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 외 1편

  • 작성일 2023-03-10
  • 조회수 768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김태형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




고서점을 찾아다니다가 예사롭지 않은 잡지 한 권을 발견했다. 일본 신쵸샤에서 발행한 예술종합지 《문예신조(文藝新潮)》 1957년 1월호에 근대 일본무용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시이 바쿠의 글이 실려 있다. 「최승희의 인기」라는 글이다. 아직 어디에도 거론되지 않았고 글의 존재 자체도 알려진 바 없다.

놀랍게도 1956년 북조선에서 이시이 바쿠와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 안막이 만난 이야기가 상세히 담겨 있다. 안막이 북에서 숙청당하기 2년 전이다. 전쟁 후에 다시 만난 장면을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 쓰고 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나도 덩달아 반가웠다.

이 글은 그간 잘못 알려졌던 사실을 밝히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안막의 이름이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따서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널리 알려져 있다. 심지어 최승희에 대한 관심이 현재에도 여전한 일본에서조차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최승희의 남편 안필승은 최승희와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본명 대신 필명 안막으로 불렸다. 이름을 외자로 한자 막(漠)을 쓰고 있어서 이시이 바쿠의 이름 바쿠(漠)의 한자와 동일하다. 한자는 같지만 조선 이름은 ‘막’이라 하고 일본 이름은 ‘바쿠’로 서로 발음이 다르다. 그런데 같은 한자 때문인지 안막의 이름이 이시이 바쿠를 따라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처럼 거론되고 있다. 이는 잘못이다. 누가 언제부터 이런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안막을 이야기할 때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따라서 바꾸었다는 말이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최승희의 단발머리가 안막의 작품이라는 설도 낭설이다. 비록 그가 최승희의 절대적인 조언자이며 기획자였다고 하지만, 최승희의 단발머리는 결혼 전부터 하고 있던 스타일이었다. 어디서도 안막이 최승희의 단발머리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는 기록은 없다.

안막은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고, 안필승이라는 본명 대신 자신의 정체성을 필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실은 그 스스로 지은 필명은 아니었다.) 요즘은 ‘마르크시스트(Marxist)’라고 영어식 발음으로 부르고 표기도 그대로 따라 하지만, 그리 머잖은 시기까지 ‘맑시스트’라고 불렀다. 독일식 발음이다. 지금의 ‘마르크스’는 예전에는 ‘맑스’라 했다. 마르크스는 독일 철학자다. 그러니 그의 사상을 영어가 아닌 독일식으로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안막의 이름은 ‘맑스’를 줄여서 외자로 사용한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게다가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니혼쇼소(日本書荘), 1936, 도쿄)에서 직접 내막을 밝힌 바 있었다. “안필승은 안필승이라고 하는 이름보다도 ‘안막’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됐습니다. 나중에 이시이 선생님의 이름을 무단으로 빌려 써서 괘씸하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안막이라는 이름은 자신이 만든 이름이 아니고 집필하고 있던 신문사가 멋대로 붙여준 ‘펜 네임’이었고 그 이름이 일반적으로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됐습니다.” 이미 안막의 이름에 대한 사연을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엉뚱한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따라서 바꾸었다는 근거는 없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훗날 일어났다. 일본이 패전하고 해방된 조선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민족상잔의 비극이라 할 전쟁을 치렀고, 오랫동안 북에서 활동하던 최승희의 소식은 들을 길이 없었다. 1956년 일본 문화인들과 함께 초대를 받아 중국 베이징에 방문한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의 제자들에게 영접을 받게 된다.

최승희는 중국에 체류할 당시에 여러 제자들을 양성했고, 이 제자들은 이시이 바쿠를 스승의 스승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부르며 예쁜 여성들과 함께 나타난 한 사내는 “이 사람들은 모두 최승희 선생의 제자들로, 즉 선생의 손제자(孫弟子)입니다.”라며 소개한다. 국경절 행사에는 중국 각 소수민족의 민족무도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들도 행사에 참여하러 온 무용단이었다. 이들은 이시이 바쿠를 알아보고 스승의 스승을 만난 영광을 감추지 않았다. 최승희의 소식이 궁금했던 이시이 바쿠는 베이징에 오자마자 최승희의 소식부터 수소문하던 차였다. 베이징의 조선대사관을 통해 연락을 취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소식이 북으로 들어갔던 모양이다. “조선대사관 쪽에서 전화가 와서 제발 조선에 들러 달라고” 정식 초빙장을 보내왔다.

