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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다른 속옷을 입을 수 있었으면 –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보고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10-23
  • 조회수 583

먼바다를 헤엄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것을 만나게 됩니다. 이게 나를 죽일 수도 있구나 생각 하면 다시 바다에 나가는 일을 망설이게 되죠.

 

세상에 혼자 남겨졌을 때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하면

 

위로가 되던가요?

 

여기 두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사랑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망설이는 사람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유진목, <유목 中>

 

 

세상에 대가 없이 베풀어지는 것이 있을까

 

이 세상에 조건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있을까. 어렸을 적 어느 학습 만화를 읽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대사를 마주한 적이 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나는 밖에 나가 놀이터에 갈 수도 있고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 그리고 얼마든 TV로 영화를 볼 수도 있고 산책을 하며 나무를 보고 햇빛을 받으며 마음껏 숨을 쉴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우리 엄마는 대가를 바라고 나에게 잘해주는 게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어린이들도 이용료 없이 방문할 수 있었던 공간은 누군가의 세금이나 관리비로 지어져 운영되고 있는 것이고,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TV는 전기세와 매달 통신사에 지불하는 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햇빛과 나무 그리고 공기는 무료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마음껏 접할 수 있는 환경은 결코 무료가 아니라는 것은 나중에,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여기서 해소되지 않는 하나의 물음이 있다. 바로 어머니로부터 나오는 사랑.

 

모성애의 탄생은 과연 언제 이루어지나, 아이를 낳는 순간? 아니면 비로소 아이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건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을지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상적인 어머니상을 그리며 모성을 본능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머니’라는 자리에 놓인 여성이 헌신적으로 희생하며 자녀를 길러내기 위하여 사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자 압박일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저서 <만들어진 모성>에서 ‘모성애란 본래부터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성애는 여성의 본능이다’라는 하나의 명제에 X패를 내놓으며 말한다.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다. 근대에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로, 하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세대가 변하면서 모성에 대한 강요는 점차 옅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모성을 본능이 아닌 감정이라 여기기 어려운 이들도 존재하는 2023이다. 많은 이들이 모성애는 본능이리라 굳게 믿으며 감정이라는 사실을 반대하진 않을 테지만, 우리는 ‘당연히’ 화목한 엄마와 자식의 사이를 여러 매체에서 만날 수 있다. 출산 이후 여성이 육아와 가사 노동을 모두 도맡는 모습이 생생하게 담긴 작품,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살펴볼까. 이곳에서도 엄마와 딸은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엄마는 딸을 보듬어주고, 딸은 엄마를 끝내 이해하기로 한다. 그 많은 일을 겪었지만 우리는 물보다 진하다는 피로 이어진 관계니까.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모녀 관계를 형용하기

 

이 글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엄마와 자식 관계를 다룬 작품을 비판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다만 의문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랑’이 무너지고 난 뒤의 모녀 관계를 다룬 작품은 존재할까. 그토록 견고하다고 여겨졌던 모성애가 하나의 감정에 불과하다는데, 왜 그 감정이 사그라든 관계에 관한 작품은 없을까. 그러던 와중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작품을 발견했다. 22년 끝자락에 개봉한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라니. 이건 세상에서 제일 기발하면서도 기이한 방식으로 엄마와 딸의 관계를 형용하는 영화 제목일 것이다.

 

동시에 부서진 유리 조각 같은 제목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같은 옷을 나누어 입는다는 사실로부터 어렴풋이 보이는 사랑과 연대가 있으니까. <리의 세계>와 같은 유진목 시인의 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은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다며 가족에 대한 여러 가지 감정, 동시다발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들을 시 속에 담아내기 때문일까. 입체적이고 다방면적인 모습으로 ‘가족’을 다룬 창작물일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또한, 보통 한국에서 가족은 미우나 고우나 서로를 품어주고 사는 사이, 창작물에서는 더욱 애틋한 관계로 그려진다. 거기다 성별이 같은 두 사람이라면 어쩐지 한 덩어리로 결속되어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대개의 경우를 깨고 새로운 게 등장할 것만 같다. 그 뒤에 느껴지는 섬뜩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같은 옷이 그저 겉옷이나 바지가 아니라 속옷이라는 점으로부터 기인한다. 강한 결속은 강한 결핍을 불러들이기도 한다는 사실. 너무나도 가까이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 우리는 여기서 알게 된다. 이 관계는 완벽한 독립을 실패한 관계구나.

