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기꺼이 모험하고 사랑하는 도로시 – 권누리의 『한여름 손잡기』를 읽고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10-30
  • 조회수 625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 도로시어느 날 태풍에 휘말려 마법의 대륙 오즈에 떨어지고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험 이야기를 펼친다이것이 라이먼 프랭크 바움의 소설 오즈의 마법사이 소설을 읽다 보면 오늘날 우리 근처에도 도로시가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누워서 입안 훑어내면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세계가 (니팅레이스있을 만큼 이 별은 크고 넓으므로,

만약 당신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면기꺼이 권누리 시인의 한여름 손잡기를 내밀고 싶다도로시가 다른 동료에게 내민 손처럼이곳에는 내 미래의 수신인은 단 한 번도 나인 적 없다’ 생각하면서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씩씩하게’ 걷는 (한여름 손잡기」 79p) 시적 화자들이 살고 있다.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귀여운 원피스 입고 만나자며 명랑하게 인사하면서도 불온한 신뢰와 불신으로 (도로시 커버리지이루어진 얄팍한 세계를 달려 나가는 도로시들이 살고 있는 한여름 손잡기.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허수아비양철 나무꾼겁쟁이 사자에게 각각 세 번의 손을 내민 것처럼이 시집에서도 세 번의 한여름 손잡기가 등장한다제목이 같은 각각의 시들은 고유한 온도와 리듬을 지니고 있다마치 사람의 손바닥에 머무는 온기처럼가슴팍에 살고 있는 심장 박동처럼그리고 이들이 맞잡고 껴안을 때면 타인들에게 전염되듯이 시 속의 요소들 또한 에 머물지 않고 시 곳곳에 배치된 ’ 또는 우리로 번져 가려 한다가령 의 옆에 나란히 누워 너는 행복할 것이라 속삭이는 것처럼. (한여름 손잡기」 39p) ‘사랑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무책임하지만 그래서’ ‘내내 그것만 열심히’ 한 것처럼. (한여름 손잡기」 79p)

시인의 말에서 그러니까 이제 아무도 죽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 등장할 만큼, ‘불쑥 자라나는 유령들’ (카메라옵스큐라)들이 거리에 나타나고 조금씩 슬퍼지는’ (소유병을 앓게 되는 세상한여름 손잡기』 속 도로시는 태풍처럼 발목을 휘감고 먹구름처럼 그늘을 만드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그러나 태풍에 휘말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층층이 나의 흔적을 남겨두는’ 일을 하는 (초월도로시그가 등장하는 시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그 시와 권누리 시인의 시적 세계에 흠뻑 빠지게 된다.

 

 

여름타바코

 

나는 이해할 수 있는 문장만 쓰고 싶어 리타가 타바코를 굴리며 말했지 하지만 어떤 인간들은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깨닫고 인정하는 법 알기를 쉽게 포기했어 하지만 누구에게나 안전한 공간은 필요하니까

 

풀밭 위에 자리를 펼쳐 놓고 아무것도 걸지 않고선 내기를 시작했다 나는 칭찬받을 수 있는 거짓말만 하고 싶어 빛의 총량이 서서히 닳아가는 이곳에도 최소한의 낙관은 남아 있어 우리 원하는 만큼 잠들어 있자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랑만 하고 싶어

 

타바코가 굴러가고 여름은 등을 돌리고

 

리타는 아름다운 것을 끌어모아 잿더미로 만드는 취미가 있었고 그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물려주는 타바코여름타바코

 

오해할 수 있는 진심만 갖고 싶어?

 

인간의 뒤라는 건 왜 이렇게 단단하고 연약하게 만들어진 걸까 나는 이제 거절할 수 있는 미래만 갖고 싶어

 

사랑하는 것들 모여 있는 거대한 유원지 솟구치다 꺾어 돌고 바닥 치는 롤러코스터와 솜사탕 가게의 명랑한 음악 소리 물 담긴 붉은 대야 위 둥둥 떠다니는 엄지만 한 슬픔을 얇은 습자지 뜰채로 건져내는 놀이 다섯 번에 삼천 원 퍼낸 슬픔은 숨이 죽은 인형으로 교환해주는 귀여운 풍경 몰래 피어오르는 한 줌짜리 불씨 그건 누구도 모르게 타바코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작은

 

캠프파이어,

불꽃

 

 

