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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려진 흔적은 다시 온기를 나눌 수 있는가- 조온윤 시인의 ‘연소 시계‘를 읽고

  • 작성자 이윤서
  • 작성일 2024-02-28
  • 조회수 308

연소시계

조온윤

나는 네가 태어난 날로부터 흐르는 시계야

기우는 해 그림자도 아닌, 물방울의 똑딱거림도 아닌

아무도 없는 실내 조용한 식탁의 평면으로부터

내 몸을 태우며 아래로 흐르는 시계야


이 적막에 귀를 가만 대어보면

스스로 시계가 되어버린 이들의 박동이 들려


빙하가 사라지기까지의 세월을 가늠하는 기후학자와 

오지 않은 종말을 두려워하며 죄목을 세어보는 신도들

세계대전으로 떠나간 연인을 기억하는 연인과

우리는 되풀이되는 이야기가 되어 여기 머물지


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얼마나 지나온 걸까?

얼마쯤 녹아버린 몸을 보면 알 수 있지

시간의 혈관은 내내 굳었다 흐르기를 반복하고

그동안 많은 전쟁이 이 식탁 위를 휩쓸고 지나갔어


탕, 탕, 간수가 쇠그릇을 두번 울리면 식사는 시작되고

탕, 탕, 시간을 몰수하는 형으로 이 재판은 끝이 나


그리고 다시 탕, 먼 후생의 기억에서

수백년 뒤의 총성이 머리를 울릴 때면 

살아남은 이들은 붉은 촛농이 흐르는 창끝을 머리 위로

멈춰버린 정오의 초침처럼 가리킬테지


내 몸이 녹아 사라지기 전에 너를 다시 만나게 될까?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이등병이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어

바로 그날, 조간신문을 보던 시계공이 깨달은 것은

시계의 역사가 곧 기다림이라는 거였어


탕, 탕, 언젠가 너는 손님이 되어 문을 두드리고 있어

너를 그토록 기다리던, 사랑하는 시계의 집이야

식탁에는 역사의 박동 대신 갓 지은 음식만이 가득할 거야


지난한 삶이었지? 어서 들어와, 사랑하는 사람아

시계는 두 팔로 세시 사십오분을 가리킬거야


나는 누군가를 위해 불타는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그 고통을 감내하며 기다림이란 역사를 쓸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이 시의 화자는 연소시계이다. 화자는 오랜 기간 전쟁과 같은 비극적 상황을 목격해왔고 그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을 바라봐왔다. 그 오랜 기간을 연소시계로서 스스로를 태워가며 시간을 보내는 화자는 이러한 불행에 굴복하지 않는다. 삶의 긍정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되려 그동안 고난을 겪어온 사람들에게 따스한 위로의 손길을 건넨다. 

 이 시에는 “시계의 역사가 곧 기다림이라는 거였어” 라는 구절이 있다.  자신의 역사를 고작 기다림으로 채우는 화자가 이해 받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화자는 그 위로를 건네기 위해 몸을 태워가는 연소시계가 되기를 자처한 걸지도 모른다. 오로지 손을 마주잡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 것일지도 모른다.

 연소시계는 사랑하는 시계의 집에 찾아온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두 팔로 세시 사십오분을 가리킨다. 시를 읽고 시계를 바라본다면 세시 사십오분이라는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기댈 수 있는 품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를 안아주며 지나온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의 한 부분을 나눠 갖는 것이다.

그동안의 나는 고난이 찾아올 때 그걸 극복해내기조차 벅차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주변인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 시의 화자는 자기 자신을 태우는 고통이 있을지언정 괴로워하는 타인을 위할 수 있는 마음씨를 지녔다. 그 마음씨는 참 다정하고도 사랑스럽다. 감히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나의 삶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수많은 고난을 이겨낸다면 그들에게도 고난을 이겨낼 용기를 선사하고, 내가 수많은 고난에 빠져있다면 누군가로부터 고난을 이겨낼 용기를 선사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또한 연소시계의 그동안 타오르며 그을려진 흔적들이 종국에는 마음 속 모닥불로  눌어붙어 우리를 오래도록 따스하게 비출 것이다.


이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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