늦었어.”
준비를 마친 엄마가 집을 나서자 나도 숙제할 것을 가지고 미자네 집으로 갔다.
“우리 할아버지, 정말 이상하지? 칭찬받았다고 혼내는 게 말이 되니?”
“맞아, 칭찬해 줘야지. 대견하다고.”
미자와 나는 할아버지 흉을 봤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미자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서야, 근데 네 할아버지가 초상화 그린다고 했었지?”
“응, 시골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야. 경성에 온 것도 초상화 그리는 붓을 사러 온 거래.”
“잘됐다. 우리 아버지가 초상화 화가를 찾는대. 네 할아버지한테 초상화 그려 달라고 하자. 할아버지가 네 덕분이라고 좋아할 거야. 이번 기회에 점수 좀 따.”
“진짜? 우리 할아버지가 좋아할까?”
“당연하지.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버는 거잖아.”
“그래? 그러자.”
미자의 말이 그럴듯했다. 할아버지에게 칭찬받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럼 우리 아버지한테 오늘 말할게.”
미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에 학교에서 미자가 나를 불렀다.
“윤서야, 우리 아버지가 오늘 오후에 너희 집에 간대. 할아버지 만나서 초상화 이야기를 한다고 했어.”
“그래? 근데 우리 할아버지가 요즘 계속 늦게 오셔. 혹시 못 만나면 어떻게 하지? 어제도 늦게 오셔서 말도 못 했거든.”
“내가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조금 늦게 가라고 할게.”
“알았어. 정말 고마워.”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갔다. 내 생각대로 할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요즘 할아버지는 매일매일 밖으로 돌아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에서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은 밤늦게 온 적도 있었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다녀야 좋은 붓을 구할 수 있나 궁금하기는 했지만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나는 집 주위를 서성이면서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할아버지가 미자 아버지보다 늦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날이 어두워지는데도 할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기를 반복했다.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모자 쓴 남자가 우리 집 주위를 서성이는 게 보였다. 조금 전에 나를 스쳐 지나갔던 남자가 어느새 나타나 담벼락 사이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나는 일부러 그 남자 곁으로 다가갔다. 순간 짙은 눈썹과 까만 사마귀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 사진관에서 만난 남자, 바로 그 사람이었다.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렸다.
“윤서야, 여기서 뭐 하고 있냐?”
갑작스러운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나는 달려가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가 놀라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이제 오세요? 초상화 붓은 잘 사셨어요?”
“붓? 그래, 그럼 잘 샀지.”
할아버지와 나를 지켜보던 모자 쓴 남자가 성큼성큼 우리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최석주야?”
“그렇소, 내가 최석주요. 무슨 일이요?”
할아버지가 모자 쓴 남자를 쏘아보았다. 남자가 할아버지에게 한 발짝 다가서는데 누군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최석주 선생님! 분명 최석주 선생님이 맞으시지요?”
고개를 돌리니 미자 아버지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 미자 친구구나. 윤서라고 했지?”
“네. 할아버지, 제 친구 아버지예요.”
미자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옆에 서 있던 모자 쓴 남자를 보고는 놀랐다.
“니시무라 경감, 여긴 어인 일이요?”
“예, 뭐 지나가다가. 김 상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이번에 총독부에서 초상화가를 찾기에 그 문제로 의논을 드리러 왔소.”
“아, 그러시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니시무라는 재빨리 사라져 갔다. 나는 그제야 할아버지의 손을 놓았다. 손을 펼치니 손바닥이 축축했다.
“선생님, 이번에 총독부에서 초상화 작업을 한답니다. 선생님을 추천하고 싶어서요.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총독부라고 했소?”
“예. 이번 작업을 끝내면 세간에 선생님 이름이 널리 알려질 것입니다. 좋은 기회지요.”
“아니요, 나는 그 작업을 안 할 거요.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많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오.”
“선생님, 이게 어떤 의민지 잘 모르시나 본데요.”
“난 분명히 내 뜻을 밝혔으니 이만 돌아가시오.”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미자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잡아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뒤를 돌아보니 미자 아버지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는 게 보였다.
“윤서, 너 이리 들어오너라. 당장.”
할아버지가 방 안으로 들어가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화를 내는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방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지난번에는 일본 선생한테 칭찬받았다고 좋아하더니 오늘은 친일파 놈 자식이랑 친구라고? 그게 사실이냐?”
“네, 미 미자랑 친구예요. 근데 미자는 좋은 애예요. 저한테 잘해 줘요.”
“아무리 잘해도 일본의 앞잡이 딸인데 그런 애랑 놀다니 네가 지금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칭찬받은 것, 마음 맞는 친구와 잘 지내는 것, 할아버지가 초상화를 그릴 수 있도록 하려고 한 것이 왜 잘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공부 잘하는 게 왜…… 흑흑, 잘못이에요? 저는 할아버지가 초상화 그릴 수 있게 되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 흑흑.”
할아버지는 흐느끼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공부라고 다 같은 공부가 아니다. 네가 해야 할 진짜 공부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서운하고 서러워서 울기만 했다.
“아버님! 죄송해요.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윤서가 왜 이러죠?”
뒤늦게 집으로 돌아온 부모님이 영문을 몰라 허둥댔다.
“늦었으니 윤서 데려다 재워라. 내일 이야기하자.”
할아버지의 말에 엄마가 나를 데리고 나왔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엄마가 무슨 일이냐고 자꾸 물었지만 대답하기가 싫었다.


3. 미자와 반 아이들


“당분간 윤서는 내가 데리고 있어야겠다.”
아침상을 받으면서 할아버지가 잘라 말했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가 할아버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상을 차리던 엄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멍하니 할아버지만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너희들은 일이 바빠 윤서를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윤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일본 놈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니,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아버님, 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앞으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엄마가 머리를 조아렸다.
“네가 일을 하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꽉 막힌 늙은이가 아니야. 너도 어제 있었던 일을 들으면 깜짝 놀랄 게다.”
“네? 어제 있었던 일이라뇨?”
“어제 윤서가 제 친구 아버지라고 나한테 소개를 하더라. 근데 그 작자가 뭐라고 한 줄 아냐?”
할아버지가 한숨을 쉬자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뭐라고 했는데요? 아버지.”
“총독부에서 초상화가를 찾는다고 나더러 초상화를 그려 달라더라. 윤서 딴에는 내 눈에 들려고 그런 모양인데 도대체 어떻게 이 지경까지 만들어?”
“죄송해요, 아버지.”
“죄송이고 뭐고 내가 윤서 데리고 화호리로 내려가서 가르쳐서 보낼 테니 딴소리 말아라.”
할아버지의 말에 엄마와 아빠는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러다 정말 화호리로 가야 되나 싶어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싫어요. 할아버지, 저 화호리에 절대로 안 가요.”
“그럼 계속 이렇게 일본 놈들 시키는 대로 살겠다는 거냐?”
“네,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예요.”
“훌륭한 사람?”
“네.”
할아버지에게 지지 않으려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자. 윤서야,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
갑작스러운 질문에 허를 찔린 것 같았다.
“왜 대답을 못 해? 너는 조선인이냐? 일본인이냐?”
“다 당연히 조선인이죠.”
학교에서 배운 대로 천황폐하의 자식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무서웠다.
“조선인이 일본 말을 배우고 일본 역사를 배우는 게 맞는 게냐? 일본인 같다는 칭찬 듣고 좋아하던데 그게 신나는 일이냔 말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처음 학교에 갔을 때부터 국어 시간에 일본어를 배웠고 역사 시간에 일본 역사를 배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나라를 빼앗아 간 일본을 미워하고 싫어할 순 있지만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공부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래 있으라고는 안 하마. 어차피 사진관을 여느라고 네 엄마, 아버지가 바쁘니 자리 잡을 때까지만 화호리에 있으란 말이다. 길어야 1년, 그보다 적을 수도 있고.”
“…….”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할아버지가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나는 밖에 좀 다녀와야겠다. 너희들은 며칠 뒤에 윤서가 내려갈 수 있게 채비를 좀 해다오.”
할아버지는 식사를 마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엄마, 나 어떡해?”
“할아버지가 저리 단호하시니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널 보낼 수도 없고…….”
엄마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윤서야, 할아버지 말씀이 옳은 것 같다. 아버지도 네가 화호리에 가는 거 찬성이야. 다른 환경에서 지내다 보면 느끼는 것도 많을 거야.”
믿었던 아버지마저 딴소리를 하자 짜증이 밀려왔다.
“싫어, 난 안 갈 거야.”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와 학교로 뛰어갔다.
“최윤서, 네 할아버지가 초상화 안 그리겠다고 했다며?”
교실 문 앞에서 마주친 미자가 나를 째려보았다.
“…….”
“우리 아버지가 너랑 어울리지 말래. 이상한 집안이라고.”
미자는 말을 마치고는 교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단짝 친구라고 믿었던 미자가 던진 말에 마음을 한 방 세게 맞은 것처럼 아팠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아이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냉랭하고 눈길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루 종일 말을 거는 아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집으로 와 버렸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교실에서 시끌벅적하게 놀고 있는 아이들한테 다가갔다.
“얘들아, 나도 좀 끼워 줘. 같이 놀자.”
갑자기 왁자지껄하던 소리가 그치고 아이들의 움직임도 멈췄다.
“최윤서, 네 할아버지 완전 이상하다며?”
항상 나한테 치여서 이등을 하는 일본인 아이가 앙칼지게 따지고 들었다.
“맞아, 저 아랫녘에 사는 촌뜨기 영감이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다고 우리 아버지가 그랬어.”
미자가 맞장구를 치자 아이들이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그렇게 설치더니 꼴좋다.”
“자기가 완전 잘난 줄 아나 봐.”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학교가 끝날 때까지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집에 와서도 내 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윤서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사진관에서 돌아온 엄마가 자꾸 물었다.
“이게 다 할아버지 때문이잖아. 아이들이 나랑 이야기도 안 하려고 해.”
“왜?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야지.”
나는 요 며칠 사이에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이야기했다. 이 모든 게 할아버지가 초상화를 그리지 않는다고 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을 하는데 눈물이 났다.
“윤서야, 엄마가 사진을 배울 때 미쳤다는 말까지 들었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다고 나서냐고, 더구나 여자가’라고 수군거렸거든. 하지만 엄마는 꼭 하고 말겠다고 결심했고 그 일을 해냈어.”
“지금 그 이야기를 왜 하는데?”
“할아버지가 총독부 관리들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겠다고 하는 건 옳은 일이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비난해. 돈도 벌고 이름도 알릴 수 있는 일인데 그걸 마다하니까.”
“나도 그래.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하는지, 날 야단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엄마도 널 화호리에 보내는 게 싫었어. 근데 네 말을 들으니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까지 왜 그래?”
그렇지 않아도 서러운데 엄마까지 내 마음도 몰라주는 것 같아서 더 슬펐다. 나는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내 눈물이 잦아들자 기다리던 엄마가 나를 달랬다.
“윤서야, 엄마 생각에는 반 아이들과 다시 친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그리고 이번 기회에 할아버지가 왜 그러는지 함께 지내면서 알아보는 것도 좋잖아.”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한참 아무 말 않고 있던 엄마가 방을 나갔다. 나는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엄마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히카다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최윤서! 미자가 한 말이 사실이냐? 총독부에서 하는 일에 네 할아버지가 훼방을 놓았다던데.”
“훼방이 아니라요.”
선생님은 내 말이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큰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관리들 초상화를 그리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이유가 뭐지?”
“…….”
“집에 가서 할아버지를 설득하도록 해라. 대일본제국에 필요한 일을 거절하다니. 영광으로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감히 조센징 주제에.”
교무실을 나오는데 눈물이 줄줄 흘렀다. 평소에 나를 칭찬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선생님 표정은 싸늘했다.
나는 교실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밖으로 나왔다. 종로까지 왔지만 사진관에 가기 싫어 거리를 헤맸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해가 지고 깜깜해질 무렵 집으로 향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 모퉁이를 도는데 바로 앞에 할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누군가와 함께였다. 나는 할아버지와 마주하기 싫었다. 할아버지가 집으로 들어가면 그때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알겠네. 어떻게든 내가 마련해 보겠네.”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한참 있다가 살짝 얼굴을 내밀어 보았더니 할아버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느릿느릿 걸어 집으로 갔다.
“윤서야!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무슨 일 있어?”
집 앞에 엄마와 아버지가 나와 있었다. 그 옆에 할아버지도 서 있었다. 나는 말할 기운도 없었다.
“어서 안으로 데려가 눕혀야겠다. 기운이 하나도 없구나.”
할아버지가 내 팔을 잡으며 부축했다.
“할아버지, 저 화호리에 갈게요.”
내 말에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췄다. 엄마도 아버지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알았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
나는 할아버지에게 의지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4. 화호리 가는 길


