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괴물로 자라난다 –영화 ‘괴물’을 보고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12-11
- 좋아요 1
- 댓글수 0
- 조회수 617
*감상에 앞서, 본문에는 최신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 부탁드립니다.
** 노래와 함께 감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각자가 생각하는 괴물에 대해 이야기하자
너부터 시작
괴물은 말야 초록색이고 이빨이 아주 커
다음
괴물은 말야 손톱이 길고 냄새가 나
다음
괴물은 말야 밝은 걸 싫어하고 검은 피를 흘려
다음
괴물은 말야 시끄럽게 기침을 하고 사람을 먹어
다음
괴물은 말야
……
괴물은 말야
……
긴 침묵이 지나고
하나둘씩 눈을 떴을 때
그 애는 울고 있었다
너 왜 울어?
모두가 그 애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흙을 파내려가는 뾰족한 손톱을 생각해 상처 입은 무릎을, 배고파 잠이 오지 않는 매일 밤의 뒤척임을, 빛이 머리를 관통할 때의 저린 통증을 생각해
백은선, 「진짜 괴물」 中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신작, 네가 좋아할 것 같아. 올해 여름, 일본에서 유학 중인 언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언니는 일본에서 우선 개봉한 영화를 보고 내게 연락한 것이다. 그 메시지는 내가 생각에 잠기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란 대체 무엇일까 고민해보게 된 것이다. 나는 여러 예술 중에서도 영화와 시를 가장 사랑하는데, 아무래도 각각 카메라로, 언어로 특유의 호흡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공통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영화는 러닝타임 내로, 시는 장르적 특성으로 인해 두 작품 모두 함축과 비유가 가득 담긴다. 이로써 관객과 독자에게는 극대화된 ‘이미지’가 다가오는데,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아름다운 서사가 진하게 농축된 풍경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제한된, 약 2시간이라는 시간 내에서 가장 영리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내는 영화이다. 단순히 강하게 주장하지 않고, ‘영리하게’ 주장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카메라의 이동, 시점, 편집과 같은 영화적 요소와 시놉시스와 대사 등 서사적 요소가 결합되어 진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미지를 만드는 영화, 그런 것이 좋다. 특히나 나는 ‘그 무엇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영화가 좋다. 나는 사람의 가장 주된 원동력이 분노나 우울이기보다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감정들도 좋은 원동력이 될 수 있으나, 결국 우리가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누군가를, 또 어떤 것들에게 기꺼이 마음을 주면서 가지는 기쁨인 듯 하다. 그리하여 이 차가운 오늘날, 어쩌면 혐오와 냉소로 21세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하여 말하려는 영화가 좋다.
나는 언니가 말한 고레에다 감독의 신작, ‘괴물’이라는 영화의 정보를 나름대로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예고편과 간략한 줄거리를 볼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고, 이건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영화겠거니, 생각했다. 어떤 시집을 요약해보라고 했을 때면 난데없이 장황하고 난해하게 말하게 되지만, 직접 읽을 때면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비슷한 영화들도 있으니, 나는 직접 보는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3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고대하던 ‘괴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은 시월의 밤이었고, 비와 바람이 무섭게 불어왔지만, 영화 극장의 관객들 모두 뜨거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고레에다 감독과 아역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할 때면 박수와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고 모두가 영화에 대하여 마치 나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지닌 채 모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쏟아져 나오는 박수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나는 내가 흘린 눈물보다는 눈물의 구성 성분, 그러니까 눈물을 흘린 이유에 집중하는 사람인지라 계속해서 궁금했다. 내가 그 무엇 때문에 영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것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고,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11월의 끝자락에서, 국내 정식 개봉된 ‘괴물’을 다시금 보고 느꼈다. 잠잠히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며, 다시금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고민하지 말자고. 더 시간이 지나버리기 전에 내가 느꼈던 그 최초의 감각들을 기록해 두자고.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짤막하고 파편적인 메모들과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이 났던 백은선 시인의 시 두 편을 남겨 두었고, 그 이야기들부터 이 글은 탄생하였다. 나의 사랑을 듬뿍 담아서, 그리고 어떤 말할 수 없는 비밀들과 그럼에도 사랑을 하겠다는 마음을 시로 잘 나타내는 백은선 시인의 시를 빌려서.
