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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퇴고)

  • 작성자 카임
  • 작성일 2023-05-15
  • 조회수 2,003

푸를 청에 봄 춘. 그리하여 청춘.

너는 이름을 버리는 데 익숙했다. 콘크리트 사이를 비집고 피어난 새하얀 들꽃. 우리는 들꽃을 보며 아래로 아래로 침몰했다. 콘크리트 바닥에서 피어난 것과 콘크리트 바닥에다 처박히는 건 다른 문제. 바닥을 기며 누릴 수 있는 구원은 없다. 처박힌 서로를 껴안고 바닥을 굴렀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이었다. 나는 너를 청이라고 불렀다. 맑을 청, 푸를 청, 아무거나 해라. 말하니 너는 뒷간 청圊 이라는 한자를 어디서 알아와 가지곤 그걸 제 이름 삼았다. 이 병신아, 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이름 삼냐. 말하니 머리를 긁으며 넌 말했다. 쟤는 한자에 네모난 집 하나 갖고 있잖아. 난 그게 맘에 든다, .

너는 나를 춘이라고 부른다. 형은 저기 저 들꽃처럼 살아라. 따뜻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넌 나를 봄 춘 자로 불렀지만 나는 도무지 그 이름을 받을 수 없다. 나는 네가 지어준 봄 춘 자를 버리고 어리석을 춘芚 자를 사용하기로 했다. 사람은 이름 따라 살아간다던데. 그래서 우리는 망했다. 누구 하나 잘 되려 하지 않고 자꾸만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자처해 망했다. 차마 뒷간을 이름 삼은 널 두고 홀로 봄처럼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린 영영 성인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청춘은 빛바랜 청춘. 圊芚. 그리하여 청춘. 봄이라 그런가. 절망이 조각조각 나뉘어 하늘을 부유한다. 있잖아, 형. 절망은 원래 노란색인가. 좁은 폐가에 옆구리를 자작하게 붙이고 앉아 청이가 물었다. 하늘이 온통 뿌옇다. 아니, 이건 황사다, 황사. 중국에서 날아오는 거. 내가 말하자 청이가 입을 뻐끔댔다.

그럼 우리의 절망은 중국산인가보다.

할 말이 없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며 청이의 얄쌍한 손가락을 만지작대다 그 틈새로 내 손가락을 끼워 깍지꼈다. 우리가 누런 청춘을 견뎌낼 방법은 하나가 되는 것뿐이었다.

*

청이는 제 인생이 언제부터 바닥을 기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비굴했던 기억뿐이라 비굴하단 게 뭔지도 모르겠다고. 사실 행복이랄 것도 모르겠고 불행이랄 것도 모르겠고 원래 이렇게 사는 사람 있으면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 거 아니겠냐고 청이는 말했다. 나는 대담해질 수가 없다. 두 발로 걸었던 기억이 뚜렷하다.

청이는 나이가 없었다. 아주 오래 살았지 나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푸르다. 청이의 푸름은 나만 볼 수 있다. 골목을 지나는 꼬맹이들은 청이를 가리키며 아저씨, 하고 부르고 치매가 왔다는 건너편 옥희 할머니는 청이더러 아부지, 그런다. 행복이 뭔지 모른다는 청이의 얼굴엔 이르게 주름이 피었다. 주름도 꽃도 모두 어딘가에 피어나는 거니까 그러면 니 얼굴엔 꽃이 피었다고 말하자. 했더니 청이가 웃는다. 푸르게 웃는다. 나는 청이에게 열아홉이라는 나이를 주었다. 아무도 청이를 미성년자로 보지 않았다.

형은 그럼 몇 살이지. 청이가 물었다.

스물여섯.

우리 그럼 일곱 살 차이네.

그렇네. 럭키 세븐이네.

럭키 세븐이 뭔데.

있어. 좋은 거.

그게 행복한 건가.

그래. 행복한 거.

물을 때 청이는 정말 열아홉 같다. 열아홉은 청춘의 과도기. 청이의 이름은 맘에 들지 않았지만 멋대로 쥐여준 나이만큼은 마음에 들어서 자꾸만 부르게 됐다. 열아홉, 열아홉, 하고 불렀다.

*

청이는 한 번도 일을 해본 적 없다고 했다. 몇 년을 밑바닥에서 썩었던 탓에 아무도 받아주는 이가 없었댔다. 어릴 땐 너무 어려서, 나이 좀 들고 나선 학교도 안 나온 게, 그리고 지금은 아저씨 이런 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청이는 남에게 기생해 살아갈 줄은 알았지만 홀로 서는 법은 몰랐다.

