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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과 솔방울

  • 작성일 2023-08-09
  • 조회수 388

   붕어빵과 솔방울

이알찬


   궁중 악사였던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작곡가 모차르트를 낳았고, 야구 선수 이종범도 야구 선수 이정후를 낳았다. 그리고 붕어빵 마니아 우리 아빠는 붕어빵을 못 먹는 나, 김형우를 낳았다.


   아빠는 오늘도 어김없이 퇴근길에 붕어빵을 들고 오셨다. 

   “다녀오셨어요? 윽, 붕어빵….”

   식탁에서 저녁을 먹던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멀찌감치 자리를 옮겼다. 

   “어? 우리 형우 학원 간 거 아니었어?”

   아빠가 한 손에 들고 있던 붕어빵을 마저 입 속으로 넣었다. 

   “겨울마다 식비 절반을 붕어빵에 쓴다니까.”

   엄마가 구시렁거리며 커다란 접시를 식탁에 올려놓자 아빠가 붕어빵을 와르르 쏟아놓았다. 

   “형우야,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무서워? 너 어릴 때 이거 엄청 잘 먹었거든. 그냥 한번 먹어 봐. 자!”

   아빠가 붕어빵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아예 벌떡 일어나서 내 방으로 도망갔다.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붕어빵을 무서워하는가.’

   나도 그 붕어빵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붕어빵이 맛있을 거라는 것도 확신한다. 

   “난 그냥 싫은 거야. 무서운 게 아니라.”

   붕어빵을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렸지만 여전히 붕어빵은 무서웠다.

   아빠는 내가 붕어빵을 피하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라고 짐작했다. 여섯 살 때. 

   하루는 엄마 아빠를 따라 수산시장에 갔는데 내가 대방어 앞에서 꼼짝하지 않더라는 거다. 

   “엄마, 저거 고래야?”

   내가 손가락으로 방어를 가리키는 순간, 다른 손님과 흥정을 마친 가게 주인이 방어를 번쩍 들고 눈앞의 도마 위에 턱 올리더라는 거다. 커다란 회칼로 방어를 해체하기 시작했고 내가 그 모습을 눈을 부릅뜨고 구경했다는 거다. 그런데 며칠 뒤부터 생선 반찬을 먹지 않더니 급기야 아빠가 사 온 붕어빵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했다. 고래가 시커먼 피를 흘린다면서.

   나는 그때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들었던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방어를 어떻게 고래로 생각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의심해 보기도 했지만, 여섯 살이니까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 자그마치 열세 살이나 먹었다. 그때보다 키는 1미터 가까이 더 자랐고 목소리도 굵어졌으며 힘도 세졌다. 그런데 아직도 그깟 붕어빵이 정말 무섭다.

   나도 이런 내가 우습고 한심스러웠다. 훈련하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인터넷에서 고래가 해체되는 장면을 검색하기도 했다. 쇠꼬챙이와 기다란 칼로 마치 무 자르듯 고래를 토막 내는 장면이 첫 장면부터 리얼하게 나왔다. 1분도 버티지 못하고 꺼 버렸다. 

   괜히 상상했다. 마치 내가 침대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할딱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욕실로 가서 물로 입을 헹구었다. 내친김에 세수까지 했다. 그러고 나니 조금 기분이 밝아졌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자 그제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김형우, 이 정도면 잘생겼지!’

   문득 장유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내일 만날 유나 눈에도 이렇게 생기 있고 멋져 보였으면 좋겠다. 

   유나는 태양광을 혼자 다 끌어모은 듯 자기 혼자만 빛이 난다. 그래서 나는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유나가 눈앞에 나타나면 머릿속 회로가 다 꼬여서 어버버했다. 

   내일 입고 갈 옷을 미리 골라 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옷차림을 검색했다. 옷장과 서랍을 다 열어 보았지만 한숨만 나왔다. 그나마 가진 옷 중 가장 단정해 보이는 스웨터와 청바지를 골랐다. 

   ‘내가 붕어빵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면 유나가 뭐라고 할까?’

