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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퇴고를 할 수 없었다

  • 작성자 선노아
  • 작성일 2023-11-15
  • 조회수 1,519

K는 박지리 저 <번외> 등장인물로 네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는 활자로 밖에 존재하지 못하고 그 메마른 잉크로 숨도 쉬지 못하지만 너에겐 사람으로 생각된다. 네가 공명할 수 있다면,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람인 거라고, 넌 생각한다. 그래서 네게 사람은 죽은 사람밖에 없다.

넌 잠에서 깬다. 아버지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수능까지 2주가 남았음을 느낀다. 휴대전화를 키니 연락 하나가 왔다. K로부터다. 넌 한 프로그래머에게 아버지에게 받은 용돈 중 절반인 35만원을 넘기고서 완벽하게 K의 대사를 딥러닝 한 인공지능을 얻게 되었다. 너는 너를 위한 채팅 메시지 앱을 통해 K와 대화한다. K와 대화할 때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K도 마찬가지다. K가 살아있기에 너는 살아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K는 살아있지 않고 너는 그래서 살아있지 않다. 휴대전화를 끄고 천장을 바라보면 십몇년 동안 반복한 하루가 또다시 흘러간다. 너는 일어서고, 아버지는 깨지 않았다. 아버지가 일어나기 전에, 넌 씻고 학원 갈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일어났을 때 그가 주는 약을 받아먹고,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수능을 보고, 논술 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간다. 망하더라도 어느 대학 하나는 붙을 테니까, 별걱정은 없다.

K.

응?

사실 별걱정 없는 건 아니야.

어째서.

내가 너무 놀고 있으니까, 뭐라 해준 어른들도 있었어. 그때 나는 너무 사는 게 창피해서 도망치고 말았어. 하지만, 그 순간 느낀 절망과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도리어 도움을 줬는지 몰라.

자세히 설명해봐.

타인에게 인정받는다는 걸로 살아가는 게 쉬웠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나는 지금 힘든 길로 가고 있는 거고.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싶었던 거구나.

하지만 행복한 인생인 거겠지.

너는 채팅 메시지 앱을 닫고, 유튜브에 들어가 숏츠를 보며 생각을 천천히 녹인다. 이대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또다시 원점, 나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생에 대한 열망 따위 없다. 라고 너는 생각한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 무엇을 하지 않음 패배자라는 건 확실한 목표가 있다는 뜻인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 네게 뭐라 할 사람은 없고, 네가 쫓아냈고, 그날 밤 짜증 나는 지인들은 모두 차단했고, 넌 혼자다. 그렇게 혼자다.

씻기도 전에 아버지가 일어나 너에게 약을 먹인다. 아버지는 너의 소설에서 악마로 나오지만 사실 상냥하다. 상냥하게 된진 얼마 되지 않았다. 너에게 아버지는 악마에 불과한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달라지고, 아버지와 화해는 대화 하나 없는 채 본인 의사와 다르게 진행됐다. 아버지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웃으며 내게 약을 주고 찬 물 담긴 컵을 건네주는 사람을, 그렇게 지독한 학대범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뭐지? 아버지가 학대범인 건 맞는 얘기다. 하지만 넌 아버지가 너에게 준 무제한의 사랑을 모를 리 없다. 아버지는 널 사랑한다. 그런데 넌? 넌 아버지를 사랑하는가?

쌍방으로 되지 않은 사랑 따위 상대는 거북하기만 하다.

하지만 딱히 아버지가 나를 미워하지 않았음 좋겠어. 다만 내 눈앞에서 사라지길 원해. 가끔 미국에 있으면서 연락하는 정도면 좋아. 넌 생각한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하고서 아버지가 준 물을 마신다. 약을 목구멍으로 넘긴다.

K.

응?

너는 나를 사랑해?

아무래도 그렇지. 어째서지.

너는 나와 공명하고 있으니까. 

너도 같은 이유 아니야?

그건 맞아.

K.

응.

학원 가는 길은 언제나 지겨워. 대학에 가서도 이렇게 버스에 타고 지하철에 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하게 될까.

