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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 어때] '추락의 해부'를 중심으로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4-01-31
  • 조회수 482

금일 오후, 조선일보(문화 일반)에 올라온 쥐스틴 트리에의 신작 영화 <추락의 해부> 비평글을 읽었다. [그 영화 어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내겐 너무 별로였던 영화 ‘추락의 해부’란 연재글 이었는데, 정말로 터무니 없었다. 그리고 이 글은, <추락의 해부>를 비호하기 위한 나의 애상이며, 씨의 글에 반론하기 위한 한 시네필의 필사다. 

우선 이 기사에는 가장 큰 결점이 세가지있다. 그 첫번째는 이 글이 영화를 장르물로 해체하고 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추락의 해부>를 말하지만 정작 필자의 시선은 난잡하기 이를 때없는, 불필요한 (사담에 가까운)잡담과 다른 영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졸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읽히지가 않는다. 


‘추락’은 양두구육 영화입니다. 범죄 스릴러 형식을 취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범인이 누구고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고, 이게 아니에요. 황금종려상이라고 해서 짐작하긴 했어요. 장르물은 외피일뿐이겠군. 그런데 이 영화는 형식적으로 장르영화로서 게으르고 안일하며 하고 싶은 얘기는 구태의연합니다.’


위 글은 기사의 글 중 일부분인데, 이것은 내가 말한 첫번째 결점(장르물로 해체하고 있다)에 해당한다. 이 단락은 모순적이다. 먼저, 필자는 이 영화가 범죄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이 영화는 장르영화가 아니다. 굳이 따져보자면, 맹인 아들이 집을 비운 사이 남편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그의 아내 ‘산드라’는 남편이 죽은 집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범인으로 몰리게 되지만, 그 뿐이다. 더 이상의 반전도 없고, 오락 영화에서 볼법한, 일개 유흥에 지나지 않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는 없다. 감독은 남편이 떨어져 죽는 그 순간에도 미묘한 멜로디의 노래와 매우 절제된 카메라가 남편의 죽음을 거의 단상에 가까울 정도로 훑고 지나갈 뿐이다. 그 순간 영화는 말한다. 이건 결코 장르 영화가 아니라고. 누군가가 죽고, 그 죽음을 위해 어떤 사건을 부풀리며, 자극적으로 죽은 시신을 보여주는, 그런 일반적인 장르영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이 영화는 남편이 죽은 영화 시작 15분부터 줄곧 이야기 해오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양두구육’ 영화라고 하며, 그 까닭을 ‘형식적인 장르영화로서 게으르고 안일’하다고 단정짓기에는 어폐가 있다. 애초에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를 이 영화에 갖다붙인 것은 필자 자기 자신일 뿐이고, 이 영화는 양두구육의 영화로서, ‘장르영화’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 이 글이 웃긴 것은, 본 단락의 네번째 문장이다. ‘장르물은 외피일 뿐이겠군.’ 

이 문장 앞에만 서면 실소가 나온다. 장르물이 외피일 뿐인 것을 알면서 장르영화로 게으르고 안일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게다가 이 단락에서 필자는 영화를 <추락의 해부>가 아닌, ‘추락’으로 표기했다. 영화 제목마저 실수로 표기되어 있다. 이 글은 애초에 정성들여 쓰여지지 않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곳에서 머금은 실소를 폭소로 바꾸는 것은 바로 그 다음 필자의 주장이다.


(주제는)우리네 인생사, 전말을 그 누가 알리오, 원래 진실이란 믿음의 영역이며, 각자 선택하는 것이라오.’ 이 얘깁니다. 거짓과 진실 혹은 실제와 인식의 경계, 주인공이 소설가이기에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한 언급은 영화에서 반복 등장합니다. 어디서 들어보신 것 같지 않습니까. 실체적 진실의 한계와 회의라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의 원작을 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100년도 더 전에 한 얘깁니다. 아쿠타가와는 진실에 대해 인간이 지닌 인식론적 기준을 초월해 존재하는 미지의 영역(terra incognita) 있다는 데까지 가지를 뻗었죠. 아직도 100년 전 일본 작가의 두뇌 근처에서 맴맴 돌고 있다니. 명작이나 걸작이 되려면 거기서 한끗은 더 나아갔어야 하지 않을까요.