나의 감상에 말하기 전, ‘괴물’은 이러한 영화다. 싱글맘 사오리는 아들 미나토의 행동에서 이상 기운을 감지하고, 용기 내어 학교에 찾아간 날 학교의 선생님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름을 감지한다. 그리고 사오리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미나토의 친구 요리를 찾아가는데, 그가 다른 아이들과는 무언가 다름을 어렴풋이 인지한다. 미나토와 요리의 담임 선생님은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사오리는 요리가 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뿐 자신의 아들은 그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따돌림을 당하는 요리를 도와주고, 곁에 있는 사람이 미나토다. 미나토는 요리를 좋아하고 있고, 그 마음의 농도는 무척이나 진하다. 요리 또한 그런 듯 해 보인다. 이렇게 얽힌 관계를 풀어내고, 그 풀어내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 영화이다.
앞서 나는 영화의 이미지가 영화의 기술적인 요소와 영화의 서사적인 요소에서 탄생한다고 했는데, 내가 남긴 메모들도 각각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바로 구조와 인물. 영화가 어떻게 지어졌는가 그 골조를 살펴보는 부분은 영화의 기술적인 요소에 해당할 수 있고, 그 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숨을 쉬는가 읽어내는 부분은 아마도 서사적인 요소에 해당할 테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케이크를 자르듯이 정확하게 나눌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내가 느낀 것을 찬찬히 나열할 뿐이다. 다만 내가 이 영화의 풍경들이, 그로부터 내게 다가오는 이미지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느꼈으므로 그 아름다움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영화는 각각의 부로 나눌 수 있다. 최근에 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나 ‘헤어질 결심’과 같이 여러 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를 본 적 있다. 전자는 아예 영화 속에서 막이 바뀜을 알려주고, 후자는 굳이 제시하지는 않지만 감상할 때 관객들이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괴물’은 ‘헤어질 결심’과 같이 관객들이 암묵적으로 부를 나눌 수 있다. 각각 0부, 1부, 2부, 3부로. 그러나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 ‘괴물’이 다른 점은, 이 영화는 경유의 형식으로 각각의 부가 전개된다는 점이다.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이 전개되는 장소에 따라 끊어주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한 사람 한 사람의 시선을 살피며 테이프를 되감듯 구성되어 있다. 0부는 ‘요리’로 추측되는 남자아이가 잠시 등장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1부는 주인공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의 입장으로, 2부는 요리와 미나토의 담임 선생님 ‘호리’의 입장으로, 3부는 마침내 ‘미나토’의 입장으로 한 사건에 대해 각자가 바라본 것을 영화로써 전개한다. 나는 이것이 과감하면서도 영리한 구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한 번 벌어진 영화의 사건을 각자의 시선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관객은 3번씩이나 같은 장면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지루함이나 ‘굳이 반복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유연하게 장면들을 변주하며, 개인의 오해와 착각을 ‘경유’하여 영화를 진행시킨다. 이를테면 사오리는 미나토의 신발 한 짝이 없는 것을 보았고, 호리 선생은 요리의 신발이 뺏긴 것을 보았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리의 신발이 같은 반 아이들에 의해 버려져 함께 하교하는 미나토가 요리에게 신발 한 짝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우리가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들을 부수고 나가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구조에서 오히려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또한 이 영화에 ‘절대적 진실’은 없다. 각자의 진실이라고 믿는 각자의 입장만 있을 뿐. 이런 입장들을 경유하며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타인을 대했는지 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함부로 타인을 재단해왔나, 알지도 못한 채 수면 위로 살짝 떠오른 면만을 보고 감히 내 멋대로 생각해 왔을까. 이렇게 말이다. 속이는 듯 말해주지 않는 ‘경유’ 구조는, 나에게 깊은 감동과 동시에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이 영화는 같은 사건을 세 번씩 보여줌으로써 장면 간의 함축은 적은 편이다. 대신, 나는 이 영화의 비유가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다. 이 비유들이 내게 다가오는 영화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앞서 말한 인물의 형태를 빌려 존재한다.
