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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없는 사나이의 회고록

  • 작성자 다이모니온
  • 작성일 2006-10-17
  • 조회수 483

(이야기글 같기도 한 글이지만 시를 보고 쓴 감상문이어서 여기에 올립니다.^^)

[논제]위의 시, <가을날>의 시적화자가 처해있는 상황을 설정하고, 자신이 그 시적화자가 되어 지난날을 회상하는 글을 쓰시오.


  학창시절에 앞으로 남은 까마득한 인생 언제 다 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벌써 6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버렸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미소가 절로 나오지만, 하나하나 떠올리며 지난 세월을 머릿속으로 훑고 지금의 나를 보자니 마음이 이토록 괴로워진다. 그래도 이제는 펜을 들어야겠다. 펜을 들어 내 인생을 정리하고, 내가 이 세상과 작별한 연후에 이것을 본 자식들이 “우리 아버지께서 이런 삶을 살다가셨구나.”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껴주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이제 60년 전으로 슬슬 거슬러 올라가봐야겠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6.25전쟁 후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다. 나의 형과 누나들, 5명은 북에서부터 부모님 손을 잡고 남으로 졸졸졸 따라 내려왔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에 내가 태어났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먹여 살릴 입은 많았으니 부모님은 나의 출생 앞에서 고민을 이만저만 하신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난 그렇게 우리 집 막둥이로 태어났다.

  밤이면 전등불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달동네 꼭대기에 자리 잡은 판잣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판자때기를 있는 대로 가져다 대어 만든 집이라 조금만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웠다. 그래도 나에겐 그 집이 지상의 낙원이었다. 부모님은 수레를 끌고 다니며 노점 장사를 하시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가셨다. 막둥이라고 부모님과 형제들은 나를 몹시 귀여워 해주었다. 당시만 해도 이가 득실거리는 세상이었는데 밤마다 우리 아버지께서 내 몸에 있는 이를 잡아주셨다. ‘톡톡’, 이 잡는 소리가 어찌나 정겹던지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행복한 미소가 떠오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난 그렇게 마냥 어린아이였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뛰어다니던 철부지 막내아들이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다. 곧게 다림질한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쓴 나의 모습을 처음 보던 날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미 결혼해버린 큰형과 큰누나도 내가 중학생이 되던 날 입학식에 와서는 “우리 막둥이도 이제 다 컸구나!”하면서 웃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착실한 중학생이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금방 벗어버렸고, 공부도 곧잘 했다. 그래도 무시무시한 선생님들의 체벌을 면할 수는 없었다. 집이 워낙 가난했던 탓에 육성회비를 때에 맞춰 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선생들의 체벌이란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그 때는 다들 그러하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엉덩이나 종아리에 시퍼런 멍이 들거나 가끔은 피가 나도록 맞았지만 난 꾀나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고 있는 평생 친구들을 만났고 공부를 잘한 탓에 선생들의 예쁨도 받았었다.

  그러나 나의 학창시절이 평탄치만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해 가을에 아버지께서 폐암으로 돌아가신 것이었다. 몸에서 이상이 느껴져 그 해 봄에 병원을 찾았을 때 아버지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고 결국 몇 달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시고 만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도통 드시지 않던 술을 드시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안 해보신 일이 없었다. 과일 장사, 식모살이, 공사판에서의 막노동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일은 다 하셨다. 그렇게 힘겹게 일을 하시고 집에 돌아오시면 반드시 소주 한 병을 안주도 없이 들이키시고는 가끔은 삶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시어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흔들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도 방황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담배를 피우고, 싸움박질을 하는가 하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폭주족과 같은 행동을 일삼기도 했다. 어머니는 하루하루 돈벌이 하시는 것만으로도 벅차셨기 때문에 그런 나에게 신경 쓰실 겨를조차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내 성적은 중하위권으로 뚝 떨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들과 몰려다니기를 일삼다가 밤에 집에 들어오면 마음 한 구석이 공허해지면서 괴로웠다.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누워있거나 잠 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즈음에 지독한 피곤에 절어버린 얼굴을 하고 들어오시는 어머니를 보면 괴로운 가슴은 더욱 쓰라렸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내가 이래서 되는 건가. 예전의 나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가. 이렇게 살아서 남는 것이 무엇이지. 친구들과 방탕을 일삼는 순간에는 배고픔도, 어두운 우리 집안일도 다 잊을 수 있지. 그렇지만 끝에 남는 것은 더욱 커져버린 괴로움과 공허함 뿐이야. 정신 차리자!’

