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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질의 꿈을 꾸는가? <굿바이 레닌>

  • 작성자 버틴
  • 작성일 2024-05-26
  • 조회수 320

 어쩌다보니 사회주의와 관련된 작품에 대한 글을 연달아 쓰고 있다. 그만큼 사회주의는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듯이,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베를린 장벽은 허무하게도 말실수로 붕괴했고, 소련은 산산조각났다.    

 사회주의가 지금까지도 회고되는 이유는 아마 그 시절 사람들의 희망을 담고 었기 때문일거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진다. 가진 자들은 호화롭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반면,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일해야했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사람들에게 대안을 선물해줬다.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노동자들에게 정말 달콤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러한 요구를 반영하지 못했다. 그렇게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실험은 실패했다.  

 <굿바이 레닌>은 동독이 흡수 통일된 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알렉스의 어머니는 열렬한 공산당원이었다. 그녀는 알렉스가 반정부 시위 중 동독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쓰러진다. 어머니는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만 그 사이 독일은 통일이 되어있었고, 그녀가 목숨 바치던 당은 없어졌다. 알렉스는 충격을 받으면 어머니가 사망 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아직 통일이 되지 않은 것처럼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거짓말을 하는 알렉스의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알렉스는 더 이상 판매되지 않는 동독제 물품들을 구하러 다니고, 서기장과 닮은 사람까지 찾아가며 가짜 뉴스를 만든다. 나는 이 과정을 보며 이상하게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떠올랐다. 이 소설에서 사람들은 정성스럽게 행복을 강요받는다. 소설의 사람들은 세계정부의 지배를 받으며 불행하지도, 늙지도 않으며 살아간다.  나는 소설 속 사람들을 알렉스의 어머니에, 세계정부를 알렉스로 비추어 봤던 것일지도 모른다. 진실을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진실을 알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 나을까? 적어도 실존주의에서는 후자라고 말할 것이다.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극중 레닌의 동상이 철거되는 장면을 본다면 어딘가 가슴이 저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신념이 부정당할 때 슬픔을 느끼는 건 인류 공통이기 때문이다. 당장 자신이 자라왔던 나라가 망하고 아예 다른 체제의 국가가 세워진다고 상상해보라. 괜히 뒤르켐의 아노미 이론에서 이런 상황을 상정하는게 아니다. 

 신념은 본질과도 관련있다.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한지 수십 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본질을 찾으려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항상 실패한다. 본질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며,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짓 본질을 세운다. 국가, 인종, 종교가 자신의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고 오해한다. 알렉스의 어머니와 알렉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의 본질이 사회주의라고, 당에 충성하며 슬픔을 잊을 수 있을 거라 착각한다. 그러나 이념은 사람에 우선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알렉스의 어머니는 레닌 동상의 철거를 목격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알렉스의 거짓말에 대해 알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알렉스에게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으며, 끝까지 알렉스를 믿었던 것처럼 연기한다. 이처럼 거짓말에 순응하는 건 또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직면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고 해도 괜찮다. 인간은 회복할 능력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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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데올로기를 두려워하는가?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책은 강렬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전 빨치산으로,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런 그는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전봇대에 머리를 박아 사망한다. 20세기는 반공과 공산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한 세기였다.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며, 여러 사람들이 억울하게, 혹은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21세기에 와서도 사회주의를 적대하는 시선은 여전하다. 나는 제목의 의미가 아버지가 이런 차이트가이스트, 시대정신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생각한다.한국전쟁을 그린 소설 <광장>에서는 이러한 대사가 있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중립국."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중립국.""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중립국." <광장>에서 화자는 완전히 자유롭고 중립인 곳, 바다로 몸을 던진다. 남한도 북한도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이 원하는 사회는 되지 못한다. 그들의 종착지이자 안식처는 죽음이라는 결말 뿐이다. 한편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엄밀히 따지자면 다르지만, 여기서는 편의를 위해 구분하지 않기로 하자. 실로 사회주의는 유령과 같아 실체도 없고, 수명도 다했지만 여전히 세상을 떠돌고 있다. 아버지는 이렇게 역설적이게도 죽음으로 인해 자신을 유령처럼 계속 따라다니던 ‘빨갱이’라는 수식어에서 해방되어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한 시대를 정의한 이념에 대해 묘사하고 있음에도 지극히 개인적이다. 사회주의란 이념 자체보다는 아버지와 그 지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책은 진행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이념의 본질을 꿰뚫어보는데 성공했다. 현대 정치 구도는 ‘탈정치’가 주도한다. 포퓰리즘의 부상과 정치 혐오로 인해 정치, 혹은 이념은 눈엣가시로 취급된다. 최근의 문화에서는 조금이나마 정치적인 내용이 보이면 ‘정치 묻히지 말라’는 말을 듣기 일쑤다. 하지만 조지 오웰은 ‘문학 활동은 정치와 구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의 삶 또한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며 이데올로기 또한 인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개인의 정치적인 면에, 이념의 인간다운 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 버틴
  • 202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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