첫 번째로 1부의 주인공인 사오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사오리는 미나토에게 좋은 엄마다. 가령 사춘기에 접어들어 ‘들어오지 마시오’ 팻말을 방에 걸어둔 것을 보자, 다그치기보다는 베란다에서 나와 보라고 한다거나 등굣길에 물통을 놓고 가려 하자 집의 바깥까지 나와 미나토에게 물병을 쥐여 준다거나. 그런 엄마가 사실은 아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정도는 클리셰적인 설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집중해서 본 것은 사오리의 또 다른 면이다. 사오리는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의도치 않게 압박을 준다. 이를테면 사오리는 미나토와 함께 걸으며 ‘선 밖으로 걸으면 지옥에 가.’ 그렇게 말한다. 이는 우리가 어릴 적 했던 놀이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보도블럭을 밟으며 걸을 때, ‘노란 블록 밖으로 걸으면 으악, 죽는다!’ 같은 놀이.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이 대사 두 번이나 등장하는데, 나는 이것이 후에 등장하는 사오리의 대사와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집으로 가는 차에서 사오리는 미나토에게 말한다. 아버지처럼 여자를 만나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가장이 되라고. 이에 미나토는 충동적으로 차 바깥으로 몸을 던진다. 나는 이 장면이 굉장히 함축적이고, 비유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미나토는 같은 반 남학생인 요리에게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런 미나토에게 여자를 만나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 가정을 꾸리라는 말은 얼마나 폭력적으로 다가올까 싶었다. ‘선의 바깥’으로 가면 지옥에 간다는 엄마의 농담은, 단순히 농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알게 모르게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을 바라는 사오리의 말이, 미나토에게는 하나의 강박적인 선으로 다가온다고 느껴졌다. 이 상황에서 미나토는 어머니인 사오리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생겼을 것이고, 자신을 ‘괴물’이라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처음에 영화의 제목이 왜 괴물일까, 의아해했으나 영화를 보는 동안 천천히 이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2부의 주인공인 호리 선생에 대하여다. 호리는 겉보기에 좋은 선생님으로 보이지만, 어쩐지 이상한 면 또한 보이는 선생님이다. 음침한 속내를 숨기고 있다기보다는 덜 성장한, 미성숙한 아이처럼 보이는 것이다. 출판된 책에서 오타를 찾아내 출판사로 연락을 하는 취미를 지녔다던가, 자신의 아이가 학대당한다 생각하여 학교에 찾아온 사오리를 편모 가정의 어머니는 과보호가 심하다며 이야기하다, 사과할 때 어리숙하게 말하며 이야기 도중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사탕을 먹는다던가. 그럼에도 반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며 따돌림을 당하는 요리까지 챙겨주려 애쓴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키우던 금붕어를 변기에 버리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다. 그는 분명히 좋은 선생님이지만,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이면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호리 선생의 캐릭터성이 굉장히 좋았다. 그 이유는, 어쩐지 호리 선생이 미나토를 만나지 못한 요리, 요리를 만나지 못한 미나토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아들의 진정한 마음을 알지 못하고 의도치 않게 압박을 주는 사오리 같은 어머니. 또는 일찍이 아들의 성향을 알아차리고 –요리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미나토를 보고, 요리는 자신도 그런 적 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아 추측하건대- 너는 인간이 아닌 돼지의 뇌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과 아내가 이혼한 것 또한 아들의 탓이라고 ‘가스라이팅’하는 요리의 아버지 같은 사람. 호리 선생도 작중에서 아버지가 없이 자랐다고 하는데, 그런 보호자 아래에서 자라지 않았을까. 그리고 호리 선생 역시 홀로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끌어안고 있다가 어른이 된 것 아닐까. 자신을 사랑해주는 미나토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한 채. 자신에게 두근거림과 소중한 순간들을 안겨주는 요리를 만나지 못한 채 말이다. 어리숙하게 보이지만 그것이 사회에서는 이상하고 음침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한쪽이 무너져 내린 채 자라서 그것이 기이하다 느껴지는 ‘괴물’로 자란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 ‘괴물’이 큰일을 하는데, 바로 영화 속에서 누구보다 먼저 요리와 미나토의 관계를 알아챈다. 출판된 책에서 오자를 찾아내길 좋아하는 습관을 토대로 말이다. 요리가 미나토를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쓴 암호를, 작문 시험지에서 두 사람의 관계성을 읽어낸다. 그리고 폭풍이 들이닥치는 날 미나토의 집 앞으로 가서 사과한다. ‘미나토 미안해, 선생님이 잘못 알았어. 너는 잘못한 게 없어.’