   아마 장난친다고 생각할 거다. 아, 말도 꺼내지 말아야겠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 극뽁!의 기회!”

   나는 거실로 나갔다. 식탁 앞으로 다가가서 접시에 누운 붕어빵들을 살폈다. 열 마리 정도 보였던 붕어빵은 이미 반 이상 사라지고 없었다. 다섯 마리의 붕어빵들이 텅 빈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우리 형우, 붕어빵 먹어 볼래?”

   신이 난 아빠가 붕어빵을 불쑥 집어 주었다.

   “아, 저기, 아빠, 나, 슈크림으로.”

   “응? 어차피 이거 다 슈크림이야. 팥은 내가 다 먹었지.”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붕어빵의 꼬리를 붙잡았다. 내 얼굴을 살피던 엄마가 손사래를 쳤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붕어빵 그게 뭐라고.”

   엄마는 붕어빵 가격도 올랐는데 아들까지 합세해서 어쩌고 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아빠는 너무나 심각했고 엄마는 너무나 쿨했다. 

   꼬리만 살짝 씹었다. 빵만 씹었는데도 뱃속이 부글거렸다. 아빠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 먹었는지 붕어빵이 또 두 개나 사라졌다. 

   ‘딱 한 입만 더 먹어 보자.’

   나는 크게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물컹! 

   “그렇지, 우리 아들 잘 먹는다!”

   아빠가 환호성을 질렀고 욕실에서는 엄마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슈크림이 내 혀끝에 닿는 순간, 나는 곧바로 휴지에 몽땅 다 뱉어 버렸다.

   “아, 안 먹을래요.”

   나는 방으로 다시 들어왔고, 엄마는 애한테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아빠를 타박했다. 

실패의 쓰디쓴 맛에 우울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카톡이 왔다. 

   “유나다!”

   축 늘어져 있던 나는 성능 좋은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 앉았다.


   - 김형우, 내일 11시 CGB, 어딘지 알지?

   - ㅇㅇ

   - 확인 끝. 내일 보자

   - ㅇㅇ


   핸드폰을 잡고 한참 더 기다렸지만 더 이상 톡이 올라오지 않았다.

   ‘절호의 기회에 이응으로만 답변을 하다니! 바보냐, 김형우?’

   지금이라도 유나에게 잘 자라고, 좋은 꿈 꾸라고, 꿈속에서 만나자고 톡을 보내고 싶었다.

   유나가 보낸 톡 두 줄을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섭섭하고 아쉬웠다.

   - 형우야 안녕? 저녁은 먹었니? 지금 뭐 해? 우리 통화할까?

   유나에게서 이런 대화까지 바란 건 아니었지만, 아주 조금 원망스러웠다. 

   유나의 톡은 닳고 닳아서 까칠까칠한 우리 집 목욕 타월 같았다. 유나에게 먹다가 버린 붕어빵 꼬리 신세가 될까 봐 슬퍼졌다.

   ‘붕어빵은 사람들한테 사랑받기라도 하지.’

   나는 핸드폰 알람을 오전 7시로 맞춰 놓고 홱 돌아누웠다. 일찍 일어나서 미용실에서 머리도 자르고 갈 계획을 세웠다. 한동안 잠이 오지 않아 천장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구경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역시 중요한 날에는 알람의 도움 없이 정신력이 승리하는 법이다.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자마자 입에서 괴성이 터졌다. 

   “으악! 누가 껐어, 내 알람!”

   10시 5분이었다. 지금 출발해도 11시까지 도착할까 말까다. 칫솔에 치약을 묻히며 계속 소리를 지르니 아빠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폈다. 

   “아니, 나는 말이야, 주말인데 7시에 알람이 울리길래, 네가 알람을 잘못 맞춘 줄 알고 꺼 버렸,”

   “아빠! 저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고욧. 으휴!”

   치약 거품이 목구멍으로 꿀떡 넘어갔다. 터져 나온 기침 때문에 거품이 사방으로 튀었다. 