위는 한여름 손잡기에서 가장 주목하여 읽었던 시편이다체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시인은 아이돌 덕질을 좋아하고더불어 아이돌의 노래로부터 여러 시를 써왔다고 한다그래서일까읽는 동안 나에게만은 아이돌인 인디 뮤지션의 노래가 떠오르는 시였다러블리서머쨩의 당신은 담배 나는 비눗방울 (ラブリーサマーちゃんあなたは煙草 はシャボン)이라는 곡으로, ‘매일 흐린 하늘이 비로 쏟아지거나’ ‘재가 되어버리는’ 세계 속에서도 비 냄새가 밴 그 여름을 떠올리며 담배를 물고 있는 당신을 그려내는 노래이 노래 속에서 당신은 어른스럽고 나는 둥둥 떠다니지만 무지개 빛깔로 공교롭게도 권누리 시인은 퀴어시에 대해 생각하며 쉽게 여성으로 느껴지는 인물들로 시를 써낸다고 한다무지개는 퀴어의 다양성과 평화를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빛나므로당신은 담배이며 나는 비눗방울이라 칭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 시 속에서는 말 그대로 단단하고 연약하게 만들어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마치 앞서 언급된 비눗방울처럼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으면서도 한 번의 노크에 터져버리는그런 마음. ‘나는 이해할 수 있는 문장만 쓰고 싶다 말하거나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랑만 하고 싶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들 사이의 어떠한 사실 깨닫고 인정하는 법을 보이거나 최소한의 낙관은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를 지닌 시적 화자는 에메랄드 시티의 마법사를 찾아 걸어가는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와 닮았다마법사 대신 마법 같은 사랑과 미래와 진심까지 당차게 걸어가는 사람.

 

한편 타바코즉 담배는 시 속 리타가 굴린 것과 같은 방식으로 종이 속에 연초를 넣어 만들어진다처음 시를 읽을 때엔 타바코를 굴린다는 표현부터 이 정물의 등장까지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거듭 읽는다면 그 무엇보다 타바코를 아름답게 풀어낸 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독백하듯 두어 줄씩 쓰이던 시가 마지막에 가서 놀이공원의 풍경을 그려내며 줄줄 쏟아지는 이미지로 전환된다그리고 적힌 캠프파이어불꽃’. 타바코는 아름다운 것을 끌어모아’ 만든 것이자 지난 계절들의 추억이고여기에 불을 붙여 환하게 만들 수 있는 캠프파이어불꽃은 누구의 마음속에나 누구도 모르게’ ‘작은 풍경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이렇듯 비눗방울과 담배가 교차하며 그려내는 듯한 여름의 싱그러움은시 속 도로시의 마음을 더욱 선명하게 그려낸다.

 

 

구르는 여름과 도로시

 

여름이 구르는 건 누군가 열심히 발로 차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한때 그 애가 여름 굴리는 걸 오래 지켜보았다.

 

그 작업은 몹시 정교하고 명료하게 이루어졌고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가만 쳐다보면 그 애는 이곳부터 저곳까지 여름을 차며 걸었다여름이 구른 자리마다 축축하게 땀이 흘러 바닥이 짙게 젖었다.

 

규칙 없는 궤도뜨거운 공기

 

눅눅한

 

젖지 않는 커튼이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이다.

 

더 단단한 여름을 위해.

 

물을 섞어준다천천히이따금 여름이 토하는 너무 많은 비는 그 애를 슬프게 했지만여름이 잘못된 길로 든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것을 바로 놓을 수도 있었다.

 

한번은 여름을 가방에 넣고 바다로 갔다그 애는 모래를 밟고 걸었다맨발발등은 까맣게 타가고

물에 닿지 않는 복판에 여름을 얌전히 내려두었다.

 

여름은 낯을 가리는지 작게 웅크렸고그 와중에 더욱 단단해졌고 그 애는 발가락을 접었다 펴며 간지러워하며 여름을 굴렸다.

 

여름은 모래투성이가 되었고 여름은 즐거워 보였고 여름은 제법 행복한 것 같았다.

그게 전부였고,

 

나는 한때 그 애가 여름 굴리는 걸 오래 지켜본 적이 있었다.

