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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외계+인>에 대한 뒤늦은 소고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4-05-28
  • 조회수 400

최동훈 감독의 영화 <외계+인>은, SF물과 무협, 판타지 등의 모든 장르를 뒤섞은 만큼 방대한 서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1부와 2부라는 연작 구성으로 나누어져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2부가 개봉한 것은 올해 1월 초였고,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5월이기에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있지만, 언젠가는 꺼내야할 이야기라고 생각해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최동훈 감독의 영화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한껏 어깨에 힘들어간 인물들, 장난기로 가득찬 대사, 의미없는 카메라 워킹 등. 그의 영화들은 대게 눈을 땔 수 없을 정도로 신나는 리듬감을 보유했으나 ‘재미’라는 유흥으로 지나치게 일관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지껏 충무로에서 보기힘든 흥행불패라는 타이틀과 총합 3000만 관객이라는 어마무시한 전적을 석권하고 있었고, <외계+인>이란 영화는 그의 흥행신화를 거의 맹신하다시피하는 투자자들로 인해 역대 최대규모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였다. 그리고 <외계+인> 1부는 비평과 흥행 모두 아쉬운 성적을 이루었다. 2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중들은 최동훈이라는 이름에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고, 투자자들은 실망했다. 그러나 나는 <외계+인>을 통해 최동훈이란 감독을 다시 보았다 (이 영화를 보고난 후, 올 타임 한국 영화 베스트 탑 8에 올리려고도 했다. 1위 - 휴일 / 이만희. 2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3위 - 남매의 여름밤 / 윤단비). <외계+인>은, 최동훈 감독의 가장 세련되고 훌륭한 영화이자 2024년 최고의 한국영화인 것이다. 그건 이 영화를 보며 여전히 그가 멋부리는 인물들과 장난기로 가득찬 대사, 유치한 유머를 고수하고 있지만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쌓아올린 작품의 완성도 측면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시지프스 신화를 따르며 인간의 운명론과 존재를 사유하는, 매우 아름답고도 희망차지만 끝내 비극적인 영화다. 

극 중에는 크게 3가지로 분류되는 타임라인이 존재한다. 그 중 첫번째는 주인공 이안(김태리)의 유년시절이다. 이 유년시절에 이안은 자신의 아빠 ‘가드(김우빈)’가 사이보그라는 것을 알고 그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병원으로 잠입했다가, 한바탕 소동에 휘말리게 된다.

두번째는 이안이 살아가는 고려시대다. 이안은 가드와 그의 조수 썬더, 그리고 탈옥한 외계 죄수들과 함께 고려시대에 떨어지고, 가드는 죽는다. 외계죄수들은 도망치고, 썬더는 행방불명되었다. 이안의 청년시절이 담겨진 고려시대는, <외계+인> 1부의 주무대가 바로 이 두번째 타임라인이다.

세번째는 고려시대에 살고있던 이안에 의해 뒤바뀐 현재다. 또는, 이안이 고려시대를 벗어난 이 후의 현재이기도하다. 이 시간선에서 이안은 어른인 채로 놓여져있다. 이 것은 <외계+인> 2부의 메인배경이다.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1. 이안의 유년시절(현재)

2. 이안의 유년기 - 성장기 - 성인 / 고려시대 (과거)

3. 이안의 성인 (현재)