덜커덩거리며 기차가 출발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신태인으로 가는 기차에 나란히 앉았다. 경성역을 벗어나자마자 창밖에는 초록빛 물결이 일렁였다. 뙤약볕 아래서 벼들이 커가고 있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앞으로 닥칠 일들이 걱정되었다. 화호리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나도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를 곁눈질하며 눈치를 보다가 시무룩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피곤했는지 한참 동안 세상모르게 잠을 잤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창밖을 보니 대전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옆자리에 앉은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기차가 역에 멈추자 사람들이 우르르 기차에 올랐다. 사람들이 빈자리를 찾아 서둘러 앉기 시작했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는 내 앞자리에 짐 보따리를 든 아주머니가 앉았다. 그런데 아주머니 치마를 꼭 잡은 아이의 얼굴이 벌겋게 보였다. 아이는 축 늘어진 채 가끔씩 춥다고 칭얼거렸다. 아무래도 많이 아픈 것 같았다.
기차가 덜컹거리며 흔들리자 아이가 일본 여자의 기모노를 잡았다. 기모노로 한껏 멋을 낸 일본 여자의 눈 꼬리가 올라갔다.
“저리 치우지 못해? 에이, 더러워.”
일본 여자의 고함 소리에 놀라 아주머니가 아이를 안고 일어섰다. 일본 여자가 자리에 있던 아주머니의 짐 보따리를 들어 팽개쳤다.
‘아이가 아픈데 너무 하잖아!’
나는 속으로는 화가 났지만 나서서 뭐라고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본 여자는 널찍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머니의 짐을 주워 품에 안고 내 자리를 내주었다.
“여기 앉으세요.”
아주머니는 고맙다며 자리에 앉아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때 시끄러운 소리에 할아버지가 잠에서 깼다.
“아줌마, 아기가 아파요?”
“열이 있는 것 같아.”
내 말에 아주머니가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아이의 이마를 짚어 보더니 깜짝 놀랐다.
“열이 너무 높아. 아기 엄마, 어서 병원에 가야겠구먼.”
할아버지의 말에 아주머니는 초조하게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아이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자 일본 여자가 큰 소리로 차장을 불렀다.
“병이 옮으면 어쩌려고. 저 조센징 아이를 당장 치워요.”
“죄송합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차장이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두 사람에게 따졌다.
“아니, 아픈 아이를 두고 그렇게밖에 말을 못 하겠소?”
“당신이 왜 나서? 내 말이 틀렸어?”
일본 여자는 다짜고짜 반말을 해 댔다. 나는 할아버지의 팔을 잡아당겼다.
기차가 서자 차장이 아주머니와 아이를 쫓아냈다. 아이를 품에 안고 기차에서 쫓겨나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복잡해졌다.
‘학교에서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고 배웠는데…….’
아픈 아이를 내쫓고 편한 얼굴로 뻔뻔하게 앉아 있는 일본 여자를 보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할아버지도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었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신태인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경성보다는 못해도 생각보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다. 옆 선로에서는 인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쌀가마니를 화물칸에 싣느라 분주했다.
역 바깥에는 가게들이 끝도 없이 쭉 이어져 있었다. 싸전, 술 가게와 잡화점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고개를 돌리니 역 바로 옆에 널판과 철로 만들어진 건물들도 여러 개 있었다. 그 앞 빨간 벽돌 건물 위 붉은색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요?”
“쌀이 많이 나니까 방앗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기차로 쌀을 실어 가니 나르고 싣는 일을 해야 하고.”
“쌀을 어디로 가져가는데요?”
“군산으로, 거기서 또 일본으로 간단다.”
“와, 그럼 여기 사람들은 모두 부자겠네요? 쌀이 저렇게 많잖아요.”
“제대로 된 나라라면 그래야지. 쌀이 이렇게 많은데 굶는 사람이 부지기수니. 쯧쯧쯧.”
할아버지는 여전히 화난 얼굴이었지만 나는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역에서 화호리까지는 한참 가야 했다. 할아버지가 가마를 타자고 했다. 몇 걸음 걸어가자 손님을 기다리는 가마꾼들이 많았다. 그중 한 가마꾼들이 가마를 대자 할아버지가 가마를 탔다. 나도 다른 가마에 올랐다.
얼마 가지 않아 가마가 흔들려 속이 메스꺼웠다. 나는 가마에 달린 옆문을 열었다. 밖에는 들판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화호리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가마꾼에게 내리겠다고 했다. 흔들리는 가마를 오래 탔더니 토할 것 같았다.
“어! 어! 아이쿠!”
가마에서 내리는데 할아버지 가마를 들고 있던 가마꾼 하나가 갑자기 쓰러졌다. 순식간에 할아버지 가마가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놀라서 달려갔다. 가마 문을 여니 할아버지가 엎어져 있었다. 가마꾼들이 할아버지를 부축해 가마에서 꺼냈다.
“할아버지! 괜찮아요?”
“괜찮다. 괜찮아.”
할아버지는 오히려 놀란 나를 다독였다.
“저, 저놈이!”
그사이 가마꾼 하나가 누군가를 쫓아갔다. 멀리 아이 하나가 도망가는 게 보였다.
“어르신, 송구합니다요. 저놈 때문에 가마꾼이 쓰러졌지 뭡니까요.”
남아 있던 가마꾼이 할아버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가마 옆에 동그란 게 떨어져 있는 걸 집어 들었다.
“할아버지, 이게 뭐예요?”
“새끼를 꼬아 만든 건데 사내애들은 그걸로 공차기를 하지.”
나는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해서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하, 고 녀석. 진짜 빠르네.”
쫓아갔던 가마꾼이 허탈한 얼굴로 돌아왔다.
“어떤 놈이여?”
“모르지. 어린 녀석이 달리기가 어찌나 빠른지 도저히 잡을 수가 없더라고.”
가마꾼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할아버지가 “괜찮네. 놀다 그런 모양이지.”
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발길을 돌렸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5. 수봉이


“오늘부터 이 할애비랑 공부를 하자.”
할아버지가 들고 온 책을 펼쳤다. 알 수 없는 글자들이 가득했다.
“이게 뭐예요?”
“천자문이란다. 옛날부터 한자 공부를 할 때 아이들이 배웠던 글자들이다. 기본 중의 기본이니 열심히 따라 해야 한다. 이걸 다 마치면 한글도 가르쳐 주마.”
“네.”
대답은 했지만 읽고 쓰기를 반복하는 게 지루하기만 했다. 하품이 계속 나왔지만 할아버지 앞이라 계속 삼켰다.
“오늘은 할아버지가 초상화를 마무리해야 하니 너 혼자 공부하고 있어라.”
며칠 동안 계속되는 한자 공부에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문틈으로 할아버지가 작업하는 아래채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다. 나는 동네 구경이라도 하고 싶어 경성에서 가져온 모자를 챙겼다. 챙이 넓은 모자는 내가 제일 아끼는 건데 엄마를 졸라서 사느라고 꽤 고생을 했다.
집 밖을 나서니 생각보다 동네가 컸다. 집들도 많고 크고 높은 건물들도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담장 낮은 집 안을 슬쩍 보니 아주머니가 장독대를 씻느라 바빴다. 한참을 지켜보는데 아주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담장 아래로 몸을 숨기고 재빨리 달아났다. 허겁지겁 동네를 벗어나니 눈앞에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와, 진짜 예쁘다.”
벼들이 햇빛에 반짝거리고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양팔을 벌리고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오더니 순식간에 모자를 논 가운데로 날려 버렸다.
“어떡해!”
벼들이 빽빽한 논 안으로 들어가 보려 했지만 겁이 났다. 벼 이파리들은 창처럼 뾰족했다. 이제 막 이삭을 내밀기 시작한 벼들은 스치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하며 허둥댔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나타나더니, 논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 이거.”
키가 크고 마른 내 또래의 사내아이가 주워 온 모자를 내밀었다. 나는 엉겁결에 모자를 받았다. 아이는 이내 몸을 돌려 언덕길로 걸어갔다.
“얘? 너 여기 사니?”
“…….”
몸을 돌린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 고 고맙다고…….”
창피하게도 내 얼굴이 빨개졌다. 아이는 내 얼굴을 보더니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난 이수봉인데 넌 누구냐?”
“나 나는 최윤서야. 경성에서 왔어.”
수봉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동안 뭔가를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집을 만들고 있는데. 보여 줄까? 같이 갈래?”
“응.”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봉이는 신나게 경사진 산길을 달려갔다. 나도 질세라 수봉이의 뒤를 쫓아갔다.
수봉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는 숨이 차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헉헉, 여기가 어디야? 집은 어디 있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옆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지만 집 같은 것은 없었다. 수봉이는 목을 뒤로 젖히더니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우와!”
나는 수봉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눈앞에 상상하지도 못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대단하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를 보며 수봉이가 웃었다.
“이건 느티나무고 요건 갈참나무야. 올라가 볼래?”
수봉이가 먼저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봉이의 뒤를 따랐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있는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데 수직으로 오르는 계단이 부서질까 봐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무 위에 올라가니 자그마한 집이 있었다. 지붕은 없었지만 두 나뭇가지 사이에 작은 나무를 꼼꼼하게 채워 바닥을 만들고 나무를 이어서 벽을 만드는 중이었다. 딱 봐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믿기지가 않아. 어떻게 이런 곳에 집을 만들었어?”
“나만의 집을 만들고 싶었거든. 이제 벽을 마저 두르고 지붕만 얹으면 끝이야.”
수봉이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지붕도 만들 거야?”
“응, 근데 사실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걱정이야. 아버지한테 물어봐도 모른다고만 해서.”
수봉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이대로도 멋져. 바람도 정말 시원하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신기하고 멋진 풍경이 꿈처럼 느껴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내 긴 머리가 날리고, 갈참나무 잎이 흔들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수봉이는 어떻게 집을 만들었는지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저기 아래 진짜 큰 나무가 있네. 그 옆에 큰 집도 보여.”
“…….”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던 수봉이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나는 수봉이의 표정을 살폈다.
“저건 당산나무야. 우리 집이 원래 저기였어. 저 큰 집이 있던 자리.”
“그래? 근데 여기 벽에 창을 하나 다는 게 어때?”
나는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수봉이의 얼굴이 슬퍼 보여서 빨리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창을 내려고 해 봤는데 내 실력으로는 안 되더라. 그래서…….”
집 이야기가 나오자 수봉이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수봉이와 놀다 보니 어느새 하늘에 노을이 번지는 게 보였다. 할머니의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어서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나 여기 또 놀러 와도 되니?”
“응, 언제든지 와.”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멋진 집에 아무 때나 놀러 올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나무 위에 있는 수봉이에게 소리쳤다.
“내일 또 올게. 지붕 만드는 것도 꼭 보고 싶어.”
수봉이가 나무 위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도 한참 동안 손을 흔들어 주고는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웠는데 자꾸만 나무집이 아른거렸다. 어떻게 지붕을 만들지 고민이라던 수봉이의 말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지붕을 만들었다가 부수곤 했다.
아침에 할머니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눈이 떠졌다. 어서 나무집에 가 보고 싶어서 할머니에게 아침밥을 달라고 졸라댔다. 할머니는 대문을 빠져나오는 내 등 뒤에 대고 계집애가 댓바람부터 어딜 가냐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톡, 톡.
갈참나무 아래에 서니 뭔가가 떨어졌다. 바닥을 보니 손톱만 한 도토리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아직 초록빛이었지만 껍질이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흘렀다. 나는 도토리를 주워 손에 쥐고 나무 위에 올라갔다. 집은 텅 비어 있었지만 아늑하고 편안했다. 주워온 도토리를 벽 사이에 끼우니 맞춤이었다. 반짝거리는 게 보석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도토리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
요란하게 땅바닥을 긁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몰라서 두리번거렸더니 수봉이가 나뭇가지를 꺾어 끌고 오는 게 보였다. 나무에서 내려와 수봉이에게 달려갔다.
“어? 이렇게 일찍 왔어?”
“응. 아까 왔어.”
나는 수봉이가 끌고 온 나무 한쪽 귀퉁이를 들었다. 수봉이는 환한 얼굴로 다른 쪽 나뭇가지를 잡고 앞장을 섰다. 나는 수봉이와 함께 나무를 자르고 묶어서 벽을 쌓았다. 조금씩 완성돼 가는 집을 보니 뿌듯했다.


