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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금 아픈 사랑

  • 작성자 위다윗
  • 작성일 2024-05-23
  • 조회수 479

그렇다. 내 인생은 미치도록 복잡하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 복잡하고 답답한 사실을 증명해보고 싶어 쓰고 버린 내 글들과 시간이 참으로 아까울 뿐이다. 모두가 어지러운 인생, 모두가 특별해지기 위해, 위대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 세상에서 나 위다윗이 얼마나 특별한지 듣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뭐, 그렇다고 내가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지하철만 타도 남고딩들이 신나게 욕을 쏟아 붓는 그 “문제적” 기독교 (어떤 불특정 다수에게는 *독교이겠지만)를 독실하게 믿고, 그 신앙에 자신의 젊음을 던진 목회자 부부의 외동아들이자 어릴적부터 동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꼈으나 그걸 억제하며 버텨온 꽤 인내심이 특출난 사람이라고 말하면 적당할 듯 하다. 참고로, 이미 보편적인 상식이지만 기독교는 동성애를 “사랑”의 형태가 아닌 인간 본성의 “뒤틀어짐” 내지는 인간행위의 “탈선”으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오늘날 정통 개신교 내에서 동성애라는 죄와 그 죄를 행하는 LGBTQ 집단의 사람들은 주로 공감과 긍휼 대신 극심한 혐오, 경계와 거절을 받는 대상이다. (기독교인들도 당연히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우가 노골적이다기 보다는 동성애자들은 그러한 대우를 받는 게 합당한 사람들이라는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것에 가깝게 보여진다.) 


부모님께서 내가 여성의 몸보다 남성의 몸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내가 사춘기를 시작할 즘,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두분 모두 굉장히 속상해하셨지만 기도와 통제 속에서 충분히 꺾일 수 있는 죄의 씨앗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물론 이 씨앗은 보수적인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했고 오늘날 나는 더이상 내가 남편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며 신앙안에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조차 없게 되는 남자가 되었다. 내게는 게이라이프 아니면 독신밖에, 적어도 솔직하게는, 선택권이 없게 느껴진다. 다행히 성경은 독신라이프를 반대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 핵심교리를 확립했던 사도 바울도 독신으로 살았다. 문제는 내가 그걸 원하는가이다. 아니, 내가 그걸 견딜 수 있는지이다. 아무리 내가 애늙은이라도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갈망은 곧 스무살이 될 나에게 다른 이성애자 젊은이들보다 덜 강하게 일어나진 않는다.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갈지 모르겠지만, 난 동성애가 죄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늘날 크리스챤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갖고 있는 편견과 오해, 적대심에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동성애라는 욕구는 한 남자의 한 여자를 향한 자연스러운 욕구만큼 실제이며 이 끌림은 육적인 필요를 넘어서, 한 인간의 영적, 정신적인 필요까지를 담고 있다. 동성애에 대해 말할때 흔히 내 교회 지인들은 “게이들은 온전히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목적으로 다른 남자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인사이더로서 분명한 것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이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상호간의 케미, 친밀감, 대상의 지적 능력, 따뜻한 성격, 등등으로, 혹은 지구의 존재하는 각기 얼굴만큼 다른 이유들로 누군가를—-그 지겹지만 사실 지겹지가 않은 특별한 사람을—-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사랑해봤다. 


첫인상은 왠지 모르게 오징어가 생각나고 “배우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봐 날 경악하게 만들었던, 까만 얼굴과 귀여운 무식함만큼 첫인상이 엉망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운명이 장난을 쳤는지, 몇년을 함께 지내며 그 사람의 깊고 진지하고 어둡다고도 할 수 있는 내면을 보게 되었고, 그렇게 서서히 그에게 그 전에 다른 이에게 느꼈던 감정들 보다 더 진한 감정을 느꼈다. 이 감정이 꽃피기 시작하자 나도 두려웠고, 그 사람도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원망인지 모르겠는 이유로 (말해주지 않았기에) 거리를 두며 우리의 5년간 조심조심 쌓아온 관계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바벨탑처럼 깨끗하게 무너졌다. 내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단절당한 것이기에 상대쪽 입장에 의해 깨끗이 지워진 셈이다. 겉으로는 호수같지만 실제는 지진같았던 관계를 지나고 난 다음 난 그 사람이 나로부터 도망친 것을 고마워야 할지 아니면 평생 저주해야 할지 헷갈렸다. 착한 크리스챤답게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퉁 쳤다. 아무리 그를 위해 보낸 내 응답없는 문자가 우스워보일지라도. 예수님도 침 뱉음을 당하셨고, 발가벗기셨는데 이 사람에게 씹히는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또 내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더라면 나는 이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셈 아닌가. 우리는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을까. 이런식으로 혼잣말을 자주 하곤 한다. 어쩔때는 눈물로 모멸감을 씻어내릴 때도 있다. 끝나지 않는 눈물 같더라도 눈물은 언제나 멎게 되있다. 이제는 너무 똑같은 이유로 많이 울어 그가 남긴 상처나 엉킨 실타래처럼 끓어오르는 내 감정들을 바라보지만 굳이 동참하지는 않는다. 그냥 오늘 너 상태가 별로구나, 하며 넘어간다.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우리나라와 해외에서 관심을 받은 몇 안되는 퀴어소설인데 소설의 전개보다 이 문장하나가 내 뇌리에 박혔다. 나에게 정확하게 해당되는 말이었기에.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이 되는 건가? 누군가에게 항상 집착했고, 집착하고 있고, 집착할 사람. 그게 정녕 자기소개 거리란 말인가. 모두가 타이타닉에서 눈물을 흐르게 했던 그런 위대한 로맨스가 아닌 후회와 수치만을 남기는 뿌리채 잘못된 사랑이었다라고 평할 만한 야윈 사랑만이 나의 사랑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람. 내가 정말 레미제라블(les miserable, 비참한 인간)인 것일까. 마치 내 영혼이 뼈다귀밖에 없는 좀비임을 고백하는거나 다름 없지 않나. 슬프게도 그게 맞는 듯 하다. 