사실은 영영 모르게 하고 싶었다. 홀로 서는 법을 알면 너, 또 도망가버릴 거지. 지금은 너와 나 서로 불도 켜지지 않는 집에 눌어붙어 곰팡이 핀 벽지처럼, 하나로 붙어 떨어질 수 없는 사이처럼, 그렇게 지내고 있지만 언젠가 너는 청이라는 이름도 앞선 이름들처럼 훌훌 던져버리고 도망칠 거란 걸 알았다. 하물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앞선 삶에서도 그랬는데 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청이가 도망치지 않을 리 없다. 나는 폐가와 자가를 구분하지 못하는 청이를 집구석에 박제시켜두고 공사판으로 출근했다. 사람은 이렇게라도 살아진다.

 

그리고 위기는 언제나 모든 것이 괜찮다고 느껴질 때 찾아온다. 이 정도도 바닥을 기는 삶이라 부를 수 있다면, 영영 진흙탕에 몸 담그는 일이 있더라도 나쁘진 않겠다고 여길 즈음이었다. 청이는 도망의 기척도 없이 얌전히 집에 눌어붙어 있었고 나는 꾸준하게 공사판에 출근했다. 몇 주 전 저기 저 꼭대기 가장자리를 걷던 서른여덟 홍구 자식이 그대로 떨어져 추락사했는데도 이 빌어먹을 아파트 공사는 계속한다, 하고 대장 아저씨가 불평했다. 사람이 제일 잔인해요. 그렇지요? 그래, 사람이 제일 잔인하다. 너는 조심해라 춘아. 에이 아저씨 여기서 일하는 젊은 놈치고 그 잔인함 모르는 사람 누가 있다고. 저도 죽을 만큼 그 잔인함에 데여서 여기까지 온 거거든요. 아저씨가 허허 웃었다. 공사장 옆에선 아파트 입주민들이 돈을 모아 불렀다는 싸구려 무당이 한참 동안 홍구 씨의 이름을 부르며 가짜 굿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하마터면 나는 홍구 씨의 루트를 그대로 밟을 뻔했다. 한데 모여 흙먼지 뒤집어쓴 주먹밥을 주워 먹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아참, 저기 위에 휴대폰 놔두고 왔는데, 그랬고 대장 아저씨는 사용하던 숟가락을 휘두르며 내가 일 할 때 휴대폰 빼놓으라 했나 안 했나! 하고 호통쳤다. 눈칫밥 벌어먹은 세월이 아득했다. 흙 맛 나는 주먹밥을 내려두고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했다. 막내라서 그랬다.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하필 그때는 식사하던 중이라 안전모도 쓰지 않았고. 대충 가져다가 전해주면 되겠지, 안일하게 생각했고. 위태롭게 가장자리를 걸을 때 식사하던 그 누구도 나에게 위험하니 조심하라 외치지 않았고. 사람은 별다른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었고, 별다른 이유 없이 죽을 수도 있었다. 하필 그때 걸음을 삐끗했다. 그대로 추락했고 홍구 씨가 떨어졌다는 곳만큼 높은 층은 아니라 허리랑 다리가 조금 나갔다. 흙바닥이 푹신해 천만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비껴갔으면 쌓아둔 벽돌에 머리를 처박을 뻔도 했다. 아저씨들이 우르르 몰려와 병원에 가라고 호들갑 떨었지만 그럴 돈도 염치도 없었다. 그냥 청이가 보고 싶었다. 온몸이 조각조각 아리니 내 처지가 초라했고, 그런 생각을 하니 죽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어린 애처럼 가족의 얼굴을 떠올렸는데… 나에게 남은 가족은 이제 청이밖에 없어서, 그래서 청이가 보고 싶었다. 죽을 만큼 아프니까 그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그날은 일찍 퇴근했다. 기껏 잡아챈 휴대폰은 액정이 박살 나 고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청이가 있을 폐가로 귀가했고 청이는 여전한 얼굴로 나를 기다렸다. 문을 열자 나보다 한 뼘은 더 클 몸뚱어리가 성큼 걸어와 반겼다.

형 일찍 왔네.

어. 일찍 왔다.

아저씨들이 일찍 보내주더나?

어. 나 일 잘한다고 일찍 보내주더라.

