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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값: 레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 작성자 위다윗
  • 작성일 2024-06-21
  • 조회수 123




01. 사랑, 톨스토이, 그리고 러시아 


이 세상에서 가장 추상적이면서도 우리를 마법처럼 홀리는 단어는 무엇일까? 아마 우리가 하루에 한번쯤 되뇌이지 않고는 일상의 지루함을 버틸 수 없다 느끼는 단어, 바로 사랑일 것이다. 이제까지 인간은 사랑을 질려 한 적이 없으며 사랑은 우리의 노래, 설교, 정치, 예능, 그리고 우리가 사람들과 교제하는 모든 만남의 장을 매체삼아 우리를 마주한다. 그 각양각색으로 자주 우리에게 새 옷을 입고 찾아오는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과연 누가 전부 깨달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러시아를 뛰어넘어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명성을 받은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나는 적어도 사랑에 대해 더 심층적인 탐구와 고민을 할 수 있었다. 


우선 이 장편소설에 대한 나의 본격적인 견해를 나누기 앞서 이 소설이 쓰여진 배경을 다룰 필요가 있다. 안나 카레니나는 1877에 완성이 되었는데, 이 시기 러시아는 말 그대로 격동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산업화를 비롯한 서구문명을 향한 동경과 그에 맞서는 러시아 전통으로 귀환하려는 시도들, 전제 정치와 그에 맞서는 농민들의 반란, 마치 복잡한 실들이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며 엉킨듯 19세기 러시아는 흥분과 혼동이라는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가는 질풍노도를 통과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속 많은 소설가들에겐 지식인들의 혁명이나 소외계층의 고난에 초점을 두고 서사를 펼치는 것이 당시의 제한된 정치적 목소리를 보다 확대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정확히 동일한 시점에 한 러시아 귀족 여성인 안나 카레니나의 외도와 또 다른 러시아 귀족인 레빈의 사랑과 결혼, 좌충우돌 부딪히며 펑안과 안정을 찾아가는 그의 가정으로 시선을 주목시킨다. 톨스토이는 물론 지식인으로서 러시아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톨스토이는 그의 소설을 통해 더 거시적인 정치적 불안정 너머에 점차 영향력을 얻어가는 폐미니즘, 결혼과 이혼, 가정에 대한 새로운 관점 등이 러시아 기존 가부장적 가치관과 충돌하고 있음을, 즉,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원이라 할 수 있는 가정의 위기를 간파하고 보다 근본적인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02. 개인, 가정과 사회의 불협화음 


여러 고전들을 읽어보았지만 이만큼 치밀하게 개인과 가정과 그 모두를 포함하는 사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표현한 작품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귀족 안나 카레니나의 전남편인 카레닌은 러시아 정부의 고위관직으로서 많은 인정과 보상을 얻고 끊임없이 자신의 커리어를 개척해나간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세료자와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정서적 공급을 제공하기 보다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더 몰두하지만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간의 관계를 알고 나서는 안나 카레니나에게 엄마와 아내의 자리로 돌아올 것을 촉구한다. 반면, 안나 카레니나는 자신이 속한 귀족사회가 요구하는 가정상과 여성상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젋은 미혼 남자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그 결과로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딸을 포함한 새로운 ‘가정’은 사회에서 가정이라고 인정되기 조차 어려운 매정한 반응을 만난다. 즉, 카레닌과 안나 카레니나 모두 각자의 방식에서 자신의 가정에서의 역할과 사회적 역할이 충돌했고 그 갈등을 일으켰던 것은 카레닌에겐 성공과 명성에 대한 추구, 안나 카레니나에겐 사랑에 대한 추구라는 개인의 욕망에 기인했다. 




03. 톨스토이는 그래서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안나 카레니나 책의 첫머리는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로 성서의 로마서 구절을 인용한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점은 원래 로마서 12장 19절에 붙여 있는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를 제외하고 인용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톨스토이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혼동시키는 동시에 모순적으로 더 성숙시키기도 한다. 과연 여기서 “복수”는 간음을 한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신의 응보인지, 자신을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했다고 느끼게 만든 브론스키를 향한 안나 카레니나의 응보인지, 더 나아가 외모와 부와 지위를 향유하는 러시아 귀족을 향한 러시아 사람들이 구축한 사회의 응보인지, 톨스토이는 어느 해석에 대해서도 선명한 지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톨스토이는 모든 인물들의 입장과 처지, 선택의 동기와 욕망을 엑스레이 찍듯이 묘사한다. 문학의 장르중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던 톨스토이지만 과연 톨스토이 만한 사상가와 사색가가 이 거의 1,000 페이지 가량의 긴 분량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없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톨스토이는 자신이 펼쳐낸 이야기를 통해 우리 각자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찰하고 또 사회의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타인을 향해 섣불리 일어나는 판단을 유보하게 함으로 다양한 독자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깨달음을 주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비유하자면, 거대한 폭포 앞에 섰을때 각각 다른 사람에게 다른 방식으로 이미지들이 연상되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다. 