6. 아오키


“공부하라고 했더니 하루 종일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게야?”
해가 진후에 살금살금 집에 들어오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말했다.
“하도 답답해서 마을 구경을 했어요.”
“고깟 것도 못 참아서 어디다 쓸꼬.”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찼다.
“할아버지, 저 학교에 가고 싶어요. 여기 화호리에도 학교가 있지요?”
“기어이 다시 학교에 가겠다는 게야?”
나는 할아버지 말에 속이 상했다. 그런데 곁에 있던 할머니가 하는 말은 더 놀라웠다.
“기집애가 무슨 학교를 간다고 그려? 얌전하게 바느질이나 음식 만드는 법 배워서 시집갈 준비를 해야지!”
“경성에 있는 내 친구들은 다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저만 집에 있으라고요? 싫어요. 저도 학교에 가서 산수도 배우고 창가도 부를 거예요. 학교에서 가사나 재봉도 배운단 말이에요.”
“윤서야, 일본 말에, 일본 역사를 배우는 학교가 뭐가 좋으냐? 우리 말, 우리 역사, 우리 산천에 대해 배우는 게 진짜 공부지.”
“그래도 혼자 배우는 것은 싫어요. 집에서는 친구도 없잖아요.”
할아버지는 나를 붙잡고 설득하고 싶어 했지만 내 방으로 와 버렸다. 나는 어떻게든 할아버지를 졸라서 학교에 보내 달라고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수봉이한테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물어볼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루 종일 나랑 집 만들고 논 걸 보면 수봉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밤에 학교에 갈 궁리를 하느라 늦잠을 잤더니 할머니는 벌써 밭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없는 사이 할아버지에게 학교에 가겠다는 내 생각을 분명하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갈 준비나 하라는 할머니의 말은 떠올리기도 싫었다.
“할아버지! 저 윤서예요.”
아래채에 있는 할아버지의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둘러보니 나무로 된 커다란 책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그리다가 만 그림들이 있었다. 책상 한편엔 크기가 다른 붓들이 가득했고, 붓 옆에는 그릇에 색색의 물감들이 담겨 있었다. 벽에는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었는데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 그림에 눈이 갔다.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했고,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도 행복해 보였다.
“할아버지, 어디 계세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할아버지를 찾았다. 고개를 돌리다 보니 벽에 작은 문이 있었다. 문을 살짝 밀었더니 문이 열렸다. 그곳에도 여러 개의 그림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 사람은 눈이 왜 이렇지?’
그림 하나를 꺼내 보니 안경 속의 눈이 사팔뜨기였다. 눈빛이 살아 있는 게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튀어나와 뭐라고 말을 할 것같이 보였다. 다시 다른 그림을 꺼냈더니 이번엔 용무늬가 그려진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에 쓴 관이며 신발이 고급스러워서 신분이 아주 높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호랑이 털모자를 쓴 사람이며 관복을 입은 사람 그림들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그림 속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사실적이었다.
“계시오? 아무도 없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넋을 놓고 보고 있던 나는 후다닥 그림을 놓고 밖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나는 마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화가 영감은 어디 갔지?”
남자 하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뾰족한 얼굴에 험악한 인상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잠깐 나가셨어요. 누구세요?”
“아오키 도련님, 화가 영감이 없나 봅니다.”
“나도 들었어. 기무라.”
아오키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곱상한데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기무라, 얘가 아버지가 말하던 그 화가의 손녀인가 봐. 아버지의 말을 얘한테 전해줘.”
“하이.”
기무라는 아오키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나는 어른이 내 또래의 아이에게 쩔쩔매는 게 놀라웠다.
“구마모토 사장님이 네 할아버지에게 사장님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셨다. 네 할애비가 오거든 농장에 다녀가라는 말을 꼭 전하도록 해.”
기무라는 말을 마치고 아오키에게 다가갔다.
“너도 같이 올래?”
“…….”
아오키의 갑작스러운 말에 말문이 막혔다. 처음 보는 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도 그렇고 왜 나까지 오라고 하는지도 이해가 안 되었다.
“올 거지? 꼭 왔으면 좋겠어. 구마모토 농장과 우리 집 구경시켜 줄게.”
아오키는 씽긋 웃으며 집 밖으로 걸어갔다. 기무라가 그 뒤를 따라갔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구마모토 농장은 뭐지? 걔는 일본 애 같은데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머리에 가득 찼다. 궁금함이 점점 커져만 갔다.
“윤서야, 안방으로 좀 오너라.”
갑자기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학교 문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냉큼 안방으로 건너갔다.
“이곳 화호리에는 학교가 두 군데 있거든. 하나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공부하는 심상소학교고 나머지 하나는 조선인들만 다니는 학교야. 교육 시설이나 환경은 심상소학교가 훨씬 좋지만 들어가기가 어렵다더라. 몇 명 뽑지도 않는대. 공부하기도 힘들고. 그러니 조선인 학교에 가는 게 어떠냐?”
“아니요. 기왕이면 좋은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시험에서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미리 포기하는 건 싫어요.”
할아버지는 내키지 않는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경성에서도 다른 애들한테 뒤처지지 않았어요. 저 공부 잘했어요.”
“공부를 잘하는 게 꼭 좋은 일은 아니다.”
자랑스러워야 할 내 말에 칼로 무 자르듯 하는 할아버지가 이해가 안 돼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공부를 잘하는 게 왜 안 좋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보자고 했다. 갑자기 말이 끊겨 어색해진 분위기를 없애려고 나는 기무라가 한 말을 꺼냈다.
“아까 구마모토 농장에서 사람이 왔어요. 사장님 초상화를 그려 달래요. 할아버지더러 농장으로 오라고 했어요.”
“뭐? 구마모토 사장 초상화를?”
할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나 반듯하고 단정한 표정의 할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모습에 괜히 눈치가 보였다.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건 화가로서 실력을 인정받고 돈도 버는 일인데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방을 나왔다.


7. 구마모토 농장


“영감, 왜 농장에 안 온 거지?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아침 일찍 기무라가 쳐들어왔다. 할머니가 냉큼 나서서 할아버지가 그동안 몸살을 앓았다고 둘러댔다. 기무라는 당장 가지 않으면 좋지 못할 거라고 협박했다. 할아버지가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가자 기무라가 나를 쳐다보았다.
“도련님이 너도 함께 오라고 했다.”
“나, 나도요?”
“그래, 지난번에도 오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냐?”
“그 그건 아닌데…….”
기무라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나는 기무라가 아오키가 오라고 하면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그 아일 왜 데려오라는 게요?”
준비를 마치고 나오던 할아버지가 놀라 물었다.
“내가 어찌 알아. 도련님의 명령이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저랑 함께 가요.”
기무라에게 봉변을 당할까 봐 내가 서둘러 할아버지를 말렸다. 할아버지는 못마땅한지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우리는 기무라를 따라 구마모토 농장으로 향했다.
농장 입구에는 철로 만든 큰 문이 있었다. 경성에서 다니던 학교 교문보다도 컸다. 농장 안으로 들어갔더니 커다란 건물들이 눈앞에 떡 버티고 있었다. 학교보다 큰 건물이 다섯 개나 있었는데 그중 2층으로 된 건물은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건물들을 지나 한참 올라갔더니 낮은 언덕 위에 커다란 집이 있었다. 집 주위를 나무로 덧대었는데 무늬들이 독특했다. 집 뒤로 아름드리나무들이 호위하듯 서 있었다.
“왔니?”
아오키가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한 척 구는 게 어처구니가 없어 대답하지 않았다. 나와 아오키를 번갈아 보는 할아버지의 눈치도 보였다.
“할아버지, 저번에 학교 알아보러 가셨을 때 쟤가 왔었어요. 그날 제가 말했잖아요. 초상화 그려 달라고 했다고요.”
할아버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 어서 들어가. 사장님 기다리게 하지 말고.”
기무라의 말에 할아버지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너 여기서 학교 다닐 거야? 그럼 우리 학교에 들어와라. 우리 학교 되게 좋거든. 근데 시험을 통과해야 해. 시험이 어려운데 어떡하지? 참, 넌 몇 살이야?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지?”
“…….”
아오키가 내 곁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속으로는 ‘흥, 바보 아냐?’라고 생각했다. 기무라가 ‘아오키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걸 몇 번이나 들었는데 이름도 모른다고 생각하다니 머리가 아주 나쁜 게 틀림없었다.
집이 넓어서인지 복도도 길었다. 조금 걸어가니 방문이 보였다. 문을 열자 다다미가 깔린 방 안에 기모노를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각진 얼굴에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눈, 코, 입이 모두 컸다. 짙은 눈썹과 꽉 다문 입술이 고집스러워 보이는 게 말이 많은 아오키와는 딴판이었다.
“어서 오시오, 화가 양반.”
“예, 사장님.”
할아버지는 구마모토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나도 할아버지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구마모토가 나를 흘낏 쳐다보았다.
“이 아이는 누구요?”
“제 손녀올시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오키가 나섰다.
“아버지, 이 아이가 경성에서 왔대요. 이제 화호리에서 학교에 다녀야 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심상소학교에 들어오라고 했어요. 오늘은 시험공부를 도와주려고 오라고 했고요.”
“시험이 어려울 텐데 붙을 수 있을까? 물론 우등생인 우리 아오키가 도와준다니 별걱정 없겠지만 말이다. 하하하.”
나는 기가 막혔다.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도와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선심 쓰는 듯한 말투도 기분이 나빴다.
“화가 양반, 내 특별히 심상소학교 교장한테 부탁해 놓으리다. 우리 아들이 저리 나서는데 나도 그냥 있을 수야 없지. 안 그렇소?”
“…….”
할아버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아오키가 끼어들었다.
“아버지, 근데 갑자기 왜 초상화를 그리려고 해요?”
“이제 우리 가문도 조선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으니 대대손손 이어 가야 하지 않겠니? 그래서 내 초상화를 그려 너와 네 아들들에게 남겨 주려고 한다. 가문을 일군 수장이 누구였는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부유하게 살게 되었는지 알아야 하니까 말이야.”
“예.”
아오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양반, 방금 내가 왜 초상화를 그리려고 하는지 들었잖소? 권위가 드러날 수 있도록 그려 줄 수 있겠소?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소.”
할아버지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러시오? 무슨 문제라도 있소?”
“지금 그려야 할 그림이 밀려 있어서요.”
“지금 뭐라고 하는 게요? 내 그림을 안 그리겠다는 건 아니겠지? 화가 양반!”
구마모토의 눈빛이 매서웠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두려웠다.
“아닙니다. 조정을 해 봐야지요. 내일부터 한 차례씩 이곳으로 와서 밑그림 작업을 하지요. 전신상은 그림 값이 쌀 30석입니다.”
“쌀 30석? 가격이 만만치 않구려. 뭐 좋소. 그리합시다.”
구마모토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아버지, 저희는 제 방으로 가서 공부할게요.”
아오키의 말에 구마모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할아버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와 아오키를 번갈아 보았다.
“화가 양반, 걱정 마시오. 공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려보내리다. 우리 아오키가 모처럼 맘먹고 좋은 일 하려는 모양인데 꺾어서야 되겠소. 오히려 영광인 줄 아시오.”
구마모토의 말에 할아버지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다짐을 받았다.
“윤서야, 잠깐만 있다가 바로 오너라. 할아버지도 오늘은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으니. 집에서 기다리마.”
“네, 할아버지. 금방 갈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할아버지를 안심시켰다.
아오키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섰다. 아오키의 뒤를 따라가던 나는 집의 규모가 대단하다는 걸 다시 느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특히 벽에 걸려 있는 길고 날카로운 칼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2층으로 올라온 아오키가 방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나는 창틀에 기대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어때, 화호리가 한눈에 보이지?”
“응, 끝이 안 보여.”
“저 넓은 땅이 대부분 우리 아버지 땅이야.”
“뭐? 방금 뭐라고 그랬어?”
“저게 다 우리 아버지 땅이라고. 그래서 이곳이 구마모토 농장이잖아. 들어오면서 보지 않았어? 쌀 창고가 여러 개 있었잖아.”
“…….”
나는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한 사람이 저렇게 많은 땅을 가질 수 있는 건지, 그 땅에서 나오는 그 많은 쌀들은 다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했다. 문득 처음 화호리에 왔을 때 많은 쌀들이 군산으로 또 일본으로 간다던 할아버지의 말들이 떠올랐다.
“우리 아버지가 산 하나를 깎아서 이 농장을 만들었거든. 너 우리 집 뒤에 있는 나무들 봤지? 그게 당산나무라고 하더라. 당산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라며? 이제는 우리를 지켜주는 나무가 된 거지.”
아오키는 자랑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당산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어서 마을 사람 모두가 소중하게 보호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당산나무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아오키가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너 일본어 어느 정도 해? 우리 학교에 들어오려면 일본어를 잘해야 해. 듣고 말하기는 기본이고 특히 관용 표현에 신경 써야 해. 세 개 이상 꼭 나오거든.”
“속담 같은 거 말이야? 그건 잘 모르는데.”
“걱정 마. 내가 가르쳐 줄게. 참, 「황국신민서사」는 하나도 틀리면 안 돼. 그럼 바로 떨어져.”
“외우긴 했는데…….”
“그 정도론 안 된다니까. 잠꼬대로도 할 수 있을 때까지 줄줄 나와야 해.”
아오키는 깨알처럼 세세하게 짚어 가며 공부할 것들을 정리했다. 만약에 이런 정보 없이 시험을 봤다면 분명 떨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오키가 알려 준 것들을 종이에 적었다. 그때 10시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들렸다.
“어? 너무 늦었다. 할아버지 가셨을까?”
“아래층에 내려가 보자.”
내가 걱정하는 게 느껴졌는지 아오키가 서둘렀다.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아오키가 데려다주겠다며 따라왔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걸었다.
길모퉁이를 도는데 눈앞으로 뭔가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팔로 얼굴을 가리는데 퍽 소리가 났다. 눈을 떠 보니 아오키가 내 앞을 막고 있었다. 아오키가 씩씩거리며 돌아서자 등이 흙투성이가 된 게 보였다.
“야, 사람한테 던지면 어떡해!”
아오키의 고함에 앞을 보니 수봉이가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나는 멍하니 수봉이를 바라보았다. 수봉이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쏘아보았다. 눈길을 돌려 곁에 있는 아오키를 보고는 입을 삐죽였다.
아오키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이수봉, 너 사과 안 해?”
“내가 뭘 잘못했는데? 갑자기 너희가 나올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
수봉이는 흙투성이가 된 짚으로 만든 공을 주워 들고는 다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수, 수봉아.”
“…….”
수봉이는 대답도 없이 가 버렸다. 아오키가 멀어져 가는 수봉이를 보며 화를 냈다.
“고마운 줄도 모르는 나쁜 자식.”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쟤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한테 와서 돈 빌려 달라고 죽는소리를 했거든. 우리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돈 빌려줬는데도 고마운 줄도 모른다니까. 그것도 저랑 나랑 친구라서 빌려준 건데.”
아오키는 말을 하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공으로 맞은 등이 아픈 듯했다.
“많이 아프니?”
“괘 괜찮아.”
나대신 공을 맞고도 억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아오키가 고맙고 또 미안했다.
“내 이름은 윤서야. 최윤서. 나이는 열두 살이고.”
“와, 나랑 나이가 같아. 윤서, 이름도 예쁘다.”
아오키가 환하게 웃었다.
“참, 내 이름은.”
“알아, 아오키.”
아오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는 나를 보자 아오키도 덩달아 웃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집을 나섰다. 어제 아오키와 같이 있는 나를 보고 놀라던 수봉이 때문에 잠을 설쳤다. 아무래도 수봉이가 아오키와 내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서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수봉아!”
나무집 위에 수봉이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반가워서 손을 흔들었는데 수봉이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나 거기 올라가도 되니?”
괜히 주눅이 들어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안 돼. 올라오지 마.”
수봉이는 화가 잔뜩 났는지 고함을 질렀다. 나는 어떻게든 오해를 풀고 싶어 서둘러 말을 쏟아냈다.
“어제 네가 보 본 것은 오해야. 어제 아오키랑 두 번째 만난 거야. 그것도 다 걔가 먼저 온 거고.”
“…….”
수봉이가 소리 지르지 않고 듣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걔를 왜 만났냐면 걔네 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한테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해가지고.”
“뭐? 초상화?”
“응, 우리 할아버지가 초상화를 그리거든. 그러니까 오해를 풀었으면 좋겠어. 수봉아.”
“흥, 그 할애비에 그 손녀인 주제에.”
수봉이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순간 내가 헛소리를 들은 건가 싶었다. 수봉이는 벌떡 일어나 나무 아래에 있는 나를 노려보았다.
“우리 조선인들은 먹고살 게 없어서 하루 넘기는 것도 힘든데 네 할아버지는 일본인들한테 그림 그려 주고 돈 받아 챙기고. 그 돈으로 떵떵거리고 사니까 좋지?”
“뭐?”
“너랑 수준 맞는 아오키 놈이랑 놀면 되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수봉이의 말에 기가 막혀서 처음엔 대꾸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사람 아니야. 욕심만 가득한 사람 아니라고. 그리고 일본인하고 조선인이 잘 지내야지. 똑같은 천황폐하의 신민이잖아.”
“뭐? 일본인하고 잘 지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난 척하기는. 아오키가 이곳에 왔을 때 난 아오키랑 친하게 지냈었어. 근데 걔네 아버지가 어떻게 한 줄 알아?”
“아오키 아버지가 돈도 빌려줬다며?”
“뭐? 그 자식이 그래? 우리 집을 빼앗았으면서 그렇게 말해?”
수봉이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수봉이는 그런 나를 보며 소리쳤다.
“지금 아오키네 집이 우리 집이 있던 곳이야. 그곳에서 우리 가족 모두 행복했었다고. 난 반드시 우리 집을 되찾고 말 거라고.”
이제야 수봉이가 아오키를 싫어하는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집을 빼앗기고 엄마를 잃었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
“너 앞으로 다시는 여기 오지 마. 빨리 꺼져.”
수봉이의 매몰찬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나는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알았어, 알았다고. 나도 다시는 여기 안 올 거거든.”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대고는 무작정 앞으로 뛰었다. 나쁜 놈, 못된 놈, 내가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끄집어내 중얼거렸다.
집으로 돌아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화호리에 처음 도착하던 날, 할아버지 가마에 새끼를 꼬아 만든 공을 던지고 도망간 아이. 그 아이가 바로 수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할아버지가 일본인들에게 빌붙어서 산다니? 더구나 혼자서 떵떵거리고 산다니 말이 되는 소리야?’
나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나는 수봉이가 했던 ‘그 할애비에 그 손녀’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림을 그려 달라는 구마모토에게 할아버지가 전신상은 쌀 30석이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갑부인 구마모토조차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라고 한 걸 보면 수봉이가 일본인 초상화 그려 주고 그 돈으로 떵떵거리고 산다고 한 게 괜한 말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야. 허투루 돈 쓴다고 할머니한테 그렇게 잔소리하는 할아버지가?’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시는 너랑 이야기하나 봐라.’
꺼지라고 소리치던 수봉이를 떠올리니 다시 화가 솟구쳤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8. 입학시험