이시이 바쿠는 북조선인민공화국의 초빙장을 받고 그 즉시 설레는 마음으로 평양에 가게 된다. 역시 최승희는 전해 들은 대로 동유럽에서 공연 중이었다. 대신 남편 안막이 마중을 나왔다. 대사관을 통해 초빙장을 보낸 이는 안막이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 안막을 찾으며 부르자 함께 있던 이시이 바쿠의 아내는 놀란 듯이 문화선전성 부상, 지금으로는 차관급쯤 되는 사람의 이름이 왜 그러하냐고 이상하다고 의아해한다. 이시이 바쿠와 이름이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발음이 서로 다르지만 여러 차례 조선으로 공연을 다녀왔던지라 남편의 이름이 조선식으로 ‘막’이라 불리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간 안막의 이름도 몰랐을까. 그럴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고는 이름 대신 성을 부르곤 한다. 우리의 경우는 친한 사이에 이름만 부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성과 이름을 모두 부르는 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시이 바쿠의 여러 글에서 안막은 ‘안군’이나 그냥 ‘안’으로만 표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안막의 정확한 이름이 표기된 것은 이시이 바쿠의 이 글에서 처음 확인된다.

‘막(漠)’이라는 이름이 일본에서 낮잡아 부르거나 의미가 썩 좋지 않은 그런 이름은 아니다. 광막하고 쓸쓸한 사막을 연상할 수 있어서 다소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선전성 부상이라는 높은 직책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일본이 아니라 북조선이다. 이시이 바쿠의 아내는 남편의 이름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놀랐을 것이다. 그래서 직접 말하기보다 직책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 정도로 에둘러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시이 바쿠는 물론 안막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리라. 이들이 어떤 사이인데 이름조차 모를까. 다만 안막은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에 자주 드나들지는 않았고, 최승희가 독립한 이후에는 더욱 이시이 바쿠와 만날 일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가 여러 편의 최승희와 관련된 글을 쓰며 ‘안군’이나 ‘안’이라고만 표기한 것은 자기의 이름과 동일한 것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안막은 눈치가 빨랐는지 이내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저는 선생님의 숭배자이기 때문에 그 후 바로 이름을 바꿨어요”라고 웃으며 대답한다. ‘그 후’가 언제인지 불분명하다. 최승희가 다시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에 들어가 활동할 때일 것이다. 이미 안막이라는 이름은 최승희와 결혼하기 전부터 사용했다. 필명으로만 쓰다가 정식 본명으로 개명했을 것이다. 안막은 오랜만에 만난 이시이 바쿠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농담으로 받아 냈던 것으로 보인다.

다카시마 유사부로가 쓴 평전 『최승희』(学風書院, 1959, 도쿄)의 마지막 부분에는 「평양에 간 이시이 바쿠 부부」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시이 바쿠의 부인 이시이 야에코가 《월간촌철(月刊寸鉄)》 1957년 10월호에 발표한 글을 인용하고 있다.

이시이 야에코는 평양에서 안막의 이름을 듣고 놀랐던 기억을 잊지 않았는지 다시 그 장면을 떠올린다. “이시이 바쿠의 이름 ‘막’과 같아서 저희에게는 가족의 유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남편과 이름이 같다는 것은 ‘가족의 유대감’으로 승화되어 있다. 안막으로서는 스승에 대한 ‘존경’이라 표현했고, 이시이 부부는 ‘가족’으로 안아 주었다. 이름이 같은 것은 우연일 뿐이지만, 이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막은 이시이 바쿠의 이름과 무관한 다른 뜻이 있다고 굳이 부정하지 않고 존경심을 그대로 드러냈던 것이다.

이렇게 전쟁이 끝나고 다시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최승희와 스승 이시이 바쿠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도 참 다행이다. 이렇게라도 스승과 제자의 끈이 이어지고 또 그 제자들마저 이 세상에 널리 무용을 전하고 있었으니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시이 바쿠가 아니었으면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다.