<추락의 해부>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고 나서도 남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건 진실과 거짓을 인식의 영역으로 끌어오게 되고, 이번 단락에서 필자는 <추락의 해부>가 단지 거짓과 진실(인식의 경계)을 주제로 삼았다는 이유만으로 거짓과 진실을 매우 흥미롭게 교차시킨 또 하나의 명작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라쇼몽’을 논쟁 거리로 삼는다. 그리고, 필자는 이 영화가 <라쇼몽>과 그 원작인 소설보다 못한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문제는, 두가지다. 영화와 소설은 다르다는 것이며, <라쇼몽>과 <추락의 해부>는 별개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2000편이 넘는 영화들을 보았고, 그런 영화들을 보아오는 동안 영화를 사랑해왔지만, 영화가 원작이 있지 않는 이상 단 한번도 문학과 작품을 비교해본 적은 없었다. 영화는 문학보다 역사가 적고, 텍스트로 이루어진 문학보다 더 많은 수단들을 동원해야하는 골치아픈 예술 중 하나이므로, 영화가 문학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더군다나 그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키워드가 조금만 비슷하다고 해서 <라쇼몽>과 <추락의 해부>를 이어붙이는 것 처럼 그걸 억지로 연결시켜본 적은 더욱 없다. 그건 단지 범죄이야기를 다루었다는 것만으로 마틴 스콜세이지가 장 피에르 멜빌보다 못하냐 묻는 것과 같고, 왜 <남매의 여름밤>은 <하나, 그리고 둘>을 넘어설 수 없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으며, 요즘 영화는 브레송 같은 사운드의 미학을 보여주지 않냐고 묻는 것과 같다. 답은 간단하다. 비교되는 두개의 영화는 다른 감독, 다른 영화다. 마틴 스콜세이지에게 중요한 것은 흥망성쇠이고, 멜빌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다. 브레송은 사운드를 위한 자신만의 영상 철학이 있었고, 요즘 영화들은 자신만의 철학이 있을 터다. 그러므로 어떠한 작품을 넘어설 수 있냐 없냐를 따져물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그 두 작품 전부를 만든 감독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필자는 이 영화가 ‘걸작이 되려면 라쇼몽에서 한끗 더 나아가야 했다’고 한다. 작가가 다르고, 담으려고 한 것들이 다른데, 도대체 어디로 나아갔어야 한다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추락의 해부>는 <라쇼몽>처럼 인지영역에 대해서 또하나의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지만,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진실과 거짓이 아니라, 그 것들이 사실여부없이 그 자체로 당사자에게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이다.

한편, 이 단락에서 필자는 ‘ 거짓과 진실 혹은 실제와 인식의 경계, 주인공이 소설가이기에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한 언급은 영화에서 반복 등장’한다는 이유로 본작을 <라쇼몽>과 비교했는데, <추락의 해부>는 현실과 허구를 교차한 적 없고, <라쇼몽>의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자신이 ‘소설가’라고 이야기 한 적은 없다. 그것이 반복 등장한 적도 없다. 그러므로 애초에 <추락의 해부>와 <라쇼몽>의 비교는 성립이 불가한 것이다.


내가 육성으로 웃게 된 것은, 바로 그 다음 문단이다. 그 문단을 나는 첨부하지 않을 거다. 그건 갑자기 그 문단에서 영화와는 전혀 관련없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박성민 MIN 대표라는 분이 등장하고, 필자는 느자구 없이 정치 이야기를 하며, ‘정치는 사실이 아니라 인식의 게임이다.’란 말과 함께 ‘작품성을 자랑하는 영화가 되려면 정치 컨설턴트의 일침보다는 예술적으로 승화된 얘기를 담아야 하는 거 아닐까’하는 알 수도 없는 말들을 내뱉기 때문이다. 나는 이게 <추락의 해부>와 무슨 관련 있는지 모르겠다. <추락의 해부>는 정치에 대해 단 한번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박성민 MIN 대표와는 전혀 상관없는 영화다. 필자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음 문단에서 이렇게 말한다.

