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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

  • 작성자 카임
  • 작성일 2022-11-13
  • 조회수 920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던 아빠는 하필 사랑 앞에서 개처럼 굽히고 보는 로맨티스트였다. 엄마를 그토록 사랑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토록 사랑해버렸고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이를 갖게 됐다. 그래서 원래 아빠는 내 손발이 양수에 절어 쪼글쪼글해지기 전에 머리부터 으깨어 죽이려고 했다. 왜냐면 아빠는 그때 너무 가난했고 엄마도 아빠 못지 않게 가난했으므로. 아빠 빚이 엄마 빚이고 엄마 빚이 아빠 빚이던 시절이라 차마 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돈도 없는 주제에 일주일 치 식비를 탈탈 털어 병원으로 향하던 길, 아빠는 문득 자신의 기구한 인생을 떠올렸다. 너무 기구해서 영화 제작사에 팔아넘기고 싶었던 그 인생이 나를 죽이러 가던 그 순간에 떠올랐다.

엄마는 내가 아빠를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지독한 정의감에 도취해있던 멍청이라 학창시절이 순탄치도 않았고 당연히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도 서툴렀다. 그런데도 그 멍청이 같은 면모를 좋아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두 눈을 끔뻑이며 너 니체 좋아하니 묻는 엉뚱한 똑부러짐이 멋있어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모르는 아빠의 주위로 사람이 많이 몰렸다. 엄마도 그중 한 명이었다. 엄마는 쓸데없는 정의감 같은 건 품지 않았고 쌩 초면에 이름 모를 철학자에 대해 묻는 멍청함을 지니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까 엄마는 정말 사람을 대할 준비가 완벽했는데 어쩐지 사람이 모이지 않아 항상 외로웠다.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이나. 그래서 매일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울었고 그러다 아빠를 만나게 됐다. 아빠는 울고 있는 엄마 옆에 앉아 드물게 멍청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울지 마, 라는 다소 보편적인 아빠의 말이 처음 튀어나오는 순간 엄마는 너무 기뻤다. 그리하여 울음을 그치고 올려다본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엄마도 그 얼굴을 보고선 따라 웃었다.

너희 아빠는 사람을 웃길지언정 울리진 않는 사람이었단다, 라고 엄마는 아빠를 요약했다. 그러므로 아빠는 너를 죽일 생각 같은 건 한 적도 없을 거란다, 병원으로 한 번 향해봤던 건 그저 돈 없는 예술가의 철없는 퍼포먼스에 불과했단다.

아빠는 사실 노래를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홀로 상경한 적이 있는데 평생을 우물 속에서 살던 개구리는 우물 밖으로 튀어나간 순간 광활함에 짓눌려 숨이 막힐 수 있단 사실을 간과한 채였다. 있는 줄도 몰랐던 정신병부터 원랜 없었는데 어느 순간 발병한 정신병까지, 그때 아빠는 걸어 다니는 종합 정신병 세트로서 진정한 의미의 현대예술을 하며 꾸역꾸역 버텼다. 당시에 엄마는 아빠의 예술이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 잠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와중에도 웃는 낯짝을 한 아빠를 보곤 당장 뒷덜미를 낚아채 부산으로 내려왔다. 아빠는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야야, 너 니체 좋아하니. 니체를 알긴 하니. 아저씨. 아저씨는 니체 아세요? 좋아하세요? 모르세요? 신은 뒤졌다. 그거 모르세요. 신은 뒤졌다. 니체. 니체는 뒤졌다. 신. 모르세요, 이거. 나는요, 있잖아요, 니체를 알고 나서 내 인생이 망했어요, 젠장. 하는 푸념을 2시간에 걸쳐 늘어놓았다. 엄마는 아빠가 울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 2시간을 내내 웃는 얼굴로 신은 죽었다, 니체, 니체는 죽었다, 신, 나도, 나도 죽었다, 신, 신, 신이란 게 뭐 이래, 젠장, 젠장, 젠장…. 택시 아저씨는 처음에 그 푸념이 재밌다고 웃었지만 내릴 때쯤엔 추가 요금을 요구했고 엄마도 더 따지지 않고 돈도 없는 주제에 아빠의 푸념 값을 지불했다.

아빠는 폐쇄 병동에 갇혀 청춘을 보냈다. 그래서 아빠의 청춘 속 청은 푸를 줄 몰랐다. 뭐라도 해야지 다짐하는 날들이 길었고 뭐라도 하지 못하는 날들이 길었다. 하려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달라서 아빠는 좌절했다. 노래는 하려는 것이었고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푸른 날 같은 건 영영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폐쇄 병동이었다. 덜 마른 시멘트 냄새를 맡으며 청춘을 죽였다. 이따금 아빠를 만나러 간 엄마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아빠의 얼굴이 너무 불쌍했는데 그것보다도 불쌍했던 건 웃음을 채 지우지 못한 얼굴이었다. 웃으면 복이 온다던 말과는 달리 아빠의 웃음은 너무 기괴해 복도 달아날 것 같았다. 좌절해도 된단 말을 하고 싶었는데 울상을 지으면 더 오래 앓게 될까 두려워 감히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는 퇴원하기 직전까지도 내내 웃는 얼굴이었고 종종 아빠와 마주친 철없는 어린애들이 기괴하게 비틀린 입꼬리를 보고 괴물이라며 놀리기도 했다. 나 정말 괴물 같냐. 하고 묻는 아빠를 위해 엄마가 해줄 수 있었던 건 그 애들을 향해 너희 그럼 못 써. 하는, 정말로 못 써먹을 훈계를 하는 것뿐이었다.