빈 조각배



책을 한 권 샀더니 덤으로 책 몇 권이 더 왔다. 어디 내다 팔기도 어려운 책들이다. 표지가 떨어져 나간 한문투성이의 서양문학사 두 권에 그 유명한 이어령의 초기 산문집이다. 초판이 아니라서 덤으로 보내 준 것 같다. 쇄를 거듭해 널리 읽혔던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그래도 귀한 책이라 유심히 펼쳐 보았다. 가만히 글을 읽다가 ‘敗北’라는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패배’라는 말이다. ‘北’은 흔히 북녘 북 자로 읽지만 달아날 배 자로 쓰이기도 한다는 것을 이어령의 글을 읽다가 알았다. 한자를 쓰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달아날 배, 나뭇조각(丬)과 비수(匕)가 결합된 한자다. 비수란 예리하게 날을 깎은 작은 칼이나 화살촉이다. 아무리 예리하게 다듬은 칼과 화살촉이라 해도 나무로 만들었으니 별 쓸모가 없다. 이런 무기로는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진다는 것은 이미 예상되는 일인지 모른다. 이길 수 있는 조건이 없는데, 어찌 이기기를 바랄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는 다른 요인이 없다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지는 싸움을 예상하고 싸움에 나섰다면 분명 그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렇더라도 그냥 죽거나 명예롭게 죽거나 다른 도리가 없어서 아예 죽어 버리거나 죽는 것은 돌이킬 수 없다.

지는 싸움을 알고서도 나서는 이유 중에 져야만 이기게 되는 반전을 꾀하는 경우도 있다. 질수록 이기게 된다. 싸움에 이기는 것 자체가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싸움에 나서지 않는 것이 옳을 테지만, 싸움에 내몰리지 않을 수도 없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싸움에 지고야 만다. 이기려고 싸워서 지는 것과 지려고 싸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달아나는 것은 조그만 비수를 가슴에 품고 먼 훗날을 기약하며 조각배 하나 겨우 타고 도망치는 형국이다. 복수의 칼날을 갈아야 할 것이다. 더 크고 날카로운 칼을 만들어 다시 돌아와야 한다. 비록 싸움에 졌지만, 때를 기다리며 물러서는 길을 열어 놓는다. 그저 달아나고야 말 것이라면 싸움에 나설 이유가 없다. 지기 위해 나섰다면 차라리 그 자리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 꼬리를 감추고 달아날 필요는 없다.

달아나는 것은 다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이를 악물고 견디다가 때를 기다려 돌아와서 다시 칼을 들어야 한다. 이렇게 보니 달아나는 것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비록 굴욕적이지만 그다음을 기다리는 결연한 의지가 숨겨져 있다.

책을 만드는 일은 꼭 조각배 하나 만들어 갈대밭에 숨겨 두는 것 같다. 달아나기 위한 것일까. ‘책’은 ‘冊’으로 써야 책 같다고 이태준은 말한 바 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의 모양새 같기도 하다. 한자를 뜯어보면 멀 경(冂)에 스물 입(卄)이 더해져 있다. 멀고 공허한 자리에 무엇인가 스무 개나 빼곡히 들어차 있다. 만 개가 아니라 딱 스무 개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 정도면 멀고 아득하고 공허한 자리를 대신이나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왠지 어딘가 먼 곳으로 무엇인가 가득 싣고 가는 조각배가 연상된다. 배 주(舟) 자와 비슷해서 그럴 것이다.

빈 조각배에 무엇을 실을 것인가. 비수는 이미 예전에 썩어 문드러지고 없다. 그 외에 스무 가지쯤은 실을 수 있다. 그러나 다 싣고 나면 이 조각배는 어딘가로 가야 할 필요가 없으리라. 무거워서 배를 저을 수 없을지 모른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저 먼 곳이 보이지 않는다. 공허는 어느새 사라졌다. 그 자리에 지붕을 얹고 눌러앉아 살면 된다. 언제든 떠날 수 있으니 비가 새면 갈댓잎으로 지붕을 엮고 서둘러 쟁여 놓은 스무 가지 중에서 한 번도 손이 가지 않는 무거운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미처 챙기지 못했던 중요한 것들을 그 자리에 대신 들여놓아야 할 것이다. 배를 저어 갈 수 있을 정도로 저 먼 공허한 곳을 채울 수 있는 것들로 한 권의 책을 써야 할 것이다.