  하루하루 괴로워하던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결심을 하고나서부터 난 다시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 오래 관계를 유지하던 친구들과 멀어지는 일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뼈저리게 후회되는 지난날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귀가도 늦게 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1년을 완벽히 허비하였기 때문에 다시 성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정말이지 잠도 얼마 자지 않으면서 공부했다. 그토록 노력한 끝에 다행히도 상위권의 성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고 3 생활을 마친 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던 탓에 대학 진학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도 스스로 경제학, 사회학 서적 등을 꾸준히 읽고 외국어를 공부하며 실력을 쌓아나갔고 덕분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다.

  기업에서 나는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고졸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내가 받을 수 있는 연봉에는 한계가 있었고, 젊은 나이에 유수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후 높은 직위에서 활약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니 내 가슴 속에서는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열정이 용솟음쳤다.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2년째 되는 해에 난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대학시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내가 모은 돈과 어머니께서 이 일, 저 일 하시면서 모은 푼돈을 합치면 대학 입학 등록금은 족히 낼만했다. 그렇게 1년을 주경야독한 끝에 나는 명문대인 A대에 진학하여 경영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 입학일은 그 당시로선 내 생애에서 최고로 기쁜 날이었다.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까닭에 나는 야간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욕심 같아서는 아예 대학 생활에 전념하면서 다른 이들과 같이 젊음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경제력을 차근차근 길러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경영학과에서 나는 마케팅 분야에 주력하여 공부하였다. 대학 3학년이 되어서는 기업에서도 마케팅 부서로 옮겨갔다. 지금까지 쌓아온 나의 실적이 인정받았다는 사실과, 경영학과 3년차에 다닌다는 사실이 맞물려 낳은 결과였다. 연봉도 올랐으며 나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생각에 아주 의욕적으로 일을 했다. 그렇게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바람에 나의 대학 4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다른 이들처럼 젊음을 불사르며 학생운동을 한 것도 아니었고,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으며,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은 바라지도 못했다. 오직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공부하기와 돈 벌기라는 두 가지 일에만 전념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기존에 다니던 기업의 마케팅 부서에서 꾸준히 일하였다. 그러던 중 난 마케팅 부서에 신입사원으로 채용된 김미연 씨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 여자는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된 여자이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내가 퍽이나 재미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난 그 여자 때문에 행복했고 여기까지 왔기에 일말의 후회도 갖고 있지 않다. 어쨌든 김미연 씨는 당차고 수수하면서도 지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였다. 처음으로 입사하던 날 부서 직원들에게 또렷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네며 환하게 웃던 그 예쁜 모습을 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녀의 자리는 책꽂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나의 맞은편에 있는 자리였다. 피곤하고 나른할 때 즈음이 되면 꼭 커피를 뽑아 주는 탓에 나는 그녀에게 더욱더 호감이 갔다. 김미연 씨는 우리 부서에 굉장히 빨리 적응했고, 나 또한 그녀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에게 새로운 감정이 찾아들었다. 정신없이 살아온 지난 세월 동안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감정이었다. 회사에 있을 때면 김미연 씨에게 자꾸만 한 마디라도 더 걸고 싶었고, 집에 있을 때면 그녀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녀 앞에서 혹여 말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밉보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행동 하나,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하게 되었다. 불현듯 ‘이것이 사랑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 속에 이는 격정적인 감정은 끝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고 나는 김미연 씨에게 기어코 데이트 신청을 하고 말았다.