“오늘은 그동안 했던 거 모두 복습해야 해. 내일이 시험 날인 거 알지?”
“알았어.”
아오키의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몇 주일 동안 아오키는 내 선생님이 되었다. 아오키가 어찌나 꼼꼼한지 질릴 때도 많았다. 외울 때까지 닦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아오키는 그동안 나를 가르쳤던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질문을 했다.
대부분 반복하고 또 반복한 거라서 저절로 기억이 났다. 내가 답을 맞힐 때마다 아오키가 즐거워했다.
“잠깐 쉬자. 내려가서 간식 가져올게.”
아오키가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 나는 창문을 열었다. 2층이라서 농부들이 논에서 피를 뽑는 게 보였다. 저들 대부분은 거대한 구마모토 농장의 소작인들이었다. 아오키에게 화호리의 논 대부분이 자기 아버지의 땅이라는 말을 들었던 날, 집에 가자마자 할아버지에게 물었더니 할아버지가 한숨을 쉬면서 말해 주었다. 조선인들은 먹고살 게 없어 헐값에 구마모토에게 논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수봉이 생각이 났었다. 아오키의 아버지에게 돈을 빌렸다는데 수봉이네도 구마모토에게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딴 자식 걱정을 내가 왜 해?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억지로 수봉이 생각을 떨쳐 냈다.
아오키는 짧은 휴식을 끝내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연달아 질문을 해 대는 바람에 나도 지치고 힘들었다.
“그만, 이제 집에 갈래.”
“응, 그래.”
순순히 받아들이는 아오키의 모습이 놀라워서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더니 아오키가 낄낄거렸다.
“그래야 내일 시험을 잘 볼 거 아냐.”
“맞아.”
나는 잽싸게 맞장구를 쳤다. 어서 집으로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고 싶었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구마모토가 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데 아오키가 내 몸을 밀었다. 나는 그냥 집 밖으로 나왔다.
집 밖에서 낡고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 하나가 기무라를 붙들고 사정을 하고 있는 걸 보았다. 뼈만 앙상한 남자의 표정이 절박했다.
“사장님을 만나게 해 주시오. 빌린 돈을 갚으러 왔으니.”
“사장님이 지금 안 계신다니까. 내일 오라고 내일.”
“당신이 받아서 사장님께 전해 주면 되잖소.”
사내의 말에 기무라가 펄쩍 뛰었다.
“돈 관리는 사장님이 직접 하니까. 나는 모른다니까.”
기무라는 남자의 말을 싹둑 자르고는 집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하릴없이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아오키, 네 아빠 집에 있잖아. 아까 내가 분명히 봤어.”
“그 그래? 나는 모 못 봤는데? 네가 잘못 본 거 아니야?”
“…….”
말을 더듬으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아오키가 이상했다. 자기 아버지를 봤는데 없다고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오키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몇 번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내일 있을 시험을 떠올렸다. 어서 집에 가고 싶어서 발길을 돌렸다. 밤에 잠자리에 누웠는데도 시험 걱정 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아오키가 함께 학교에 가자고 우리 집으로 왔다. 긴장된 탓인지 밥도 넘어가지 않아서 그냥 집을 나왔다. 할아버지는 별말이 없었다. 표정을 보니 지금이라도 말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할머니도 시험 잘 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무척 서운했다. 갑자기 경성에 있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잘할 수 있어.”
아오키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나마 아오키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오키는 나를 교무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일본의 역사를 시대 흐름에 따라 말해 봐라.”
“이 관용 표현을 설명해 보아라.”
일본인 선생님은 깐깐하게 따져 물었다. 신기하게도 아오키와 함께 풀었던 문제들이 고대로 나온 경우가 많았다. 나는 아오키와 함께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황국신민서사」를 외웠다. 행여 낱말 하나라도 틀릴까 봐 조바심쳤는데 다행히도 틀린 곳은 없었다.
“앞으로 학교에서 조선말을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된다. 적발되면 바로 퇴학이야. 알았나?”
“예.”
선생님의 말에 엉겁결에 대답을 했다.
“그 그럼 하 합격인가요?”
“그렇다. 내일부터 학교에 와도 된다.”
“고 고맙습니다.”
나는 인사를 꾸벅하고는 교무실을 나왔다. 내일부터 학교에 다닐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복도에 서서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가슴이 쿵쾅쿵쾅했다.
“합격이야?”
눈을 뜨니 아오키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오키가 내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때 드르륵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왔다.
“언제부터 학교에 나오래?”
“내일부터.”
내 말에 아오키가 잘됐다며 손뼉을 쳤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에 아오키는 서둘러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기뻐해 주실까?’
생각해 보니 두 분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껏 부풀었던 마음이 바람 빠지듯 식어 갔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점점 더 느려졌다.
모퉁이를 도는데 집 앞에 어떤 남자가 기웃대는 게 보였다.
‘누구지? 그림 그리러 온 손님인가?’
나는 빠르게 걸어 그 사람 곁으로 갔다.
“초상화 그리러 오셨어요?”
순간 그 남자가 깜짝 놀라며 뒤돌아섰다. 남자가 어찌나 크게 놀라는지 나도 덩달아 가슴이 내려앉았다.
“누 누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다.”
내 말에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훑어보고는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 나는 남자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날 보고 놀라는지, 저렇게 도망치는 이유가 뭔지 고개만 갸우뚱거려졌다.
멀어져 가는 남자를 바라보던 나는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아래채 문 앞에 서서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할아버지, 저 시험에 붙었어요. 내일부터 학교에 나오래요.”
나는 할아버지가 뭐라고 할지 궁금해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알았다’고 말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참고 또 참았는데도 찔끔 눈물이 나왔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할아버지가 왜 유독 학교 문제에서는 차갑게 구는지 속상했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랑 똑같아.’
나는 저녁밥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이불 속에만 있었다. 할머니가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어 댔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입을 삐쭉거려 보았다.
학교에 같이 가자며 찾아온 아오키는 내 얼굴이 엉망인 것을 보고는 눈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걷기만 했다.
학교에서도 낯선 아이들 틈에 앉아 있으려니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 경성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지냈던 일들을 떠올리니 화호리로 오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 후회가 되었다.


9. 수상한 사람들


“윤서야, 이리 오너라.”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마당에서 할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할아버지 곁에는 어떤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사람 같았다. 가까이 가면서 보니 지난번에 대문 앞에서 만났던 사람이었다. 나는 할아버지 곁에서 걸음을 멈췄다.
“인사 드려라. 당분간 우리 집에 묵을 황 선생이다. 초상화를 그리러 왔는데 마땅히 지낼 곳이 없어 우리와 같이 지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 그래.”
내가 머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는데 웃지도 않고, 말까지 더듬고, 초상화를 그리러 왔다면서 지난번엔 왜 도망쳤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이상한 아저씨네’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아저씨와 함께 아래채로 가고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까지 마쳐야 하는 숙제를 꺼내 놓고 보니 다섯 개였다. 배운 걸 정리해야 하는 게 두 개, 외워야 하는 게 세 개나 있었다.
‘숙제가 왜 이렇게 많아.’
심상소학교에 들어간 지도 어느새 사 개월이 넘었다. 들어가기도 힘들었지만 공부하는 건 훨씬 더 어려웠다. 일본인 아이들이 훨씬 많고 조선인 아이들은 몇 명 없어 잘못하면 따돌림 당하기 십상이었다. 나는 일본인 아이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똑같은 잘못을 해도 조선 아이들에게 더 심하게 야단을 치는 일본인 선생님 과목에서는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을 꺼내 숙제를 시작했다. 꼼짝하지 않고 열심히 풀었더니 겨우 마쳤는데 딱 한 문제가 막혀서 풀리지 않았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아오키한테 알려 달라고 해야겠어.’
나는 책을 덮고 방에서 나왔다. 부엌에서 나오던 할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녁밥 먹어야 하는데 어디 가려는 겨?”
“금방 갔다 올게요. 숙제 모르는 게 있어서요.”
나는 재빨리 대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두워지는데 여자가 어딜 돌아다니느냐는 할머니의 고함이 들렸다.
나는 경사진 비탈길을 뛰어 올라갔다. 할머니의 잔소리에서 벗어나려면 빨리 다녀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보시오. 내 말 좀 들어주시오.”
모퉁이를 돌아서던 나는 큰 소리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아오키 집 앞에 한 남자가 담에 기대어 반쯤 쓰러져 있었다. 아이 하나가 남자의 팔을 부축하고 있었는데 남자의 몸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땅 없으면 우리 식구 모두 굶어 죽는단 말이요. 제발 한 번만 봐주시오.”
남자의 울먹이는 소리가 길어지자 기무라가 나타났다.
“어서 꺼져. 이렇게 계속 시끄럽게 굴면 순사를 부를 거야.”
“사장님께 말 좀 잘해 주시오. 내가 약속한 날짜에 돈을 갚으러 왔다는 걸 당신도 알지 않소?”
“난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런 일이 있었나?”
기무라는 느물거리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남자가 기무라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제발 그 땅만은 돌려주시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갚을 테니 한 번만 봐주시오.”
“하, 이제 보니 순 거짓말이구만. 돈도 없으면서 갚으러 왔었다는 게 말이 되냐고.”
“아니오, 참말이요. 갑자기 애들 어멈이 죽는 바람에 장례를 치르느라…… 어떻게든 돈을 마련할 테니 조금만 제발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당장 꺼져. 더 이상 그런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기무라가 남자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더니 밀쳐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이가 기무라에게 달려들었다.
“수봉아, 안 된다. 안 돼.”
남자가 달려들어 아이를 붙잡았다. 기무라가 아이의 따귀를 갈기자 남자가 아이를 몸으로 감쌌다.
남자와 함께 울고 있는 아이는 수봉이었다. 나는 다짜고짜 기무라에게 달려갔다.
“이 아저씨 말이 맞아요. 그날 구마모토 사장님이 집에 있었잖아요.”
순간 기무라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있으면서 없다고 거짓말했잖아요. 일부러 안 만난 거 아니에요?”
“무 무슨 수작이야? 너 같은 조센징 계집아이 말을 누 누가 믿어 줄 것 같아?”
기무라가 막무가내로 우기자 수봉이가 다시 나섰다.
“왜 거짓말해요? 일부러 안 만난 거 맞잖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하지 말고 썩 꺼져. 이미 그 땅은 구마모토 사장님 것으로 정리되었으니까.”
기무라는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수봉이가 문을 쾅쾅쾅 두드렸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수봉아, 이제 그만하자. 집에 가자.”
수봉이 아버지가 문에 매달려 있는 수봉이를 끌고 농장을 나섰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가 다 늦게 어딜 갔다 왔느냐며 밥 먹으라고 호통을 쳤다. 밥이 들어갈 것 같지 않았지만 밥상 앞으로 갔다. 밥상 앞에는 황 선생 아저씨도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밥을 깨작거리는 나를 보고 물었다.
“윤서아, 왜 밥맛이 없어?”
“할아버지!”
입을 떼긴 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게다가 모르는 아저씨도 있어서 더 힘들었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지켜보았다.
“제가 처음 화호리에 오던 날, 가마에 공 던졌던 아이 기억나세요?”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아까 아오키네 집 앞에서, 공 던졌던 그 애, 수봉이와 수봉이 아버지를 봤어요.”
“뭐?”
“논을 맡기고 돈을 빌렸대요. 약속한 날에 갚으러 왔더니 구마모토 사장이 없어서 못 만나고 가진 돈은 다 써 버린 거죠. 근데 수봉이 아버지가 돈 갚으러 온 날, 제가 구마모토 사장님이 집에 있는 걸 봤어요. 아무래도 일부러 피한 것 같아요.”
“그게 그자가 땅을 늘려온 수법이다.”
“예?”
나는 할아버지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할아버지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구마모토가 화호리의 그 많은 땅들을 어떻게 손에 넣었겠니? 식산은행에서 저리로 돈을 빌려서 가난한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갚으러 오면 일부러 안 만나고, 날짜가 지나면 담보로 잡은 땅을 빼앗은 거지.”
나는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옆에 앉아 있던 황 선생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나쁜 놈들. 남의 나라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가난한 백성들을 쥐어짜 호의호식하다니.”
더 이상 밥을 먹을 수가 없어 내 방으로 돌아왔다. 화호리의 넓은 들판이 자기 아버지 땅이라며 자랑스러워하던 아오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라고 말했던 수봉이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수봉이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게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일본인 학교에 가는 걸 싫어했어. 구마모토 사장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게 틀림없고. 그런데 왜 구마모토 사장의 초상화를 그리는 거지?’
수봉이가 한 말을 떠올려 보면 할아버지가 일본인 초상화를 그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건데 할아버지는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초상화를 왜 그리는 건지 할아버지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경성에서 총독부에 걸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했을 때 거절한 것을 보면 돈 때문은 아닌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평소 할아버지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전신상 초상화 하나에 쌀 30석이라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벌면서 할머니한테 낭비한다고 잔소리하는 것도 이상했다. 이해되지 않는 할아버지의 행동들이 떠올라 밤이 깊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10. 농진 경진 대회