다 성자들의 이야기다. 이어령의 또 다른 글처럼 오늘도 닭은 세 번 울고야 만다. 얼기설기 엮어 놓은 지붕은 볕살에 바래다 못해 매운 먼지처럼 부스러져 나가고 한 달이면 되겠지 싶어 들여놓은 쌀독은 이내 바닥이 드러난다. 이곳이 공허해져야 떠나게 되는구나. 남루해져야만 저 먼 곳으로 가게 되는구나. 지고 말아야 달아나게 된다. 빈 밥그릇 몇 개, 찌그러진 양은냄비 하나, 입이 넷, 그리고 남은 공허를 싣고서야 조각배 하나 칠흑 속으로 떠나간다. 아무도 몰래 닭이 또 세 번 울기 전에 깊은 야밤에 조각배는 홀로 떠나간다. 떠나가고야 만다.


작가소개 / 김태형

1992년 《현대시세계》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로큰롤 헤븐』(민음사)『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문학동네)『코끼리 주파수』(창비)『고백이라는 장르』(장롱), 시선집 『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지식을만드는지식), 산문집 『이름이 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마음의숲) 『아름다움에 병든 자』(마음산책) 『하루 맑음』(청색종이) 등이 있다. 출판사&책방 <청색종이> 대표. 제4회 시와사상문학상 수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추천 콘텐츠

「스케치하는 시간」외 1편

스케치하는 시간 류미월 권태는 새로움을 갈구한다. 그렇고 그런 날이 계속될 때 훌쩍 집을 떠나 낯선 여행지를 걷다 보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여유가 생긴다. 지루한 ‘코로나 19’ 마스크 시대와 어제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갈 무렵 문뜩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림 그리기가 생각났다. 유화나 수채화보다는 기초를 다지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연필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각사각 슥슥 연필심이 도화지를 채워나가는 소리가 좋다. 사진보다 섬세할 정도로 잘 그리는 중급반 동호인들을 볼 때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가로, 세로줄 긋기를 통해 감각을 익히고 H, 2H, 3H ... 6H, B, 2B, 3B ... 6B 연필을 사용해서 명암을 조절한다. 원기둥 그리기와 머그컵 그리기까지 끝내고 나니 슬슬 재미가 붙으며 오그라들었던 어깨가 펴진다. 시간이 날 때면 주방과 거실에 있는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본 스케치를 한다. 길을 가다가 야생화를 보면 정성 들여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하나씩 불러내서 스케치북에 그려본다. 나 스스로 ‘자뻑’하며 만족하는 그림이 나왔을 때의 기쁨은 글 쓰는 맛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오늘은 머그컵과 친해지는 날이다. 머그컵을 좌우대칭 정확히 파악한 후 비율에 맞게 스케치하고 짙은 색에서 중간색, 흐린 색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스케치를 채워나간다. 가로세로 명암을 넣으며 마지막 완성에 다다를 때는 숨소리도 죽여가며 몰입하게 된다. 머릿속을 하얗게 도화지처럼 비우고 오로지 스케치하는 사물만 생각하며 그린다. 하늘에 뜬 흰 구름처럼 평화로운 마음 상태에서 집중 몰입할 때의 순간이 좋다.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살림을 하다가 여유가 날 때 차 한잔하며 사각의 백지를 마주하는 순간은 한여름에 순백의 눈 위를 걷는 것처럼 청량하고 순수해지고 차분해지는 나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림을 잘 그려보겠다는 욕심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운 부분은 더욱 진하게 하나의 빈틈이라도 있을까 봐 여백을 꽉꽉 채우게 된다. 기초 작업인 구성이 잘못됐을 때는 미련 없이 싹 지우고 다시 그려야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내가 그린 게 최고인 것 같고 틀림없어 보여서 한번 그린 건 쉽게 지우지 않게 된다. 안쪽부터 채워나가다 보면 기본 구성이 잘못되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필로 밀도 있게 채워나가는 것보다 잘못 그린 부분을 지우개로 제대로 지우는 것이 최고의 소묘라는 걸 스케치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어디 스케치 뿐이랴. 우리의 삶도 자꾸 비워야 새것을 받아들이고 머릿속도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면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버려야 새것을 받아들일 공간이 커지는 법 아니던가. 스케치하는 시간은 힐링과 치유의 시간이 된다. 기분이 불쾌하고 속상하고 슬펐던 감정이 스케치하는 동안 상처가 아물 듯 기분이 좋아진다. 급하고 덜렁거리는 조급함이 산사(山寺)에서 참선을 하듯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스케치하면서 그림을 완성