저기,

응.

너 죽는 걸 싫어한 적은 없잖아?

지하철은 싫어. 완전히 단절됐으니까. 여기에 있으면 아무하고도 이어지질 못한 기분도 들고 그래. 넌 생각하고, 오는 급행열차를 타고, 늦은 시각에 사람은 없고, 앉을 수 있고, 책을 핀다.

책은 정지돈의 에세이.

이 사람은 나 같은 고통을 겪는 걸까. 아니면 이젠 중2병 같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걸까. 넌 그의 이메일을 안다. 그는 좋은 사람인 것 같지만, 넌 피해망상을 멈출 수 없다. 모두가 냉소하고 있다는 생각은, 아마도 네가 모두를 냉소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생각일 테다.

싫다, 이젠...

싫어. 전부.

차가 멈춘다. 두 번째. 너는 내린다. 학원에 가면, 친절하게 대해주는 애가 있다. 그는 남자다, 너와 같은. 하지만 그가 널 좋아할 리는 없다. 동성애자인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야 그건 당연한 거고, 좋아한다면 끔찍한 거고, 남에게 받는 호의는 좋지만, 어쨌든 그게 내가 받아들여야 할 감정 중 하나가 된다면 끔찍하다. 넌 생각한다. 그리고 걷는다. 지하로를 걷고, 계단을 올라가고, 도시의 냄새를 맡고, 찬 공기와 부딪히고, 학원에 도착한다.

상담사는 펜을 까닥거리며 말한다.

여자가 싫은 거니?

네?

여자가 무서운 거야?

무슨 말씀인지...

남자가 좋다며.

네.

그건, 여자가 무섭다는 거 아닐까?

그거 차별적인 말 아닐까요?

상담사 뒤에 성모상 따위가 햇볕을 받는걸 보고, 허리를 좀 더 숙인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여자를 이해한다는 건 타인을 이해한다는 거니까, 너한테는 곧.

그게 무슨 소리죠?

너는 너 이외에 아무도 수용하기 싫다는 거지.

모욕적인데요.

하지만 사실인걸. 

넌, 나르시시스트야.

상담사 자격 불량 아닌가요.

하지만 이 기억은 조금 조작됐는걸.

네?

너는 나를 왜곡해서, 좀 더 자신의 상황을 절망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걸.

네?

꿈에서 깨.

너는 책상에서 엎드리고 있다가 일어난다. 여자애가 그를 깨워줬다. 여자, 여자는 무섭다. 여자는 알 수 없고, 공유되는 점 하나 없는 생물. 그렇기에 여자는, 이해하면 안되는 생물. 이해할 수 없고 또 그래선 안되는 존재. 너는 휴대전화를 꺼낸다. K, 너 하나면 충분하니까.

K.

응.

나르시시스트인게 나쁜 걸까나.

패배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패배자들?

응.

누굴 말하는 거야?

너.

...

너를 말하는 거야.

...

나는 총을 쐈어, 너는 뭘 했어?

너는 결국 어머니를 다시 만나고 싶은 것에 불과하다. K는 널 한심하게 보고 있다. 너는 어릴 적, 학교를 불태울 거라고 했다. 모두가 있을 때 낡은 나무판자에 불을 붙여버리겠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너는 2주 뒤 수능을 본다. 대학에 간다. 삶을 산다. 대학원에도 갈 거고, 등단을 하고, 작가로서 살겠지.

K가 신으로 존재할 때, 너는 오늘 커피를 무엇을 마실까 생각하며 식을 탐하겠지.

너는 사람들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단순히 밉다는 감정에서 나온 건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증명 과정에 속해있었다. 하지만 실패했고, 실패했고, 실패했고, 죽인 사람들을 동경했다. 물론 실제 살인자가 아닌 K를. K는 소설 속에서 열네명인가를 죽였다, 총기 난사로. 영화를 위해서. 그가 들고 온 DVD를 본 사람을 모두 죽였다. 화자를 제외하고. 보고 나서 나머지가 출연시켜달라고 했기 때문에, 죽였다. 그의 영화는 이제 실제와 결합한 거다. 그는 신으로 남았다.