3부는 이렇게 호리 선생이 미나토의 집 앞에서 사과하는 장면 다음으로 시작한다. 미나토는 자고 일어나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3부의 첫 장면인데, 이후 사오리의 설명이 이어진다. 미나토는 어릴 적부터 자고 일어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꿈을 꾸었다고. 러닝타임 내내 무뚝뚝해 보였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여리고 사랑에 진심을 다하는 아이였음을, 관객들은 그제서야 알게 된다. 그런 미나토는 요리를 좋아한다. 같은 반의 남자아이들이 대놓고 요리를 괴롭힐 때, 그 상황이 싫어서. 그리고 나설 수 없는 자신이 미워서, 미나토는 분노를 발산한다. 역시 요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여’ 타인에게 미나토는 ‘괴물’이 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교장 선생님과 단둘이 있을 때, 미나토가 고백한다.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애와 행복해질 수 없는 걸 알아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이렇듯 내면의 진실을 말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 미나토를 분노와 슬픔에 찬 ‘괴물’로 만든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진정한 괴물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사람을 죽이고, 때리고, 피해를 입히는 이들은 괴물이 아니다. 그저 인간 이하의 나쁜 것일 뿐이다. ‘괴물’이란 타인에게는 두렵고 이상하게 보이며 자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그런 슬픈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영화에 ‘괴물’이라는 제목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중후반부에서는 요리와 미나토의 아지트로 추정되는 오래된 기차 속에서, ‘괴물은 누구게’ 게임을 하는 것이 나온다. 하나의 생명체를 그려 카드를 만들고, 그 카드를 이마에 붙여 서로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게임이다. 그렇게 설명을 듣다 자신의 카드를 알 것 같을 때 정답을 외치는 게임인데, 게임 속 생명체는 느릿한 달팽이, 공격을 받아치지 못하는 나무늘보, 그리고 아버지에게 자주 세뇌당하는 돼지 등 대개 요리를 나타내는 동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딱 한 번, 이 영화에서 정말로 괴물이 그려진 카드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괴물은 검은 색 하트에, 팔과 다리가 달려 있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그건 그저 평범한 사람- 팔과 다리가 달려 있다-과 사랑-하트의 형태이다-을 가장 닮은 형태인데. 특별할 것 없이 그 무엇이든 괴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나타내는 것 같아 마음이 찡했다.
요리와 미나토는 영화의 엔딩에서, 아지트 밖으로 나와 자신들만의 천국으로 향한다. 폭풍이 들이닥쳐 두 사람을 찾는 어른들은 뒤로 하고, 두 사람은 길고 좁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들판으로 향한다. 요리는 ‘우리 다시 태어난 건가?’ 하고 묻지만 미나토는 그대로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요리는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고, 두 사람은 빛 사이를 질주하며 영화가 끝난다. 나는 이 엔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데,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싸는 빛과 점차 밝아지는 화면이 내게는 두 사람이 축복 받는다는 이미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더불어 요리와 미나토의 대사도 인상 깊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그러니까 돼지의 뇌를 가졌건 내가 괴물이건 어떠한가. 우리는 비록 ‘길고 좁고 어두운 터널’을 지났지만, 결국 아름다운 들판에 도착했고 그곳에는 서로가 있다. 그곳에서는 마음껏 뛰놀고 웃으며 사랑할 수 있다. ‘괴물’은 나쁜 존재가 아니라 슬픈 존재이므로, ‘괴물’이 마주하는 엔딩은 역시 아름답다. 영화의 해석에 따라 두 사람이 언덕에 간 것이 실제 상황인지 아닌지는 갈리겠지만, 결국 요리와 미나토가 두 사람만의 천국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 내게 큰 감동과 여운을 주었다.
