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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아닌 세상에게 물어보라

  • 작성자 다이모니온
  • 작성일 2006-10-11
  • 조회수 97

학교 과제로 쓴 글입니다.

주제는 '이근삼 씨의 희극 <원고지>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 속에서 네루다의 <시>에서와 같은 합일(合一)을 통한 인간의 구원은 가능한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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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소수의 몇 사람들에게만 ‘천재’라는 이름을 부여해줍니다. 이른바 천재라 불린 이들의 이름을 읊어보기로 하죠. 네루다, 랭보, 전혜린, 괴테, 모차르트, 베토벤 등. 그들의 공통점은 일반인들은 꿈꿔보지도 못할 높은 경지에 있는 세계를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세계를 뛰어 넘어 신의 세계, 사유의 세계, 우주 등의 초월적 세계를 그들은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만약 다른 부모와 다른 스승과 다른 친구를 만났다면, 다른 국가에서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었다면 천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세상은 그들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그들에게 천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들이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날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요. 세속적 세계를 넘어서 약점 많은 인간을 구원해줄 초월적 세계를 아직 만나지 못한 네 명의 일반인들이 이 세상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들의 원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위에서 의문을 가지게 된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죠.



미국 슬럼가의 스무 살 된 소녀, 제인

  골목길을 지나 보이는 뉴욕 번화가라는 곳에서는 오늘 밤에도 불빛들이 여러 색으로 치장을 한 채 현란한 몸동작을 해보이고 있어. 댄스 음악이 들리기도 하고, 가끔은 자지러지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해. 분명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의 골목길만 지나면 세상은 온통 멋진 것들로 둘러싸여 있을 것만 같단 말이야. 나도 뉴욕 번화가를 거닐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늘이라는 지붕 아래 살고 있는데 조금도 행복해본 적이 없어. 오늘 밤에도 난 도통 기쁜 걸 모르겠단 말이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화려한 네온 싸인 불빛과 시끄러운 소리에 난 기쁘기 보다는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아.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 옥상에 올라가 그냥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세상아, 난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내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온통 잿빛으로 가득할 뿐이야. 우리 엄마는 교회에 나가셔. 어릴 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엄마 손을 잡고 교회에 다녔었지. 그런데 요즘에는 일요일 아침만 되면 엄마랑 싸워. 아주 고약한 딸이 되곤 하지. 엄마한테 마구 소리 지르고 해선 안 될 말을 입에 담으면서……. 왜 싸우냐고?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난 신이 없다고 생각하거든. 도대체 신이란 존재를 믿을 수가 없어. 인간을 구원해줄 신이 도대체 어디 있냐는 말이야. 신이 있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거든. 교회에서 목사님으로부터 듣는 설교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신은 인간을 모두 평등한 존재로 여기시거든. 신에 대한 믿음만 가진다면 그 사람에겐 은총이 가득할 것이고. 근데 내 삶에 은총이란 것이 있기나 하니? 있기나 하냔 말이야!

  오늘 아침에도 아침 5시에 눈을 뜨자마자 신문 배달을 했어. 그 다음엔 존슨 씨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일을 했지. 설거지를 하고, 정원에서 잡초를 뽑고, 음식을 만들고, 빨래를 하고, 그 넓은 집을 청소하고, 아이들을 재우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 밤 10시가 기본이야. 어릴 때는 학교도 못 다녔지. 뗏국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콧물을 질질 흘리며 다녔어. 10대 중반에는 술도 하고 담배도 하고 본드도 해본 적이 있어. 남자친구하고 밤낮 가릴 것 없이 거리를 배회하고 다니다가 아기까지 가졌었지. 결국 낙태를 시키고 말았지만. 참, 더러운 나의 20년 인생이야. 누구든 내 이력을 보면 혀를 차곤 하지. 왜 그렇게 살았냐면서. 내가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산 게 아냐. 내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 20세에 가까워지면서 내 삶에 대해 진실로 반성하기 시작했어. 그래서 지금은 착실하게 살고 있는거 아냐. 일자리도 잡고 말이야. 난 내 삶이 나아질 줄 알았어. 이렇게 마음잡고 열심히 일하면 모든 게 나아질 줄 알았다고. 행복해질 줄 알았다니까. 근데 이게 뭐야. 난 지금 조금도 행복하지 않아. 마음 속 근심 걱정 털어버리고 거리를 배회하던 철없던 때가 그리울 정도지 뭐야. 경제적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줄을 모르지. 아직도 한 끼, 한 끼 해결하는 게 걱정이고, 집에는 벽지가 떨어져 시멘트가 들어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야. 여름에는 비까지 새고 있는데 수리할 엄두도 못 내고 있어. 엄마는 몸이 아파서 이제는 일도 못하시고 내 밑으로는 동생이 두 명이나 더 있어. 걔네들은 나만 믿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는데 난 미쳐버릴 지경이야. 세상아, 어떻게 해야 돼? 세상 사람들은 나한테 손가락질을 해.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이라고. 세상아,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니? 내 삶은 이미 죽은 시체나 다름없고 내게 미래란 없어. 꿈, 희망? 그런 건 나한테 말하지마. 도움이 되기는커녕 내 가슴을 고통스럽게 파대는 벌레 같은 한마디일 뿐이니까. 사람들은 세상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떠들어대는데 난 정말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이건 너한테만 할 수 있는 고백이야. 난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아름다움을 보기도 전에 너의 추한 모습을 볼대로 다 본 것 같아. 내가 바란 것도 아닌데 넌 내 앞에서 추한 모습을 모조리 들춰 보여줬어. 세상아, 난 너한테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지만, 들어줄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너에게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지만 난 네가 원망스러워. 내게 추한 모습만을 보여준 네가 원망스러워.

