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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자기비평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4-06-10
  • 조회수 196

어렸을 적에는 모든 예술이 결국 회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 고흐와 모네, 르누아르의 작품을 눈 앞에서 직접 목격했을 때, 그 생각의 골은 깊어져갔다. 결국 문학이란 마르셀 푸르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전부라고 생각했고, 음악은 드뷔시가, 영화는 큐브릭과 로이 앤더슨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작품을 읽거나 보거나 들을 때, 그 어느 것 하나 섬세한 터치가 없는 작품은 전부 폐기물이라고 너무 섣부르고 성급하게 단정 짓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내가 만난 것은 다름아닌 박서보였다. 거의 최초로 본 추상화였던 묘법 No.060728은, (처음에는 그냥 지나칠뻔 했지만), 조금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이상하고 별 것 없는 단색화였지만, 그 속에는 필사인지 사족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그래서 지독할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사람의 정신(혼)이 있던 것이었다. 예술 학교에서는 ‘예술’이란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예술’에 관한 건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박서보를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고흐와 낭만주의, 양산품에 지나지 않는 앤디 워홀과 현대미술양식, 건축양식만을 늘어놓고, 습작생들이나 만들 모조품들을 만들도록 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박서보를 몰랐다. 내가 만난 그곳에는, 여지껏 내가 보아왔던 세계를 통째로 갈아엎을 어떠한 것이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 후, 나는 세상을 다시 보았다. 한동안 추상화에 빠져 있었고, 이우환, 김환기, 김기창부터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장 마리아, 이베 등의 화가로부터 눈을 땔 수 없었다. 그리고 난 무수히 많은 것들을 다시 경험했다. 그리고 안 사실이 있다.

‘예술에는 끝이 없다.’

문학은 분명 블랑쇼에서 끝났고, 영화는 고다르(혹은 홍상수)에서 끝났으며, 음악은 존 케이지에서 끝났다. 그 찬란한 예술의 시대를 끝낸 이들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들의 것을 사유한 이들이다. 블랑쇼는 문학을 사유하는 문학을 했고, 고다르(혹은 홍상수)는 영화를 사유하는 영화를 했다. 존 케이지는 음악을 사유했다. 예술은 언제까지나 존재와 죽음과 삶에 대한 고찰이 아닐 수 없는데, 그들은 그것 전부를 사유하는 방식을 사유하므로서, 끝내 존재의 방식(예술 형식)를 사유하는 데까지 도달했다. 그들은 예술의 형식을 끝낸 이들이다. 그러므로 현재 예술가라는 이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그 형식 속에서 이미 끝난 일들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경험한 모든 작품들은 언제나 부족했다. 아무리 대단해도, 또는 세간에서 평가를 높게 받더라도, 그것들을 ‘진보적’이거나 ‘새로운’ 것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이제 그 무엇도 ‘예술’이 될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차가워졌고, 냉대해졌으며, 낙담했다. 본래 나는 ‘글틴’의 ‘소설 게시판’을 주된 무대로 삼고 활동했다. 나만의 확고한 가치관을 세웠다. 그러나 소설을 쓸수록 나 역시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만 같았고,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좋은 글을 쓰지 않을 바에야 더 이상의 글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쓴, 마지막 소설> 이후 더 이상의 소설은 없었다. 그때 알았던 것이 바로 비평&감상 게시판이었다. 당시 한창 글틴에 열중하고 있던 난,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으므로 다시 알려고 했다. 한 달 동안 글틴에 대한 나의 단상을 적어놓은 <행복한 글틴일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12월부터 새해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글틴에 들어와 기고되는 모든 글들을 읽었고, 12월 31일 밤에 글을 등록했다. 그러고서는 4일 후 대번에 삭제했다. <행복한 글틴일지>는 존경해 마지않는 문학 평론가 김현 선생의 유작인 <행복한 책읽기>에서 그릇된 것이었다. 존경하는 분의 발꿈치만큼이라도 도달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김현 평론가의 글에는, 만약에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면, 자신의 타 비평문 못지않게 많은 양의 텍스트로 설명해 가며, 매우 깊고 또 세밀하게 그 이유를 서술해 놓은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 홀로 생각을 마쳤을 뿐, 세밀하지 않은 양의 글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다. 서술된 것보다는 서술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고, 여러 댓글들과 멘토님의 의견을 읽고는, 이 글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해명하는데 반년 걸렸다. 언젠가는 글을 삭제한 진상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조심스러웠어야 했다. 대게 사람들은 행복한 건 건강한 거라고들 말하고는 한다. 행복한 글쓰기 이전에 내가 해야 했던 건 건강한 글쓰기였다. ‘비평’이라고 하면 모두 다 딱딱하고 날카롭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비평’은 ‘평론/이론’이 아니다. ‘비평’은 ‘나’를 주체로 하고, 나의 단상과 사상을 공유하며 설득을 얻는, 일종의 ‘예술’이자 ‘직설적인 소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하고 있던 ‘비평’은 주체가 너무 확고한, 무너진 ‘비평’이었다. 그래서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또는 읽는지 생각해 보았다. 행복해지고 싶었고, 그래서 건강해야 했다. 결국 난 그것이 하찮고 사사로운 감정이란 것을 알았다.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서 사사로운 감정에도 불구하고 연인과 싸우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에 오히려 서로를 갉아먹는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 내가 글을 쓰고 읽는 건 그냥 그게 좋아서다. 비평을 하는 건 내가 왜 그걸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서다. 단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한 것 뿐이다. 그렇게 보면 내 사랑은 너무 일방적이었나…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거니깐. 난 비평이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직설일 수 있어서 좋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렇기에 이미 끝난 관계를 다시 비집고 들어가 회상하고, 시작하고, 봉합하며, 메꾼다. 우리들이 하고있던 예술은 그런거였던 거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난 말한다. 예술은 이미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끝나지 않았고, 끝나지 않았기에 우리를 담을 수 있는 예술을 끝내고 싶어하지 않아한다. 그래서 우린 끝나버린 것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닐까. 예술은 끝이 없다. 이건 내가 알아낸 일종의 의견 내지는 단견이다. 만약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이 이걸 받아들이면 그건 비로서 비평이 된다. 그리고, 이미 난 이 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째 난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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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희찬

    화자님 축하해요~^^

    • 2024-06-11 15:42:59
    송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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