‘괴물은 누구게?’ 예고편에서, 그리고 영화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관객석에 앉아 있던 나에게도 깊게 다가왔는데, 괴물은 결국 앞서 느낀 것과 같이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녔던 사람들이다. 그런 이야기를 껴안고 앓고, 미나토와 같이 잠에서 깨어나 눈물을 흘리던 이들이 괴물로 자라난다고 생각했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 숨겨야만 하는 비밀 같은 마음, 아직은 꺼내놓기 어려운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웃으며 달려 나가는 엔딩을 맞이하는 ‘괴물’들. 그들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덩달아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보러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또 가족 이야기를 할까?’라는 농담을 들었을 만큼, 평소 감독은 가족 서사에 충실하다. 그러나 이때까지 만들어온 작품들에 안주하지 않은 ‘괴물’이 나에게는 특히나 깊이 있게 다가왔다. 이것은 ‘정상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더 다양한 ‘사랑’을 노래하며,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나 역시 사랑이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말한 것처럼, 영화를 보고 난 뒤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동안, 메모를 작성하며 미나토의 마음을 되새겼다. 또 한 번 미나토가 지나온 순간들을 살펴보기도 하면서. 과연 무슨 마음이었을까 떠올려 보았다. 이건 미나토를 ‘괴물’이라고 만들 만큼 슬프고 비밀스러운 사랑이었지만, 그건 사랑을 버릴 수 없을 만큼, 자신을 ‘괴물’로 만들 만큼 끝까지 끌어안고 싶었던 소중한 마음이었을 거다. 또한 미나토와 그 순간들을 공유하던 요리를 떠올렸기도 했다. 더불어 한때 호리 선생에게도 그런 마음들이 있었을 것이고, 사오리나 교장 선생님에게도 꼭 특정한 누구를 사랑하는 순간은 아니더라도 자신이 ‘괴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순간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이 지점에서 지나온 나의 사랑들을 겹쳐볼 수 있었는데, 이런 마음들로부터 오늘날의 내가 있구나, 나는 ‘괴물’이었지만 그건 아주 슬픈 일이 아니었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마침내 집에 도착하였다.
나는 이 글을 역시 백은선 시인의 시로 닫을 것이다. 반 아이들에게 ‘외계인’이라고 놀림 받던 요리를 생각하며. 외계인을 사랑하는 미나토를 생각하며.