들판의 벼들이 노랗게 익어가자 여기저기서 추수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늦은 밤까지 벼를 베고, 말리고, 홀태로 벼를 훑느라 정신이 없었다.
추수가 끝날 무렵 구마모토 농장 사람들이 모두 모여 농진 경진 대회를 열었다. 기무라가 구마모토의 초대장을 가지고 왔다. 꼭 참석해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쪽으로 오시오. 화가 양반.”
구마모토가 학교에 마련된 훈화대 위에서 할아버지에게 손짓을 했다. 할아버지가 괜찮다고 했지만 구마모토는 기어이 할아버지를 불러올렸다. 나는 훈화대 옆에 서 있었다. 구마모토와 나란히 앉아 있던 아오키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못 본 척 시치미를 뗐다. 수봉이와 그 애 아버지를 본 뒤부터 아오키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마음이 불편하고 뭔지 모를 거리가 느껴졌다.
“화가 양반, 인사하시오. 이분은 도에서 오늘 행사를 참관하러 오신 국장님이시오.”
“예, 그러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할아버지가 인사를 하자 구마모토는 할아버지가 초상화를 잘 그린다며 자신의 초상화도 마음에 쏙 들게 그렸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운동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른, 아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화호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나온 것 같았다.
“구마모토 사장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기무라의 말이 끝나자 구마모토가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동안 낙후된 조선의 영농 환경을 개선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소똥을 활용한 퇴비를 만들어 땅의 질을 높이고, 종자 개량을 통해 생산량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이곳 화호리의 구마모토 농장은 조선의 어느 지역보다도 높은 생산량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일곱 개의 구역 중 평당 수확량이 가장 많은 사람들 순서로 상을 주는 자리입니다. 누가 얼마나 많은 수확을 했는지 지금 발표하겠습니다.”
구마모토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등수가 발표되자 일등에 뽑힌 사람이 팔짝팔짝 뛰며 앞으로 나왔다. 상으로 받은 돈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상을 받았다. 돈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낫이나 호미 같은 농기구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상을 받은 사람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상을 받은 턱을 내라느니 낸다느니 하며 술잔이 오갔다.
훈화대 위에 있던 사람들도 아래로 내려왔다. 할아버지 곁으로 갔더니 아오키가 내 곁으로 와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아는 체를 했다. 국장과 구마모토는 내려와서도 손을 맞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단하시오, 구마모토 사장. 놀랍기만 합니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국장님.”
“아니오. 아니오. 누가 뭐래도 이건 칭찬받아 마땅하오.”
“고맙습니다. 사실 한 평에 네 근 이상 쌀을 수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밤낮으로 쉬지 않고 철저히 농사 지도를 한 덕분에 가능한 결과입니다.”
“노고가 크셨소 그려. 내 반드시 도지사께 말씀 올리리다.”
“정 그러시면 소작료 인상을 허락해 주십사 청을 드려 주시겠습니까?”
“당연하지요. 이렇게 평당 수확량이 높으니 도지사께서도 그만한 청은 들어주실 겁니다.”
국장의 말에 구마모토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들을 지켜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구마모토와 국장이 학교를 빠져나가자 경진 대회도 끝이 났다. 아오키는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 바보 멍텅구리들아!”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얼굴이 벌게진 수봉이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에라이, 제 살 깎아 먹는 줄도 모르는 천하에 멍청한 놈들.”
수봉이 아버지가 사람들을 향해 침을 퉤 뱉었다. 그때 경진 대회에서 일등상을 탄 사람이 화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땅 뺏기더니 눈에 뵈는 게 없냐? 이렇게 좋은 날, 어디서 행패여?”
“좋은 날? 누구한테 좋은 날이여? 나락 보태 상 받으니 뵈는 게 없지?”
수봉이 아버지의 말에 무슨 말이냐며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한 평에 나락 너 근 이상 나온다는 게 가당키나 헌 일이냐고. 몰래 나락 보태 부풀려 상 받으면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지?”
“뭐 뭔 소린지 나 나는 도통 모르겄네.”
일등상을 받은 사람이 당황하며 말했다.
“모르겄다고? 구마모토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랴? 내가 이렇게 농사 지도를 잘혀서 수확량이 높으니 소작료 올려 받아도 아무 말도 허지 마라. 이러고 나설 게 빤하다는 거여.”
수봉이 아버지가 한 말이 조금 전에 구마모토가 국장에게 하던 말과 똑같아서 나는 깜짝 놀랐다. 수군대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참말이여?”
“지금도 소작료가 높아 살기 힘든디 또 소작료를 올린다는 말이여?”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 댔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못 살겠다고 악을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봉이 아버지는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들더니 꿀꺽꿀꺽 목 안으로 들이부었다.
그때 사람들 틈에서 수봉이가 나타나 제 아버지를 부축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몸을 가누지 못하자 수봉이도 덩달아 비틀거렸다. 나는 혼자서 애쓰는 수봉이가 불쌍해서 앞으로 나가 수봉이 아버지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오키가 놀라는 게 보였다. 아오키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더니 도망쳐 버렸다.
“그 더러운 손 치워.”
수봉이가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내 말 안 들려? 그 더러운 손으로 우리 아버지 만지지 말란 말이야?”
“뭐?”
“네 잘난 할아버지가 일본 놈들 그림 그려 주면서 아부하고 돈 벌잖아? 넌 잘난 척하는 아오키랑 딱 붙어 다니고. 그렇게 사니까 네가 조선인이 아니고 일본인인 것 같으냐?”
수봉이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마음 한쪽에서는 ‘기무라에게 구마모토 사장이 집에 있는 걸 봤다고 이야기해 줬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라는 서운함이 솟았다. 나는 수봉이 아버지의 팔에서 손을 뗐다. 수봉이는 비틀거리면서 아버지를 부축하며 가 버렸다.
“윤서야,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할아버지는 별다른 말없이 집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나는 할아버지 뒤를 따라서 걸었다.
“다녀오셨습니까?”
“…….”
마당에 있던 황 선생 아저씨가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대꾸도 하지 않고 아래채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도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할아버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무슨 얘기냐?”
할아버지가 방바닥에 앉자 나도 할아버지 맞은편에 앉았다.
“전 수봉이네 땅을 빼앗으려고 거짓말을 한 구마모토 사장이 나쁘다고 생각해요. 구마모토 사장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수봉이 아버지에게 놀란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할아버지와 저를 일본 사람들한테 붙어서 호강하며 산다는 수봉이 말은 잘못된 거잖아요.”
“어떤 이유에서건 내가 돈을 받고 일본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건 사실이잖니?”
“그럼 할아버지는 수봉이가 한 말이 옳다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화가 나지 않아요?”
나는 할아버지가 수봉이가 한 말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그 할애비에 그 손녀네’라며 비웃던 수봉이의 목소리가 떠올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넌 경성에서도 공부 잘했다고 말했었고 이곳에서도 굳이 심상소학교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어. 그 이유가 뭐겠니? 네 마음속에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 있다는 거지. 어떤 걸 공부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야.”
“…….”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 믿었던 것들이 진짜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말이 다 옳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아래채에서 나왔다.


11. 잡혀간 수봉이 아버지


“도대체 이게 뭔 일이냐고?”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당게.”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얼굴을 붉히며 불평을 터뜨리는 걸 보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잘못했다가는 불똥이 나한테 떨어질까 무서웠다. 꾹 참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큰일이 생긴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마침 아래채에서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할아버지한테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는데 밖에 나갔던 황 선생 아저씨가 돌아왔다. 그림을 그리러 왔다는 아저씨는 두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우리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르신, 큰일 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화호보통학교 운동장으로 몰려가고 있어요.”
“왜 그런다든가?”
“구마모토가 소작료를 올린 모양입니다. 사람들 불만이 대단해요.”
황 선생 아저씨의 말에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찼다.
“지난번 경진 대회 때 도지사에게 부탁한다더니 기어이 일을 저질렀구만. 그나저나 큰일이네.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불겠어. 소작인들이 다치지 않아야 할 텐데.”
“아무래도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제가 떠나야 할 모양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걸세.”
할아버지는 다급하게 말을 하다가 곁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채색이 덜 되었다는 말일세.”
“예.”
황 선생 아저씨는 방 안으로 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뒤쫓아 아래채로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할머니 눈치를 보았다. 할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자마자 슬그머니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무리 지어 몰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 뒤를 따라갔다.
학교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갔다.
“소작료를 올린다니, 우리더러 죽으라는 이야기지 뭐여요?”
“맞아요. 농자금에다 비료 값, 소작료까지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도대체 우리는 뭘 먹고 사냐고요.”
아주머니 하나가 소작료 고지서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여기저기서 ‘옳소’ ‘맞아요. 맞아’라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동진 수리조합비를 왜 소작료에 넣느냐고요. 그건 땅 주인이 내야 하는 거 아녀요?”
“만만하니까 그런 거여. 우리가 땅 떼일까 봐 끽소리도 못 헌 게.”
사람들 한숨 소리가 커졌다. 땅딸막한 아저씨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그때 수봉이 애비 말이 딱 들어맞었당게요.”
“고게 뭔 소리여?”
“아, 그 농진 경진 대회 때요. 구마모토 사장이 ‘내가 이렇게 농사 지도를 잘혀서 수확량이 높응게 소작료 올려 받아도 아무 말도 허지 마라’ 이러고 나설 거라고 혔잖어요.”
“옴마, 그러네. 참말로 용허네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긍게 왜 나락을 보태냐고요. 이게 다 생산량을 부풀린 탓이랑게요.”
사람들이 경진 대회에서 일등상을 받은 사람을 훔쳐보았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때 사람들이 학교 입구를 가리키며 술렁거렸다.
“오메, 저게 누구여?”
“수봉이 애비네, 수봉이 애비.”
고개를 돌리니 사람들에게 이끌려 운동장으로 걸어오는 수봉이 아버지가 보였다. 수봉이는 멀찌감치 떨어져 걸어오고 있었다. 땅딸막한 아저씨가 득달같이 달려 나가 수봉이 아버지를 데리고 왔다.
“이보게, 자네 말이 딱 들어맞았네. 소작료를 올렸으니 어쩌면 좋겄는가?”
“지 맘대로 올렸는데 우리가 그대로 내면 쓰겄어요? 못 낸다고 싸워야지요. 싸워서 원래대로 돌려놓아야지요.”
“근디 구마모토가 그렇게 호락호락헐까이. 우리가 못 낸다고 허믄 가만있지 않을 거인디.”
수봉이 아버지의 말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렇게 내고도 먹고살 수 있겄어요?”
“아니여, 굶어 죽기 딱 맞당게.”
“그럼, 못 내는 게 맞지요. 우리들은 안 내는 게 아니라 못 내는 거잖여요.”
“맞네, 맞아.”
동네 사람들이 수봉이 아버지의 말에 수긍했다. 수봉이 아버지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가 하나만 물을게요. 우리 마을 사람들은 소작료를 못 낸다고 결정한 거지요? 반대하는 사람 있으면 지금 말하셔요.”
“…….”
아무도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자 수봉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모두들 소작료 고지서 가지고 오시요.”
사람들이 소작료 고지서를 들고 와서 수봉이 아버지가 가리킨 곳에 놓고 자리로 돌아갔다. 미처 고지서를 가지고 오지 못한 사람들은 고지서를 가지러 집으로 뛰어갔다. 사람들은 잔뜩 굳은 얼굴로 수북이 쌓인 고지서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어 바람이 흙먼지를 날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집에 다녀온 사람들도 소작료 고지서를 내놓고 들어갔다.
수봉이 아버지는 품속에서 부싯돌을 꺼내 들었다.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탁탁탁!
부싯돌이 부딪치자 불꽃이 피어났다. 수봉이 아버지가 고지서에 불을 붙였다. 확 하고 불길이 솟구치더니 고지서가 불에 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고지서가 불에 탔으니 이제 다 끝났습니다.”
수봉이 아버지의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서서 집으로 돌아갔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수봉이가 자기 아버지 곁으로 왔다. 수봉이 아버지가 수봉이의 손을 잡으며 일어섰다. 수봉이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수봉이가 나에게 마치 ‘오늘 본 일을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수봉이는 자기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와 황 선생 아저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마루에 앉아 있었다.
“저들이 수봉이 애비를 주재소로 끌고 갔으니 가만두겠는가?”
“그러니 어찌합니까? 빼 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구마모토를 찾아가 사정을 하면 어떻겠는가?”
“안 돼요!”
“안 됩니다!”
황 선생 아저씨와 내가 동시에 말했다. 할아버지는 마당에 서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재빨리 마루로 올라갔다.
“할아버지, 어제 수봉이 아버지가 소작료 고지서를 모아서 태우는 걸 봤어요. 그런 사람을 아오키 아버지가 가만두겠어요?”
“윤서야, 이건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안 돼요, 할아버지. 집에 있으면서도 없다고 시치미를 떼고 수봉이네 재산을 빼앗았다고요. 할아버지가 그랬잖아요. 그런 사람이 할아버지 말을 들어줄 리 없어요.”
나는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무서웠다. 수봉이 아버지처럼 할아버지도 끌려갈까 봐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렸다.
“윤서 말이 맞습니다. 어르신, 잠시 기다려 보시지요. 상황을 좀 지켜본 뒤에 어떻게 할지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황 선생 아저씨가 눈짓을 했다. 나는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왔다. 머릿속에 할아버지가 끌려가는 장면이 자꾸만 그려졌다.