왜 같은 속옷을 입어야만 했나

 

도입부에서부터 이 영화가 쉽게 갈 것 같지 않음을 암시한다. 조금 좁지만 평범한 가정집 화장실에서 속옷을 빠는 딸 이정이 있다. 그 옆으로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을 이용하는 엄마 수경도. 수경은 이정을 재촉하더니 마르지도 않은 속옷을 입고 밖을 나선다. 생리 중이니 약을 사와 달라는 딸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연인 그리고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즐기는 수경. 뒤늦게 집에 들어와 약을 찾는 딸을 보고서 그렇게 말한다. ‘넌 왜 내 것 중에 안 좋은 것만 가져갔니.’ 모녀간의 기묘한 기류를 느끼던 중, 하나 사건이 터진다. 마트 주차장에서 다툼을 벌인 뒤 화가 나 차에서 내린 이정을 수경이 차로 친 것. 수경은 급발진 사고를 주장하지만, 이정은 이것을 고의라고 확신한다. 이 자동차 사고를 시작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눈에 띄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러닝타임 140분 동안 아무 장비 없이 잠수를 한 것처럼 숨이 막힌다. 그리고 마침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푸하, 숨을 쉬며 생각한다. 이 영화는 때를 미는 것 같은 영화다. 모녀 관계를 최대한으로 불린 뒤 잠들어 있던 찌꺼기를 벗겨내는 영화. 그렇다면 묵은 때가 나타나게 해주는 타올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이 영화는 조명이나 음악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단한 영상미나 화려한 연출 대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사물과 공간으로 말한다.

 

엄마와 딸, 아니 수경과 이정은 어디에

 

수경과 이정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머무르는 공간이다. 우선 두 사람의 일터를 살펴볼까. 감독 김세인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함께 대중목욕탕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았던 좌훈을 소재로 가져왔다. 감독은 좌훈을 하기 위해 입은 옷이 연기에 의해 점차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고서 태동과 떠올렸다고 한다. 그것을 반영하여 수경은 동네 아주머니들을 상대로 좌훈을 제공하는 마사지 가게에서 일한다. 이정은 작은 학습지 출판사에서 일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학습지의 주 고객은 어린아이를 둔 어머니들이다. 이정은 고객이 되는 어머니들의 모성애 –아이를 위해 이 정도는 해 주어야 한다는-을 자극하며 학습지를 영업하고, 수경은 이정과 비슷한 나잇대의 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한다. 결과적으로 이정은 자신의 어머니가 충분한 모성애를 발휘하지 못하였다는 생각에 휩싸이고, 수경은 다른 집 아이들과 이정을 겹쳐보고 비교하며 독립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다.

 

일터 다음으로 살펴볼 곳은 ‘이정만의 방’이다. 영화가 끝이 날 때까지 한 번도 이정만의 방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모순적이지만 말이다. 이정은 스물 후반의 나이가 되어서도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집에는 자신만의 방이 없다. 이것은 수경과 이정의 경계가 모호함을 의미한다. 옷을 갈아입는 와중에도 문이 열리고, 어머니의 악다구니로부터 도피한 방 또한 제대로 문이 잠기지 않아 틈이 벌어져 있다. 화장실에서 마저 역류한 콘돔으로 온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이때 수경이 애인과 집을 합치는 과정에서 하는 말이 있다. ‘여긴 소라 (애인의 딸) 방 아닌데? 여긴 창고 방이야. 창고가 없으면 집이 지저분해지잖아. 난 그런 집에서 살기 싫어.’ 아마도 수경과 이정이 함께 사는 집에는 창고 방이 있을 것이다. 수경의 욕망이, 이정의 불확실함이 투영된 창고 방 말이다. 더불어 이정의 신세는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6인실 병실에서 커튼을 치는 것으로 애써 제 공간을 만드는 찰나, 수경이 등장해 커튼을 걷어낸다. 직장에서도 비슷한 처지이다. 정해진 자리가 없고 인사이동을 하여 붕 뜨는 상황이 된다. 다리를 다친 상태임에도 돌아다니며 영업 판매를 해야 하는 동시에 다른 어머니들 사이에 둘러쌓인다.

 

마지막으로 모녀의 커다란 갈등의 시작점이 되는 자동차가 있다. 자동차는 지금껏 언급된 공간 중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공간이다. 비교적 동적이라는 특성을 가진 덕분일까, 이곳에서 두 사람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다. 수경의 소유도, 이정의 소유도 아니기에 미묘한 쟁탈전이 있었고 그 기류 속에서 추돌 사고에 대한 고소 건이 진행된다. 이정이 사고를 고의라고 주장하자 열이 오른 수경은 차를 주행할 수 없도록 스티커를 마구 붙여둔다. 이정은 이곳에서 직장 동료의 USB를 읽어내 그가 사는 곳까지 가는 당돌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한껏 어리광을 부린다. 두 사람의 결핍과 결속을 볼 수 있는 이 붉은 자동차는, 이정이 폐차를 하면서 종적을 감추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이정은 홀로 차를 몰다가 정말로 자동차가 고장 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머니가 일부로 자신을 해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 자동차 키를 발코니에서 떨어뜨린 뒤 폐차장에 간다. 이때 차를 구기고 압축시키는 씬을 필요 이상으로 길게 보여준다. 이정의 과거 회상과 교차하며 찌그러지는 차를 보면, 단순히 차를 버리는 것이 두 사람의 단절만을 상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어떨 때 옷을 나누어 입지

 

공간을 보았으니 이제 사물에 집중해볼까.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이 영화에서는 옷이 사람 사이를 오고 가며 그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옷에 대한 모든 것은 한 끗 차이다. 없으면 안 되는 동시에 사치스러운 것이 되기도 하고, 몸을 감추는 도구이자 동시에 드러내는 도구가 되기가 한다. 이러한 물성을 지닌 사물을 찢는다는 건 옷처럼 겹겹이 겹쳐진 감정을 찢으며 분노를 표출함이나 다름이 없다.