  지금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번화가는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하네. 눈에 맺힌 눈물 때문에 불빛이 온통 흐릿해 보이긴 하지만 말이야. 내가 본 세상은 항상 이렇게 흐릿하거나 더러웠던 것 같아. 나도 너를 보며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어.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의심 없이 교회에도 나가고 싶어. 꿈과 희망을 말하고 싶어. 세상아, 내일도 오늘의 반복이겠지. 날 도와줘, 세상아.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줘. 부탁이야.


한국의 50대 대기업 이사, 김씨

  언제나 청춘인 줄로만 알고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벌써 인생의 중턱을 넘어서버렸어. 허허, 허탈한 웃음만 나오는구나.

  대학을 졸업한 난 꿈과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가슴 부풀어 있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어. 세상이 다 내 것인 것만 같았지. 연인과 불같은 사랑을 했고, 그에 못지않게 이 드넓은 세상, 그리고 내 일을 뜨겁게 사랑했어. 열정의 화염 속에서 나의 20대는 춤추듯이 그렇게 흘러갔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 그 때 생각만 하면 웃음꽃이 저절로 피어오르는구나. 대기업의 말단 사원부터 시작해서 난 차근차근 승진 길을 밟았어. 번 돈을 착실하게 모아서 집도 사고, 마누라 취미 생활하는 데에도 아낌없이 투자하고, 차도 사고, 아이들 교육도 시켰지. 그러다가 재산이 불어나기 시작했고, 여행을 가거나 문화생활을 하면서 나에 대한 투자를 하는 데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어. 물론 부모님도 편안히 모시면서 말이야.

  그렇게 안락한 생활을 해나가면서 분명 난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어. 하여튼 내가 갈망하는 그것에 다다르지 못해 내 가슴 한 구석이 언제나 텅 빈 것만 같았지. 지금도 그래. 아니 지금은 마음의 공허함이 더 크게, 더 뼈저리게 다가오고 있어. 분명히 난 남부럽지 않은 삶을 꾸려왔는데 지금에 와서 아무것도 성취해 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 나 자신을 누군가로부터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것 같은 느낌에 괴로움을 금할 길이 없어.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만히 생각할 때면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두 귀에서 끊임없이 맴도는 것만 같아. 마음이 불안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미칠 지경이지. 내가 왜 이렇게 괴로워해야 하는 거지? 분명 난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냈어. 큰 사고를 친 적이 없다고는 말 못하지만. 열정적인 대학 생활을 했고, 좋은 부인 만나 지금껏 행복한 가정을 꾸려왔지. 직업? 내 직업이야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지. 삼팔선, 사오정에 벌벌 떠는 이 시대에 난 50을 훌쩍 넘어서도 대기업 이사로 버티고 있으니 말이야. 아이들도 잘 키웠어. 둘 다 어엿한 명문대생이지. 어른 공경할 줄 알고, 밝은 아이들이니 내가 자식 교육에서 미련이 남을 것이 뭐가 더 있겠어. 그런데 내 마음은 아직도 인생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처럼 방황만을 거듭하고 있단 말이야. 아아, 괴로워. 톱니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내 귀를 맴돌아.

  냉정하게 생각해보라고? 원인을 분석해보라고? 그래, 냉정하게 생각해볼게.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운 건지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자고…….

  음, 난 아마 너무 지쳐버린 것일지도 몰라. 하긴 지칠 만도 하지. 내 인생이 탄탄대로였던 것 같아도 그것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이었으니까. 하하, 이제야 내가 왜 이렇게 괴로워하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네. 이 구역질나는 세상에 얼마나 익숙해져버렸으면 이제야 자각을 할까. 그래, 난 이 세상에서 지칠 대로 지쳐버린 거야.

  우리는 자본주의를 최상의 이념인양 떠받들고 있지. 자본주의는 무한경쟁의 어머니야. 난 이 무한경쟁의 용광로 속으로 던져졌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세상의 빛을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항상 전교 1등을 하라는 소리, 명문대에 진학하라는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었고, 그렇게 바라던 명문대에 진학해서도 안정적이고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어. 휴, 생각만 해도 숨이 차는군. 그렇게 뛰고 또 뛰어서 대기업에 취직을 했지. 사회 진출을 한거야. 이제 다 된 줄 알고 한숨 놓으려했더니 이 사회란 거 쓰레기 하치장보다 더 더러운 곳이더군. 서로를 헐뜯고 할퀴며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은 이제 말할 것도 없었지. 인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세상, 사람이 경제적 가치로 평가되는 세상, 음모와 권모술수로 얼룩진 세상, 이 것이 내가 본 세상이었어. 젊은 나이에 쇠파이프로 머리를 연타당하는 것 같은 충격에 적잖이 혼란스러웠지. 사회 초보생일 때는 집에만 오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고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느낌에 고생 좀 했었어. 그리고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이 사회란 쓰레기 하치장으로 나도 다른 오물들과 같이 스며들어갔지.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머리가 아프지도 않고 구역질이 나지도 않아.

  이제야 깨달았어.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난 나란 존재를 잃어버린 거야. 대기업의 이사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어디 그게 진정한 나겠냐고. 청년 시절의 나를 생각해봐. 그 때는 오직 나만을 위한 미래, 나만을 위한 투자를 계획하고 구상하느라 바빴었지. 시를 읽고 가슴 설레어 했고, 음악을 듣고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고,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시절이었는데……. 근 20년 동안 내가 이러한 삶의 감동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가. 오직 나 자신을 이상적인 무언가를 통해 투영시킴으로써 얻게 되는 희열 말이야. 그 아름다운 경험과 느낌을 잊고 살아왔어.

  겨우 나의 괴로움에 대한 근원을 찾긴 했는데 앞으로 내 삶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 난 이미 지금의 생활과 혐오하던 세속적 삶에 익숙해져버렸는걸. 그리고 나에겐 아직도 가장으로서의 임무가 남아있고 말이야. 게다가 많이 늦었어. 벌써 60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걸.