04. 안나 카레니나와 카레닌, 동전의 양면 


안나 카레니나는 부정할 수 없는 인격적 미성숙함과 결함을 갖고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신실했던 남편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장 사랑한다고 여겼던 유일한 외아들 세료자를 포기하고 자신을 유혹했던 만난지 오래 되지 않은 남자와의 불법적인 동거를 한다. 그 뿐 만 아니라, 그 값을 지불하고 만난, 진심으로 안나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애인 브론스키를 비이성적인 집착으로 밀어붙이며 그의 모든 다른 관계들에서의 책임성을 포기하도록 부추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독자들은 감히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적대감과 판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녀의 타인을 향한 공감과 정의감,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와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헌신을 그녀의 어떤 성품적 결함보다 더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우 이상적이고 엄격한 레빈은 안나 카레니나의 집을 방문하고 나서 그녀에 대해 갖고 있었던 편견들이 무너지고 대신 그녀를 향한 존중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낀다. 러시아 귀족 사회내에서 타부시되고 낙인찍힌 여성이었지만 그녀는 그녀를 향한 평판의 격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엄했고 아름다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존엄성은 지켜졌는가? 아니다. 결국 그녀는 브론스키의 사랑에 확신하지 못한채 스스로 열차에 몸을 던지는 최후를 겪는다. 흥미로운 점은 물론 그녀의 최후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안나 카레니나 본인의 선택과 무책임성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집단적인 판단과 위선적인 기준에 달려 있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안나 카레니나의 오빠 오브론스키를 포함해 많은 귀족 남성들이 불륜을 행하지만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사회는 포용하고 거의 아무런 보복을 하지 않는다. 반면에, 안나 카레니나를 향해서는 실질적으로 모든 영향력을 박탈하고 관계동심원에서 제외시켜 버리는 반응을 보인다. 물론 안나 카레니나는 불륜이라는 행위의 결과들을 어떤 식으로든 짐 져야 했지만 다소 사회의 암묵적인 이 처벌 방식은 정의롭지도 공정하지 않는 혐오의 현현으로 보인다. 만약 현대사회였다면, 그녀를 이렇게까지 고립시키지도 그녀의 정신적 문제를 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것을 통해 우리는 톨스토이가 당시의 러시아 귀족사회의 미성숙함을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안나 카레니나의 무책임성 뒤에 동전의 양면처럼 그녀의 생명력과 진실됨이 있었듯이, 카레닌의 냉정하고 일중독적인 행동 뒤에는 여린 감정과 책임성, 끊기가 있다. 앞서 카레닌에 있어서 그의 사회적 자아와 가장으로서의 자아간에 충돌을 언급했지만, 카레닌은 소설 전반적으로 사실은 매우 가정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임을 옅보여준다. 안나 카레니나의 불륜 이후, 그는 평판이 훼손되는 것을 떠나 안나의 배신에 마음이 무너진다. 그에게 사회적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그 세계에서 성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그를 사랑해주고 존중해준 아내 안나 카레니나와의 부부생활이 기반을 했기에 그것이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 예고없이 찾아온 사랑의 위기에 너무 괴로워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지 못한다. 또한 시간이 좀 지나고, 안나 카레니나를 용서하고 아들 세료자를 건강하게 양육하고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처럼 카레닌 또한 겉으로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성품의 결함이 있지만 그 너머 사랑을 원하고 사랑을 줄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의 소유자인 것이다. 


05. 사랑, 사랑, 그리고 또 사랑 


안나 카레니나와 카레닌, 두 사람의 삶을 통해 그들이 삶에서 무엇을 선택하며 어떤 것을 득하고 어떤 것을 실하는지를 볼 수 있다. 안나 카레니나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랑과 자유를 추구하고 그것을 얻는다(물론 불완전했지만). 그 대가로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사회적 평판과 입지를 잃는다. 대조적으로, 카레닌은 사회로부터의 존중과 성공을 추구하고 결국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것에 남 부러울 것 없이 다다른다. 그 대가로 그는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아내를 잃고, 열심은 아니었어도 꾸준히 쌓아올린 결혼관계를 잃는다. 이 글을 시작할 때 말했던 사랑에 대해 다시 말하고자 한다. 사랑은 꼭 사람을 향한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향한 사랑, 열정과 추구는 매우 다양하고 그것이 다양하기에 이 세상을 살아갈때 서로에게 느끼는 살아있음의 기쁨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와 카레닌 외에 중요한 인물인 레빈은 성공도, 가정도, 사랑도 아닌 이상을 사랑한다. 선함과 정의, 진리를 향해 목말라하고 그 갈증에 번뇌한다. 이와 같은 레빈의 추구도 안나 카레니나의 브론스키를 향한 열정적인 집착 만큼이나 뜨겁다. 이야기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이 다양한 사랑들에게는 지불해야 할 값들이 있다는 것이다. 각자가 때론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저울질하고 과거의 선택을 후회할 수 있지만 과연 선불리 타인의 선택을 비난할 수 있을까? 만약 안나 카레니나가 브론스키와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 전 연을 끊고 욕망을 무의식 깊이 억누른 채로 카레닌과 마치 쇼윈도 부부의 삶을 살듯이 계속 살았다면 그녀는 과연 후회없이 죽을 수 있었을까?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을 모르기에 우리는 인간인 것이고 그렇기에 톨스토이는 인간을 미화하지도 흑화하지도 않은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실체는 우리 모두가 관찰해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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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다윗
  • 2024-05-15
테일러 스위프트, 음악이란 삶이며 울림이다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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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다윗
  • 202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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