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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괜찮아」 외 1편

  • 작성일 2022-10-14
  • 조회수 849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괜찮아, 괜찮아



조여선




호되게 앓았다. 아기들은 아프면서 자란다는 희망이라도 있는데 나이 많아 못 된 병에 걸리니까 치명적이다. 삶에 의욕도 사라지고 그런대로 쓸 만했던 총기도 흐리마리해졌다. 특별히 아픈 데가 없어 건강관리에 소홀하기는 했어도 이렇게 망가지도록 몸은 왜 잠자코 있었을까.
사그랑주머니일지언정 씩씩해 보였던 누나가 큰 수술을 받으러 입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먼 거리에 사는 남동생 부부가 달려왔다. 전후 사정을 듣고 나서 동생은 ‘누님은 살아야 할 이유가 백 가지도 넘어요.’ 한다.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굳게 마음먹고 살아나야 한다는 경고로 들렸다. 내 앞가림은 했다고 자부했는데 동생의 눈에는 할 일을 수두룩하게 남겨 두었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비척거리는 누나한테 백 가지라니. 그 한마디가 강하게 박혀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동생이 던지고 간 말을 곱씹어 보았다. 우선 연세 많은 친정어머니가 생존해 계신다. 내가 잘못되면 참척의 불효를 안겨 드리는 것이라 그것만은 피하고 싶다. 나의 이러한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기로 동생들과 약속했으나 언제까지 감추어지겠는가. 다음으로 결혼 적령기를 지난 두 아들이 있다. 독신을 고집하더라도 내가 적극적이었다면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대충 추려 보아도 할 일이 남은 건 확실하다.
수술하는 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심란하고 우울했다. 이른 아침에 수술 예약이 돼 있어서 빗속에 아들들과 남편, 멀리서 사는 동서가 왔다. 나는 수술실로 갈 이동 침대에 누워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가족들의 얼굴을 눈에 담고 배웅을 받았다. 불길한 말은 꺼내기도 싫어 부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동서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형님, 몇 시간 주무시다 오시면 돼요.’라고 안심시켰다. 참석하지 못한 동생들이 ‘언니, 잘될 거예요.’ 하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지방에 살기도 하지만 모두 직장에 나가서 올 수가 없었으나 기도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수술실은 서늘했다. 마취하겠다고 하는 순간 남동생이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수술이 잘못되거나 명이 다하여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깨어난다면 남긴 숙제를 절반이라도 풀어 보자. 그래야 세상 떠나는 날 홀가분하고 원망도 덜 들을 게 아닌가. 나는 거기까지 기억나는데, 네 시간 후에 병실에 왔다고 한다. 비몽사몽이어도 나를 70년 동안 여자로 살게 했고 두 아들이 열 달씩 살던 소중한 아기집이 이제는 내 몸에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배 한가운데 커다란 거즈가 붙어 있을 뿐이었다.