  내일도 난 다시 출근을 했다가 일을 하고 저녁 식사 시간 즈음 되어 집에 돌아와 샤워와 식사를 한 후 TV 앞에서 스르르 잠에 빠져들겠지. 현기증이 나. 내 몸이 쳇바퀴에 걸려 빙글빙글 돌아가기를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세상아, 도와줘. 너무 어지러워…….


한국의 18세 고교생, 철수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내내 미치도록 졸렸는데 정작 침대에 누우니까 잠이 안 오는 이 상황은 뭐람. 휴, 어쨌든 푹신한 침대에 누우니 너무 좋다. 피곤해서 그런지 다리가 좀 아프긴 하지만…….

  분명히 난 대학 진학을 하려고 불꽃 튀게 공부하고 있는데 대학에 가서 무엇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하, 가슴이 답답하네. 경영대 들어가겠다고 정해놓긴 했지만 모르겠어. 경영대를 졸업하고 다음엔 무얼 할지 정말 모르겠어.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고민을 부모님께 털어놓으면 경영대에 가야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시고 귀 얇은 나는 그 말씀에 금방 설득당해 버린단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조용히 스스로 생각을 해보면 분명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거든.

  힝, 울고 싶어! 울고 싶단 말이야! 이 상황이 지긋지긋해. 내가 무슨 기계도 아니고 말이지. 하루 종일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집에서도 수능대비, 시험대비 문제만 반복해서 풀고 있고. 책을 읽어도 이게 대학 가는데 도움이 되는 책인지 생각해보고 읽는 내가 싫어. 책을 참 좋아하는 나인데.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아주 많이 읽으면서 행복해 했었는데……. 이번에 어떤 외부행사에 참가를 하려고 하는데 이놈의 학교하고 학원이 또 방해를 한단 말이지. 엄마께서는 내가 참가하고 싶다니까 또 이렇게 물어보실 게 뭐야.

  “그 행사 참가하면 생활기록부에 기록되고 대학교에서 참고를 하는 거니?”

  담임선생님도 역시 이렇게 말씀하셨지.

  “그다지 도움이 되는 행사가 아니면 참가할 필요가 있나?”

  우웩, 오바이트 나와.

  이렇게 잠도 안 오고 깊은 생각에 잠길 때면 내 삶이 이리저리 꼬일 것만 같은 두려움이 나를 엄습해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될 것 같아서 무서워. 부모님께서는 경영을 전공하고 회계사가 되거나 기업에 입사해서 마케팅을 맡으라고 하시지. 난 지금까지 그런 길을 가려고 생각해왔어. 정확히 말하면 지금도 내가 갈 길은 그 것밖에 없는 것 같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니? ‘난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어요. 이 일은 나의 천직이에요.’ 이런 말말이야. 나는 내가 갈 거라고 생각하는 그 길이 하늘이 내게 선물해주신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확신이 없단 말이야. 그냥 난 어릴 때부터 그 길을 가야 한다고 들어왔고 그 길 말고는 인생의 다른 길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 그런데도 내가 갈 길에 대한 확신이 없단 말이지. 주변에는 자신의 미래와 꿈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행복해 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아직도 내 미래와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한 확신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슬프고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어. 그런데 날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결국 내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그 길을 따라 걸어가게 될 것 같다는 사실이야. 나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가려고 하는 그 길에 대해 확신하고 있으니까.

  세상아, 내가 너무 큰 것을 바라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네게 부탁할 수밖에 없구나. 내가 가야할 길을 좀 보여줘. 힌트라도 줘. 제발……. 내가 이처럼 피 터지게 공부해서 대학에 간 보람이 있게 해줘. 간절한 이 소원 들어주길 바란다. 나도 노력할게.

  아, 이제는 정말 자야겠다. 머릿속의 잡다한 상념들은 깨끗이 지워버리고.


또 다른 한국의 17세 고교생, 수희

  아이씨, 재밌게 놀다가 집에만 들어오면 기분이 더러워진다니까! 저녁 7시가 넘었는데 아무도 없고 집 분위기는 침울하고……. 모처럼 용돈으로 예쁜 옷도 사와서 보여주고, 맛있는 음식도 사와서 인심 좀 쓰려고 했더니 아무도 없잖아. 이게 뭐야!

  흐흑, 흐흑…….

  눈물이 나올 건 또 뭐람. 흐흑.

  세상아,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큼 불행한 애는 또 없는 것 같아. 이게 뭐니? 뭐냐고! 넌 알지? 내가 왜 이러는지 말이야. 돈이 많으면 뭘 해? 옷 번지르르하게 입고 다니고, 어쩌다가 한번 가족이 다 모일 때 몇 십만 원짜리 밥 사먹으러 가면 뭐하냐고. 평소에는 다같이 얼굴 보기도 힘들고, 얼굴 좀 맞대고 있어도 깊은 대화도 한 번 제대로 안 하는 거, 그런 게 가족이야? 가족은 뭔가 달라야 하는 거 아니니? 요즘엔 친구가 가족보다 가깝게 느껴져. 그래도 항상, 흐흑, 항상…… 마음 한 구석이 외롭고, 흐흐흐흑……. 마, 음… 마음 한 구석이… 외로운 건 친구나 다른 사람들은 가족의 자리를 채워줄 수 없기 때문이야. 흐흑, 흐흑…….