  “미연 씨, 오늘 저녁에 일 없죠?”

  첫 데이트 신청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꺼낸 나의 한 마디였다.

  “저녁에요? 네, 집에 가서 쉴 것밖에는 할 일이 없어요.”

  그녀는 예의 그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대답하였다.

  “그러시다면 제가 저녁을 사고 싶은데 같이 식사나 하러 가죠.”

  “호호호, 정훈 씨가 나한테 저녁을 다 사시겠다 그러시고, 무슨 일일까요? 호호. 저야 좋죠. 그럼 일 끝나고 같이 나가요.”

  미연 씨의 마지막 말에 난 가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그 날 난 미연 씨와 저녁을 먹으며 정말 많은 얘기를 했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니 사귀고 싶다는 말을 했다. 이 글에 이렇게 옮기자니 참 단순한 일같이 보일지 모르나 처음 사랑이란 것을 하게 된 나로서는 여간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행운의 여신이 손을 들어주셨는지 미연 씨는 나의 고백에 수줍은 승낙의 표시를 해보였다. 그 당찬 얼굴을 약간 숙이고는 살며시 미소를 띠더니 이내,

  “네, 좋아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알콩달콩한 연애는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간 낯간지러운 연애가 아니었다. 회사에서 마주보고 앉은 우리는 심심하면 서로에게 지우개 따위를 던지며 즐거워했고, 부서 회식이 있을 때면 반드시 옆에 붙어 앉아 서로를 챙겨주곤 했다. 부서 직원들이 장난스레 우리를 약 올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2년간의 열애 끝에 미연 씨와 나는 결혼에 골인했다. 내 나이 29세, 미연 씨는 26세였다. 그렇게 우리는 평생 함께 걸어갈 동반자의 길에 첫 발을 내디뎠다.

  결혼 후 1년이 지나고 우리는 첫 아이, 지훈이를 낳았다. 그 자그마한 아기를 보며 우리 부부는 일종의 신비로움을 느꼈다. 아기의 귀여운 손가락, 발가락, 눈, 코, 입, 엉덩이를 보며 이것이 정말 우리의 작품인가 하는 생각에 아기를 쉴 새 없이 만지고 안고, 아기에게 사랑에 가득 찬 뽀뽀를 했다.

  첫 아이를 가지면서 아내는 직장을 그만 두었고 2년 후에 둘째 아이인 지은이를 낳았다. 나는 33살이 되었을 때 나의 20대 청춘을 모두 바친 기업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시작한 사업은 무역업이었다. 시작부터 사업이 꾀나 번성해서 나의 결혼초기 생활은 그야말로 행복의 연속이었다. 사랑스러운 아내, 귀여운 나의 아들과 딸, 그리고 내 사업. 더 이상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사업 3년차 되는 해에는 집도 한 채 마련하여 이사를 했고, 고급 승용차도 한 대 뽑았으며 내가 사업을 시작하기 직전에 일하기를 그만두고 조그마한 단칸방에서 혼자 사시고 계신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와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가지를 않았고, 고부 관계도 좋아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라고 느낄 정도였다.

  나의 앞날은 창창할 것으로만 기대했다. 사업이 더욱 번성하여 더 큰 집을 사고, 가족들과 여행도 여러 곳 다니고, 자식 교육도 최상으로 시키고자하는 욕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꿈이 이루어질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이 나를 위한 손을 들어주시지 않았다. 사업을 시작한지 5년 차에 접어들 무렵 IMF 여파가 불어 닥쳐 사업은 부도를 내고 말았다. 나 스스로에 대해, 현실에 대해 실망이 컸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난 좌절하지 않았다. 금방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난 젊었고, 아이들도 아직 어렸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38세란 나이가 나이인 만큼 여러 군데 이력서를 내도 나를 받아들여주는 곳이 좀처럼 없었다. 간신히 작은 중소기업에 취직했지만 그 회사도 몇 달 후 부도를 내고 말았다. 어렵게 취직한 회사도 부도를 낸 후 난 방황하기 시작했다. 너무도 무력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낮에는 그저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밤이면 밖에 나가서 혼자 술을 마시고는 곤드레만드레한 상태로 집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내, 핏덩이 같은 자식들, 그리고 내가 모시고 있는 어머니 생각에 골치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서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어보려고 술을 더 마시고, 담배도 더 많이 피웠다. 그럴수록 나 자신은 점점 더 황폐해져 갔다. 보다 못한 아내가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내는 학습지 선생을 하기 시작했는데,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빚을 갚기는 역부족이었다. 아이들 학원을 하나씩 등록하고, 집안 살림을 하고, 나의 술, 담배 값을 지불하다보면 아내가 벌어오는 월급만으로도 빠듯했다.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이 은행, 저 은행에서 빚 독촉 전화를 하는 통에 내 머리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을 술과 담배에 절어 살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내 바로 위엣 형님이 찾아오셔서 한 말씀 하시고 가셨다.