청이가 막 얼굴을 구기며 웃었다. 형은 진짜 대단하다. 그렇게 덧붙였다. 청이의 세상은 너무 좁았다. 내가 청이의 전부였다. 그게 좋았던 건데. 이상하게 그때는 그게 그렇게도 부담스러워 일부러 입을 다물고 일찍 잠들었다. 아린 허리와 찢어질 것 같은 허벅지를 부여잡고 몸을 구겨 잠을 청했다. 청이가 내 등 뒤에 바짝 붙어 함께 몸을 구겼다.

 

아침엔 도무지 눈을 뜰 수 없었다. 허리와 다리가 잘려나갈 듯 아팠다. 청이는 끙끙 앓는 내 머리칼을 얄쌍한 손가락으로 넘겨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청이의 걱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도무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을 만큼 아팠다. 나는 뚝뚝 끊기는 발음으로 청이에게 말했다.

청, 아. 나 일하는, 곳, 알지.

응.

거기, 가서 아저씨, 들한테 말해. 형 일, 관두겠, 다고.

그 짧은 문장을 발음하기 위해 몇 번을 호흡해야 했는지. 청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신발을 주워 신었다. 다녀올게, 형. 그 말에 와중에도 안심했다. 다녀온다고 말했다. 한 켤레뿐인 신발을 주워 신고 밖을 나서면서도 도망쳐버리지 않고 돌아오겠다 말했다. 청이는 거짓말을 모르니까…. 희미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몸이 퉁퉁 불어 꼭 펑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청이는 일을 시작하게 됐다. 내가 일했던 그 공사판에서.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청이는 흥분한 목소리로 주절댔다. 아저씨들이 나보고 같이 일하재. 형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냥 그렇게 끝낼 수가 없대. 그리고 이건 어떤 대머리 아저씨가 줬다, 형한테 주라고. 청이의 꽉 쥔 주먹에서 나온 건 호랑이 연고였다. 그 아저씨 말로는 이게 만병통치약이라던데. 덧붙이는 소리를 듣고 작게 웃었다. 청이도 따라 웃었다. 뭐가 웃긴지도 모르면서 따라 웃는 청이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호랑이 연고의 뚜껑을 따 청이에게 넘겨주고 웃통을 벗었다. 퉁퉁 부은 허리가 여전히 아렸다. 청이가 작게 탄식했다.

이게 뭐야, 형.

뭐긴 뭐야. 좀 다쳤다. 허리 쪽으로 넓게 발라봐.

어제는 이런 말 안 했잖아.

거기 다 바르면 여기 다리도 좀 발라줘.

이제는 뜨겁게도 느껴지는 상처 위로 청이의 차가운 손가락이 닿았다. 청이는 내내 목소리를 낮게 깔곤 추궁했지만 나는 한마디도 답하지 않았다. 결국 보라색으로 변한 허벅지까지 연고를 문질러 발라준 청이가 먼저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 없이 연고 뚜껑을 닫아 내 겉옷 주머니 속에 넣었다.

혹시라도 나 없을 때 아프면 발라. 알았지?

그래 알았다.

벗어둔 웃옷을 주워 입으며 나는 말했다.

앞으로 공사장 나가면 청이 너도 조심해라, 다치지 않게.

형이나 잘하던지.

너 다치면 그 공사장 불 지르고 도망칠 거니까.

말을 해도.

그리고 너무 착하게 굴지도 마. 세상은 이유 없이 호의적이지 않으니까….

청이는 잠깐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됐다. 나는 청이를 바라보며 느리게 웃었다.

*

청이는 공사장에서 귀여움을 받는다고 했다. 내가 춘이 형, 춘이 형, 했더니 아저씨들이 놀라더라. 정말 니가 춘이보다 동생이냐고. 청이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웃었고, 나는 몸을 구기고 앉아 맞장구쳤다. 원래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좀 늙어 보이고 그러는 거야. 대장 아저씨도 실은 마흔다섯밖에 안 됐다? 너는 너무 열심히 살아서 그래, 청아. 청이는 잠깐 고개를 까딱이더니 이내 누런 벽에 제 몸을 기댔다.

아저씨들이 나한테 먹을 것도 주고 마실 것도 주고. 하여튼 잘 챙겨줘.

청이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 평온한 얼굴 위로 무언가 떠올랐다. 냄비 위로 떠오르는 거품처럼, 자꾸만 걷어내도 계속 생겨나는 저건 무엇일까. 요즘 청이의 얼굴은 자주 낯설었고 동시에 나는 궁금했다. 청이는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할까. 이제는 비굴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왕이면 얼굴 위를 부유하는 저것이 절망보단 희망이길 바랐다. 아니, 사실은 청이가 미치도록 불행했으면 싶었다.