너랑 나는 화단에 앉아 사랑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그걸 다시 녹음하고 녹음한 걸 다시 틀고 다시 녹음해서 또 틀고 또다시 녹음하고 이런 식의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마지막에 남는 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어떤 음파 뿐이래. 그래 그건 정말 사랑인 것 같다. (중략)
바다에서 떠내려온 닳고 반짝이는 유리조각을 주웠다.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다.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백은선, 「사랑의 역사」 中
추천 콘텐츠
마음을 오래 쥐었다가 놓으면손금이 깊어진다는 걸 알기 전 그러니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창문을 열면 골목이 길게 쏟아졌다 넘쳐흐르는 아이들의 웃음 뒤엉켰다가 다시 흩어지는 동안 흙먼지처럼 피어오르는 즐거운 비명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모두 모여서 길이 되었다 커튼 아래 숨어 버렸던 그때 펄럭이는 정오가 나를 휘감고 아이들의 옆으로 나를 데려다 놓을까 봐 나는 아직 아무 겉옷도 챙겨 입지 못했는데 내 겉옷은 서랍 가장 안쪽에 살고 있었다 긴 소매는 팔을 접어둔 채 잠들었고 마음에 드는 외투는 늘 계절과 맞지 않았다 쉽게 잠들고 말던 어린 날 눈을 감을 때마다 새로운 길을 상상했다 내일은 내게 어울리는 날씨가 찾아올 수 있도록 꿈을 꾸며 깊어졌다 외투의 주름이 스치는 곳에손금이 자라났고상처처럼 골목처럼 선명해져갔다 들었다가 내려놓는 일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기분들이 손끝으로 모일까 나는 자주 굽는 어깨를 가지게 되었다 겉옷을 쥐었다 놓으면 결국 나는 놓아버린 사람 창문처럼 반쯤 열린 귓구멍 사이로 야 너도 나와 왜 안 나오는 거야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조금씩 깊숙해졌다 그러니 그때내가 아직은 놀이터에 가지 않고 바깥으로 걷지 않고 서랍 속을 방처럼 맴돌고 있을 때 시간의 주름을 놓아주며무수히 뻗어나가는 꿈을 꾸었다
- 모모코
- 2024-08-21
이슬아 작가의 월간 이슬아, 문보영 시인의 일기 딜리버리. 그런 메일링 서비스들을 보며, 언젠가 나도 사람들에게 나의 글을 보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어딘가에 올려서, 불특정 다수가 나의 글을 보고 가는 것 말고. 애초부터 독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므로 그들을 위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 그건 작년 겨울에 어렴풋이 떠올린 것이었다. 언젠가, 그러니까 언젠가 해보아야지. 그런데 언제 하지? 언젠가는 해 보겠지. 그렇게. 그리고 나는 올해 초부터 여름까지 고선경 시인의 메일링 서비스를 꾸준히 신청하였다. 나는 그가 ‘럭키 슈퍼’로 등단하였을 때부터 큰 팬이었다. 웹진 ‘비유’에 실린 시편을 보고서 더욱 팬이 되었는데, 가볍고 산뜻한 어조가 지닌 위트로 무언가 핵심을 찌를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능력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쓰지 못할 것 같은 시를 쓰고 있다고 해서 좋았고, 그런 시인이 갓 구운, 따끈따끈한 시와 산문을 내게 배달해준다는 건 큰 기쁨이 될 것 같았다. 2023년 초, 나는 굉장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으나 고선경 시인이 배달해준 시편들을 읽으며 어떠한 용기를 얻었다. 얘들아 문예창작과는 더 슬픈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야 게임을 더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야 계속 지고도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고선경, ‘수정과 세리’ 中 이 시는 1월의 중반 메일링으로 처음 받아보았고, 이후 고선경의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에도 수록되어 내가 자주 읽는 시가 되었다. 내가 시인이라는 꿈을 가진 이유, 굳이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겠다고 다짐한 이유, 지금 나에게 매너리즘이 들이닥친 이유를 고선경 시인의 텍스트와 함께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고열과 함께 아주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시를 썼는데, 이것이 ‘래빗 헌팅’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손에 쥘 수 있다면 당도 높은 복숭아일 거야 쉽게 물러지는손끝으로 망설임 많은 과즙이 흘러내린다 아직도 카드는 뒤집어지길 기다리고 있고 (...) 