  ……

  아휴, 이제 안 울 거야. 어쨌든 항상 이런 식이야. 내가 집에 돌아오면 누구 하나 반겨주는 얼굴이 없잖아. 다른 애들 집은 이렇지 않단 말이야. 다른 집 보면서 부러워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고 어리석기도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걸 어떻게 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있지, 내가 가끔은 거만하게 다 컸다고 으스대지만 사실 난 절대 다 큰 애가 아니야. 풋, 우습지? 갑자기 이렇게 숙이고 들어오는 것이. 어쨌든 내가 엄마하고 말다툼을 할 때면 다 큰 애처럼 행세하려고 하지만 사실 난 그렇지 않다고. 가족들에 대해 가슴 속 깊이 쌓아둔 응어리가 있어서 엄마하고 다투면 꼭 내가 제일 잘났다는 듯이 행세하게 되는 건가봐. 그런데 난 정말 아직 어려. 엄마 품이 그립고, 아빠의 손길이 그리워. 오빠도 나랑 함께 한국에 있으면서 다정하게 놀아줬으면 좋겠고…….

  난 느낄 수 있어. 내게 삶을 향한 불타는 의지나 의욕이 없다는 걸 말이야. 이게 청소년이 느낄 그럴 감정이니? 젊음을 구가하는 젊은이가 느낄 감정이냔 말이야. 이건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이나 할 소리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더 괴롭고 슬퍼! 가끔은 모든 게 못난 내 탓인 것 같아서 가슴이 쓰라리고, 또 가끔은 가족들이 날 이렇게 방치해둔 것 같아서 원망스러워.

  우리 엄마, 아빠께서는 모두 대기업에서 높은 위치에 계셔. 오빠는 미국에 유학 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들 나보고 부럽다고 하는데 난 그런 지위 따위 필요 없으니까 엄마만이라도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주신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 나의 속마음, 부모님의 속마음을 좀 깊이 공유해봤으면 좋겠어. 모든 걸 다 들어줄 수 있는 건 오직 가족뿐이거든.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가족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너무 힘들어. 가뜩이나 고등학생이 되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도 많아지고 나라는 존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잔뜩 혼란스러운데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어. 가끔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닿긴 하지만 항상 부모님은 어느 대학, 어느 과에 가서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는 식의 말씀만 반복해서 하시고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시거든. 정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그리고 너무 혼란스러워서 내 머릿속에 아주 긴 파이프가 엉켜있는 것만 같아.

  세상아, 어떻게 해야 할까? 난 이런 나의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거든. 너무 한심하고 불쌍해서. 스스로라도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출구를 찾아야만 할 것 같아. 안 그러면 난 평생을 숨 막히는 가스실 안에 있는 기분으로 살게 될 것 같아. 응?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앞의 네 사람이 세상에게 하는 말을 잘 들어보셨나요?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셨다면 분명 느끼신 바가 많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기도 할 것입니다. 감수성이 풍부하신 분이라면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세상살이가 다 힘든 것인데 무에 안타깝고 슬프냐며 무덤덤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요. ‘어머, 저거 내 얘기잖아!’하며 공감의 손뼉을 치신 분도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가졌든 간에 우리가 앞의 네 사람의 말을 듣고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고찰해보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들은 것은 비단 저 네 사람만의 목소리가 아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죠.


  대표적인 민주주의의 목표 세 가지를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 이는 사실 프랑스혁명 당시 프랑스 시민들이 내걸었던 구호이지만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최종목적으로 고착화 되었죠. 학창시절 교과서에서도 배우듯이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이룩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둘은 일종의 trade-off의 관계에 있다고나 할까요. 이러한 자유와 평등의 관계 때문에 생기는 문제도 많은데요, 그 중의 하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빈부 격차 심화입니다.

  우리는 미국을 동경의 눈길로 바라봅니다. 미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에는 ‘자유’, ‘웅장함’, ‘개방’, ‘아메리칸 드림’ 그리고 ‘세계최강국’ 등이 있을 거예요. 한 마디로 미국은 꿈의 나라인 것이죠. 그런데 정말 미국이 꿈의 나라일까요?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을 잘 듣고 미국이 정말 꿈의 나라인지 아닌지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2002년 미국 인구통계국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상위 20% 가구가 총소득의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위 20%의 가구가 총소득의 3.5%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미국은 철저히 자본주의에 입각한 나라여서 명문대학교도 성적에 상관없이 거액의 기부금만 낼 수 있다면 입학이 가능하며, 명문사립 중․고등학교의 경우에는 웬만한 중산층 자녀들도 넘볼 수 없을 만큼 비싼 등록금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상류층 사회의 벽은 높기만 해서 미국에서의 신분 상승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네요.

  이래도 미국을 ‘꿈의 나라’라고 지칭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위의 사실에서 나타난 문제들이 미국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복지제도가 아주 잘 되어있는 몇몇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하게 인정해야 할 사실을 ‘문제점’이냐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문제점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냉정한 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하류층 사람들은 고약한 운명의 덫에 걸려 사회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꾸려나가게 됩니다. 바로 제인의 삶이 그들의 삶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더러운 운명의 덫에서 빠져나오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덫은 그녀의 몸을 더욱 강하게 조이고 있습니다. 덫이 제인을 조이면 조일수록 제인의 숨은 점점 더 가빠져갑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의 삶은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하는 동물과 같은, 기계와 같은 삶일 뿐입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 현대 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 속에서 산업세계는 첨단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생산력은 증가하지만 인간 노동력의 필요성은 점점 감소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20대80’이라는 법칙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상층부 20%의 사람이 생산물의 80%를 창출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흐름에 놓여있는 사회 속에서 제인과 같이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없어 보입니다. 희망은커녕 점점 더 어두운 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과 같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녀에게 동정의 눈길을 던지는 것 이상의 아무런 일도 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신을 알고, 숭고한 정신의 세계를 맛봄으로써 자아를 실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지요. 왜냐하면 누구 하나 그녀의 짐을 덜어줄 사람도 없고, 그녀가 삶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삶은 그저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듯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오직 살기 위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가슴이 뭉클해 오시죠. 전혀 뭉클하시지 않다고요? 아이고, 불효자식이네요. 하하하, 농담이고요. 제 생각엔 나이 30을 넘기거나 자식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가슴이 뭉클해 오고, 그렇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가슴 뭉클함을 덜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인생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감정의 차이겠지요.