 

‘겹쳐짐’에 초점을 두면 보이는 것들도 있다. 영화에서 수경은 대부분 외투 없이 상의와 하의. 한 겹의 옷을 입고 나중에는 란제리만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 반면 이정은 병원에서 퇴원 할 때도, 깁스를 갈 때도, 장을 볼 때도, 아무튼 외출할 때면 여러 옷을 겹쳐 입는다. 이는 수경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속을 드러내는 편이고, 반대로 이정은 자신을 꽁꽁 싸매는 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옷은 하나의 육체를 의미하기도 하니까. 그중 옷 중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쉽게 타인과 공유하지 않는 속옷은 가장 육체와 가까울 것이다. 공유하고 싶지 않지만, 반강제적으로 하나의 방을 쓰며 같은 속옷을 공유하는 딸과 어머니는 완전한 독립을 실패한 모녀 관계를 나타낼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수경이 애인의 딸, 소라를 거부하는 것이 코트를 거부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가장 바깥을 감싸는, 그것도 자주 입지 않아 섞여들 수 없는 코트를 선물 받은 것부터 수경이 거부할 조짐이 보인다. 그리고 이 코트가 오직 자신 ‘수경’을 위한 선물이 아닌 ‘소라의 어머니로서’ 애인에게 받은 선물임을 알고서 이것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붉은 빛 란제리만 입은 채 거리를 걷는다.

 

수경은 집으로 돌아와 씻던 중 정전으로 의해 불이 나가자, 이정에게 조명으로 몸을 비추어 줄 것을 의미한다. 딸이 옅은 빛으로 비춘 곳에는 분노와 슬픔의 표출로 난도질 된 옷, 그것이 흘러 내려간 뒤 나타난 엄마의, 아니 수경의 맨몸이 있다. 이정은 수경의 맨몸을 마주한 뒤 어둠 속에서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는다. 이때 이정은 수경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자신을 왜 죽이려고 했냐고. 차량이 고장 나 일어난 사고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것은 그 사건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왜 평소에 자신을 모질게 대해야만 했냐는 물음일 것이다. 캄캄한 시야 속에서 질문을 주고받은 뒤, 이정은 결심한다. 엄마와 자신은 함께일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로부터 완벽한 독립을 하게 된다.

 

다음 날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서는 이정을 보고 수경은 그 전처럼 미친 듯이 화를 내거나 소리 지르지 않는다. 다만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 줄곧 배우고 싶었던 리코더를 불어본다. ‘소리 내어’, ‘마음껏’ 불어본다. 정확하고 맑은 음이 아니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주를 한다. 그리고 이정은 속옷 가게에 가 ‘여태껏 엄마가 사 와서 모르던 나의 속옷 크기‘를 알게 된다. 이정의 속옷 치수를 재는 직원의 한 마디이자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숨 쉬세요. 그렇지 않으면 정확하게 사이즈를 잴 수가 없어요.‘

침착함에서 비롯되는 솔직함

 

최근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 시도만큼은 훌륭하지만, 큰 움직임은 언제나 아쉬움을 불러오기도 한다. 여성을 앞세워 여러 활약을 선보인 뒤 사랑과 우정이 가득한 교훈을 제시하고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나긴 시간 동안 남성 서사가 가득했던 것에 비해 다량의 여성 서사가 새로이 등장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지루함을 느끼는 시점에서, 뻔하지 않은 작품을 만날 수 있어 기뻤다. 더군다나 가족애로 회귀하지 않는 모성애에 관한 이야기라니.

 

특별하게 그리고 화려하게 인물을 표현하려 애써 노력하지 않고, 사회 어딘가 존재하고 있을 하나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배운다.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모성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를 향해 던지는 질문, 견고한 갈고리처럼 보인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은 조각, 그러나 제각기 빛이 나고 싶었던 유리 조각들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단단하고 강력한 자기주장일 것이다.

 

엄마는 나를 키우는 일에 미숙한 여자였습니다 (...)

 

그 시절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릴 때는 사소한 일에도 많이 노여웠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는 살아가는 일이 싫다가도 또 언제는 살아봐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마치 내가 죽은 사람 같아서 웃음이 납니다 (...)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믿음은 없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살아가 보려고 합니다

 

엄마는 내가 제일 처음 떠나 온 주소입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 유진목, <반송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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