직선으로 뛰어가는 토끼 곡선으로 떨어지는 카드 잠긴 문을 열어본다그림자의 형태는 계속해서 바뀐다 울렁거리지는 않는다 나는 무언가 막힌 것을 뚫어버리듯 이 시를 썼다. 모든 건 사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고, 나의 이야기를 막힘 없이 써내기 위해 시작한 것인데 나는 왜 이렇게 괴로워 하는 걸까. 그런 마음들로. 그리고 나는 이 시를 ‘글틴’을 비롯한 나의 블로그 등에 업로드 하였고, 운 좋게 글틴 시 부문 멘토님들께서 나의 시를 월장원으로 선정해 주셨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놀라게 된 계기는, 모 sns를 하던 중 발견한 게시글 덕분이었다. 올해 여름부터 친한 동생의 권유로 sns에 글을 올리는 계정을 만들었다. 내게는 몇백 명 정도의 구독 계정이 있었으나 그들은 대개 비공개 계정이었고, 나 또한 겁이 많아 따로 소통 창구를 마련하지 않아 사실 내게 그런 구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어느 밤, 한 구독자분께서 내게 ‘글틴’에서 본 시가 이
- 모모코
- 2024-01-08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 도로시. 어느 날 태풍에 휘말려 마법의 대륙 오즈에 떨어지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험 이야기를 펼친다. 이것이 라이먼 프랭크 바움의 소설 『오즈의 마법사』.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오늘날 우리 근처에도 도로시가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누워서 입안 훑어내면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세계’가 (「니팅레이스」) 있을 만큼 이 별은 크고 넓으므로,만약 당신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면, 기꺼이 권누리 시인의 『한여름 손잡기』를 내밀고 싶다. 도로시가 다른 동료에게 내민 손처럼. 이곳에는 ‘내 미래의 수신인은 단 한 번도 나인 적 없다’ 생각하면서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씩씩하게’ 걷는 (「한여름 손잡기」 79p) 시적 화자들이 살고 있다.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귀여운 원피스 입고 만나’자며 명랑하게 인사하면서도 ‘불온한 신뢰’와 ‘불신’으로 (「도로시 커버리지」) 이루어진 얄팍한 세계를 달려 나가는 도로시들이 살고 있는 『한여름 손잡기』.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에게 각각 세 번의 손을 내민 것처럼, 이 시집에서도 세 번의 ‘한여름 손잡기’가 등장한다. 제목이 같은 각각의 시들은 고유한 온도와 리듬을 지니고 있다. 마치 사람의 손바닥에 머무는 온기처럼, 가슴팍에 살고 있는 심장 박동처럼. 그리고 이들이 맞잡고 껴안을 때면 타인들에게 전염되듯이 시 속의 요소들 또한 ‘나’에 머물지 않고 시 곳곳에 배치된 ‘너’ 또는 ‘우리’로 번져 가려 한다. 가령 ‘너’의 옆에 나란히 누워 ‘너는 행복할 것’이라 속삭이는 것처럼. (「한여름 손잡기」 39p) ‘사랑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무책임’하지만 ‘그래서’ ‘내내 그것만 열심히’ 한 것처럼. (「한여름 손잡기」 79p)시인의 말에서 ‘그러니까 이제 아무도 죽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 등장할 만큼, ‘불쑥 자라나는 유령들’ (「카메라옵스큐라」)들이 거리에 나타나고 ‘조금씩 슬퍼지는’ (「소유」) 병을 앓게 되는 세상. 『한여름 손잡기』 속 도로시는 태풍처럼 발목을 휘감고 먹구름처럼 그늘을 만드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풍에 휘말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층층이 나의 흔적을 남겨두는’ 일을 하는 (「초월」) 도로시. 그가 등장하는 시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시와 권누리 시인의 시적 세계에 흠뻑 빠지게 된다. 여름, 타바코 나는 이해할 수 있는 문장만 쓰고 싶어 리타가 타바코를 굴리며 말했지 하지만 어떤 인간들은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깨닫고 인정하는 법 알기를 쉽게 포기했어 하지만 누구에게나 안전한 공간은 필요하니까 풀밭 위에 자리를 펼쳐 놓고 아무것도 걸지 않고선 내기를 시작했다 나는 칭찬받을 수 있는 거짓말만 하고 싶어 빛의 총량이 서서히 닳아가는 이곳에도 최소한의 낙관은 남아 있어 우리 원하는 만큼 잠들어 있자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랑만 하고 싶어 타바코가 굴러가고 여름은 등을 돌리고 리타는 아름다운 것을 끌어모아 잿더미로 만드는 취미가 있었고 그건
- 모모코
- 2023-10-30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