  여러분의 눈에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자상한 아버지, 성실한 사회인, 무뚝뚝한 남편 등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겠지요. 당신에게 있어서 어떤 아버지였는지, 사회인으로서는 어땠는지, 당신의 어머니에게 어떤 남편이었는지 더 이상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자신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자, 생소하시죠. 생각해보세요. 아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 존재 자체로서 생각해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

  생각을 해보시라고 약간의 시간을 드렸는데 질문에 답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존재 자체에 대해 생각을 해보며 안타까움이나 슬픔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자식들을 비롯한 주변인들이 아버지를 하나의 자아로 보기보다는 한 집안의 가장, 아빠, 직장 동료, 남편 등으로 본다는 사실에서부터 쓸쓸함이 전해져 오니까요. 아마 여러분 중에서 아버지의 위치에 계신 분이 있다면 더욱 그러하겠죠.

  앞에서 김씨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면 현재 삶에서 행복을 느끼시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아 마음이 아프네요.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고요. 그분이 살아오신 과정을 보면 큰 풍파도 없었고, 중산층 이상의 삶을 영위해오셨는데도 말이에요. 이런 삶의 이력을 보면 이 세상에 행복할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네요. 그런데 슬프게도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풍요로움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참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 위치에 놓여있는 4, 50대 남성들의 점점 더해가는 자살률이나 우울증 환자수의 증가가 이러한 사회 현상을 대변해주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각자의 꿈과 목표를 가지고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께서는 열심히 달려왔고 지금도 달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자기 자신만을 챙기시지 못합니다.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에 필요한 경제적 여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시죠. 그렇게 열심히 일하시는 아버지들은 가정과 일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소중한 꿈과 목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심하게 말한다면 가족을 위해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삶을 살게 된다고나 할까요. 이 세상이 다 인정해주는 한 인간으로서의 천부적 인권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아실현을 위해 몸 바쳐 무언가를 시도해보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시나요? 윌리 로먼이라는 한 남자를……. 김씨와 같은 삶을 살다가 그와 비슷한 63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주인공이죠. 생각나신다고요? 맞습니다. 윌리 로먼은 바로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한 가족의 가장입니다. 미국에서는 ‘윌리 로먼’이라는 이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된 소시민을 나타내는 보통명사가 되어버렸죠. 물론 작품 속의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된 소시민’ 그 이상의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인물이지만요. 여하튼 윌리 로먼은 김씨나 이근삼의 희극, <원고지>의 ‘아버지’와 매우 흡사한 인물입니다. 그의 삶에도 크게 부족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는 가난하지도 않았고 실업자도 아니었죠. 게다가 그에게는 헌신적인 부인과 건장한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남자답고 운동을 잘하며 인기가 많은 아들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지요. 남부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이지요? 그런데 극 중의 그는 매우 불쌍한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윌리 로먼은 60대가 된 인생의 늘그막에 와서까지 큰 부를 거머쥐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을 져버리지 못합니다. 30을 넘긴 아들들은 아직도 자리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고요. 오직 아름다웠던 과거에 대한 회상만이 그의 삶에 즐거움을 줄 뿐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과거를 떠올리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을 하고, 현실에서는 짜증과 불안이 섞인 나날을 보내지요. 하,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저는 <세일즈맨의 죽음>의 내용만 생각하면 가슴이 턱턱 막혀오면서 파도처럼 저를 무섭게 덮쳐오는 불안과 슬픔을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저의 삶 그리고 이 세상의 모습이 윌리 로먼과 그 주변인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윌리 로먼의 삶을 감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가 어떠한 이유 때문에 심각한 심리적 공황을 겪게 되는 것인지 그 근거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현대사회는 철저한 개인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사상 아래에서 운영되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철저한 자유라는 대포 속에 내던져지게 됩니다. 이는 곧 무한경쟁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합니다. 삶의 과정 속에서 매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인생의 끝에서 승리의 축포를 올리고 싶다면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냉혹한 무한경쟁 사회를 뚫고나가야 합니다. 만약 무한경쟁을 통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능력 부족으로 사회의 낙오자가 된다면 그것 또한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상의 섭리는 인간에게 있어서 큰 짐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르트르가 <겨울공화국>을 통해 말한 것처럼 이러한 현실은 근대의 프랑스 혁명, 미국독립전쟁과 같은 피 끓는 투쟁으로 얻어진 자유라는 것이 인간에게 남겨준 하나의 지독한 의무이자 형벌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눈보라 치는 겨울과 같이 냉혹한 현실 속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한 가장 정확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부(富)를 거머쥐는 것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인간의 경제적 위치는 그 인간을 평가하는 하나의 중요한 잣대가 되어버렸죠. 빌 게이츠나 삼성 이건희 회장처럼 막대한 부의 소유자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이 시대 영웅과 같이 포장하는 언론도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있는 사회 분위기에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생에 있어서 나아갈 수 있는 여러 가지 길 중에는 우리에게 부를 안겨다 줄 수 있는 길도 있고 그렇지 않은 길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전통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도자기를 굽는 데에 몸 바치는 도예가들을 보십시오. 도예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주목도 받기는커녕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술을 향한 열정을 삶의 양식으로 삼아 살아나가는 것이지요. 그들이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빌 게이츠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시장의 수요라는 것에 의해 빌 게이츠와 도예가들의 경제적, 사회적 위치가 나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물질적 기준에 의해 좌우되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히 그러한 기준에 순응하여 부를 거머쥘 수 있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대학의 과를 봐도 사회에 나가서 재산을 축적하는 데에 유용한 과, 예를 들면 법학과, 의예과, 경영학과와 같은 과들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학에서도 입학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한 학생들에게만 그러한 과에 입학하기를 허가해줍니다. 이러한 사회풍토 속에서 부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낙오자가 되기 십상입니다.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냉대 어린 눈초리와 사회적 멸시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여기까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꼬맹이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중요한 것은 생계유지와 문화생활의 영유가 가능한 경제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심리적 공황 상태로 인한 또 다른 형태의 낙오자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난해서 그런 것이 아니나 분명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있는 사회의 피해자들입니다. 그들은 온 일생을 자기 고유의 본질과 자아를 찾기 보다는 재물을 쌓고 경제력 상실로 인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뛰는 데에만 열중한 결과 그와 같은 불행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씨,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먼, <원고지>의 아버지가 이러한 희생자들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순투성이 현대사회가 낳은 희생자들이지요.