‘장르물 외피 안에 심어놓은 본원적 주제가 강하게 던져지려면 형식적으로 설정한 법정물의 긴장도가 순수 법정물보다도 더 팽팽했어야 해요. 그래야 긴장이 이완될 때 발생하는 에너지의 낙차가 영화적 진술을 관객의 머리 위로 수직낙하시키죠. 이 영화가 게으르게 이용한 법정 설정은 때로 실소를 자아낼 정도입니다.’

필자는 분명 자신 스스로 이 영화가 ‘범죄 스릴러물’이라고 했는데, 뜬금없이 ‘장르물’이라고 정정하고, 긴장감이 팽팽(?)했어야 한다는 말을 남긴다. ‘긴장이 이완될 때 발생하는 에너지의 낙차가 영화적 진술을 관객의 머리 위로 수직낙하시켜’야 한다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박성민 MIN 대표의 등장에 버금가는 망언을 근거로 말이다. 도대체 이 영화에 ‘‘긴장이 이완될 때 발생하는 에너지의 낙차’가 왜 필요한가? 애초에 왜 긴장감이 필요한가? 영화적 재미를 위해? 자신 스스로 알 수 없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박성민 MIN 대표를 들먹이며 예술적으로 승화된 야기를 담아야 한다고 했으면서, 이제와서는 재미있어야 한다니. 이 글은 모든 걸 설명하지 않고 있을 뿐 더러, 뜬구름잡는 소리로 넘어가고 있다. 이 후 <추락의 해부>에 나오는 법정 언쟁씬이 지루하다며, ‘법정물’ 영화로는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결혼 이야기>가 더욱 좋을 거라며 추천하기까지 한다. 그 까닭은 ‘부부가 서로를 극단적으로 몰아가며 죽도록 싸우는 대화’가 <결혼 이야기>와 유사하다는 것 때문이다. 그건 ‘<돈키호테>에는 사랑 이야기가 재미없으니, 사랑을 다룬 셰익 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더 재밌을거예요!’하는 것과 다를 바없다. (이 지점에 이르면 필자가 넷플릭스 광고 받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이 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근거없는 비꼬기 식 태도와 영화와 상관없는 단락들이 계속 된다. 이 글이 <추락의 해부>에 대해서 거의 오랜만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제대로 된 담론을 꺼낸 것은, 맨 마지막 부분에서이다.

작 중 산드라는 남편이 죽고 범인으로 몰려 오랜 기간 고생을 한다. 영화의 후반부 산드라는 재판에서 승소 후 자신의 아들과 지인들과 모여 웃고 떠드며 그들에게 농담조로 ‘승소했는데 왜 아무런 보상이 없냐’고 말한다. 필자는, 비꼴 것이 없어서 그것을 가지고 ‘그런 주장은 47건 혐의 모두에 대해 4년11개월 만에 무죄 판결 받은 대한민국 전 대법원장 정도가 하실 말씀’이라고 말한다. 아니, 도대체’ 47건 혐의 모두에 대해 4년11개월 만에 무죄 판결 받은 대한민국 전 대법원장 정도가 하실 말씀’이 어떤 건가? 나는 그런 말씀을 도무지 알 수 없다.

필자는 이 후 ‘이러다 밤새겠네요. 제가 이 영화가 과대평가됐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기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생각해주세요.’라며 글을 마친다. 그의 끝맺음을 읽으며, 나는 생각할 것이다. ‘이 영화가 과대평가됐다고 생각할 기자는 당신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영화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 있으니깐. 근데,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초반, 나는 이 비평글에 흥미를 가지고 읽었다. <추락의 해부>에 대한 언론의 부정적인 시각은 별로 없었으므로 나는 독특한 시선의 영화 비평글을 기대하고 읽었다. 그러나 이제 알았다.

[그 영화 어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내겐 너무 별로였던 영화 ‘추락의 해부’는 ‘양두육근’의 글이다. 이 글은’ 형식적으로 비평문로서 게으르고 안일하며 하고 싶은 얘기는 구태의연’하다. 혹자는 이런 나의 언행에 우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난하기 위해, 비꼬기 위해 쓰여진 글은 응당 비꼼으로 대우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서 왜 나의 비평글들이 비난처럼 보였는지 알았다. 그건, 바로 작품을 대하는, 저급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그런 태도를 보리겠다). 이런 글은 더 비난 당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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