 

청이의 귀가는 자주 늦어졌다. 하루는 밤새 청이를 기다렸다가 물으니 아저씨들이 씨발 자꾸 자길 붙들고 저녁도 먹고 담배도 피우고 술도 쫌 마시다 들어가라 그런다고 그래서 존나 늦게 들어온다고, 이상한 위치에 욕을 남발해 당황했다. 너 그런 거 어디서 배웠어. 물으니 청이는 ‘그런 거’가 무언지 몰라 대답하지 않았다. 이래서 청이를 바깥에 내놓고 싶지 않았다. 꿋꿋하게 땅바닥을 구르면서도 맑을 줄 아는, 푸르게 빛날 줄 아는 청이가, 요즘엔 자꾸 안 좋은 쪽으로 물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영 깨끗하게 살 것도 아니고. 내 손아귀에 붙들려 입 다물고 지낼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 어색한 험한 말을 고쳐주지 않았다. 청이의 입에서 씨이발 형,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같은 말이 나올 때마다 잠깐 놀라고 말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청이도 나도 참 이름값 하고 살았다.

어리석게 병원에 가지 않고 뻐팅기는 나나 구린 말만 배워오는 청이나. 우리는 이래서 청춘인가, 청아. 나는 잘 모르겠다. 이런 청춘도 괜찮은지.

*

청이는 대외적으론 열아홉이었다. 그런데도 공사장 아저씨들은 자꾸만 청이한테 술을 쥐여주고 담배를 가르치려 든다고 했다. 어느 날엔 머리끝까지 담배 냄새를 묻히고 와 말했다.

형은 담배 피워본 적 있어?

성인 되고 한 번. 왜?

묻자 청이는 넌더리 난다는 표정으로 조잘댔다.

글쎄 자꾸만 우철이 아저씨가 담배를 피워 보라잖아. 나 열아홉이라 안 된다 말해도 자꾸만. 그래서 씨발, 내가 참다 참다 화를 냈는데 그것도 무시하고 무작정 입술 틈새로 개비 하나 물리고 쭈욱 들이키라고만 하고. 결국 하라는 대로 들이키긴 했는데 목구멍이 존나 따가운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쭈욱 타들어 가는 기분인 거야.

청이는 제 가슴께를 가리키며 열분을 토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청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나 죽는 거 아닌가 생각 들어서. 아까 피웠는데 아직도 계속 여기가 아프다, 형.

청이가 쪼그리고 앉아 내 어깨에 제 몸을 기댔다. 나는 말 없이 청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쩌지 형. 나 벌써 탁해져 버린 것 같다. 청이가 말하고 나는 아니야, 아니야, 그 말만 했다. 더는 이름에 맑을 청 푸를 청 그런 건 못 붙일지도 모르겠다. 말하는 청이를 오래오래 토닥여줘야 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 청이는 말했다. 그래도 나 술은 아직 한 번도 안 마셨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조금 운 탓에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흘러내린 청이의 앞머릴 쓸어넘겼다.

아저씨들이 술은 억지로 안 먹였어?

아니. 먹이려고 했어. 그런데 내가 뱉었어.

어떤 놈이 너한테 술을 처먹였지.

대머리 아저씨, 긴한데 뱉었으니까 괜찮아. 그 아저씨, 형한테 연고도 줬고.

청이는 작은 호의에 너무도 약하다. 착하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그랬다. 그 대머리 아저씨 때문에 내 몸 아작났는데, 그건 모르고. 청이는 어쩐지 뿌듯하단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저씨들이 저녁 먹을 때마다 옆에 소주병 끼고 마시는데, 내 앞에 앉은 대장 아저씬 그거 마시면서 죽을 듯이 울고 내 옆 앉은 동이 아저씨는 미친 듯이 웃는 거야. 같은 장소에 있는데, 씨발, 누구는 끝도 없이 우울해지고 누군 하늘을 날 듯이 행복해지는 거야. 고작 그 초록색 술병 하나에 사람이 불행했다 행복했다 절망했다 희망했다 죽을 것처럼 하다 살고 싶은 것처럼 굴고, 막 그러는 거야.

청이의 손을 부여잡았다. 얇고 긴 손가락 새로 뭉툭한 손가락을 끼워 맞췄다.

그런데 나는 그걸 마시면 어떤 모습일지 모르잖아. 그게 두려웠어. 나도 동이 아저씨처럼 엄청 행복해지면 어떡하지, 아님 대장 아저씨처럼 엄청 슬퍼지거나.

행복해지면 좋잖아. 청이 너도 동이 아저씨처럼 술 마셨더니 행복해질 수도 있잖아.