  아마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중세 시대나 그 이전의 시대에도 부가 사회적 위치를 좌우하는 데에 어느 정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당시의 아버지들도 평생 동안 생계유지와 부의 축적을 위해 일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앞에서 말한 소위 희생자들이 반드시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아닌가요?’, 라고 말입니다. 물론 근대 이전의 시대에도 부는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기여를 했고, 그 당시의 아버지들도 현대의 아버지들처럼 평생을 생계유지와 재산축적에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 이전의 시대와 이후의 시대의 차이점을 각 시대의 사회 구조에서 찾아야 합니다. 중세 시대와 그 이전의 시대에는 자유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대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운명 지어지는 사회적 계급이 있었지요. 사회적 계급이 비록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속박하기는 했어도 당시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소속감을 부여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적 계급에 순응하여 정해져 있는 길을 걸어가면 되었으니까요. 그들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져 머리를 쥐어짜고 심리적 불안을 겪어가며 힘들게 자유 선택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계급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같은 계급의 사람들과 서로 의지하며 정해진 인생의 항로를 따라갔으면 그만이었으니 자아실현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을 것이고, 자신의 계급 속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토대로 심리적 불안 따위를 겪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 현대인들에게 사회적 계급과 같이 여러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부여해줄 장치는 없습니다. 개개인은 서로 다른 사회 원자들로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철저히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근대 이전 사람들에 비해 타인에 대한 의존도가 현저히 낮은 개인적인 삶을 꾸려나가야 하다보니 자기 자신과 인생을 더욱 값지고 특별한 것으로 승화시킬 자기 개성에 따른 자아실현이 보다 절실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 사회에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하여 돈에 휘둘려 진정한 자아실현을 하는 이들이 흔치 않으니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 사람들은 이제 육체적 병이 아닌 정신적 병에 시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김씨와 같이 자신의 병과 불행의 근원을 알게 된다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삶을 살기를 멈추기 힘든 것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원천적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이 요구하는 길로 자신도 모르게 끌려갑니다. 부를 거머쥔 사람들을 부각시키는 언론에 현혹되고 경제력의 정도에 따라 은연중에 발생하게 되는 사회적 신분을 자각한 사람들은 대개 어느 수준 이상의 재산 축적을 가능케 하는 진로를 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회 풍조에 따라 물질에 현혹되어 자기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이란 미약한 존재가 초월적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불가능하다고 보아야합니다. 그들은 철저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성공을 이룩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좀 우울하지요? 그래도 우리 희망을 가집시다! 그리고 희망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합시다. 오늘부터라도 저녁에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신 아버지의 어깨를 주물러드리고 대화를 하며 아버지라는 사람을 알기 위해 노력해보세요. 결혼을 하셔서 분가를 하신 분이라면 전화도 매일하고 자주 찾아뵈도록 하세요. 자본주의의 모순에 짓눌려 개인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이룩하시지 못하신 아버지일지라도 가족과 주변인들의 따뜻한 사랑이 있다면 그 이상으로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은 또 없으니까요.


  철수의 고민에 대해서는 특별히 설명할 것이 더 없네요. 연령대가 달라 고민의 형태가 다를 뿐 그 원인은 김씨의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처럼 속세에 물들지 않고 자기가 진정 좋아하는 일을 찾아 뜨거운 열정을 불태울 용기로 가득 차 있을 때에 진로를 제대로 정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중요한 시기에 자기 본질을 찾기 위한 길이 아닌 사회적 통념과 어른들의 권유에 따라 진로를 택하게 되니 성인이 되어서 김씨와 같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른들이 좀더 열린 사고를 가지고 진실로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할 때에야 비로소 학생들이 진정으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나갈 수 있게 될 텐데 그 날이 언제쯤 올까요?


  마지막으로는 수희가 처해있는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죠. 저런, 수희는 가족의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군요. 부모님이 모두 맞벌이를 하시고, 오빠는 저 멀리 미국에 유학을 간 상태이네요. 게다가 부모님이 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계셔서 여간 바쁘신 게 아닌가보군요. 제 주변에도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청소년들이 좀 있는데 볼 때마다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답니다. 한창 가족의 보살핌과 사랑을 먹고 자랄 나이인데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말이에요.

  파편화 된 가족, 이것이 우리 시대의 현주소입니다. 물론 아직도 가족은 우리 모두의 삶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존재이죠. 그렇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편화 된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본인도 그러한 현실에 너무 익숙해져서 의식하지 못한 채로 말이죠. 이러한 현실을 그 가족들의 잘못으로 돌리고 꾸중할 수도 없습니다. 가족 구성원 간의 노력이 부족한 탓도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각자의 사정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가장 먼저 이와 같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을 사회 구조 속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대 인간 사회는 극도로 분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즉, 개인주의의 양상이 점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에 따라 사람들은 공동체 중심의 근대 이전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개인의 삶을 공동체의 가치나 이익보다 훨씬 더 중요시 합니다. 가족에게는 소홀히 하고 그만큼 자신의 일에 더욱 충실한 현대인들의 모습은 이와 같은 사고체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지요.