  • 관리자
  • 2023-11-15
눈 오는 날의 기호

눈 오는 날의 기호 류미월 간밤에 바른 자세로 잠을 못 자고 뒤척인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뜨자 등 쪽이 불편하다. 이럴 때면 인근에 있는 의료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건강 카페에 가곤 한다. 따뜻한 자리에 누워서 척추 라인을 온열로 집중 관리받고 나면 통증이 줄어들고 온몸이 개운해진다. 체험 비용은 차 한 잔을 주문하면 된다. 체험을 마치고 넓은 창가 탁자에서 차 한잔하는데 정월의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달리는 자동차 위에도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여인의 어깨 위에도 꿈꾸는 푸드트럭 위에도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가 갓 구운 고소한 빵 내음을 흩뿌리고, 한쪽 하늘에선 깃털 같은 함박눈이 춤추듯 내려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비릿한 슬픔을 뿌리고 간다. 어느 정도 함박눈이 퍼붓고 난 하늘이 맑아졌다. 하늘도 먹먹한 제 무게를 감당 못 할 때는 펑펑 소리 내 울듯 함박눈이 되어 내리는가 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는데 묵은지 같은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친구도 눈 오는 날 친구가 그리웠나 보다. 느닷없이 먼 옛날 함박눈이 내리던 날 퇴근 후 명동거리를 빙빙 배회하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20대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친구와 명동 골목 식당에서 낙지 덮밥을 먹으며 사는 게 매운 건지 음식에 고춧가루 때문인지 눈물 반 콧물 반을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고달픈 삶을 서로 토닥이며. LP 판을 틀어주는 음악다방 구석진 자리에서 신청 곡을 메모지에 적어 DJ 박스에 건네곤 그 곡이 나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하며 듣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추억에 빠졌다가 의료기 체험 카페 문을 밀고 나서려는 순간 손을 힐끗 봤다. 거칠고 주름진 손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거리를 걸었다. 눈은 먼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오다 사선으로 흩날리다 소리 없이 내린다. 가로수와 고층 빌딩과 벤치와 로드킬 당한 생쥐 몸 위에 소복소복 말없이 이불을 덮어주듯 내린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웠던 사람의 얼굴도 불현듯 스쳐 간다. 눈은 묘한 마력이 있다. 눈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멍하게 ‘눈 멍’을 때리고 정지된 화면처럼 있으면 머리를 옥죄던 근심 걱정이 지우개로 쓱쓱 지운 듯 잠시 사라진다. 요즘 들어 집안 살림살이에서도 잘 안 쓰는 그릇이나 옷과 책 그리고 자잘한 살림살이를 큰맘 먹고 버리고 있다. 버리고 나니 공간이 넓어지고 마음마저 뻥 뚫린 듯 시원해진다. 주방을 드나들 때면 그릇장에 남겨진 그릇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집은 좁다고 투덜대며 넓혀갈 생각만 할 일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처분하고 나서 집이 몇 평은 넓어진 느낌이다. 중년에 접어든 삶은 무조건 더하기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때로는 빼기를 잘해야 편안한 삶이 된다는 걸 공감하고 있다. 되지 않을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에너지가 방전되고 화가 깊어져서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된다. 요즘 들어 아니다 싶은 것들은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건이

  • 관리자
  • 2023-11-15
「상처가 주는 울림」외 1편

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 관리자
  • 2023-11-10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