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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기억

  • 작성자
  • 작성일 2024-06-27
  • 조회수 89

아무것도 아니던 무언가를 기억하게 되는 일이 있다. 그건 대체로 특별해지기 때문이다. 일상 여기저기에 묻어있어서 채 알지도 못했던 것을 내가 똑바로 바라보고 알아채게 된다면, 그것은 특별해졌기 때문. 나에게는 어떤 숫자들이 그렇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가장 먼저 숫자들을 외운다. 생일, 전화번호, 그 사람에게 의미있는 날짜나, 내가 그 사람을 만난 날짜 같은 것. 시계를 볼 때, 달력을 볼 때, 수학 문제를 풀 때 닮은꼴의 숫자들이 나오면 괜히 반가워진다. 너는 여기에도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그러면 나의 지평이 조금 더 넓어지는 것 같다. 원래라면 스쳐지나갔을 작은 일들에 곤두선 무수한 촉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일이다. 


특히 그 숫자로 가리키는 시간에 도착하면, 온 세상을 네 안에서 사는 것만 같아 내가 눈부셔진다. 하루에도 두 번씩, 똑같은 시간은 돌아오기 때문에 나는 잊고 있다가도 너를 떠올린다. 그러면 지금을 살아가느라 바쁘던 것도 어디 깊은 곳에 있던 사랑 닮은 정서 앞에서 전부 고요해진다. 때때로 호들갑처럼, 때때로 딱 일분치의 구원처럼. 나는 그 시간을 대한다. 고대하던 일을 그 시간 즈음에 성공하게 되면 전부 너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인 것만 같고 울다가 시계를 봤는데 낯설지 않은 숫자가 보이면 괜히 시간마저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아 옹송그린 어깨가 조금 판판해진다. 


그런 기억이 있다. 초콜릿을 사먹고는 그 두꺼운 종이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접으려는 찰나에 보인 유통기한. 그 날짜가 올해 너의 생일이라서, 나는 여전히 다 먹은 초콜릿 껍질을 가지고 있다. 모난 데 없이 어딘가 정갈하기까지 한 숫자를 보면서 내가 퍽 우습게 느껴졌다. 


원래 괜한 일에 과대한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 사랑의 형태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듯이, 나는 사랑을 하는 동안 몸집을 불려서 감탄하고 어디서 빌려온 겉멋든 비유들에 고개를 끄덕인다. 초콜릿 껍질을 가지고 있는 미련하고 어이없는 일에는 중경삼림을 떠올린다. 맥이 들어맞는 곳 하나 없지만, 사랑과 유통기한 너의 생일과 만 년을 견주어 보면서 그렇게 한다. 


마음의 갤러리에는 이제는 단번에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된 숫자들이 다양한 조형물과 회화의 형태를 하고 걸려 있다. 그러다가 문득문득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어, 이 숫자 너무 익숙한데 하고. 그러면 옆사람은 그렇게 묻는다. 숫자가 익숙하고 말고 할게 뭐가 있어? 그렇지만 나에게는 생각보다 강한 기억, 생각보다 화려한 추억이 그 밋밋한 획 안에 담겨있다. 


누군가와의 시간을 정리하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기면, 나는 숫자를 잊기 위해 애쓴다. 더 이상 시계를 보고 반가워하지 않기 위해 생겨버린 습관들을 나의 윤곽 밖으로 내보내려고 한다. 이른 아침 기상 시간에 익숙해져버린 것이 억울한 퇴사자의 마음처럼 그렇게. 


혼자 자조하고 그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준 일을 낯설게 후회하다가 분명히 나의 것이던 이 숫자가, 누구로 인한 것이었는지가 어렴풋해질 때 쯤 나는 다음 돌계단을 밟는다. 계단은 언제나 다음 칸이 있고, 그래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오르는 순간에는 기억하는데 막상 딛고 나면 까먹는다. 발밑이 돌이라, 평생 나를 받쳐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 위에서 방방 뛰면서 또다른 숫자들에 마음을 붙이고 그러다가 나의 옛날 메일주소 안에서 오래된 숫자를 발견하고 뻐근한 뒷목을 꾹꾹 누르게 되는 거다. 