 

 

한편여름은 싱그럽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규칙 없는 궤도와 뜨거운 공기가 공존하는 눅눅한 밤이 있고이를 자세히 다룬 구르는 여름과 도로시」 또한 인상 깊게 읽어냈다앞서 한여름 손잡기의 손잡기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봤다면이 시에서는 화자의 한여름에 대해 알 수 있다대개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들은 시 속에서 추상적으로 발화되기 마련인데그러한 점에서 여름 또한 구체적이거나 섬세하게 표현되지 않고 하나의 개념에 머무르기 쉽다하지만 권누리 시인은 그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나아간다표제작과 시집에서 당당히 한여름을 내세운 것처럼여름을 내세우는데도 멈춤이 없다. ‘여름이 구르는 건 누군가 열심히 발로 차고 있기 때문이라며 모든 생명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여름의 뒷모습을 그려내거나, ‘여름이 구른 자리마다 축축하게 땀이 흘러 바닥이 짙게 젖었다고 말하며 여름의 질감을 텍스트로 나타내기도 한다.

동시에 시의 후반부에서는 여름을 하나의 물건이나 생명처럼 취급하는데이는 시적 화자가 여름을 애틋하게 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정교하고 명료하게’ 여름을 굴리며 가는 그 애처럼시적 화자는 여름 풍경과 그 풍경 속에서 느낀 마음들을 눈사람처럼 조심히 굴리고모래성처럼 천천히 쌓아가며 시적 표현으로 발화한다. ‘여름은 모래투성이가 되었고 여름은 즐거워 보였고 여름은 제법 행복한 것 같았다. /그게 전부였고,’와 같은 담담한 어조 또한 눈에 띄는데감정 과잉 상태에 접어들지 않고서 지난 계절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여름 모빌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방 꾸미는 일을 한다

 

그것이 이번 생 내게 주어진 일이다

 

블라인드를 바닥까지 길게 내려도

물결처럼 들이치는 빛

이런 눈부심은 지구에서 가장 멀리 있는

죽음도 깨울 수 있겠지

 

나는 눈을 뜬 이 방에서 큰 계획을 만들어본다

 

더는 죽지 않을 것 단,

또 죽게 된다면 되살아나는 일은 그만둘 것

머리를 묶은 검은 공단 리본에 달린

모조진주가 달랑거린다

꼿꼿이 선 것만이 아름답다고 믿는다면

 

요람은 더욱 푹신해지고 몸을 구겨도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이용 침대 곁에서

웅크린 채 잠든다 높이 매달아둔 모빌은

 

파르르 돌아간다 소용돌이의 소용돌이의 소용돌이가 무수한 소문을 만들어내면 거기에는

 

여름의 조각에 비싼 값을 매겨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팔아대는 나의 영원하고

무용한 사랑이 있다

 

 

나는 이 시야말로 눅눅하면서도 고유의 온기가 있는 시라고 생각했고내가 생각했던 도로시’ 같은 화자가 떠오르기도 하는 시라 느꼈다.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방 꾸미는 일을 한다는 첫 구절부터 굉장히 인상 깊은데우선 이제는이라는 수식어가 흥미로웠고 다음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는 방을 꾸민다는 행위가 흥미로웠다한때 사람들로 북적였으나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방여전히 이것을 가꾸고 꾸준히 장식하는 화자는 어떤 사람일까더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절망감보다는 누군가 올 수도 있다는 미래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화자는 아마도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더불어 그것이 이번 생 내게 주어진 일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한 여정의 주인공인 도로시’ 같다고 생각하게 했다. ‘나는 눈을 뜬 이 방에서 큰 계획을 만들어본다는 서술 또한 당차고 그럼에도나아가는 화자를 그려보게 되어 좋았다.

한편 이 시에서는 모빌이 핵심 정물로 사용되고 있다이 모빌 속에서 내가 읽어낸 것은 닿을 수 없는 세계인데, ‘높이 매달아두었으므로 만질 수 없고 무수한 소문이 웅성거리기만 하는 화자와는 먼 세계우리가 보았던 모빌은 대개 어릴 적 누워서 본 것들인데이때는 직접 만져보지 못하고 빙글 돌아가는 모습만 지켜보지 않았던가이렇듯 화자는 몸을 구기고 어린이용 침대 곁에서 아직은 이해하기 힘든어린 도로시가 바라보는 너무나도 넓고 복잡한 이 세계 같은 모빌을 지켜보는 것 아닐까싶었다.