청이는 잠깐 침묵했다. 깍지 끼워진 손을 움찔거리며 더욱더 세게 맞잡았다. 청이의 손과 내 손이 빈틈없이 맞물려 꼭 하나같다. 청과 춘. 우리의 손. 하나로 이어 붙이면 청춘. 빌어먹을 청춘. 청이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형이랑 같이 행복해지고 싶다. 혼자 행복 찾아 도망치고 싶지 않아.

*

어느 날에 청이는 몸을 구겨 잠을 청하다 말고 내게 물었다.

있잖아, 형. 행복이 뭐지 대체.

나는 잠에 절어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너랑 나랑 같이 있는 거. 계속 그렇게 지내는 거.

그런 게 행복인가.

그런 게 행복이지.

그런데 왜 형은 하나도 안 행복해 보이지.

몸을 돌려 청이를 바라봤다. 기다란 속눈썹, 크고 우뚝한 코, 갈라져 푸석한 피부. 그런 게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형은 언제 가장 행복했어?

지금.

거짓말 말고.

사실은 스무 살.

왜?

나는 술을 먹으면 행복해지는 사람이었거든.

그렇구나…. 청이는 작게 중얼거리며 조금 더 내 옆으로 붙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쉬지 않고 출근한 청이는, 크리스마스 날엔 평소보다 일찍 귀가했다. 영문도 모르고 공사장 아저씨들이 챙겨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청이는 신발을 벗으며 오늘이 무슨 날인가, 했다. 공사장엔 세 번째로 부른 가짜 무당이 여전히 굿을 벌이고 있고 공사장 주변은 온통 허허벌판이라 청이는 트리를 볼 일도 캐롤을 들을 일도 없다. 나는 청이가 챙겨온 소주, 돼지고기, 과자, 젤리, 그런 잡다한 것들을 정리하며 물었다.

청이 너 생일은 언제야?

없어.

없어?

응.

청이가 양말을 벗고 겉옷을 벗고 바지를 벗고 속옷을 벗을 동안 나는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형 내 옷이 어딨지 묻는 청이의 뒤통수에 대고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오늘 니 생일 하자. 청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봤다.

생일?

그래, 오늘이 니 생일이야. 선물도 이렇게 많이 받았잖아.

그러게. 선물도 많이 받았네.

응. 실은 오늘이 청이 생일이었던 거야. 아무 날도 아닌데, 그냥 니 생일이어서, 그래서 아저씨들이 선물을 챙겨준 거야.

청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렇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청이의 생일이 됐다. 더이상 우리에게 12월 25일은 예수의 생일이 아니었다. 남들이 캐롤을 부를 동안 우린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고, 남들이 크리스마스 기념 외식을 나갈 동안 우린 받아온 돼지고기를 라이터에 지져 먹었다.

청이는 이제 이름도 나이도 생일도 있다. 그리고 난 점점 더 청이가 갖지 못한 걸 선물해주고 싶었다.

*

돌고 돌아 또다시 새해가 찾아온다. 우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힌 채 만났던 그 계절이 다시 돌아온다.

 

열아홉이던 청이는 공사장에서 스물을 맞았다. 청이가 어른이 되면 함께 마시려고 남겨둔 소주병을 쥐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하필 오늘 같은 날 귀가가 늦었다. 어쩐지 도망가버린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덮쳤다. 이제 청이는 홀로 도망가버려도, 누군가 보호해주지 않아도 괜찮은 나이가 됐다.

청이는 얼굴이 빨개진 채 새벽 세 시가 되어 문을 열었다. 형아아아아. 늘여 말하는 목소리에선 알코올 냄새가 났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흐트러진 얼굴과 마주했다. 속도 모르고 청이는 배시시 웃었다.

동이 아저씨가 나 스물 됐다고 술 사줬다.

동이 아저씨?

응. 술 마실 때면 맨날 깔깔 웃기만 하는 아저씨.

청이는 조악한 발음으로 떠들었다. 청이와 함께 마시려 준비한 초록색 소주병이 방 한구석에 처량히 처박혀 있었다. 청이의 처음은 내가 아니었다. 그게 조금 슬펐다. 취한 건 청이인데 엎어지는 건 나였다. 청이의 앞에 엎어져 계속 울었다. 사실은 많이 슬펐다.

왜 울어 형.

청이가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추려 애썼다. 나는 이불에 코를 박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 너무너무 행복해서 자꾸만 웃음이 나고 미쳐버리겠는데, 형은 왜 슬퍼. 왜 대장 아저씨처럼 울어.