   얼른 옷을 입고 아빠 로션을 얼굴에 발랐다. 머리에 물을 바른 뒤 아빠 왁스로 억지로 눌러 보았다. 멋대로 뻗친 머리는 드라이도 소용없었다.

   “형우야, 어디로 가는데? 추운데 차로 데려다줄게.”

   엄마가 자가용 열쇠를 들고 나섰다.

   “나도 나도.”

   아빠가 어제 먹다 남은 붕어빵 한 마리를 마저 넣으며 따라나섰다. 코를 킁킁거리며 자꾸만 내 머리 냄새를 맡았다. 누구 만나러 가느냐고 자꾸 캐물어서 친구들이라고만 대충 둘러댔다.

   11시가 조금 지나서 영화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열고 나오니 12월의 찬 공기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8층 매표소까지 올라가려면 5분 이상 걸릴 텐데. 약속에 늦는 건 무조건 당첨이다.

   운전석에서 아빠가 창문을 내리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 귀염둥이 형우, 즐거운 시간 보내떼요.”

   “아휴, 아빠!”

   나는 빨리 가라고 손을 내두르고 영화관 건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눈앞에 민호가 서 있었다. 혼자였으면 좋으련만, 그 옆에 못 보던 여자아이까지 있었다. 

   ‘아, 쟤가 유나 친구 주하?’

   그제야 오늘 유나가 친구를 한 명 데리고 오기로 한 사실이 기억났다. 몸 안의 열이 귓불까지 확 뻗어 올라왔다. 여자아이는 우리 집 자가용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고는 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눈으로 인사했다.

   “아휴, 우리 귀염둥이 형우 오셨쎄요?”

   민호가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젖히며 나를 놀렸다. 나는 민호를 향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민호는 더 신이 나서 킬킬거렸다.

   “그런데 왜 여기 있어? 유나는?”

   “유나 먼저 매표소로 올라갔어. 거의 딱 맞춰서 볼 거 같아.”

   주하가 대답했다. 

   넉살 좋은 민호가 주하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앞장섰다. 

   8층에 내리자 유나가 영화표 넉 장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볼 영화는 한국 로맨틱 코미디다.

   “미리 예매해서 좌석이 굿이야. 형우 너, 주하 옆에 앉을 거지?”

   유나가 표 두 장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잠시 유나 손만 내려다보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주하가 말했다.

   “형우야, 민호랑 같이 앉아도 돼. 난 아무 데나 상관없어.”

   주하가 엉뚱한 배려를 했다. 내가 굳이 민호 옆에 앉고 싶을 리가 있겠냐 말이다.

   “그래도 오늘의 주인공은 너희 둘인데 그건 아니지.”

   유나가 나를 주하 옆으로 슬쩍 떠밀었다. 나는 마지못해 표를 받아 들고 상영관 통로로 걸어갔다. 아쉬워하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입술에 힘을 빡 주고 걸었다. 

   머릿속에 네 명의 좌석을 그려 보았다. 민호, 유나, 나, 그리고 주하. 이렇게 앉으면 베스트다. 

   “여기다!”

   유나가 제일 먼저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나도 유나 뒤를 따라 들어갈 뻔했다. 갑자기 민호가 유나 팔을 잡았다. 

   “나 가운데 앉으면 답답해. 내가 끝에!”

   민호가 먼저 안으로 쑥 들어가 앉았다. 

   ‘나이스 플레이!’

   역시 내 친구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유나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내가 먼저 들어가서 유나 옆에 앉으면 주하가 눈치채지 않을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누군가 “실례합니다.” 하며 우리 자리의 오른쪽 옆좌석을 가리켰다. 덩치 큰 어떤 아저씨였다. 

   ‘주하를 저 아저씨 옆에 앉히면 안 될 것 같은데.’

   여태까지 꽉 잡고 있던 입술에서 힘이 풀리더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푸르르 쏟아졌다.

   “형우야, 너 들어가서 앉아. 내가 여기 앉을게.”

   주하가 나를 밀었다.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어서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옆에….”