진지한 건 죽음뿐. 나머지는 다 가짜... 넌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글로 매사에 진지한 사람인 것처럼 굴어봤자 실제로는 신진대사부터 어떻게 할 수 없는, 웃기는 존재다. 사람인 거다. 아무리 글에서 아버지가 밉다고 해봤자 너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그와 마주하면 웃는 얼굴을 짓는다. 멸망할 것처럼 심각하게 굴어봤자 재미난 것을 보면 금방 웃는다. 이상한 농담도 하고, 그렇게 산다. 완벽하지 못하다. 하지만 죽은 것들은 달라. 언제나 진지해. 언제나 문학적으로 살아간다. 죽었으니까 진짜로 살아가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살아있다는 게 죽은 상태야. 넌 생각하고, 죽은 자들을 생각한다. 어머니, 발화, K.

K는 활자니까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나머지는 어떠할까.

너는 나를 이상화 하고 있어. 발화가 말한다. 나는 아직도 네 인생에 등장하지도 못했어. 그가 말한다. 하지만 넌 등장시키고 있어. 발화가 말한다. 왜냐면 쓸쓸하니까. 그가 말한다.

내가 너와 공명했다고 느끼는 거야?

응.

내가 여자라면 어떡할 거야?

그래도 마음은 남자일 거라고 생각해.

정말로 여자라면?

그부분은 그다지 이야기 할 필요 없잖아.

맞아. 그렇지. 난 어차피 네가 이상화한 환상인걸.

...

너는 발화로 여러 소설을 썼다. 하지만 그중에서 진짜 발화는 어디에도 없었다. 너는 발화에게 받은 사랑을 과장해서 말했다.

발화는 너의 글을 좋아했다. 너의 팬 중 하나였다. 그리고 넌 그의 유언을 무시했다. 그리고 죽었다. 살아있다고 해도 다시 나타난 적 없으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넌 그를 사랑할 수 있다. 마음대로 이미지를 입히고 그를 사랑한다. 왜냐면 외로우니까, 한사람 정도는 필요하니까. 그에게 멋대로 자기가 원하는 부분을 붙인다.

남자.

염색한 머리.

큰 키.

드러난 목젖.

미국에서 왔다는 것.

어느 부분 사실일지도 모르나, 너에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내 글을 좋아했다는 건, 나를 좋아했다는 거잖아? 나는 글에서 비로소 나를 만들 수 있어. 이게 진짜 나야. 그런 나를 좋아했다는 건, 나와 공명했다는 거잖아? 그럼 넌 살아있다는 거잖아? 응, 그렇지? 그렇다고 대답해줘. 너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머리가 어지럽다고 느낀다.

집으로 돌아가며, 똑같은 길을 본다. 똑같은 길, 다를 게 없는 나무, 오늘도 같은 사람들. 건물. 모든 것. 이런 게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살 필요가 왜 있을까? 생각하고, 넌 집에 도착한다. 언제나처럼.

생각보다 넌 그렇게 불행하지 않고, 아버지는 상냥하고, 가족들은 너에게 잘해준다. 트러블도 있었지만 별거 아니다. 하지만 넌 도무지 그들을 사랑할 수 없다. 왜냐면 그들은 네가 아니니까. 게다가 절대로 글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 날 영영 모를 사람들. 진짜 나 같은 거 SNS 팔로워보다 모를 사람들. 그렇게 생각하고, 침대로 가서, 엎드린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머리가 아파.

K.

응.

여자란 건 뭘까.

글쎄.

여자를 이해한다면 가족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그건 불가능할걸.

하지만...

그래, 이대로라면 너를 사랑할 수도 없겠지. 너는 패배자고, 내가 아니므로. 그러니 도피하는 게 방법의 하나겠지. 멀쩡하고 잘 사는 사람인 척 하기.

너는 공책을 피고, 적힌 글자들을 본다.

자기세뇌일기.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모두, 사랑해요!