청이가 엎어진 내 위로 살포시 제 몸을 겹쳤다. 우리는 이렇게 또 하나가 된다. 자꾸만 하나로 겹쳐진다. 그래서 자꾸만 청이와 춘이가 청춘이 되고, 그런데 또 푸를 청 봄 춘이 아니라 뒷간 청 어리석을 춘이 되고. 얼굴을 숨기고 있으니 한껏 헝클어진 표정을 짓는 게 가능했다. 너무너무 행복하다는 청이의 무게를 느끼며, 청이가 영영 불행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행복하면 또 떠나버릴 것 같아서. 내가 없어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너는 나를 두고 영영 떠날 것 같았다. 내가 준 이름도 버리고 아예 푸른 사람이 되어, 청춘처럼 그렇게 한순간에. 청이야, 이 병신아, 그러게 너는 왜 내가 푸를 청 하라 할 때 뒷간 청을 선택해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 응?

사람은 이름을 따라 산다는데 그렇게 멍청한 이름을 가진 네가 구리지 않은 삶을 살 순 없다. 그래서 청이 넌 행복해질 수 없다. 분명 행복해지면 안 되는 이름인데… 왜 자꾸 나를 두고 행복해지려 하지. 왜 나는 어리석게도 네 발치에서 맴돌지. 청이는 뭣도 모르고 내 위에 엎어져 호흡했다. 쿵쿵대는 청이의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혼자 행복해서 미안해 같이 행복해지자고 했었는데.

청이는 중얼거렸다. 나는 또다시 조금 울었다. 그랬다. 우리는 늘 같은 마음이었다. 나도 너도, 우리 둘 다.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눈앞의 추위에 몸을 숨기려 집을 선택할 게 아니라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청이 네가 뒷간 청이라 불리기를 자처해도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거기에 살을 덧대 나마저 어리석을 춘 자를 고를 게 아니라. 우린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함께 절벽을 기어오를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청이가 알아서 제 몸을 비켜줬다. 청이도 조금 울었는지 눈가가 빨갰다. 그런 청이를 가만 쳐다보다 곧 으스러질 듯 꽉 껴안았다.

청아. 너 이제 그냥 푸를 청해라.

왜애.

나도 봄 춘 할게.

…….

우리 새해에는 이름 바꾸고, 그 이름으로 살자. 이름값 하면서 살자.

청이가 얄쌍한 팔을 들어 천천히 내 몸을 감쌌다. 우리 그러면 진짜 청춘인가. 구린내 나는 빌어먹을 청춘 대신 정말 푸를 청에 봄 춘 되는 건가. 청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랬어야 한다. 너무 오래 아팠다.

*

까만 창문 너머 새하얀 눈이 살금살금 내려앉는 게 보였다. 올해의 첫눈이다. 우리는 둘 다 퉁퉁 부은 눈으로 서로의 옆구리에 자작하게 붙어 창밖을 내다봤다. 청이가 물었다. 원래 절망은 노랗고 행복은 하얀 건가. 그때 피었던 들꽃도, 지금 내리는 눈도. 나는 청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 마디마디를 만지작대며 깍지꼈다. 이제 우리는 무척 추워질 거야. 우릴 가두고 있던 집을 버려서 우리는 계속 시릴 거야. 그래서 더 꼭 붙어야 할 거야. 청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로 하나가 되겠네. 청이랑 춘이 말고 청춘이 되겠네.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웃었다. 이제 청이는 푸른 이름도 스무 살의 나이도 크리스마스 생일도, 그리고 행복까지도 가질 수가 있다. 모든 걸 갖게 된 순간 우리는 비로소 청춘이란 이름 앞에서 행복해졌다.

카임
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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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례식엔 당신이 오면 좋겠어

