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은 어떻게 대항하는가-연극 「웃음의 대학」을 보고.
- 작성자 자적
- 작성일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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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웃음의 대학」을 보고.
연극에 대한 연극, 소위 말해 극중극이다. 이 연극의 재밌는 점은 다루고 있는 연극조차 극중극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극 배우가 아닌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대적 배경에 맞서는 한 약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침울하기는커녕 관객들은 약 2시간의 긴 시간 동안 배우들의 호흡을 따라가며 그들과 함께 웃게 되고 좋은 에너지를 얻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메시지는 가볍기만 한 것도 아니라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고 분명한 위로가 담겨있다. 나는 극장을 나오며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연극이 있을까.
이 극은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 명은 극단 ‘웃음의 대학’의 작가이고, 다른 한 명은 그들의 공연을 저지하려는 목적을 지닌 검열관이다. 철저히 대립 관계에 있는 그들은 한 극본이 무대에 설 수 있는가를 두고 일주일을 다투게 된다. 검열관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작가는 그것이 무엇이든 극본을 더욱 우습게 만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열관은 그런 작가에게 감화되어 진심으로 크게 웃으며 함께 대본을 만들어 간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놓인 그들은 그야말로 ‘웃음의 힘’으로써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첫날, 찾아온 작가에게 검열관은 허가를 내려줄 수 없다며 말한다. “나는 당신의 극본을 읽으면서 한 번도 웃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작가는 말한다. “이것은 극본입니다. 배우가 읽지 않으면 그 참맛을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드러나는 연극의 성격에 매료당했다. 연극 극본은 정말 재미가 없다. 묘사는 상황에 대해 이해하기엔 모자라고, 성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인물들의 대사들로 가득 찬 대사들은 도무지 그것 자체로는 매력을 느끼기 어렵다. 아무리 거장이라 불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 밋밋한 대본에 배우라는 아주 약간의 상상력을 더해보는 것이다. 그들의 표정과 어투, 행동들을 상상하는 순간, 그러자 대본은 하나의 이야기로서 재미있어진다. 무대와 조명, 배우의 연기, 그리고 시간의 흐름.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이렇게나 살아있는 이야기라니.
일주일이 지나고 작가는 수많은 수정을 거친 끝에 허가를 받아낸다. 살면서 농담을 즐기기는커녕 크게 웃어본 적조차 없는 검열관은 그의 극본을 검열하는 일주일 동안 몇 번이고 웃었다. 허가 도장을 찍어주며 검열관은 말한다. “당신이 결국 이겼습니다”라고. 극 중에서 작가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다. 늘 웃고 당하는 사람처럼 보이며, 심지어는 우습게까지 보이는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자신만의 싸움이라 자부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웃음을 주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고 몰두하는 사람이다. 반면 검열관은 전혀 그렇지 않다. 분명 나이도 훨씬 많고 권력적으로도 작가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그에게는 신념도, 열정도 없다. 그가 본인을 묘사하듯이 권력의 끝자락에 서 있을 뿐인 인물이다. 좋고 나쁜 건 그가 결정하지 않는다. 매사에 진지하고 무게감이 있어 보이지만 정작 알맹이는 없다. 그런 부분이 어쩌면 지독한 약자였을 작가가 검열관에게 결국에 승리를 인정받도록 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확고한 신념은 작가를 다시 위기에 빠지게 만든다. 작가는 본인의 가치관과 권력에 대항하는 자신만의 싸움을 검열관에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 때문에 검열관은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킨다. 작가가 대항하고자 하는 권력에 끝자락에 서 있는 이가 바로 검열관이기에. 검열관은 작가에게 말한다. 웃기지 않는 희극을 써오라고. 절대 성립할 수 없는 문장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검열관조차 말이 안 된다며 그를 막아서지만 그런 검열관을 향해 작가는 외친다.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압니까! 웃기지 않는 희극이라니, 벌써 재미있는데요?”
작가는 다음날 그야말로 완벽한 희곡을 써온다. 그 검열관마저 읽으며 내내 웃을 만큼 희곡으로서 완벽한 극본을. 검열관은 그에게 말한다. 전혀 조건에 맞지 않으니, 허가를 내려줄 수 없다고. 하지만 작가는 그저 물러난다. 지금까지 그렇게나 허가받는 것에 열중이던 사람이 말이다. 작가는 의문스러워하는 검열관에게 편지 한 통을 내민다. 징집 통지서였다. 한 달 후면 작가는 전선에 배치될 것이다. 지금의 군대 징집과 달리, 1940년대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에서의 군 징집이라 하면 전체주의에 의한 개인의 희생이다. 애국이라는 명목 아래 국가에 의해 살생과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끝도 정해져 있지 않은 막막한 미래에도 작가는 밤을 새워가며 극본을 써 온 것이다. 그것도 더 재밌고 완성도 있는 희곡을, 그토록 원하던 무대에 올릴 수 없음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싸움을 이어간 것이다. 그런 작가에게 검열관은 말한다. “꼭 살아서 돌아와. 자네의 무대를 보고 싶어.”라고.
이 연극의 후반부는 다소 무거운 이야기를 한다. 단편적으로 보자면 작가는 결국 글을 쓰는 걸 관두고 일본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된다. 작가는 아마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연극의 모티브가 된 작가가 그렇듯이. 하지만 이 연극은 끝까지 웃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검열관이 “내가 이 대본이 완벽하다고는 했지만 하나 걸리는 게 있어”라는 대사를 함과 동시에 연극의 분위기는 다시 가볍게 환기된다. 이런 면이 나는 이 연극을 참 좋은 연극이라 느끼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 연극은 결국 웃음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연극이니까. 극 중에서 작가가 말하듯 웃으러 온 관객을 맞이할 준비가 충분히 된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웃음의 대학」을 쓴 미타니 코키는 극 중 작가는 본인을, 검열관은 그런 자신을 가로막는 다양한 제약이라 밝혔다. 극 중 작가가 그렇듯 작가들은 수많은 제약과 타협하며 글을 쓴다. 그 제약은 극 중에 나타난 것처럼 큰 권력에 의한 검열일 수도 있고, 윤리적인 측면일 수도, 시대적 풍습일 수도 있다. 이 공연은 말해준다. 무작정 제약에 부딪히거나 견디지 못해 꺾이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라고. 적당히 그 제약과 타협하며 창작 의지와 균형을 맞추는 것. 그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누가 아는가, 그 제약이 극 속의 작가처럼 오히려 더 나은 창작의 밑거름이 될지. 나 또한 창작자로서 작가와 같은 신념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어떤 억압에도 끝내 웃어 보이고야 마는. 그 어떤 제약이라도 그 앞에 서서 크게 외쳐보고 싶다.
“해보지 않고서 어떻게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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