내가 지금 기억하는 많은 것들은 대체로 그 때의 나를 특별하게 만들었던 것들이다. 

그들 덕에 내가 이 정도의 사랑을 깨닫고 잊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종종 회의한다. 그 때 그 마음은 좀 아깝다고, 그냥 내다버린 셈 쳐야겠다고. 그렇지만 그런 자학 개그마저도 내가 기억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 네가 나에게 특별했다는 증거다. 지나간 숫자들과 지금 내가 볼 때마다 반기는 숫자들을 하나하나 나열해본다. 고저가 다양한 곡선이 하나 만들어진다. 눈으로 보이게 남는 특별함 앞에서 나는 내가 해온 사랑을, 나를 살게 한 것들을, 그리고 내가 살게 한 것들을 오래오래 기억하겠다고 다짐한다. 상투적이지만 찬란하게, 지나간 마음에 품는 뻔한 미움과 나만의 애틋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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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떤 사랑이 마음 안에서 찰랑거린다고 느낀다. 꿈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나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으로 친구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오고서는 더 수많은 우회로들을 찾았다. 영화하고 싶다는 말은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당혹으로 물들이는데 너무 충분한 일이었다. 학교 특성상 그랬다. 내가 외고에 진학하게 된 것은 하나의 발악 같은 것이었다. 나의 꿈이 의무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십대의 마지막 해를 시작하고부터는 이대로 사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짙어졌다. 일월의 시작부터 일기를 쓰면서, 나의 꿈을 계속 소환해냈다. 꿈을 인지하게 되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질 것을 알고 억지로 그랬다. 어차피 늘 잔존하고 있던 것, 늘 나를 늦봄의 버드나무처럼 흔들리게 하던 것이 꿈이라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던 포부가 진짜 꿈을 말할 수 없어서 건져낸 다듬어진 직업일 뿐이었다는 것을 나는 쭉 알고 있었다. 내가 나를 인식하던 그 순간 즈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나를 독대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 영화 에서 셀린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연기자를 말하면, 부모님은 뉴스 앵커를 말하는 식으로. 나의 꿈을 돈벌이 가능한 직업으로 바꿔 버린다’고. 나는 셀린을 보면서 내가 사랑하는 일 앞에서 어쩌다가 무정한 사람이 되었는지, 꿈 꾸는 나를 왜 부정하고 싶어했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산다는 것, 내가 나로 존재하기보다도 그들에게 귀속된 존재로서 올바르게 기능한다는 것이 너무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지리멸렬한 글쓰기를 매일 두 시간씩 억지로 반복하면서 나는 처음 나를 마주하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미성숙을 다시 끌어올려 두 눈으로 바라보는 일을 견딜 수 없어 하던 열넷 즈음으로. 언어화되는 치기들이 부끄러워 참을 수 없던 때로. 나 스스로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어리숙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어 하는 나만 있었다. 나의 진심을 자꾸 의심하고, 왜를 묻는 과정은 두 번째라고 해서 무뎌지지 않았다.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에 대한 혼란을 느끼는 일은 마음을 하루종일 가라앉게 하는 일이었다. 최은영은 소설 에서 성숙은 그저 우리 환경에 익숙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여행자의 마음을 떠올리게 됐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 앞에서 나의 미성숙한 부분을 기꺼이 마주하고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닌지 짐작해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지난 두 달은 조그만 방 안에서 아무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는 일이었다. 이름 없는 여행지와 벌이는 다정하고 날카로운 밀회였다. 내가 가진 미성숙과 독대하는 과정에서 나는 비로소 꿈을 꿈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연습할 수 있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이 있었다. 꿈이라는 것은 하는 수 없이 양가적이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질투하면서도 동경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

  • 202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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