  “정훈아, 네 마누라도 뼈 빠져라 일하고 있는 판에 네가 이러고 있어야 되겠니. 여러 가지로 힘이 든 것도 알지만 이럴 때일 수록 이 악물고 일어나야지. 흠……. 정훈아, 노점상 일이라도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니? 일을 하면서 몇 푼 안 되는 돈도 조금씩 벌고 자신감도 되찾으면서 네가 정말로 재기할 수 있는 길을 천천히 찾아나갈 수 있을 거야.”

  형님이 가시고 난 형님의 말씀에 대해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옳으신 말씀인 것 같았다. 꼴에 공부 좀 하고 대학 좀 나왔다고 자존심 따위 내세울 필요 없다. 사람이란 무릇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형님 말씀대로 일을 하다보면 살림에 아주 조금이나마 보탬도 될 것이고, 재기하기 위한 좋은 아이디어도 떠오를 것이다. 마음의 결심이 서자 나는 일을 단행하기로 하였다. 나의 계획을 아내에게 말하자 아내는 힘든 일을 할 수 있겠냐며 걱정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이내 마지못하여 승낙하였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3주 후부터 길거리에서 신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노점상 생활이란 이만저만 피곤하고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와 있는 것이 가장 곤욕스러웠는데 손님들이 잘 찾아오지 않으니 더욱 그러하였다. 신발 몇 켤레를 간신히 팔고 라면이나 김밥 등으로 내 끼니를 때우고 나면 아내에게 쥐어줄 수 있는 돈은 많아봐야 2, 3만원이었다. 잘 안 풀리는 날에는 몇 천원 쥐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금방 재기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었다. 장사를 하려고 해도 밑천이 없으니 불가능 했고 나이가 워낙 많아 회사에 취직하는 것도 힘들었다. 신발 장사, 과일 장사, 옷 장사 등 별의별 장사는 다 해보았다. 빚을 갚기는커녕 이자가 계속해서 불어나는 바람에 빚은 늘어나기만 했다. 차압을 하겠다고 집에까지 와서 협박을 해대는데 어머니와 자식들 보기가 부끄러워 나의 마음은 심히 괴로웠다. 인생의 쓴맛이란 쓴맛은 다 볼썽 싶었다. 이렇게 힘든 생활이 계속되다 보니 다시 술과 담배를 닥치는 대로 하기 시작했다.

  부부싸움도 잦아졌다. 의도하지 않은 사소한 데서 다투기 일쑤였고, 돈 문제로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현명한 아내 덕분에 부부관계가 크게 빗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아내는 항상 대화로 풀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우리의 사랑이 물질 따위에 의해 흔들리지 않도록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을 되도록이면 많이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돈은 궁했지만 주말이면 꼭 가족이 함께 산책을 나갔으며 가끔은 아이들을 위해서 시내에 견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힘들다는 핑계로 어리석은 일만을 일삼았는데 훌륭한 아내가 있었기에 힘든 가운데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난 자식교육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배우고 싶다는 것들 다 가르쳐주고, 부족한 것 없는 환경에서 티 없이 맑은 아이들로 성장시키고자 했던 나의 꿈이 산산조각 나버리는 것 같은 느낌에 난 아이들에 대한 크나큰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제 중학생이 된 아들과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딸을 보며 나의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지기만 했다. 다행히도 큰 아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해주고 있었고, 두 아이 모두 비뚤어지는 것 없이 착하게 커주고 있었지만 부모로서는 미안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무너지면서 나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자식 문제였다.