12. 고등계 형사 니시무라


교실에 들어서는데 아오키 주변에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나서기 좋아하는 남자애가 아오키 코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아오키, 네 아버지가 소작인들을 혼쭐냈다며?”
“응. 이참에 버릇을 단단히 고쳐 준다고 그랬어.”
아오키가 대답하기 무섭게 아이들이 한마디씩 했다.
“특히 그 쥐새끼 같은 자식, 수봉이 말이야. 그 자식 아버지가 소작료 고지서 걷어서 다 태웠다더라.”
“그래서 주재소로 끌려갔잖아. 아마 정신 못 차리게 맞았을 거다. 낄낄낄.”
아이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오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띄워 주니까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아오키가 내 자리로 왔다.
“윤서야, 너도 소식 들었지? 수봉이 아버지가 주재소에 끌려간 거?”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아오키가 내게 소곤거렸다.
“네가 착한 건 알겠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마.”
“뭘? 뭘 그러지 말라고?”
“수봉이랑 어울리지 말란 말이야. 걔 아버지가 순사들한테 완전히 찍혔거든. 너도 괜한 오해를 받을지 모르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아오키가 거들먹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기가 막혀서 콧방귀를 뀌었다. 위해 주는 척하면서 은근히 겁을 주는 아오키가 괘씸하고, 기분 나빴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와 버렸다.
대문을 여니 마당에 한 아이가 있었다. 수봉이었다. 나는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감았다 떴다.
“너 왜 여 여기에 있어?”
“…….”
수봉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루로 올라가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가 방에서 뛰어나오며 입에 손가락을 댔다.
“쉿, 조용히 혀. 사람들이 알면 무슨 경을 칠지 몰라.”
“할머니, 쟤가 왜 여기 있어요?”
“낸들 아냐? 네 할애비가 데려다 놓고 휭하니 나갔응게.”
할머니의 말에 내 궁금증은 더 커져만 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당에 멍하니 서 있는 수봉이를 쳐다보았다.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쓰였다. 나는 수봉이 팔을 잡아끌고 와 마루에 앉혔다. 수봉이는 마루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더니 이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우당탕탕!
대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황 선생 아저씨와 할아버지가 축 늘어져 있는 수봉이 아버지를 부축해 들어왔다.
“아버지!”
수봉이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아래채로 가자. 어서 문을 열어.”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재빨리 아래채 문을 열어젖혔다. 황 선생 아저씨가 수봉이 아버지를 부축해서 아래채로 들어갔다. 수봉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따라 들어갔다.
“어쩌자고 저런 사람을 집으로 데려와. 무슨 경을 치려고!”
할머니가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무섭기도 하고 조마조마하기도 해서 아래채로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다.
“어? 문이 열려 있네. 윤서야!”
내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나는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아래채의 댓돌 위에 여러 켤레의 신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게 보였다. 방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뒤돌아섰다.
“아오키? 웬일이야?”
“너 수업 끝나자마자 집으로 왔지? 선생님이 문제 풀어 오라고 숙제 내줬어. 그래서 너랑 같이 숙제하려고 왔어.”
아오키는 책과 공책을 꺼내 보여 주었다.
“그 그래? 고 고마워. 근데 우리 집 말고 너희 집에 가서 숙제하면 안 돼?”
나는 아오키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억지로 웃었다. 행여나 입 주위의 근육이 씰룩거리는 걸 들킬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래?”
아오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냉큼 마루 위로 달려가 책가방을 가지고 왔다. 그사이 아오키의 눈길이 아래채 쪽으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빨리 가자.”
“응? 으응.”
나는 아오키를 앞세워 집을 빠져나왔다. 아오키가 댓돌 위의 신발들을 봤는지 못 봤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기가 겁이 났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수다를 떨었다.
“학교에서 배가 조금 아팠거든. 그래서 집으로 빨리 온 거야.”
“지금은 괜찮아?”
“응, 괜찮아졌어. 요즘에 내가 좀 아파. 밥맛도 없고 기운도 없고.”
“뭐 힘든 일이라도 있어?”
“아니야. 내가 힘든 게 뭐 있다고? 공부가 좀 어려워서 그런가 봐.”
아오키의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아 나는 호들갑을 떨었다. 아오키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오키의 집에 들어가는데 구마모토 사장과 낯선 사람이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인사를 했는데도 구마모토 사장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소작인들과 사이가 나빠지자 조선인인 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오키, 인사 드려라. 경시청 고등계 형사 니시무라이시다.”
구마모토 사장의 말에 아오키가 달려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아드님이 아주 영특하게 생겼군요. 조선인들을 지배하고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려면 자손이 아주 중요하지요. 사장님은 걱정을 안 해도 되겠습니다.”
“다행히 학교에서도 알아주는 수재라서 한시름 덜었습니다만 소작인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답니다.”
“그래요? 소작인에다가 불령선인까지. 이곳 화호리가 문제가 많군요.”
눈살을 찌푸리던 니시무라가 눈을 들어 나를 째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저 아이는 누굽니까?”
“아, 쟤는 조선인 아이인데 우리 아이가 공부를 가르쳐 주고 있답니다. 우리 아이가 공부 못하는 불쌍한 아이를 지나치지 못하는 착한 성격이라…….”
니시무라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만 올라가 봐라.”
구마모토의 말에 우리는 아오키의 방으로 올라왔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려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오키, 불령선인이 뭐야?”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말이야. 일본에 저항하고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불령선인이라고 해.”
“그 그래?”
“예를 들면 수봉이 아버지 같은 사람도 불령선인이야.”
아오키의 말에 나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나도 막 수봉이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오키가 나에게 불쑥 물었다.
“아까 네 할아버지 방 댓돌에 신발이 여러 개 있던데 혹시 누가 왔어?”
“하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뻔하지. 그림을 그려 달라고 오는 거지 뭐.”
“그래? 네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와 각별하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불령선인을 조심하라고 알려 주는 거야.”
“고마워. 근데 숙제는 뭐야?”
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오키는 들고 있던 책과 공책을 펼쳤다. 나는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숙제를 끝마쳤다.
“벌써 어두워졌어. 할머니가 걱정할 거야. 빨리 집에 가야겠다.”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아오키네 집을 빠져나왔다. 혹시라도 니시무라 형사를 만날지 몰라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는 후다닥 집을 향해 달렸다.
“할아버지, 큰일 났어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래채의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방 안에는 수봉이 아버지를 가운데 두고 할아버지와 황 선생 아저씨, 그리고 수봉이가 앉아 있었다. 수봉이 아버지는 겨우 정신을 차린 듯했다.
“무슨 일이냐?”
“아오키의 집에 경시청 고등계 형사 ‘니시무라’라는 사람이 있어요. 경성에서 왔대요.”
“니시무라? 정말 니시무라가 맞니?”
할아버지에게 말하는데 황 선생 아저씨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모습이 어떻더냐? 눈썹이 짙고 미간에 까만 사마귀가 있지 않던?”
“네 맞아요. 바로 그 사람이에요.”
“니시무라는 아주 악명이 높은 형사야.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 동포들은 그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끈질기게 따라붙으니까.”
“아저씨도 그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그래, 경성에서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지. 함정에 빠질 뻔했는데 겨우 빠져나왔어.”
“그 사람이 엄마 사진관에 왔던 적이 있었어요. 할아버지 이름도 알고 있었어요.”
“그게 참말이냐?”
“네, 미간에 난 까만 사마귀 때문에 기억이 났어요.”
할아버지와 황 선생 아저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서어서 이곳을 떠나는 게 좋겠소.”
“선생님은요? 니시무라가 선생님을 알고 있다는 게 걸립니다. 무슨 낌새를 챈 것 같아요.”
“내 걱정은 마시오. 나한테서는 아무 증거도 찾을 수 없을 테니.”
할아버지가 다락으로 올라가더니 손에 뭔가를 안고 나왔다.
“그동안 몰래 준비한 금덩이요. 오늘 밤 이것을 가지고 떠나시오.”
“고맙습니다. 독립 자금에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황 선생 아저씨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아껴 모은 돈을 모두 내어 주는 할아버지의 행동이 놀라웠고 황 선생 아저씨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더 놀라웠다.
할아버지는 수봉이와 수봉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황 선생, 미안하지만 이 아이와 아이 아버지를 데리고 떠나면 안 되겠소?”
“예?”
“이 사람들은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가 없소. 허니 이들도 데려가 주시오.”
할아버지의 말에 황 선생 아저씨는 잠시 망설였다. 내가 생각해도 일본인 형사한테 쫓기는데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게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우리 수봉이만이라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안 돼요. 아버지, 저 안 가요. 아버지 두고 못 가요.”
수봉이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수봉아, 아버지는 어떻게든 살 수 있어. 하지만 넌 이곳에서 살 수가 없다. 이분을 따라가. 해방이 되면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수봉이 아버지가 수봉이를 품에 안았다. 수봉이는 아버지 품에서 울고 또 울었다.
황 선생 아저씨가 일어나 허리춤에 금덩이를 찼다. 울고 있는 수봉이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만 울고 나랑 같이 가자. 해방이 되는 날, 우리 다시 이곳에 오자꾸나.”
수봉이는 눈물을 닦고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방을 나서려던 수봉이가 걸음을 멈췄다.
“윤서야, 그동안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네 할아버지의 깊은 뜻도 모르고 괜히 오해했었어.”
“아니야, 나도 몰랐는데 뭐. 경성에 가면 일단 우리 엄마를 찾아가서 도와 달라고 해. ‘부인 사진관’에 가서 내 친구라고 하면 돼.”
수봉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두 사람은 사라졌다.
“저도 이제 떠나겠습니다.”
“아니, 이 사람아. 이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 게야?”
수봉이 아버지가 다리를 끌며 일어서자 할아버지가 팔을 잡았다.
“곧 저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겁니다. 더 이상 폐를 끼칠 순 없어요.”
할아버지가 아무리 말려도 수봉이 아버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더는 말릴 수 없다는 걸 알고 할아버지는 수봉이 아버지 손에 돈을 쥐여 주었다. 수봉이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갔다.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어둠 속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13. 기습