   “뭔가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벌떡 일어나서 소리 꽥 지르지 뭐.”

   나는 잠시 주하 표정을 살폈다.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스크린 광고 조명 때문인지 표정이 당차 보였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유나 옆에 앉았고 주하는 내 오른쪽에 앉았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정신이 온통 왼쪽 팔 근처에 가 있어서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가끔 주하가 웃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나서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유나가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의 털이 정전기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몸에 힘을 너무 많이 줬는지 다리도 아팠다. 

   동네 누나를 짝사랑하던 어리숙한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해피 엔딩을 맞이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정말 뭉클했다. 속마음을 내비치지 못하는 어리숙한 주인공이 꼭 나 같았다. 

   영화 속 누나는 엄청 부자인 데다가 엄청 예뻤다. 항상 웃고 눈물 따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유나가 주인공 누나와 닮은 것도 같다.

   영화는 주인공의 슬픈 비밀이 밝혀지고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났다. 

   불이 켜지고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유나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아우 쒸, 영화 재미없어. 이 영화 고른 사람 누구야?”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앉은 자세 그대로 유나를 올려다보았다. 

   “나, 난데.”

   “그래? 네 취향 잘 알겠어.”

   유나가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아까 성질을 버럭 내던 목소리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뻘쭘해서 옆자리 주하를 보았다. 마지막 장면 때문에 눈물을 흘렸는지 주하가 휴지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울었나 봐. 그런 줄도 몰랐네.’

   나는 어쩔 줄 몰라 머리만 긁적였다. 민호와 유나가 먼저 나갔고 나는 주하가 자기 자리의 쓰레기를 들고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어머! 주하 울었어? 아우, 야아.”

   영화관 복도로 나오자 유나가 주하의 어깨를 두르며 놀려 댔다.

   ‘슬픈 거 맞는데.’

   나는 키득거리는 유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은 나도 그 대목에서 울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주하도 그 대목에서 울었다는 사실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오늘 이곳에 나온 목적도 주하를 소개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유나를 보기 위한 거였다. 

   유나는 작년에 우리 학교에 전학 온 민호 사촌이다. 덕분에 나도 자연스럽게 유나와 친해질 수 있었고 매우 부자연스럽게도 짝사랑이라는 걸 시작하게 되었다. 이건 민호도 모르는 비밀이다.

   지난주, 교실 복도를 지나가는데 옆 반 교실에서 유나가 불쑥 나오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형우야, 너 여친 있어?”

   “아니. 어, 없는데.”

   여친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우당탕 뛰기 시작했다. 설마 사귀자고 하는 건가? 짧은 순간 수십 개의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럼 잘됐네. 여소 받을래?”

   “여자 소개? 누구, 너?”

   멍청한 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방금까지 머릿속을 맴돌던 멋진 대답 중에 저런 어벙한 대답은 없었는데. 멍충이 김형우야!

   “뭐래. 크크. 내 친구 소개해 주겠다고. 곧 크리스마스잖아. 너 모쏠 탈출해야지.”

   유나가 피식 웃었다. 마치 지구상에 단 하나 남은 솔로를 바라보는 듯한 동정 어린 표정이었다. 가슴속에 원자폭탄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유나가 깔깔거렸다. 

   “뭘 그렇게 쫄아? 그냥 내 친구랑 넷이 재미있게 논다고 생각해. 긴장하지 말고.”

   “넷이? 그, 그래.”

   넷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그 제안을 덥석 물었다. 유나 친구는 관심도 없었다. 일주일 동안 내 머릿속을 채운 건 오로지 유나와 나 둘뿐이었다. 

   주하가 우는 모습을 봐서일까. 나는 유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마음에도 없는 주하를 소개받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마라탕 가게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로 가서 밀크티를 마셨다. 

   유나는 예뻤다. 맘에 안 드는 영화를 골랐다고 타박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유나를 훔쳐보며 여전히 감탄했다. 