난 동성애자들이 건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난 나를 포함해 그들이 남들보다 조금 더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원해서는 아니지만 “우리”의 사랑은 병들어 있는 것이다. 동성애가 정상이며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이(우리나라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조금 더 보수적이다고 한다.)  그렇게 믿는다. 각자가 믿는 바는 개인이 결정할 몫이지만 동성애자들이 건강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별개임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굳이 비교 하자면, 마약에 빠져있는 자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과 그 마약이 아이에게 가져다주는 폐허에 마음 아파하는 부모의 마음이 공존하고 있듯이, 동성애자들 자체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별개로 동성애 자체에 대한 비판은 합당하다고, 적어도 그 비판은 어느정도 마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동성애가 처음 꽃피는 사회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에서는 오늘 흔히 떠오르는 나이나 위치에 있어서 동등한 남성간에 관계가 아니라 주로 성인과 아동, 주인과 노예간에 동성애 관계가 흔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일종의 착취의 형태로 동성애가 발현된 것이다. 


당연히 동성애라는 카테고리 안에는 눈에 띄게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아름다운 커플들이 있을 것이며 대부분의 동성관계들 안에도 부분적으로 미덕적이고 심미적인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충격적이게, 기독교 최고의 변증가라고 불리는 C.S. 루이스가 한 말이다. 그는 자신이 동성애로 전혀 씨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나는 감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는 원래 하나님께서 디자인한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적 DNA가 있을 수 있다. 나또한 자라면서 동성애와 이성애 중 취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몸은 남자이지만 내면은 여성같은, 몸과 감정이 충돌하며 일상을 사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고 동일한 이유로 나보다 더 심한 내적 동요를 통과한 이들도 많다. 동성애는 죄이지만 동성애로 씨름하며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회앞에서 뒤로 물러난 존귀한 사람들에게 돌을 던져 세상이 더 나아지는 것도, 더 온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누가 내게 어떤 집단을 가장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난 한국인들과 동성애자들 중 후자를 택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의지하고 나의 삶의 반석과도 같은 성경이 그르다고 말하는 것을 옳다고 여길 수는 없는 일이다. 나와 다른 종교나 무교를 믿는(나는 무신론도 믿음이라고 생각하기에) 사람에게 내 견해는 다소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고,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자신의 입장을 바꿀 필요는 없다. 


부모님은 내게 언제 그런 말을 해주셨다. 

불행중 다행으로, 내가 동성애로 씨름하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을 향한 전에 없던 긍휼함이 생겼다고 한다. 내 비밀을 모르실때에는 동성애자들을 떠오르면 거부감이 먼저 일어났는데 나와 함께 이 여정?을 지나며 그들을 떠오를때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느끼신다는 것이다. 나나 부모님이나 나의 그림자 자아와 같은 동성애가 진리를 갖고 있다 자부하며 세상에게 손가락질하는 교회와, 사랑과 용납을 외치며 교회를 손가락질하는 세상 사이에 다리가 되는 이 세대의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빚어낼 것을 소망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그 꿈은 내 주제에 맞지 않는 “허영심” 혹은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일지도 모르지만 나의 미래는 정말로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조금 덜 서로에게 소리지르는 사회가 되도록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정도이다. 



나는 내가 참 아기같다. 나이는 열아홉인데 틈만나면 부모님을 찾는다.

“아빠… 우리 드라이브 가요…” 

“엄마…우리 같이 영화 봐요…”

친구아닌 친구같은 부모님과 나의 고집으로 얻어낸 패밀리 타임이 셀 수 없이 많다. 난 친구가 없어서일까 부모님과 어울리지 않고는 가끔 너무 외로워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은 생각도 올라온다. 내가 존경하는 이지선 작가가 사고 이후 스스로를 신생아로 여겼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 그 말이 내게 동아줄 같은 말이다. 몇달 후 대학을 결정짓는 시험을 보고, 한국을 떠나 혼자 해외에서 찬 밥을 먹어야 할 나이지만 왜일까 난 참 아기같다. 

연애를 포기해야 되니까 가족간의 사랑이라도 주라고 나이값 못하고 칭얼대는….


참 장황하다 느껴질 수 있는 글이지만 내 혼동과 깨달음, 고통과 치유가 조금이라도 전달되었기를 바라며 내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로 마치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린도전서 1장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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