 

권누리 시인과 그의 시가 사랑스러운 점은 바로 이것이다사랑의 달인이거나사랑을 아주 잘 한다 느껴지지는 않는다다만 누구보다도 사랑을 등지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이 보인다대개의 시에서 ’ 또는 언니’, 그게 아니라면 특정한 누군가의 이름이 나오고그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화자들이 보인다시는 개인의 체험을 시적 언어로 빚어내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언어 예술이라고 믿는다그러므로 보통 자신의 이야기자신만의 감정을 이야기하기 쉬우나 권누리 시인은 늘 누군가 함께 하는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채널 예스와의 인터뷰에서는 스스로 공주를 사랑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고 자신을 소개하였고 유어마인드 홈페이지에서는 사랑과 애도를 연습하며 살아간다’ 고 밝혔다다만 생이라는 모험을 진행해나가며그 속에서 사랑을 찾고 찾아낸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누구보다 뚜렷한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한여름 손잡기우연히 서점의 서가를 구경하다 발견한 책이었다이 시집을 처음 마주한 어느 겨울날봄날의 책 시인선을 처음 만나 보았다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은 표지수채화로 그린 듯 옅게 번진 물가의 빛들, ‘그러니 이제 더는 아무도 죽지’ 말아 달라고 하는 시인의 절박함모든 것이 새로웠다패딩을 껴입고 있던 한겨울에는 느낄 수 없는 기후태풍이 온 뒤의 세상처럼 혼란스러운 오늘날을 기꺼이 걸어 나가며사랑하는 한여름 손잡기』 속 화자들그런 화자들을 통해 시집마다 있는 고유의 기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금 눅눅해져도 좋으니 뜨겁게 맞잡을 도로시의 손이 필요할 때면 이 시집을 꺼내 읽게 되었다더불어 권누리 시인 또한 문장의 소리’, 이영주 시인과의 인터뷰에서 이 시집은 용기를 주는 시집이 아닌가 말했을 때 타인에게 용기를 주는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멋진가하며 권누리 시인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그가 앞으로 기꺼이 걸어 나가며 사랑할 것들이 기대되기도 한다그러므로 당신들 또한 이 멋진 시인의 기후를 한 번쯤은 맛보았으면 좋겠다다가오는 쌀쌀한 계절에한여름처럼 손을 맞잡으며.

 


추천 콘텐츠

초능력자의 메일링 –메일링 서비스를 하며 느낀 것

이슬아 작가의 월간 이슬아, 문보영 시인의 일기 딜리버리. 그런 메일링 서비스들을 보며, 언젠가 나도 사람들에게 나의 글을 보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어딘가에 올려서, 불특정 다수가 나의 글을 보고 가는 것 말고. 애초부터 독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므로 그들을 위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 그건 작년 겨울에 어렴풋이 떠올린 것이었다. 언젠가, 그러니까 언젠가 해보아야지. 그런데 언제 하지? 언젠가는 해 보겠지. 그렇게. 그리고 나는 올해 초부터 여름까지 고선경 시인의 메일링 서비스를 꾸준히 신청하였다. 나는 그가 ‘럭키 슈퍼’로 등단하였을 때부터 큰 팬이었다. 웹진 ‘비유’에 실린 시편을 보고서 더욱 팬이 되었는데, 가볍고 산뜻한 어조가 지닌 위트로 무언가 핵심을 찌를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능력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쓰지 못할 것 같은 시를 쓰고 있다고 해서 좋았고, 그런 시인이 갓 구운, 따끈따끈한 시와 산문을 내게 배달해준다는 건 큰 기쁨이 될 것 같았다. 2023년 초, 나는 굉장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으나 고선경 시인이 배달해준 시편들을 읽으며 어떠한 용기를 얻었다. 얘들아 문예창작과는 더 슬픈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야 게임을 더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야 계속 지고도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고선경, ‘수정과 세리’ 中 이 시는 1월의 중반 메일링으로 처음 받아보았고, 이후 고선경의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에도 수록되어 내가 자주 읽는 시가 되었다. 내가 시인이라는 꿈을 가진 이유, 굳이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겠다고 다짐한 이유, 지금 나에게 매너리즘이 들이닥친 이유를 고선경 시인의 텍스트와 함께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고열과 함께 아주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시를 썼는데, 이것이 ‘래빗 헌팅’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손에 쥘 수 있다면 당도 높은 복숭아일 거야 쉽게 물러지는손끝으로 망설임 많은 과즙이 흘러내린다 아직도 카드는 뒤집어지길 기다리고 있고 (...) 직선으로 뛰어가는 토끼 곡선으로 떨어지는 카드 잠긴 문을 열어본다그림자의 형태는 계속해서 바뀐다 울렁거리지는 않는다 나는 무언가 막힌 것을 뚫어버리듯 이 시를 썼다. 모든 건 사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고, 나의 이야기를 막힘 없이 써내기 위해 시작한 것인데 나는 왜 이렇게 괴로워 하는 걸까. 그런 마음들로. 그리고 나는 이 시를 ‘글틴’을 비롯한 나의 블로그 등에 업로드 하였고, 운 좋게 글틴 시 부문 멘토님들께서 나의 시를 월장원으로 선정해 주셨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놀라게 된 계기는, 모 sns를 하던 중 발견한 게시글 덕분이었다. 올해 여름부터 친한 동생의 권유로 sns에 글을 올리는 계정을 만들었다. 내게는 몇백 명 정도의 구독 계정이 있었으나 그들은 대개 비공개 계정이었고, 나 또한 겁이 많아 따로 소통 창구를 마련하지 않아 사실 내게 그런 구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어느 밤, 한 구독자분께서 내게 ‘글틴’에서 본 시가 이