보름 만에 퇴원했다. 며칠 지나 방사선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전철로 왕복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주말만 빼고 다녔다. 호랑이와 멧돼지가 무섭기는 해도 인간만큼 독한 동물은 없지 싶다. 처음에는 이 정도야 참을 수 있겠다고 했는데 날이 갈수록 지쳐갔다. 먹고 싶은 게 없어서 굶었고 먹을 수가 없어서 굶었다. 무기력함과의 싸움이었다. 누울 자리만 찾았다. 잘 시간이 되면 다음 날 살아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길 만큼 까라졌다. 차라리 그대로 눈을 감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숨을 쉬고 있었다. 탁상달력에 서른 번이 넘는 가위표를 해가면서 하루하루 버티어 나갔다. 교대로 지팡이가 되어 주는 아들들의 정성을 보아서라도 추스르려고 해도 건강할 때 가장 쉬웠던 자고 먹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맛을 담당한 감각 기관이 몽땅 망가졌는지 동생들과 올케, 동서는 맛깔스러운 반찬을 보내 주었어도 당기는 게 없었다. 보기 싫은 노파의 몰골로 변해 갔다. 잠꾸러기가 숙면을 못 하니 아무 데서나 병든 닭처럼 졸았다. 전철을 기다리는 승객들은 부채질하면서 잠시라도 그늘로 들어갔다. 나는 보거나 말거나 햇볕이 내리쬐는 플랫폼 나무 의자에 눕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40도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였다는 걸 느끼지 못한 걸 보면 혼이 반쯤은 나갔던 모양이다.
아들들은 변덕스러운 어미의 입맛을 맞춰 보려고 이것저것 사다 내 눈앞에 늘어놨다. 자식들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골고루 사다 디미는 과일 중 어느 하나가 입맛을 끌었다. 배터리가 바닥까지 떨어져 가던 손전등에 충전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홀쭉해진 볼에는 잔주름이 가득 들어앉았다. 머리카락에도 흰 물감을 여기저기 발라 놓았다. 그런 중에도 병마에 시달리면서 변형되거나 이탈하지 않고 제자리에 붙어 있는 눈, 코, 입, 귀가 고마웠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위인도 벗이라고 자주 연락하는 죽마고우가 있다. 언젠가 친구는 나에게 ‘자기는 점점 친정어머니를 닮아가.’ 했다. 친구의 눈썰미가 정확했다. 거울 속에서 구순의 친정어머니가 때꾼한 눈으로 혀를 차며 쳐다보는 듯하다. 오죽하면 전철을 타러 가거나 마트엘 가면 젊은이도 백발 어르신도 나에게 ‘할머니’하고 부른다. 기분이 나빴지만 구시렁거릴 기운조차 없었다.
지인과 친인척은 무리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돌볼 손주도 없고 살림도 신경 쓸 게 없다. 감사하게도 동네가 조용하고 공기도 맑아 휴식하기에 적합하다. 답답하면 뒷산 약수터에 가서 물 몇 모금 마시고 오거나 강변 따라 걸으면 한나절이 후딱 지나간다. 급하게 걷던 걸음도 아프고 나서는 느긋해졌다.
친구들은 나에게 등이 구부정해졌다고 지적한다. 10년은 젊어 보일 거라며 얼굴에 검버섯도 지우고 염색도 하라고 잔소리한다. 점 하나 빼고 염색하는 거야 어렵지 않아도 못난 주인을 만나 고생한 몸을 더는 괴롭히기 싫다. ‘아프지 않으면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살기로 했다.