나는 사람이란 가장 약한 순간에 진심을 드러내는 법이라고 믿는다. 올해는 버거운 한해였다. 대한민국에서 고삼이라는 타이틀을 쥐고 살아가는 것이 무릇 그렇듯. 평소에도 스트레스에 취약했던 내게 고삼은 권력이기 전에 바이러스였다. 집안에서 고삼부심을 부려보기도 전에 온몸에 퍼진 유해함. 아주 많이 나약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죽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죽는 상상을 했다. 아침이 되어 날 깨우러 온 가족들이 생기 없는 내 얼굴을 마주하는 상상을 했다. 나는 가족들을 아주 사랑한 것도 아주 미워한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가족의 온도. 그게 내가 우리 가족을 대하는 태도였다. 사실 사춘기 때는 우리 가족을 좀 많이 미워한 것도 같다. 그건 아마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집에서 하는 거라곤 소리를 꽥 지르고 가출하기, 비명을 지르다 경비실에서 신고 들어오기, 일주일에 네 번 조퇴하기. 온갖 기괴한 사춘기는 다 겪으며 엄마와 아빠를 미워했었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엔 사이가 돌아왔지만, 여전히 싸울 때가 있었고 그런 날에는 가출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죽는 상상을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가족들일 줄 몰랐다. 너무 식상했다. 동시에 속상했다.3월엔 모두가 잠든 밤에 옷장 안에서 숨을 참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면 내 방문 한 번을 열지 않는 가족들이 미웠다. 바로 옆 방에서 딸은 죽어가는데 쿨쿨 자는 아빠가 미웠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어 싸늘해진 내 얼굴을 발견할 표정을 생각하면 미안했다. 나는 아빠가 미워서 죽는 게 아니었는데. 엄마가 미워서도 아니고 언니가 미워서도 아니고 동생이 미워서도 아니었는데. 그러나 뭐가 됐든 처참할 내 꼴을 마주할 사람은 가족들이었다. 사춘기 때는 죽으려는 생각을 할 때면 어린 동생의 얼굴이 떠올라 죽지 못했다. 좀만 더 크면 작은 언니의 존재조차 잊을 저 아이가, 언젠가 엄마에게 나한테도 작은 언니가 있었냐고 물어볼 그 아이가 생각이 나 죽지 않았다. 그 애에게 얼굴도 모르는 자매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애는 오래오래 나를 기억할 만큼 컸다. 이제 나를 잊을 가족들은 없을 텐데…. 고삼이 된 나는 그날 죽지 못했다. 미안해서 죽지 못했다. 내 인생의 가장 비참한 모습을 마주할 가족들에게 미안했고, 나를 따라 죽고 싶어질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6살일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아주 오래오래 사랑한다고 말해준 할머니에게 내 부고 소식을 알려야 할 상황이 미안했고 더는 내 방문을 열어보지 못할 언니에게 미안했다. 숨을 쉬었다. 켁켁 거리며 쉬었다. 구토감이 몰려왔고 숨이 조금 쉬어진 뒤에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그날은 다이어리에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가족들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는 편지를 썼다. 죽지 않는 이상 나만이 볼 수 있을 그 편지를. 중간고사 무렵에는 내 처지가 비참한 순간이 많았다. 대학이 인생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시기에 잘 챙겨주지 않기로 소문이 난 선생님이 담임이었다. 그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우울해졌다. 종종 학교를

  • 카임
  • 2023-12-18
어스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던 아빠는 하필 사랑 앞에서 개처럼 굽히고 보는 로맨티스트였다. 엄마를 그토록 사랑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토록 사랑해버렸고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이를 갖게 됐다. 그래서 원래 아빠는 내 손발이 양수에 절어 쪼글쪼글해지기 전에 머리부터 으깨어 죽이려고 했다. 왜냐면 아빠는 그때 너무 가난했고 엄마도 아빠 못지 않게 가난했으므로. 아빠 빚이 엄마 빚이고 엄마 빚이 아빠 빚이던 시절이라 차마 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돈도 없는 주제에 일주일 치 식비를 탈탈 털어 병원으로 향하던 길, 아빠는 문득 자신의 기구한 인생을 떠올렸다. 너무 기구해서 영화 제작사에 팔아넘기고 싶었던 그 인생이 나를 죽이러 가던 그 순간에 떠올랐다. 엄마는 내가 아빠를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지독한 정의감에 도취해있던 멍청이라 학창시절이 순탄치도 않았고 당연히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도 서툴렀다. 그런데도 그 멍청이 같은 면모를 좋아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두 눈을 끔뻑이며 너 니체 좋아하니 묻는 엉뚱한 똑부러짐이 멋있어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모르는 아빠의 주위로 사람이 많이 몰렸다. 엄마도 그중 한 명이었다. 엄마는 쓸데없는 정의감 같은 건 품지 않았고 쌩 초면에 이름 모를 철학자에 대해 묻는 멍청함을 지니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까 엄마는 정말 사람을 대할 준비가 완벽했는데 어쩐지 사람이 모이지 않아 항상 외로웠다.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이나. 그래서 매일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울었고 그러다 아빠를 만나게 됐다. 아빠는 울고 있는 엄마 옆에 앉아 드물게 멍청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울지 마, 라는 다소 보편적인 아빠의 말이 처음 튀어나오는 순간 엄마는 너무 기뻤다. 그리하여 울음을 그치고 올려다본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엄마도 그 얼굴을 보고선 따라 웃었다. 너희 아빠는 사람을 웃길지언정 울리진 않는 사람이었단다, 라고 엄마는 아빠를 요약했다. 그러므로 아빠는 너를 죽일 생각 같은 건 한 적도 없을 거란다, 병원으로 한 번 향해봤던 건 그저 돈 없는 예술가의 철없는 퍼포먼스에 불과했단다. 아빠는 사실 노래를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홀로 상경한 적이 있는데 평생을 우물 속에서 살던 개구리는 우물 밖으로 튀어나간 순간 광활함에 짓눌려 숨이 막힐 수 있단 사실을 간과한 채였다. 있는 줄도 몰랐던 정신병부터 원랜 없었는데 어느 순간 발병한 정신병까지, 그때 아빠는 걸어 다니는 종합 정신병 세트로서 진정한 의미의 현대예술을 하며 꾸역꾸역 버텼다. 당시에 엄마는 아빠의 예술이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 잠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와중에도 웃는 낯짝을 한 아빠를 보곤 당장 뒷덜미를 낚아채 부산으로 내려왔다. 아빠는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야야, 너 니체 좋아하니. 니체를 알긴 하니. 아저씨. 아저씨는 니체 아세요? 좋아하세요? 모르세요? 신은 뒤졌다. 그거 모르세요. 신은 뒤졌다. 니체. 니체는 뒤졌다. 신. 모르세요, 이거. 나는요, 있잖아요, 니체를 알고 나서 내 인생이