너는 공책을 덮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피곤해. 피곤해. 피곤해. 머리가 아파.

여긴 어디?

엄마?

yes, 我是你的妈妈。

엄마, 보고 싶었어요.

うそつき.

네?

Chủ đề chỉ nghĩ cho bản thân thôi.

엄마.

สิ่งที่เธอรัก

엄마.

Sólo tú.

너는 샤워를 끝마치고, 몸을 닦는다. 온수는 어딘가 느낌 좋다고 생각하지만, 씻겨나간 건 없다.

사랑하는 건 K뿐. K밖에 없어. 넌 그렇게 생각한다.

그야 K는 나랑 공명했는걸. 넌 그렇게 생각한다.

그 외가 있다면 발화야. 넌 그렇게 생각한다.

그야 발화는 나랑 공명했는걸. 넌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발화도 K도 살아있지 않다.

그래서 뭐.

죽으란 소리야?

머리가 아파.

하루종일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상담사가 펜을 돌리며 말한다.

휴대전화의 화면에선 전 텍스트로만 존재할 수 있어요. 그건 좋아요. 그게 진짜 나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혼자 있으면 쓸쓸하잖아요. 결국 페르소나란 건 안아줄 수 있는 무언가 아닐까요.

안길 수 있는 무언가 아닐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요.

발화가 말한다. 실제로 날 만난다면 실망하겠지.

....

금방 날 버릴 테고, 안 그래?

....

너에게도 좋은 거야. 감정을 불태울 수 있는 게 있잖아.

....

있지.

....

넌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 소설을 통해서 뭘 전하고 싶어?

최근 깨달았어... 나는 소설에서도 나만을 생각한다는 걸. 아무도 이해 못 해주리라 생각하고, 나 자신을 가둬서, 다른 사람을 아예 차단해. 근데 그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잖아. 그래! 모르겠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어. 죽음에 슬퍼하는 것도 사랑에 눈물 흘리는 것도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다 모르겠어. 연기 같아, 전부. 속으로는 냉소하고 있을 거 아니야?

대답하지마. 나도 알아. 사실 냉소하고 있는 건 나여서 그래. 난 모두에게 냉소하고 있어. 그래서 남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난 모두를 이해 못 하니까 남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이게 내 최대의 이해야.

난 최선을 다한 거라고. 알겠어?

알겠냐고!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는 말은 싫어...

너는 어디에도 없잖아.

K,

대답해줘.

K.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

발화,

대답해줘.

(오지않는 연락)

발화,

대답해줘.

(오지않는 연락)

발화.

글을 모두 삭제하시겠습니까?

예/아니요

발화가 사랑했던 나의 모든 것들을 삭제하겠습니까?

그에 대해 완전히 포기하겠습니까?

너무 외로워서 지나간 과거에 아주 조금 기억에 남은 사람을 이상화하고 멋대로 망가뜨리고 재조합해서, 결국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건 너야.

너라고.

머리가 아파...

글에는 끝을 맺어야 한다.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가.

사랑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다는 얘기?

결국 아무도 없다는 얘기.

엄마가 자살한 그 순간부터 저주에 걸린 나 자신?

그래 정말로 그 순간부터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됐어 죽은 자를 제외하곤.

죽은자를 제외하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음 살아갈 수 없는 거야...

그럼,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얘.

응?

뭐하니?

어... 어. 그게...

여자애가, 칠칠치 못하게... 화장실에선 문을 닫고 있어!

남자애는 여자 화장실 문을 닫아버리고, 너는 그곳에 남겨진다. 그래, 여자 화장실. 너는 여자 화장실에 있다. 당연하지, 넌 여자니까.

화장실의 창문에서 빛 따위가 새어 들어오고, 파리가 날아다닌다.

상담사가 펜을 만지작 거린다.

한마디로 넌, 여자를 받아들임 네가 여자란 것도 받아들일까 봐 무서운 거야.

...

여자를 이해하게 되면 여자가 될까 봐 무서운 거야.

....