쾅쾅쾅!
잠결에 들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아 어두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쾅쾅쾅!
“문 열어!”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할머니가 뛰어가 대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칼을 찬 순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맨 마지막에 니시무라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래요?”
할머니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나는 할아버지 뒤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내밀었다.
“당신이 최석주야?”
“그렇소. 내가 최석주요.”
니시무라가 호통을 쳤지만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 집에 불령선인이 숨어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어디 있는지 당장 말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불령선인이라니?”
할아버지는 니시무라의 협박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니시무라가 코웃음을 쳤다.
“샅샅이 뒤져라.”
순사들이 신발을 신은 채 마루로 뛰어올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몸이 덜덜 떨려서 할아버지 소맷자락을 꽉 붙잡았다. 방에서 나온 순사들이 아래채로 달려갔다. 할아버지는 꼿꼿하게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낌새를 채고 도주한 거 아니야? 집 주위를 샅샅이 살펴!”
니시무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참 뒤에 순사들이 돌아와 아무것도 없다고 보고했다. 니시무라가 할아버지를 쏘아보았다.
“저 영감탱이를 끌고 가라. 독립 운동하는 자들 뒤를 봐준다는 첩보가 있어.”
순사들이 할아버지의 양팔을 붙들고 끌고 나가자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뒤를 쫓았다.
“이놈들아, 우리 영감이 무슨 죄가 있다고 데려가?”
순사들이 할머니를 밀치자 할머니가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놀라서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는 땅바닥을 치면서 못 데려간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순사들은 할아버지를 끌고 사라져 버렸다.
“아이고, 어쩐다냐? 네 할애비 어떡헌다냐?”
할머니는 넋을 놓고 앉아서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할머니를 일으켜 세워 방으로 갔다. 할머니는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할머니 곁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헉헉, 아오키! 헉헉.”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아오키 집으로 달렸다. 아오키는 헉헉대느라 제대로 말도 못 하는 나를 보고 의아해했다.
“윤서야, 무슨 일이야?”
“도와줘. 우리 할아버지가 순사들에게 잡혀갔어.”
“뭐? 너희 할아버지가?”
“응, 제발 도와줘. 네 아버지라면 우리 할아버지 풀려나게 해 주실 수 있잖아.”
아오키는 다급해 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거봐,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속에서 불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시가 급한데 마치 자기가 한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나무라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미안해.”
나는 꾹 참고 억지로 사과를 했다.
“알았어. 아버지한테 말해 볼게.”
“고 고마워, 정말. 근데 오늘은 학교에 못 갈 것 같아.”
“알았어, 선생님한테 내가 말할게.”
아오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눈을 감고 누워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놈들이 네 할애비 족친다고 때리면 어쩐다냐.”
할머니 말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밤이 되었지만 무서운 상상만 되어 잠도 잘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할머니가 주재소로 달려갔다. 나도 할머니를 뒤따라갔다. 주재소 앞에는 칼을 찬 순사들이 지켜 서 있었다. 우리는 차마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주재소 문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순사들에게 잡힌 사람들이 주재소로 끌려가고 있었다. 나는 무서워서 고개를 돌렸다. 하루 종일 동동거리고 서 있었지만 할아버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를 부축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를 방에 눕혀 드리고 나서 부엌으로 갔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할머니를 위해 죽이라도 끓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죽을 끓여 부엌을 나오는데 덜컹 대문이 열렸다.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쓰러졌다. 온통 피투성이였다. 나는 놀라서 죽 그릇을 놓쳐 버렸다.
“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달려가며 나는 할머니를 불렀다. 방 안에서 나오던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할머니와 나는 할아버지를 부축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사람을 이 모양이 되도록 두들겨 패? 천하에 나쁜 놈들.”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몸을 살피며 욕을 해 댔다. 내가 물을 떠 오자 할머니는 수건으로 할아버지의 얼굴을 닦아 냈다. 할아버지가 계속 의식이 없어 할머니는 의원을 부르러 달려 나갔다.
“으으.”
할아버지가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 제 말 들려요? 할아버지!”
“유 윤서야, 무 물 좀 다오.”
몸을 부축해 일으켰더니 할아버지가 물을 한두 모금 마셨다.
“괜찮아요? 많이 아프죠?”
“끙, 괜찮다. 거뜬해.”
할아버지는 다시 몸을 누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방문이 열리더니 할머니가 의원과 함께 들어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정신을 찾은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의원이 진맥을 하고 나서 어혈을 빼야 한다며 탕약을 지어 줬다. 할머니가 서둘러 탕약을 달이러 갔다.
“영감, 화가 영감 있어?”
다음 날 기무라가 찾아왔다. 나는 행여 할아버지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서 잔뜩 긴장했다. 할머니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초주검이 돼서 누워 있는 사람을 왜 찾아요?”
“그 정도에서 끝난 것도 구마모토 사장님 은덕인 줄 알아. 사장님 아니었으면 영감은 죽었을 거라고. 어서 영감 나오라고 해.”
할머니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기무라를 할아버지에게 데려갔다.
“화가 영감, 도지사의 초상화를 그리러 전주로 가야겠소. 이번 소작쟁의 때문에 구마모토 사장님의 입장이 무척 난처해졌어. 그러니 영감이 도지사 초상화를 잘 그려서 환심을 사라고. 그게 영감을 구해 준 사장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란 말이지.”
“그게 지금 할 소리예요? 다 죽게 생긴 사람한테 어디로 가란 말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시오.”
기무라의 말에 할머니가 펄쩍 뛰었다.
“정 이렇게 나오면 다시 주재소에 끌려갈 줄 알아. 나는 확실하게 전했으니까.”
기무라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협박을 하더니 가 버렸다.
“천하에 인정머리 없는 놈들,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다는 걸 뻔히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냔 말이여.”
할머니가 계속해서 구시렁거렸지만 할아버지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탕약을 가져오자 할아버지는 일어나 앉아 겨우 다 마셨다. 약을 마신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입술을 꽉 물었다. 하지만 ‘아구구구’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왜 일어나려고 해요? 답답해도 좀 참아야지.”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다가앉아 이불을 덮어 드렸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할아버지.”
“구마모토의 말대로 내가 도지사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 저들의 비위를 맞춰 주면서 황 선생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 줘야 해.”
“아직도 아픈데 어떻게 그림을 그려요? 더구나 전주까지 가야잖아요?”
“…….”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기운을 차리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다시 쓰러질까 봐 걱정도 되고 안타깝기만 했다. 어떻게든지 할아버지를 돕고 싶었다. 그때 머리를 스쳐 가는 게 있었다.
“맞다, 사진. 할아버지, 사진이요.”
내가 소리를 지르자 할아버지가 눈을 떴다.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면 되잖아요. 사진을 가져오라고 하면 돼요.”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14. 초상화


“수고했소, 화가 양반. 당신이 그려 준 초상화 덕분에 도지사께 칭찬을 들었소. 그동안 불미스러웠던 일도 모두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고.”
“예. 그러셨군요.”
구마모토가 활짝 웃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구마모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걸 보았다.
“흠, 오늘 내가 당신과 손녀를 부른 것은 고맙다는 말도 하고 부탁할 일도 있어서요.”
나는 왜 나랑 함께 오라고 했는지 궁금했던 참이라 귀를 쫑긋 세웠다.
“총독부에서 화가 양반을 일본에 보내 고관대작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라는구려. 내가 모든 경비를 책임질 테니 여행도 할 겸 다녀오시오. 그리고 우리 아오키도 보내려고 하니 손녀도 함께 가는 게 좋겠소.”
구마모토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도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갑작스럽다는 건 아는데 총독부에서 추진하는 일이라서 어쩔 수가 없소. 빨리 준비해서 가도록 할 테니 그리 아시오.”
“할아버지가 나이도 있으신데 일본까지 멀리 가는 건 힘들 것 같아요.”
구마모토의 일방적인 말에 나라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몸도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초상화를 그리느라 고생한 할아버지를 또 일본까지 가라는 것은 너무하는 것 같았다. 구마모토는 인상을 쓰며 나를 쳐다봤다.
“힘들지 않게 최대한 편의를 봐줄 테니 걱정 마시오, 화가 양반. 그리 알고 이만 돌아가시오.”
구마모토의 차가운 목소리에 우리는 쫓겨나듯 집을 나섰다. 구마모토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할아버지는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윤서야!”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아오키가 나를 불렀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먼저 집으로 가시라고 했다.
“윤서야, 우리 같이 일본에 가자. 할아버지한테 일본에 가자고 해. 응?”
해맑은 얼굴로 신나게 이야기하는 아오키를 보니 난처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긴 여행을 잘 해낼지 걱정돼. 지난번에 고문당한 것도 있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이 널 도와줬는데. 우리 아버지에게 말해서 네 할아버지도 구해 주고.”
“알아, 여러 가지로 도와준 거 고맙게 생각해. 근데 어쩔 수 없어.”
아오키는 잠시 망설이더니 작정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넌 나랑 같이 일본에 가야 해. 아니, 갈 수밖에 없을 걸?”
“뭐?”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갑자기 돌변한 아오키의 모습이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일본에 가지 않는다면 아버지한테 털어놓을 거야.”
“뭘?”
“네가 학교에서 일찍 가 버려서 내가 산수 숙제 같이하자고 너희 집에 간 날, 내가 네 할아버지 방 앞에서 수봉이의 신발을 봤거든.”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턱 막혔다. 여기서 아오키에게 모든 걸 들킨다면 그 이후에 할아버지에게 벌어질 일을 떠올리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 떨어진 짚신이 있었어. 분명 아이 거였어. 생각을 해 봤더니 수봉이 신발이더라.”
“네가 잘못 본 거지. 수봉이 짚신이 왜 거기에 있겠어?”
“그래? 하지만 내가 이걸 아버지에게 말하면 네 할아버지는 다시 잡혀갈 게 뻔해. 다시 고문을 당할지도 몰라. 안 그래?”
아오키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윤서야, 난 정말 일본에 가 보고 싶어. 너도 조선인과 일본인은 하나라고 배웠잖아. 일본에 가서 그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보고 오자. 우리 함께.”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오키는 환하게 웃고는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할아버지에게 아오키가 한 말을 전했다.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았다.
“괜찮다. 걱정 안 해도 돼. 나도 이참에 일본에 가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그게 누군데요?”
“…….”
할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윤서야, 이걸 들고 날 따라오너라.”
숯불 화로를 든 할아버지가 턱으로 가리킨 것은 놋쇠 그릇이었다. 그릇 안에는 파란 녹이 다닥다닥했다. 나는 놋쇠 그릇을 들고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할아버지는 집 모퉁이에 화로를 내려놓았다. 나도 화로 옆에 놋쇠 그릇을 내려놓았다.
“할아버지, 이 놋쇠 그릇은 속이 왜 파래요?”
“놋쇠 그릇에 소금물을 담아 놓으면 파란 녹이 생기는 거란다. 그걸로 파란색 물감을 만들지.”
할아버지는 놋쇠 그릇에 붙은 녹을 하나도 남김없이 긁어냈다. 그걸 솥에 붓더니 물을 넣고 숯불 위에서 하루 종일 끓였다. 저녁에 보니 한주먹만큼의 파란색 물감이 생겼다.
다음 날에는 그동안 썩혀 놓았던 볏짚을 솥에 넣고 끓였다.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아 나는 할아버지 곁에 가지 않았다.
물감 준비가 끝나자 할아버지는 나를 아래채로 데리고 갔다.
“윤서야, 할아버지가 그림 그릴 때 잔심부름을 해 줄래?”
“정말요? 네, 그럴게요.”
할아버지를 따라가는데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할아버지는 틀에 비단을 붙이더니 그 위에 이상한 물을 여러 번 칠했다.
“이건 아교와 명반을 섞은 풀이란다. 색을 제대로 드러내려면 기본이 튼튼해야 하는 법이지.”
작업이 끝나자 틀을 그늘에 말렸다.
며칠 후 틀이 다 말랐다. 할아버지는 종이 하나를 가지고 나와 틀 옆에 놓았다. 종이 위에는 예전에 할아버지 몰래 보았던 그림과 똑같은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아오키가 옷이 굉장히 화려하고 멋지다며 보통 사람은 아닌가 보다, 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이 사람은 누구예요? 아주 높은 사람인가 봐요. 표정이랑 태도가 좀 달라요.”
“네가 보기에도 그러냐?”
“네. 잘 모르지만 느낌이…….”
“이분이 바로 고종 임금이시다.”
나는 놀라서 다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보니 임금님다운 권위가 느껴졌다.
“근데 이런 그림을 그려도 돼요? 일본 사람들이 알면 큰일 날 텐데요.”
“그렇겠지. 하지만 이번에 일본에 갈 때 꼭 가지고 가야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속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밑그림을 보고 비단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임금님의 얼굴과 몸, 옷과 신발을 그리고 옥좌를 그렸다. 옥좌의 네 귀퉁이에는 네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임금님 뒤에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를 그리고 봉우리 위로 두 개의 둥근 원도 그렸다.
“임금님 뒤에 있는 이건 뭐예요?”
“다섯 개의 봉우리와 해와 달이란다. 권위를 상징하는 것인데 나는 일본에 빼앗긴 우리나라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해와 달처럼, 늘 푸른 산과 나무처럼 다시 되살아났으면 좋겠구나.”
나는 이 말이 할아버지가 지금껏 가슴속에 숨겨 두었던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일본인 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 차라리 할아버지에게 배우라던 깊은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그림에 색깔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림의 앞면이 아닌 뒷면에 색을 칠했다. 나는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서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확인했다.
“할아버지, 색깔을 잘못 칠하고 있어요. 거긴 그림 뒷면이에요.”
“허허허, 그렇지. 뒷면에 색을 칠하니 이상하게 보일 테지.”
“그럼 일부러 그렇게 그려요?”
“그래, 앞면에 물감을 바르면 시간이 흐른 뒤에 물감이 떨어져 나가거든. 이렇게 그려야 비단의 질감이 살아난단다.”
나는 작은 것 하나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그림을 그리는 게 놀랍고 감탄스러웠다. 할아버지는 그림을 뒤집더니 썩은 짚을 끓여 만든 노란 물감으로 얼굴을 덧칠했다. 수없이 붓질을 반복하는 걸 보고 있자니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한 번에 쓱 칠하면 되지 힘들게 왜 그렇게 해요?”
“얼굴이라는 면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이 모여야 하는 법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사람의 얼굴은 한 가지 색으로 그릴 수 없단다. 빛에 따라서 어두운 부분도 있고 밝은 부분도 있지. 수없이 붓을 놀려야 비로소 입체적이 된다는 말이다.”
“저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냥 그리면 되는 줄 알았어요.”
할아버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옛말에 ‘터럭 한 올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단다. 진정한 초상화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품까지도 담아야 한다는 말이야.”
“초상화 한 장을 그리기 위해 그렇게 애쓰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요.”
나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새롭게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임금님의 초상화가 조금씩 완성돼 가고 있었다.