심심할 것 같아서






친정에 가면 별채에 계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먼저 인사를 드린다. 한여름에는 모기장을 치고 방문을 절반쯤 열어 놓기도 한다. 그날도 문이 조금 열렸기에 낮잠이라도 주무시는지 모르기에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할아버지는 아픈 할머니 손을 당신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곁에 누워 계셨다.
기척이 나면 인사를 드리려고 기다려도 조용했다. 근 칠십 년을 함께했으니 말이 없어도 눈으로, 숨소리로, 포개진 손 온도로도 서로의 마음 전달은 충분하리라. 병원에서는 노환이 깊어 회복하기 어렵다고 했어도 두 분이 구순하게 보내는 그런 시간은 아름답게 보였다. 젊어서는 농사일에 몹시 바빴고 대가족 시선 때문에 이런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한 번은 우연히 오일장이 서는 날 가게 되었다. 늘 할머니 곁을 지키던 할아버지는 나에게 부탁하고 바깥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나가셨다. 다저녁때가 되어서야 멋쩍은 표정으로 들어오셨다. 내 눈치를 살피시더니 잠바 주머니에서 강아지 한 쌍을 꺼냈다. 어른 주먹만 했다. 눈동자가 초롱초롱한 갈색과 노란색이었다. 철모르는 아이들이나 가지고 노는 장난감 강아지였다. 뜻밖이었다. 할아버지가 무안해하실지 몰라 태연하게 받아 할머니께 드렸다.
결혼한 손녀에게 쑥스러웠는지 오랫동안 마음고생으로 핼쑥해진 할아버지 얼굴이 십 대 소년처럼 발그레해졌다. 묻지도 않았는데 ‘네 할머니가 심심할 것 같아서…’ 하시는 게 아닌가. 짧은 그 한마디에는 아내에게 향한 걱정과 사랑이 가득 차 있었다.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가슴이 먹먹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비록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재롱도 피울 줄 모르는 물건이나 어떤 선물보다 귀하게 보였다. 이 세상 누구보다 할머니의 쾌유를 간절하게 바라며 사 오셨을 테니 말이다.
아픈 냄새로 가득한 방에서 지루하게 지내는 아내를 위해 무엇인가 변화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마루 끝에라도 나갈 기력이 있다면 마당 가에 핀 달개비꽃이라도 볼 수가 있는데 불가능했다. 안쓰러운 아내의 심정을 달래 주려고 장터를 헤집고 다니다 강아지가 눈에 띄자 예전에 할머니가 키우던 복실이가 생각났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감정이 통해야 소통이 가능하려니 했다가 장난감으로라도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한 할아버지의 발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무미건조한 두 분 사이에 대화거리를 만들어 아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자 했던 것 같다. 할머니도 지나간 어느 날 기억과 초점이 맞춰졌는지 창백한 얼굴에 잠시 온화한 미소가 그려졌다. 내 눈에는 당신 바라지하느라 애쓰는 남편에게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는 고마움의 표시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2대 독자였다. 증조할머니는 자손이 귀한 걸 염두에 두고 아들의 혼인을 서둘렀다고 한다. 스무 살도 안 되었을 때부터 같은 동네 처녀를 점찍어 두었다가 결혼시켰다. 다행히 할머니는 칠 남매를 두셨으니 자손이 귀한 집에서 대단한 공을 세운 셈이다.
내 기억 속에 할아버지는 알뜰하고 인내심이 많았다. 책 읽기와 한시(漢詩)를 즐겨 쓰셨다. 동네 노인들이 남의 집 사랑방에 모여 담배를 피우며 화투 놀이하는 자체를 질색하여 한 번 가 보고 안 간다고 하셨다. 신문과 라디오에서 실생활에 필요한 내용이 나오면 지나간 달력 뒤에 적어 놓고 공책에 옮겼다. 한 권 분량이 되면 인쇄소에서 복사하여 손수 송곳으로 구멍을 내어 묶었다. 표제는 ‘주워 모은 글’이었고 내게도 한 권 줄 정도로 자상하셨다. 내가 이만큼의 글자살이를 하는 것도 할아버지의 영향이 크다고 보기 때문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
수십 년이 흘렀어도 장난감 강아지를 주머니에서 꺼내면서 멋쩍어하던 할아버지의 순박한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특별한 물건을 고르려고 해도 시골 장날이라 없었을 테고 맛있는 음식이 있다고 한들 드실 수가 없으니 속이 상하셨을 것이다. 나도 몇 년째 투병하고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병마와 싸운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경험하고 있어서 할머니의 심정을 이제 이해하게 되었다.
그 후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고모들과 다시 친정에 갔다. 딸들을 보시더니 할머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느 중요한 자리에 초대받아 가는 분처럼 깨끗이 씻어 달라고 부탁했다. 들피진 몸이 너무나 안쓰러워 정성을 다해 닦아 드렸다. 고모가 가지고 온 새 옷으로 갈아입히니까 개운하다고 하셨다. 나에게는 집이 멀기도 하거니와 홀앗이살림이라며 밝을 때 출발하라고 하기에 서둘러 일어났다.
이튿날 새벽 아버지로부터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에게는 어둡기 전에 가라고 하고서 당신은 목욕하고 새 옷 입고 어디인 줄도 모르는 곳으로 한밤중에 떠나셨다. 전날 밝을 때 출발하라고 한 말씀이 마지막 인사였다. 할아버지는 혼자 낯선 곳으로 가신 것이 불안하고 가여운지 몰라보게 수척하시더니 다음 해에 할머니 가신 곳으로 떠나셨다.
모든 사람이 한 번은 겪어야 할 사별이다. 하지만 먼저 가는 사람에게나 남은 사람에게나 잔인한 벌이다. 동네 사람들은 부부가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심은 연분이라고 하는데 나는 연분보다 혼자서 심심해할 할머니 때문인 듯했다. 이승에서의 부부는 저승에서도 함께 있어야 안심이 되고 덜 심심할 테니까.













조여선
작가소개 / 조여선

자연을 닮은 글을 쓰고자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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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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