  이근삼의 <원고지>이나 카프카의 <변신>은 이러한 현대 사회의 파편화된 가정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원고지>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그리고 딸이 등장하는데 아들과 딸은 아버지의 지치고 힘든 모습을 보면서도 그 모습을 가볍고 경쾌하다고 표현합니다. 어머니가 피곤에 절어 누워있는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지며 돈을 찾는데 이를 본 딸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신다고 말하지요. 또한 아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은 부모가 자식들에게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올 지경입니다. 얼마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무신경하면 그리도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일까요. 또한 부모님은 자식에게 맡은 바 책임만 다하면 된다고 하는 장남의 한마디는 이기주의와 가족 구성원 간 분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가족간의 분화 양상이 <원고지>에서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변신>에서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벌레로 변해버린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업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정한 동작을 멈추지 않는 기계와 같은 삶을 사는 인간은 벌레와 같은 존재라고 풍자를 하고 있는 것인데요. 우리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이 가족의 유대관계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레고르의 여동생은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를 그의 방에 가둬놓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모습을 보기만 하면 비명을 지르거나 마구 때리며 내쫓기까지 합니다. 음식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먹든 말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레고르가 하숙생들에게까지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비추게 되자 가족들은 끝내 그를 버리기로 결심을 하지요. 끔찍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를 두고 가족들이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과연 그것이 진정 가족이 취할 행동일까요? 가족이라면 무릇 그 구성원 중 한 명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만큼 끔찍한 벌레로 변했다 할지라도 안쓰러워 해주고, 왜 그렇게 변했는가를 깊이 고민하고 걱정해주고, 먹을 것은 잘 먹나 챙겨주고, 비록 그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였다 해도 때리거나 내쫓아선 안 되며 버리는 것은 더욱 해선 안 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변신>에서 사람이 벌레로 변한 것은 물론 상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현실 세계에 대입시켜보면 한 개인이 그의 인생에서 크나큰 풍파를 겪게 되거나 나락의 길로 빠지게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비극적 상황에 처해있는 개인을 구제해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요? 절친한 친구일까요, 아니면 그를 매우 아끼는 스승일까요? 물론 그들이 강한 희생정신과 초월적 사랑으로 무장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개인을 구제해주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지요. 이럴 때에 가족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가족은 서로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집단이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헌신적 사랑을 보여주기는커녕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버리려 한 그레고르의 가족의 모습은 이기주의에 의해 파편화된 가족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 역시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주는 것을 아는 능력이며 특정한 대상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대상을 통해 이기심을 극복하는 과정이므로 그 실천은 현실에서 매일 일정 시간 훈련하고 집중하며 인내해야 하는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결국 ‘이기심’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기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가족 간의 진정한 사랑의 교류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프롬에 따르면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과 자아는 세상 앞에 분리된 고독한 실재여서 인간은 그 분리된 실존을 자각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과 비슷한 생각, 행동, 취미 등을 공유하고자 하는데 이는 곧 사랑을 함으로써 고독하고 불안한 분리된 실재로서의 자신을 더욱 완성된 개체로서 승화시키고자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주고받지 못한 사람은 극도의 외로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수희도 앞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괴롭게 토로했었습니다.

  개개인은 매우 미약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존재가 더욱 완성도 있는 개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것을 먹고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써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될 때 인간은 자신과 상대 사이의 벽을 허물고 함께 하나가 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사랑을 알고 이를 통해 상대와 합일의 경지에 이르러 본 사람이야말로 더욱더 높은 경지로 자기 자신을 고양시켜 신과의 합일까지 가능케 할 수 있게 되는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원고지>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을 현대사회 전체로 파악하여 일련의 분석과 사유를 해보았습니다.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원고지>가 담고 있는 병든 현대사회의 이면 속에서 사람들이 네루다와 같이 초월적 존재와의 교감을 통해 자기 구원을 이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의 생각의 과정에 따르면 그러한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병폐 중 하나인 빈부격차와 사회계층 간 분화의 심화 속에서 가난에 찌든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불가능하겠지요.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런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참으로 불공평하게도 말이에요.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정신적 작용을 통한 신과의 합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하지 않은 중산층 이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초월적 세계에 도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부(富)를 기준으로 평가되는 세속적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정신 수양을 통한 신과의 합일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그들의 정신은 대부분 재산을 축적하는 전략 짜기에 소진되어버릴 테니까요.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실현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저 사회 통념에 따라 자신이 선택한 길이 순전히 자신의 의사 결정에 의한 것인 줄로 착각하고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또한 현대사회에서 파편화된 가정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가족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통해 얻게 되는 소중한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합일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이상의 합일을 이룩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세상의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진리를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진리를 체득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천재’가 될 수 없나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재가 될 기회마저 박탈당하죠.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아마 세상이 운명지어준 선택받은 인간들 중 스스로를 끊임없이 갈고 닦는 노력으로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뒷받침해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들에게는 충분히 공부할 수 있는 경제적 유복함, 진리탐구와 학문 또는 예술을 중시하는 가정의 분위기, 부족함 없는 사랑, 혹은 대단한 스승이나 동료를 통해 자신의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아주 드문 기회 등이 뒷받침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그런 선택받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하며 좌절하진 마세요. 아무리 불운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인생에서 구원을 받을 일말의 기회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포착하여 유용하게 쓴다면 여러분의 삶도 높은 정신의 세계와의 합일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언제나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잃지 않는다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설사 놓친다 하더라도 그 희망과 기대 속에서 여러분의 삶은 충분히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희망!