15. 일본에서 만난 사람


“할머니, 다녀올게요.”
“그려, 몸조심하고. 할아버지 부탁헌다.”
할머니가 내 손을 붙잡고 신신당부를 했다. 할머니는 그동안 갑자기 머나먼 다른 나라가 웬 말이냐며 땅이 꺼지게 걱정을 했다.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나는 대답하면서도 자꾸 하품을 했다. 어젯밤에 뒤척이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엉겁결에 일본까지 가게 된 게 꿈만 같았다.
아오키는 신이 나서 싱글벙글했다. 기무라는 할머니 때문에 뒤처지는 내가 못마땅한지 자꾸 눈치를 줬다.
우리 네 사람은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군산으로 갔다. 군산항에는 쌀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말 그대로 쌀로 쌓은 산봉우리였다. 신태인역에서 사람들이 기차에 쌀을 싣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많은 쌀들을 일본으로 가져가 버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는 거야!’
부두에 있는 쌀가마니를 보니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도 쌓아 놓은 쌀가마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배에 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멀미가 시작됐다. 어지럽고 매스꺼워서 앉아 있지도 못하고 계속 누워만 있었다. 모든 게 빙빙 돌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오키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눈치였다. 바다에서 배가 어떻게 떠가는지 꼭 보고 싶었는데 멀미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겨우 일본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커다란 자동차를 가지고 마중 나와 있었다. 기무라와 할아버지는 다른 곳으로 가고 나는 아오키와 함께 아오키 할머니 집으로 갔다.
아오키 할머니 집은 별로 크지 않았다. 화호리의 집보다 훨씬 작고 소박한 느낌이었다. 아오키를 반겨 주는 모습도 우리 할머니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오키의 행동 하나하나에 호들갑스러운 할머니 모습은 낯설었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 할머니와 아주 달랐다.
우리는 할머니와 함께 동경 구경을 했다. 높은 건물과 자동차들이 많았다.
“와, 역시 대일본제국이야. 대단해.”
아오키는 보이는 것마다 감탄했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내 앞에서 잘난 척을 했다. 하지만 나는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점점 시간이 지나갈수록 심심하고 지루하기만 했다. 할아버지는 초상화를 그리느라 바쁜지 연락도 없었다.
며칠 뒤 드디어 할아버지를 만났다.
“너랑 같이 가야 할 곳이 있다.”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차 안을 살폈다. 할아버지가 앉은 자리 옆에 그림을 담은 통이 있었다. 일본에서 꼭 만날 사람이 있다던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지 무척 궁금했는데 드디어 궁금증을 풀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이 되었다. 우리를 태워 온 아저씨가 할아버지에게 소곤거렸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주위를 살펴본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알겠소. 여기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 나 때문에 행여 그분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시오.”
할아버지가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바람에 나쁜 일이라도 하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어서 이리로 오세요.”
아저씨가 대문 앞에서 손짓했다. 우리는 잽싸게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우리를 방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일본군들이 입는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눈빛이 참 슬퍼 보였다.
“마마!”
할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엎드려 통곡했다. 나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궁에서 뵌 적이 있지요?”
“예, 선대왕의 어진을 그릴 때 잠시 뵌 적이 있었지요. 마마를 이렇게 낯선 땅에서 홀로 지내도록 한 저의 불충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닙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왕이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할아버지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함께 온 이 아이는 누구인가요?”
“송구 하옵니다, 마마. 제 손녀이옵니다.”
할아버지는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영친왕 마마시다. 어서 큰절을 올려라.”
나는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절을 했다. 마마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고생했겠구나. 이 먼 곳까지 오느라.”
“예, 멀미가 나서 힘들었어요.”
“그랬구나. 일본에 오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느냐?”
나는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괜찮다. 얘기해 보렴.”
마마의 말에 나는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용기를 냈다.
“군산에서 수많은 쌀이 일본으로 오는 걸 봤어요. 어마어마한 양이었어요. 조선 사람들은 뭘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스러웠어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할아버지가 머리를 조아렸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어린것이 철이 없어 그런 것이오니 용서하여 주소서.”
“아니오. 이 아이 말이 틀리지 않아요. 조선 백성들의 고통을 뒤로한 채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어요. 아무런 힘도 없이…….”
“마마, 용기를 잃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마음을 강건하게 가지시고 훗날을 기약하셔야 하옵니다.”
“요즘에는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나요. 꿈속에서라도 한번 뵙고 싶은데 한 번도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시니…….”
할아버지는 가지고 온 통에서 그림을 꺼내 마마께 드렸다. 마마는 그림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림을 펼치는 마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마마는 그림을 가슴에 꼭 안았다. 한동안 말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마마, 고정하시지요. 소인 차마 뵈올 수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라도 아바마마의 용안을 뵈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선대왕 전하께서도 마마 걱정이 크실 것이옵니다. 부디 옥체를 보존하셔서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그날을 꼭 보셔야지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마는 눈물을 그치고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할아버지도 미소를 지으셨다.
“너 공기놀이 할 줄 아니?”
마마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작은 돌멩이 다섯 개였다. 나는 돌멩이를 받아들었다.
“이건 창덕궁 낙선재에서 가져온 돌멩이란다.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이 조약돌을 만지며 그리움을 달랬지. 헌데 오늘 제대로 임자를 만났구나. 어디 한번 해 보아라.”
마마의 말에 나는 조약돌로 공기놀이를 시작했다. 경성에서 미자와 함께 놀았던 실력을 발휘했다. 내가 공깃돌을 잡아 성공할 때마다 마마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덩달아 내 어깨도 으쓱해졌다.
“이만 가셔야 합니다. 곧 사람들이 올 시간이에요.”
문밖에서 아저씨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제 헤어져야 할 것 같소.”
“마마, 저희들은 이제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옥체를 보존하소서.”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마마께 큰절을 드렸다. 마마는 애써 웃으면서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멀어져 가는 마마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지만 힘없는 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16. 새 사진을 걸다.


“엄마!”
화호리에 도착하니 경성에서 엄마가 내려와 있었다. 엄마의 품에 안기자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나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얼른 엄마에게서 떨어졌다.
“엄마, 수봉이는? 수봉이가 엄마 찾아갔어요?”
“그래, 네가 보냈다면서 왔더라.”
엄마의 말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어떻게 되었어요? 수봉이가 무슨 말 안 해요?”
“그래, 나도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어. 만주로 가야 한다기에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했다.”
“그럴 줄 알았어. 고마워요, 엄마.”
나는 엄마를 보며 활짝 웃었다. 마음속에 있던 근심덩어리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나와 엄마를 번갈아 보았다.
“에미야, 이제 윤서 데려가거라.”
나는 깜짝 놀라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엄마도 놀라는 게 보였다.
“그동안 윤서도 깨달은 게 많을 것이다. 이제는 경성으로 돌려보내도 스스로 알아서 잘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의 속뜻을 알 것 같았다.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묻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려. 이제 세상이 바뀐 게 맞나 보다. 기집애가 일본에 다 갔다 오고.”
곁에 있던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나는 할머니 손을 잡았다.
“아이고, 시집은 어쩌려는지. 그래도 뭐 제 앞가림은 할 것 같으니 다행이긴 하다. 지 에미 닮았으면 똑 부러지겄지.”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엄마와 나는 화호리를 떠났다. 가마 밖을 보니 추운 겨울이 끝났음을 알려주듯 들판에 파릇파릇한 빛깔들이 보였다. 군데군데 바구니를 든 사람들이 논두렁 밭두렁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쑥이랑 냉이를 캐는 모양이었다.
신태인역에 도착하니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쌀이 많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이곳 사람들은 부자로 살겠다고 생각했던 예전 기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초라한 옷차림의 농부들이 눈에 들어왔다.
배웅 나오신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만들어 준 한복을 내게 건네주었다.
“윤서야, 이 할애비 때문에 고생만 하다 가는구나!”
“아니에요, 할아버지. 얼마나 많이 배우고 가는데요.”
“그러냐?”
“예, ‘공부를 잘하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라고 할아버지가 그랬잖아요? 이제는 그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래? 어디 한번 말해 볼래?”
“진짜 공부는 우리 글, 우리 역사, 우리 현실을 아는 거죠.”
“허허허, 우리 윤서가 어느새 이렇게 컸구나.”
기뻐하는 할아버지를 보니 나 스스로도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호리에서 보낸 시간들은 나에게 특별했다.
경성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도 나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도 창밖을 바라볼 뿐 나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곧 경성에 도착한다는 차장의 말을 들으며 나는 엄마에게 부탁했다.
“엄마, 경성에 도착하면 ‘부인 사진관’에 먼저 들러요.”
“궁금하니?”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 꼭 해야 할 일도 있어서요.”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역에 내리니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게 보였다. 그중에서도 말끔하게 차려입은 일본인들의 모습에 기분이 나빠졌다. 예전 같으면 무심코 보아 넘겼을 모습들이 눈에 거슬렸다.
사진관에 도착하니 그동안 엄마가 작업했던 것들이 보였다. 얼마나 열심히 작업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엄마, 저 사진 찍어 주세요. 할머니가 지어 주신 한복 입은 사진이요.”
“갑자기 사진은 왜?”
“저 사진 떼어 내고 그 자리에 걸려고요.”
엄마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저도 이제 자랐으니까요. 달라진 제 모습을 찍어서 걸어 두고 싶어요.
“그래, 그러자. 엄마도 우리 윤서가 대견해.”
엄마와 나는 벽에 걸려 있던 사진을 떼어 냈다.
엄마가 카메라를 만지며 사진 찍을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할머니가 지어 주신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솜씨 좋은 할머니가 만든 한복은 내 몸에 아주 잘 맞았다.
“윤서야, 살짝 웃어 봐.”
엄마의 말에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얼마 뒤 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봉투에 이수봉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네게 부탁할 일이 있어. 나라를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이야…….”
편지를 다 읽고 난 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내가 할 일이 생겼다.











장은영
작가소개 / 장은영

전북일보 신춘문예 등단, 통일 동화 공모전 우수상,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 수상. 『마음을 배달하는 아이』, 『내 멋대로 부대찌개(공저)』,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 실록 수호대』, 『설왕국의 네 아이』, 『바느질은 내가 최고야』 발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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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태몽 찾으러 왔어요

태몽 찾으러 왔어요 변선아 1. 태몽 때문이야 “4교시는 체육이니까, 수업 종 울리면 축구 골대 앞에 모여 있어요.” “네.” 3학년 1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성운이는 힐끔 선생님을 봤지요. 성운이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이 활짝 웃었어요. 교실에 남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야호!’ 그제야 성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어요. 마음은 쌩하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갔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죠. 성운이는 소아 천식을 앓고 있어요. 절대로 뛰면 안 돼요. 엄마는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해서 성운이가 뛰지 않도록 부탁해요. 운동장에서 하는 수업이 있을 때는 성운이 혼자 교실에 남아 책을 읽게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몸을 크게 움직이는 활동이 있는 수업에는 미리 선생님이 말했어요. “성운이는 교실에 남아 있을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좋아.” 이뿐인가요? 급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도 먹지 못해요. 천식에 좋지 않으니까요. 의사 선생님은 가끔씩 한두 번 먹는 건 괜찮다고 하지만, 엄마는 ‘절대 금지’라고 했어요. 어쨌든 지금, 선생님이 그냥 웃기만 했잖아요? 체육 수업에 참여해도 좋다는 말일 거예요. 그동안 교실에 혼자 남아서 책을 읽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오늘은 친구들하고 같이 운동할 거예요. 조심히 달리면 괜찮겠죠? 성운이에게 소원이 있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맘껏 뛰어보는 거예요. 쉬는 시간에 잡기 놀이도 하고 축구도 하고 싶어요.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축구 골대 앞에 모였어요. 물론 성운이도 당당하게 서 있었죠. 곧 선생님이 와서 말했어요. “오늘은 축구를 할 거예요. 성운이는 벤치에 앉아 있을까?” “네? 저도 축구 할 건데요?” 성운이가 실망하며 말했어요. “안 돼. 성운이는 뛰면 안 되니까 친구들 수업하는 걸 지켜보자.” “휴.” 그럼 그렇지요. 성운이는 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벤치로 갔어요. “살살이 공성운, 넌 앉아서 공 차는 거나 구경해.” 민찬이가 성운이 뒤에 대고 소리치고는 혀를 쑥 내밀었어요. 성운이는 민찬이가 얄미웠지요. 민찬이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어요. ‘살살이’란 별명도 민찬이가 지어준 거예요. 천식 때문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는 걸 놀리는 거죠. 민찬이와 아이들이 공을 굴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녀요. 그 모습을 보는 성운이 마음은 소금에 절인 배추 같아요. ‘나도 뛰고 싶다.’ 생각할수록 속상했어요. 왜 자기만 천식이 있어서 뛰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죠. 지루했던 체육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에요.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면서 밥을 많이 먹었어요. 벤치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성운이는

  • 관리자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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