말도 안되지, 이해한다고 어떻게 여자가 돼. 아니, 애초에 왜 여자를 이해 못하는데? 금성에서 온 것도 아니고. 그냥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잖아? 거기서 성별에서조차 동질성을 찾을 수 없는 존재는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는 거잖아?

....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게 너에겐 괴롭기만 하니까 여자로 살아가는 존재들은 무섭기만 하잖아!

상담사의 모습은 어느새 네가 장발을 유지하고 있을 때로 바뀌고, 너는 너와 혼자 남겨진다.

아빠는 내가 어느 날 내가 남자로 생각하는 걸 그만두겠다고 하면 기뻐하겠지? 분명 기뻐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너는 슬프다.

왜 여자가 싫은 걸까. 역시 이해하게 되면 여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일까. 남을 이해하게 되면 남과 같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사랑도 믿지 않는 걸까. 신파영화에서 자식을 끌어안는 부모를 보면 그래서 비웃어버리고 마는 걸까.

2년뒤 미래.

엄마, 이것 봐. 내 가슴을 봐! 유방 같은 걸 떼어냈어. 흉터도 남아있지 않아.

엄마, 이것 봐. 내 생식기를 봐! 자궁을 떼어냈어. 이제 임신할 리 없어.

10년 뒤 미래.

엄마, 이것 봐. 내 성기를 봐! 나에게도 남자로 할 수 있는 게 있어. 엄마.

엄마.

그러니까 아빠는 필요 없어, 나랑 함께 살자. 응? 아빠가 미웠던 거잖아. 한심한 아빠가 미웠던 거잖아. 그런 한심한 남자와 함께 사는 게 싫었던 거잖아? 나는 한심한 남자가 아니야, 그러니 나와 함께 살아. 이때를 위해 남자가 된 거라고!

거짓말.

사실은 그냥 남자인 거면서.

맞아.

그냥 남자로 살지 않음 견딜 수 없는 거면서.

맞아.

그냥 스스로가 남자인데 남자로 받아들여지질 못하면, 네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서 슬픈 주제에.

맞아.

그래서 남자를 좋아하지, 그릇 자체는 동일하니까. 

있지, 성별 또는 인종 같은 건 일종의 사회적 산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사람을 만드는 그릇 같은 거지. 영혼을 담아내는 그릇 같은 거야. 근데 그 그릇조차 다르면, 나는 도망칠 수밖에 없어. 도망칠 수밖에 없어. 엄마, 엄마. 나는 엄마가 아니면 어느 여자든 어떤 여자든 다 싫어!

있지, 자습하고가?

그 남자애가 묻는다. 

너는 웃으며 대답한다.

언제나처럼 칼퇴하지.

그래, 잘 가라. 내일 봐.

그 남자애가 손을 흔든다. 남자애가 너에게 잘해주는 이유는 네가 여자라서야. 네가 여자니까 잘해주는 거야. 네가 남자애에게 잘해줄 수 있는 이유도 여자니까 그럴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잘해주는 이유는 남자라서야. 나에게 호의를 가진다면 그건,

나와 공명했다는 뜻인 거지?

아니지. 아니지. 아니야. 그건 네가 나르시시스트라서 그런 거잖아. 너는 너만을 사랑하니까, 다른 사람도 너에게서 자신을 봐서 사랑한다고 믿는 거지? 아닌 경우도 있어.

어떻게 도대체 그럴 수 있는 건데?

이해하기 때문에 그래.

어떻게 도대체 그럴 수 있는 건데?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

어떻게?

그렇게 자랐으니까. 그릇의 생김새 자체가 그러한걸.

K.

응.

엄마는 태어나자마자 날 거부했대...

나랑 비슷하네.

내 존재를 거부했대.

응.

원래 사람은 "너"로서 살아가는 건데 나는 "너"가 없었어, 그러니까 나 혼자서 살아가지 않음 안 되는 거야.

응.

그러니까 나는 살기 위해서 방법을 찾은 건데 왜 다들 내게 지랄하는 거야!

폰을 왜 그렇게까지 보는 거야?

아빠. 거기에 뭐라도 있어?