  • 카임
  • 2022-11-13
번아웃 신드롬즈의 노래를 좋아하다 번아웃이 온 사건

아무래도 이건 좀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시험을 3주 앞두고 별안간 번아웃이 닥친 건,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1 번아웃은 꼭 우울처럼 찾아왔다. 내 하루에 밑바탕처럼 은은히 깔려있다가도 어느 날엔 덩치를 불려 일상을 통째로 잡아먹는, 아주 예의가 없는 놈이었다. 언제쯤 나를 괴롭게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매일 두려움에 떨도록 했다. 처음 번아웃 증세가 나타난 건 기말고사가 3주 하고도 조금 더 남았을 무렵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무언가 나를 꾸욱 짓누르고 있단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잠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무거운 걸음을 옮겨 화장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을 맞고만 있었다. 열기에 익은 몸을 이끌고 책상 앞에 앉았다. 아침이니 머리를 깨울 필요가 있다. 태블릿을 연결해 노래를 틀고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가 그 위로 그대로 엎드려 울었다. 무언가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단순히 입버릇처럼 늘어놓던 하기 싫다의 개념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무작정 거실로 뛰쳐나왔다. 거실에서 엄마를 붙들고 하소연했다. 하기 싫다, 못 하겠다, 말을 하며 울었고 속으로는 이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험은 고작 3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엄마는 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 말했다. 어차피 안 되는 공부를 붙들고 있지 말고 차라리 잠을 더 자라고 말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 대신 책상으로 향했다. 공부는 여전히 되지 않았다.   2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수학 문제는 풀 수가 없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수학 문제를 앞에 둔 채 울기만 했다. 비참하고 초라한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았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순간을 노래로 기억하는 내가 그 당시 무슨 노래를 듣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노래 역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 그때 내 머리는 백지처럼 하얬다. 머리를 쓸 수 없으면 강의라도 듣자고 생각했다. 머리 굴릴 일 없이 불러주는 설명과 눈에 보이는 판서를 필기하기만 하면 되는 가성비 좋은 공부. 윤리 강의을 틀어놓고 노트를 폈다. 정확히 5초간 들었다. 음성을 듣자 거짓말처럼 머릿속이 피로해졌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어떤 기관을 거치지 않고 아주 거대한 공처럼 몸을 부풀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문장, 못 하겠다. 처음으로 엄마의 말을 들었다. 이럴 시간에 잠이라도 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울었다.   3 공부도 할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는 시험 기간의 청소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시 엄마를 찾아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엄마 말대로 잠을 자려고 했는데 잠조차도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잠이 안 와요. 계속 눈물만 나와요. 공부도 못 하겠어요. 엄마는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그건 옆에서 내 사정을 함께 듣던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울었고 둘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내가 원했던 말은 공부 같은 거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 카임
  • 202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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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줄리스
    감동했어요

    잘 읽었습니다.

    • 2023-06-20 15:58:36
    줄리스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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