  • 모모코
  • 2024-01-08
말할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괴물로 자라난다 –영화 ‘괴물’을 보고

*감상에 앞서, 본문에는 최신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 부탁드립니다.** 노래와 함께 감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각자가 생각하는 괴물에 대해 이야기하자너부터 시작 괴물은 말야 초록색이고 이빨이 아주 커다음괴물은 말야 손톱이 길고 냄새가 나다음괴물은 말야 밝은 걸 싫어하고 검은 피를 흘려다음괴물은 말야 시끄럽게 기침을 하고 사람을 먹어 다음 괴물은 말야……괴물은 말야…… 긴 침묵이 지나고하나둘씩 눈을 떴을 때 그 애는 울고 있었다 너 왜 울어?모두가 그 애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흙을 파내려가는 뾰족한 손톱을 생각해 상처 입은 무릎을, 배고파 잠이 오지 않는 매일 밤의 뒤척임을, 빛이 머리를 관통할 때의 저린 통증을 생각해 백은선, 「진짜 괴물」 中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신작, 네가 좋아할 것 같아. 올해 여름, 일본에서 유학 중인 언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언니는 일본에서 우선 개봉한 영화를 보고 내게 연락한 것이다. 그 메시지는 내가 생각에 잠기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란 대체 무엇일까 고민해보게 된 것이다. 나는 여러 예술 중에서도 영화와 시를 가장 사랑하는데, 아무래도 각각 카메라로, 언어로 특유의 호흡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공통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영화는 러닝타임 내로, 시는 장르적 특성으로 인해 두 작품 모두 함축과 비유가 가득 담긴다. 이로써 관객과 독자에게는 극대화된 ‘이미지’가 다가오는데,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아름다운 서사가 진하게 농축된 풍경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제한된, 약 2시간이라는 시간 내에서 가장 영리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내는 영화이다. 단순히 강하게 주장하지 않고, ‘영리하게’ 주장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카메라의 이동, 시점, 편집과 같은 영화적 요소와 시놉시스와 대사 등 서사적 요소가 결합되어 진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미지를 만드는 영화, 그런 것이 좋다. 특히나 나는 ‘그 무엇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영화가 좋다. 나는 사람의 가장 주된 원동력이 분노나 우울이기보다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감정들도 좋은 원동력이 될 수 있으나, 결국 우리가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누군가를, 또 어떤 것들에게 기꺼이 마음을 주면서 가지는 기쁨인 듯 하다. 그리하여 이 차가운 오늘날, 어쩌면 혐오와 냉소로 21세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하여 말하려는 영화가 좋다. 나는 언니가 말한 고레에다 감독의 신작, ‘괴물’이라는 영화의 정보를 나름대로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예고편과 간략한 줄거리를 볼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고, 이건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영화겠거니, 생각했다. 어떤 시집을 요약해보라고 했을 때면 난데없이 장황하고 난해하게 말하게 되지만, 직접 읽을 때면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비슷한 영화들도 있으니, 나는 직접 보는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3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고대하던 ‘괴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은 시월의

  • 모모코
  • 2023-12-11
이제는 다른 속옷을 입을 수 있었으면 –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보고

먼바다를 헤엄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것을 만나게 됩니다

  • 모모코
  • 2023-10-23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