   주하는 민호와 나를 원래 알던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대했다. 하얀 이가 다 보일 정도로 크게 웃고 말할 때마다 양손을 움직여서 마치 연극배우 옆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학교는 달랐지만 같은 반 친구처럼 금세 편해졌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 다 함께 동네로 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 저만치 포장마차가 보였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민호를 바라보았다. 민호는 내가 붕어빵을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민호야, 저거 호떡이나 떡볶이 장사겠지?”

   내가 아주 작은 소리로 묻는데, 민호가 엉뚱한 말을 했다.

   “얘들아, 형우가 붕어빵 사 준대.”

   민호가 포장마차 앞으로 나를 끌고 갔다. 

   “야, 강민호, 너 진짜.”

   아까 말한 나이스 플레이 취소다! 

   “너는 먹지 말고, 그냥 우리만 사 주라고.”

   붕어빵은 세 개에 이천 원이었다. 나는 천 원짜리 두 개를 민호에게 내밀고 멀찌감치 떨어졌다. 붕어빵 사장님이 내민 붕어빵 봉지도 민호가 받았다. 민호와 유나가 붕어빵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우와, 따듯해. 잘 먹을게.”

   유나가 붕어빵을 들고 머리부터 덥석 베어 물었다. 나는 유나 손에 들린 머리 없는 붕어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나 입꼬리에 묻은 팥이 바둑알만 해 보였다. 나는 유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입 속에서 또 비릿한 맛이 살아났다. 침을 삼켜도 소용없었다.

   민호가 주하에게 봉지를 내밀었다.

   “형우가 샀잖아. 형우야, 너 먹어.”

   주하가 붕어빵 봉지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여기 붕어빵 엄청 바삭하고 맛있네. 너희들 안 먹을 거면 줘.”

   유나가 봉지에 손을 집어넣자마자 주하가 내 쪽으로 봉지를 밀었다. 그 순간 유나가 놓친 붕어빵이 봉지 밖으로 날아올랐다. 마치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방어처럼. 아니, 숨 쉬러 물 밖으로 올라오는 고래처럼. 

   붕어빵은 중력에 충실하며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마침 지나가던 어떤 아저씨가 그 붕어빵을 밟았다. 내 눈에는 마치 대본에 충실한 엑스트라처럼 보였다.

   땅바닥에 검붉은 팥이 점점이 흩어졌고 살구색 살점이 짓이겨졌다. 보도블록의 살얼음을 보는 순간 얼음 위에 올려져 있는 해체된 고래가 떠올랐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참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우웩!”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왔다. 하필 유나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다행히 배 속에서 뭐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자꾸만 꾸엑 거리며 돼지 소리를 냈다.

   “형우야, 내가 미, 미안!”

   민호가 내게 사과한 뒤 얼른 땅에 떨어진 붕어빵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유나와 주하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민호를 보았다. 애들은 민호가 왜 내게 사과하는지 당연히 모르겠지만, 민호는 무조건 사과해야 한다. 내가 붕어빵 싫어하는 걸 알면서 굳이 포장마차 앞으로 끌고 온 놈이 저 강민호니까. 

   주하가 아저씨께 죄송하다고 인사했고, 유나가 붕어빵을 한 봉지 더 샀다.

   “그거 하나 땅에 떨어졌다고 세상 무너지는 얼굴 봐라. 자, 너 두 개 먹어.”

   유나가 봉지를 내 코앞에까지 들이댔다. 

   ‘오늘 너희들 왜 이러는 거야?’

   하얀 수조 안에 숨이 끊어진 방어 세 마리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나가 주는 건데, 받아먹으며 웃어 줘야 하는데, 내 손은 주머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나야, 내가 먹을게. 한 마리 줘.”

   주하가 갑자기 봉지째 받아 들고 붕어빵을 야무지게 먹어 치웠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자꾸만 끔뻑거렸다. 유나가 다시 건네면 이번에는 먹어 보겠노라고 생각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민우가 한 마리 더 먹어 치웠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붕어빵이 유나 입 속으로 사라졌다.