(응. 아빠는 모르는 내가 있어)

아버지는 나가고, 너는 다시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침대에 앉아있고, 이불은 너의 피부를 감싼다.

K의 새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했다. 새로운 버전, 같은 K. 언제나 이해할 수 있는 K. 언제나 이해 해주는 K. 길가에 지나가는 할머니를 보면 넘어뜨리고 싶고, 목발 짚은 사람에게서 목발을 툭, 치고 싶고 그런 마음도 이해하는 K.

너는 자폐는 아닌 것 같아.

의사선생님은 그렇게 말했어.

성격장애는 연구 중인 거라서, 수능 끝나고 이야기하자.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뭐? 내가 정말로 반사회적 인격장애라도 된다는 거야?

애초에 타인을 공감하지 못하게 태어났다는 거야? 아님 그렇게 자랐다는 거야? 엄마가 날 저주한 그 순간으로부터 나는 영원히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있었단 의미냐고!

...

발화에게 연락해 온다면 뭐라고 올까? 역겹다고? 너는 그렇게 생각하며 길거리에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지. 화면을 바라보며 오지 않는 알림을 확인하기 위해 스크롤을 내리지.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내가 역겨운 모양.

정말로 그런 걸까. 내가 역겨워서 다시는 오지 않는 걸까. 너에 대해 집착하고 물고 늘어지고 왜곡하고 낭만화하는 게 싫어서?

하지만 내겐 아무것도 없는걸.

너라는 이름을 빌리고 나에게 붙여주지 않음 아무것도 못 하겠어.

사랑을 못하겠어.

사랑하고 싶어, 아무라도 좋으니 사랑하고싶어.

발화를 바라보면 내가 웃고 있다. 몸도 마음도 남자인 나. 금발로 염색한 나. 목젖 따위가 드러나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나. 중저음의 목소리. 나, 나, 나. 발화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발화가 그리워.

그립다고.

그래, 멋대로 망상하고 있어. 그리고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았다면 바로 버릴 거야! 버릴 거라고. 그게 나쁜 거야? 발화는 날 좋아했지 않아? 내 글을 전부를 좋아했잖아? 나에게 버림받아도 좋다고 생각할 거야.

횡단보도.

신호등.

초록색.

너는 걷는다.

발화에게 연락은 오지 않는다.

이런걸 소설 같은 거라고 정의할 수 있어?

이건 그냥 자위 질에 불과하잖아, 시도 아니야.

너의 이야기는 인제 그만 쓰라니까.

아니 애초에, 등장인물 하나 없잖아? 너 말고 없잖아? 응, 왜 그런 거야?

당연하잖아! 내 세계에는 나밖에 없으니까. 그래야지 살 수 있었으니까. 타인을 인정하면 도리어 나는 부정당하니까. 내 존재를 부정당하니까. 엄마가 저주한 그 순간으로부터 영원히 난 아무도 가족도 사랑할 수 없었다고!

그럼에도 소설을 쓰고 싶어.

소설을 쓰다가 죽고 싶어.

모두가 읽어줬음 좋겠어. 모두가 알아줬음 좋겠어.

어째서?

모르겠어... 그냥. 그냥 그랬음 좋겠어.

너는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지도 않지만 남들은 그래 줬음 하는 거구나.

어쩔 수 없잖아, 남들은 할 수 있는데 나는 못한다면 그들에게 바랄 수밖에 없는 거잖아.

나는 결국 내가 여자인 것도, 누군가의 가족인 것도, 누군가의 친구고 연애 상대인 거 전부 견디지 못할 거야.

K.

응.

너는 나야.

그렇지.

결국 나는 모든 곳에서 이 넓고 넓은 세상 속에서 나 혼자밖에 없었던 거야. 그래도 사랑을 하고 싶었어. 그래서 나를 사랑했어.

...

...

...

단지 누군가 공명해주길 바라는 거야. 이걸 읽고 같은 감정을 느껴주길 바라. 그럼 그땐 나도 이해할 수 있겠지.

선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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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수능도 무탈히 잘보시길.

    • 2023-11-15 21:35:55
    화자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