이 타임라인이 흥미로운 것은, 1번과 3번에 있다. 이안은 어린시절 고려시대로 빨려들어가서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홀로 버텼다. 그러나, 정작 10년이라는 인고의 시간 이후 현재(3번)로 돌아왔을 때, 세상은 전혀 바뀐 것이 없고, 오히려 자기 자신만 아이에서 어른으로 바뀌어있다. 이안은 이제 ‘10년’이란 시간을 홀로 간직한 채, 현재에 존재하고 있지만, 더 이상 ‘현재’의 이안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건 영화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매우 이상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총합 영화의 세시간 가량 우리는 신선과 외계인들이 싸우는 것을 보아왔지만, 변한 것은 없다. 영화는 나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나아가지 않고있다. 이 나아가는 동시에, 나아가지 않는 이 방식은, 영화의 모든 것들이 시간 선에 가혀버린 이안처럼, 정말 처절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외부(현재)와 내부(과거)로부터 단절된 듯 보인다. 움직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영화. 너무나도 이상한 이 시간구조는 어딘가 잘못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의 그 무엇도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에 존재하는 유년시절 이안 (1번)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현재에 존재하는 성인 이안(3번)을 받아들일 수 있을테지만, 고려시대에 떨어져서 10년의 인생을 살아온 이안의 시간들(2번)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려시대에서 살아온 이안(2번)을 부정할 때, 우린 어린 이안과 큰 이안이 현재에 동시에 존재하는, 매우 이상한 현실을 받아들여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밖에 없다. 이안은 1번과 2번과 3번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지만, 그 모든 곳에 속할 수도 있다. 사람은 복합적인 존재인 것과 다름없이, 우리는 모든 이안의 존재를 받아들여야한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이안의 처지는 마치 <시지프스>와 <이방인>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시지프스가 떠오르는 것은, 결국 현재는 바뀌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0년이란 시간을 버텨낸 이안에게서, 그 10년이란 시간이 사라지게 되지만, 이안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희생정신에서다. ‘이방인’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안을 둘러싼 사회/현재는 변함이 없어도, 그 변함 없는 것 사이에 놓여진 ‘과거(고려시대)’에서 스스로 치열하게 자신의 의무를 위해 맞서 싸우고, 변화하여서, 변화없는 사회/현재에서 변화를 이루어낸다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낙관적이며 낙천적이다. 당장에 서로 각기 다른 시간대에 모여있던 등장인물들이 한 곳에 모여서 서로의 시간을 위해 싸우고, 음악 In Dreams를 배경으로 헤어지는 2부의 결말부분은 비관을 낙관으로 승화시키려는 이 영화의 태도를 더 자세히 보여준다. 현재에 있던 삼각산의 두 신선들은 자신들이 고려시대로 돌아갈 때, 치열하게 외계인과 싸웠지만, 결국 변화없는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무륵(이준열)은 자신의 수하 우왕좌왕을 잃었고, 두 신선들에 의해 지워진 자신의 과거를 되찾았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던 자신이 아닐 것이다. 또는, 이안을 잊지 못해서 현재로 돌아왔고, 시간을 여는 신검은 사라졌으므로, 고려시대를 살았던 시간을 홀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이안은 과거없는 현재를 살아가게된다. 모두가 각자의 추억을 포장한 채, 잊혀진 것을 기억하며 살아갈거다. 이걸 과연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발랄한 음악을 사용하며, 최대한 긍정적인 감각을 주기위해 애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과장되고 유치한 코미디 마저도 어쩌면 다시 살아야한다는 비극을 가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지도 모른다. 나는 <외계+인>을 통해 존 포드를 마주했다. 마치 매우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만 같은 <역마차>가, 민족학살과 전쟁으로 점철된 미국이라는 나라로 도달하는 여정이 되듯이, <외계+인> 역시 그와 비슷한 결의 결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외계+인> 2부에서, 부쩍 커버린 이안이 어릴적 자신의 친구를 마주했을 때, 자신은 변했고, 친구는 변하지 않은 것을 보고 아련한 눈빛을 지을 때, 그 서정적인 감정은 그 어떤 존 포드 영화의 장면과 맞먹을 정도로, 가슴이 미어진다. 비록 무협과 판타지, SF가 얼마나 잘 조합되었고, 그것이 얼마나 좋은 재미를 주었든간에, 그 자체로 너무 낙관적이고도 구슬픈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은, 과거와 현재, 개인에 관해 여러 의미로 수많이 곱씹을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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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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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조

    언젠가 가족들과 함께 <외계+인> 1부를 관람해, 서로 재밌다, 2부도 빨리 보고싶다는 의견을 주고받은 기억이 납니다. 그 뒤로는 이상할 정도로 언급하지도, 2부를 찾아보지도 않았네요. 그런데 작가님의 글을 읽고 난 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시시포스가 끝내 정상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끊임없이 돌을 굴리듯, <외계+인>의 등장인물들 또한 자신의 성장에 기록되지 못하는 일을 자처해 맡으며 현재가 변화하지 않더라도 행동하는 것을 택했다는 이야기에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비평만 읽었을 때 드는 의문점이 너무 많은데, 영화를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점에 두근거립니다. 평이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아쉬운 영화, 잘 조명받지 않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소개해주셔서 다행입니다, 2부까지 관람하고 오겠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 2024-05-29 02:20:02
    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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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감사합니다. 꼭 감상평 남겨주시길 바래요. 댓글이 아니더라도 비평 게시판에 따로 올려주셔도 좋구요!

      • 2024-06-06 11:00:47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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