다이모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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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읽고 기쁨에 사로잡

몇 번을 읽어도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과 감동이 전해져 온다는 것이었다. 또한 내가 전혜린에 푹 빠져 있을 그 무렵 한 친구가 <데미안>을 들고 다니며 읽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읽고픈 마음이 간절해졌다.   알을 깨야 한다. 알을 깨지 않은 새는 세상의 본질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불행한 존재일지니.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일전에 내 꿈에 대해 글을 쓸 일이 있었을 때 내가 말하고자 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법률가, 피아니스트, 배우, 정치가, 선생님 등이 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나는 나를 찾고 싶을 뿐이다. 세상에 묻혀, 집단에 묻혀 다른 이들과 동일시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끔찍하다면 끔찍하리만치 고독한 자유로부터 도피하면서까지 나 개인의 운명을 전체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 고독해야만 한다면 고독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내가 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고독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해진 것을 피부로 느끼지 않았던가. 나의 내면은 그 누구에게도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경험과 다른 사고 체계를 지니고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방식으로 내면화하는데 어떻게 내가 아닌 남을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도 아주 온전히. 가끔 뼈에 사무치도록 외로울 때면 나의 느낌과 생각을 공유해보려고 시도를 해볼 뿐이다. 내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글로 쓰고 또 글로 쓰면서…….   '자기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한 확신, 믿음으로 가득 차 그 운명을 빗겨나게 될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 운명의 길에서 결코 탈선하지 않을 수 있다. 곧 자신이 바라는 성공적인 삶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왜 실패를 하는가. 그들은 자기 운명에 대한 확고한 관념 체계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지극한 열망, 자신의 운명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을 통한 사색과 깨달음은 내 삶을 한층 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오후 내내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기숙사로 돌아올 때 나는 일반적으로 다니는 언덕길이 아닌 국궁장을 지나는 언덕길로 올라왔다. 그 길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오늘도 아름다웠다. 구불구불한 언덕길 양쪽의 나무들에서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회색빛으로 흐린 하늘에는 희미하고도 영롱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고 , 바람은 세지만 부드럽게 불고 있었다. <데미안>을 통한 기쁨에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인한 기쁨이 더해져 내 마음은 한없이 밝아졌다. 그래서 언덕을 올라오는 10분 내내 신나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더욱 좋았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넌 데미안이고 난 싱클레어라고 생각했어." 이건 사실 작년 11월 즈음에 쓴

  • 다이모니온
  • 2007-06-17
보바리 부인 - 현실과 이상의 영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주창하고도 오랜 세월이 흐른 18세기에 유럽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경시하는 고전주의, 이성제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이 일기 시작하면서 낭만주의가 불붙기 시작했다. 낭만주의는 혁명적 낭만주의와 병적 낭만주의로 나뉘는데 전자는 사회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에서 나온 것이며 후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연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을 가진 것이다. 혁명적 낭만주의와 병적 낭만주의는 그 시발점과 성격이 약간 다르기는 하나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난 새로운 이상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현실의 부조리를 넘어선 이상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는 플라톤주의의 근본적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사회 분위기를 따라 문학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이 때 생긴 것이 ‘낭만주의 문학’이다. 낭만주의 문학은 주로 기사도 정신, 남녀간의 영원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문학으로 이를 읽는 독자들에게 꿈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우리는 보바리 부인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결코 자신의 현실에 대해 완벽한 만족함을 얻지 못한다. 현실 세계란 항상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는 이데아계를, 꿈에서 그리는 모든 것들이 펼쳐지는 낭만주의의 세계를 동경해온 것이다. 인간의 이상을 동경하는 습성 때문에 이 세계의 모습은 인간에 의하여 계속 변모되어 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세계에 대하여 목말라한다. 이는 아무리 높은 이상을 추구할지라도 그 이상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면 그것은 이미 이상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에 근거를 둔다. 이러한 세상의 순리에 승복하지 못하고, 이상에 대한 꿈을 끝끝내 져버리지 못한 보바리 부인은 결국 현실에의 적응에 실패하여 자기 파멸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길   오메와 보바리 부인이라는 양극단의 삶을 산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히 현실과 낭만이 조화를 이루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꿈꾸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파멸을 피하고 각자가 소속되어있는 세상에 적응을 하기위해선 오메와 같은 현실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현실적인 사고와 생활방식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활의 안정감과 세상이 가져다주는 적절한 보상(예를 들면, 오메의 훈장과 같은)에 따른 만족감을 얻게 해준다. 그러나 현실에만 충실한 삶은 인간의 삶을 생존 원칙에 충실한 것 이상의 아름다운 삶으로 끌어올리지 못한다. 인간적 감정에 어느 정도 충실하고, 현실과는 다른 좀 더 나은 이상의 세계를 꿈꿀 수 있는 것은 일반 동물들은 누릴 수 없는,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완전하지 않은 현실에서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꿈을 꾸며 가끔은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것은 인간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 원동력이 되는 즐거움과 희망을 안겨다주기 때문이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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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재밌지도 않은 글 끝까지 읽고 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06-10-19 00:13:2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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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특히 이 글에서는 논제와 직접 관련되는 사항을 제시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글의 앞부분에서 네 개의 사례를 제시한 것은 많은 노력과 창의성, 표현력의 특출함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글의 형식적 특징에서는 삭제하고 간략히 주장에 따른 논거에 줄여 인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도 꼭 핵심이 되는 측면으로 압축해서 말입니다. 그런 아쉬움과 뒷글에서도 너무 많은 배경지식 소개도 글의 간략성 측면에서 우려가 되는 부분입니다. 조금더 압축해서 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 2006-10-18 23:39:17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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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엄청 긴 글이군요. 이 긴 글을 읽어내는 것은 거의 수도승과 같은 인내력과 선방에서 화두를 찾는 노력처럼 치열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렇게 긴 글로 자신의 관점을 지켜나가며, 많은 논거를 들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평소에 깊이 생각하고, 여러 분야의 독서를 통해 배경지식이 탄탄하게 잡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특성을 잘 알 수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드는 글입니다. 하지만, 글은 적당한 길이를 통해 알맞은 형식으로 자신의 뜻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글을 잘 쓰는 방법입니다.

    • 2006-10-18 23:34:15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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