아빠는 병동에서 니체를 좋아하는 다른 환자를 만났다. 죽은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공통점으로 묶인 그들은 끈끈한 유대를 가지고 함께 밴드를 꾸리기로 했다- 퇴원을 하는 날에. 그 일념 하나로 꾸역꾸역 살아낸 아빠는 마침내 퇴원했고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 넘버투를 기다리며 연습실로 쓸 지하실 하나를 빌렸다. 그 과정에서 아빠는 빚쟁이가 됐다. 그러고도 부족해 엄마에게까지 손을 벌려 음악이라곤 어릴 적 뚱땅댄 피아노가 끝인 엄마를 무작정 피아니스트 자리에 올리고선 동시에 엄마도 빚쟁이가 됐다. 빚쟁이 둘이 빛 하나 들지 않는 지하실에서 피조물 넘버투를 기다리던 시간은 너무 길었다. 아빠는 사람을 모으는 특출난 능력을 가지고 때때로 무대에 서기도 했지만 이름 없는 밴드의 노래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지은 이름이 바로 ‘earth’인데 뜻은 지구이지만 발음하면 어스(us)로도 들린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둘은 어스에서 넘버투를 기다렸다. 그리고 넘버투는 오지 않았다. 영영.

그러던 중에 네가 생긴 거란다, 아가야. 엄마는 말했다. 아빠는 수술을 위해 찾은 병원에서 낙태 가능합니까, 라는 말 대신 아기가 딸입니까 아들입니까… 라는 질문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하늘이 너무 파래서 청이라는 이름을 붙이자, 라고 했고 신혼집 겸 연습실인 지하실에 돌아와서는 태교를 위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빠는 이전에도 항상 웃는 낯을 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2005년 4월 30일에는 붉은 달이 떴다. 아빠가 쓰는 가면 속 동그란 코만큼이나 붉은 달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아빠의 초등학교 동창이 운영하던 클럽에서 공짜 공연을 선보인 어스는 얼떨결에 데뷔 제의를 받았다. 원래 기적이라는 게 조금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거 아니겠냐고 말하며 엄마는 제안 수락을 요구했지만, 아빠는 채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부를 노래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지은 노래가 모두 청이를 생각하고 지은 노래라 차마 부를 수가 없다. 이젠 없잖아. 죽어버렸잖아. 갑작스럽게 나타났다가 갑작스럽게 사라졌잖아. 발도 없는 주제에 어딜 그리 급하게 도망치는지 어느 날 갑자기 달아나버렸잖아. 나는 그걸 무대에서 부를 자신이 없다. 너는 안 그러냐. 응? 안 그러냐고…

하고 말하는 아빠는 그때도 웃고 있었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게 실은 정신병의 일종이라는 것도 모르고 아빠는 울고 싶은 얼굴로 웃고 엄마는 그 웃음을 기괴하다고 생각하며 서 있었다.

내가 청이라 지어서 그런가 보다. 푸르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멋대로 청이라고 지어서 그런가 봐. 붉은 달이 뜨는 날엔 바스라질 이름을 너무 쉽게 줘버려서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렇지. 대답을 해. 그렇지 않냐고. 내가 청이라 불러도 너는 그러지 말자고 했어야지…

하고 말꼬리를 늘어뜨린 아빠는 결국 데뷔했다. 항상 웃는 기괴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광대 모양의 가면을 뒤집어쓰고서 말이다. 어스는 아주 작은 지역 행사에서 처음으로 관객을 향해 노래했다.

어스의 데뷔곡은 달에게 바치는 헌정곡이었다. 항상 지구 주위를 도는 동그랗고 빛나는 그거. 4월 30일에는 하필 붉게 빛났던 그거…. 그리고 동시에 그 노래는 청이를 향한 추모곡이었다. 아빠는 내가 소멸하던 날의 이야기를 노래로 불렀다. 노래 속에서 나는 청이가 아니라 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청이를 청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가, 그리하여 청이 대신 달이라고 불러야만 하는 이유가 아빠에게는 존재했다. 엄마도 그 이유를 알았고 나도 그 이유를 알았는데 관객들은 몰랐다. 이건 우리 가족만 아는 이야기였다. 2005년 4월 30일에 나를 뱃속에 품어봐야만 깨달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나는 아빠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어스의 첫 공연을 관람했다. 아빠는 가면 안에서 가면과 똑같은 얼굴을 하곤 노래했다. 사람들에겐 가짜 광대의 인공적인 웃음만이 보였겠지만 나는 그것의 안쪽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진짜 광대는 가면 뒤에 숨어서 입꼬리를 기괴하게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아빠의 동그란 눈이 정확히 내게로 꽂혔다. 아빠는 분명 동요했다. 웃는 병에 걸린 아빠가 눈물을 흘렸으므로. 그것은 분명 동요, 동시에 그리움, 슬픔, 억울, 뭐 그런 거. 아빠가 신은 죽었다는 말을 맹신한 탓에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신의 피조물. 그건 달. 아빠는 부르던 노래를 뚝 멈췄다. 무대 아래 앉은 사람들이 웅성댔다. 쓰고 있던 가짜 광대는 벗어던지고, 진짜 광대의 모습으로 아빠는 높게 뜬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렇게 무대 아래로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추락하는 모습은 눈물을 흘리는 기형 광대의 총체적인 현대예술로 남아 인디밴드 계에 박제되었다.

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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