   버스가 왔다. 유나와 민호가 먼저 자리를 잡고 나란히 앉으며 통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주하가 창가 쪽 자리에 앉고 내가 그 옆에 앉았다. 히터 열기 때문에 버스 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붕어빵 때문에 꼴이 우스워진 나는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대학가 길거리가 활기차 보였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을 때였다.

   “엄마야!”

   주하가 양손으로 눈을 가리고 낮게 소리 질렀다. 나도 깜짝 놀라 주하를 쳐다보았다.

   “왜, 왜 그래?”

   주하 표정이 딱 뭉개진 붕어빵을 보는 내 표정 같았다. 드러내 놓고 찡그리지 않았지만 하얗게 질려 있는 바로 그 표정이었다.

   주하는 가로수 옆 땅바닥을 가리켰다. 혹시라도 짓이겨진 붕어빵이라도 있을까 봐 조심스레 땅바닥을 훑었다. 하지만 딱히 눈길을 끄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저거 말이야. 솔방울.”

   가로수 옆에 트리 장식으로 보이는 커다란 솔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응? 저거?”

   “나 저거 진짜 싫어해.”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플라스틱인데 저게 무섭…, 음, 무서울 수 있지. 나 그거 알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남 얘기할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말없이 주하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주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나 어릴 때부터 솔방울만 보면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울었어. 학교도 못 가고 길에 선 채로 엄마한테 전화하고 그랬거든. 동네 할머니가 치워 주면 겨우 지나갔다. 나 웃기지?”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백 퍼센트 공감했다. 붕어빵을 무서워하는 내 얘기를 빨리 들려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주하는 엄마 아빠 모두 직업 군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딸인 자신이 솔방울 따위를 무서워한다는 게 난센스라고 했다.

   “너희 부모님이 너 어릴 때 솔방울 가지고 수류탄이라고 장난치신 거 아닐까?”

   “푸하하. 우리 아빠는 그런 장난하는 스타일 아니야. 엄청 무뚝뚝하시거든.” 

   거리에 가로등이 듬성듬성 켜지고 있었다. 

   주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는 내가 솔방울을 무서워하는 게 이해도 안 되고 진짜 싫었거든. 하지만, 트라우마라는 게 모두 설명되는 건 아니잖아? 솔방울은 나를 해치지 않고 또 잠깐만 참으면 그 순간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점점 나아지더라구. 남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도 이젠 견딜 만해.”

   주하가 다시 두 손을 팔락거리며 설명했다. 조금 전에 겁에 질려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던 아이가 맞나 싶었다. 

   나는 내가 붕어빵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방어 때문이라고 믿어 왔다. 아빠 말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빠도 짐작만 할 뿐이지 명백히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하 말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놔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은 나도 붕어빵이 너무 무서워.” 

   나도 모르게 비밀을 말해 버렸다. 

   주하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버스 창문을 열었다. 상쾌한 바람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우리 아빠는 붕어빵을 하루에 스무 개 먹는 사람인데, 나는 쳐다보는 것도 싫어해. 웃기지?”

   “설마 너희 아빠가 너 어릴 때 붕어빵 가지고 식인 상어라고 장난치신 거 아냐?”

   “아마 장난치기 전에 입 안으로 다 털어 넣으셨을걸.”

   우리 둘이 한꺼번에 웃었다. 옆자리 유나와 민호가 잔뜩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 쪽을 보았다. 

   비밀은 우리 둘만 공유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시침 뚝 떼고 버스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려 겨울바람을 맞았다. 

   “너희 동네 거의 다 왔다!”

   주하가 높이 솟은 교회 십자가를 가리켰다. 그리스 여신의 치마처럼 길게 늘어진 크리스마스 전구들이 교회 십자가 밑에서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슬그머니 버스 유리창에 비친 주하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흐릿한 버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여러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 전구 불빛을 혼자 다 끌어모은 것처럼.

   “어? 형우야, 함박눈이야!”

   주하가 버스 창문을 더 열었다. 나는 딱 이 초만 더 주하 얼굴을 바라본 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붕어빵도 솔방울도 아닌 진짜 함박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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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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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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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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