  절망감이 엄습해오는 가운데에서도 나는 일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발로 뛰어다니며 어렵게 얻은 직장은 은행이었다. 지난날 쌓아놓은 약간의 경력과 경영학과를 졸업한 것이 유리하게 작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45세라는 늦은 시기에 은행창구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사업 실패 후 근 7년 만에 얻은 직장이어서 첫 출근 날 나는 집에 와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아들과 딸이 케이크를 하나 사가지고 와서는 조촐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어머니와 아내도 날 보며 한없이 기쁜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이제 다 잘 될 거예요. 난 당신을 믿어왔고 지금도 믿어요. 지금까지 잘 견뎌왔고 이렇게 해냈잖아요. 앞으로도 당신은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 전 확신해요. 우리 지금처럼만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며 살아요. 전 정말 당신과 아이들이 있어서 행복해요.”

  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난 북받쳐 오르는 지난날에 대한 슬픔과 현재의 기쁨에 가족들 앞에서는 처음으로 정말이지 통곡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울었다.

  그 후 나는 은행에서 60세까지 일했다. 퇴직하기 5년 전에는 사무직으로 승진하기도 했는데 난 참 운이 좋은 사내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15년이란 짧은 세월동안 빚을 다 갚지도 못했을 뿐더러 모은 돈도 그리 많지는 않지만 노후는 걱정 없을 만큼 저축해 놓았다. 지금 아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훌륭하게 사회적 역할을 해내고 있으며, 결혼을 해서 단란한 가정도 꾸리고 있다. 어머니는 재작년에 90의 연세로 운명하셨다. 자식 된 입장에서는 언제 돌아가셔도 슬픈 것이지만 꽤나 오래 사시다 가셨다.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가 더욱더 호강시켜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젊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보신 분이었다. 그래서 일을 안 하게 되신 연후에도 어머니 손을 만져보면 굳은살이 그대로 박혀있었다. 난 그런 어머니의 손을 만지기를 좋아했다. 어쨌든 이 못난 자식이 막바지에나마 안정을 되찾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다는 생각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리고 난 지금 아들이 마련해준 경기도에 있는 자그마한 단독 주택에서 아내와 조용한 삶을 누리고 있다.

  아, 이렇게 내 인생을 단 몇 페이지의 종이 위에 옮겨놓았다. 참으로 허무한 노릇이다. 글을 읽는 이들은 해피엔딩으로 끝난 인생을 보고 그렇게 초치는 소리를 해서야 되겠냐고 하겠지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나를 평생 묵묵히 바라봐주고 지지해준 아내가 옆에 있고, 장성하여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는 아들과 딸도 있다. 그리고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고요하고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내 마음속에서 허전함이 남아있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요즘은 계속 글을 쓴다. 고독함을 덜기 위한 나의 조용한 몸부림이다. 아내도 이런 나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는 듯싶다. 말하지 않아도 난 아내가 나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내 지난날을 이렇게 돌아보니 참으로 투쟁적으로 살아왔다는 말 밖에는 나오질 않는다. 이렇다할 낭만도 없었고, 저렇다할 일탈도 없었다. 지극히 평범하였다. 그런데 평화롭기 보다는 투쟁적이고 정신없는 삶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을 해보려고 몸부림치다가 실패하고,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한 것, 이런 것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 물론 내 삶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을 위해 일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한 것이기에 후회를 하지는 않는다. 내 어깨 위해 무거운 짐을 올려놓았다고 가족들을 책망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인생이란 것이 고작 이런 것밖에는 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에 허망함을 느끼는 것뿐이다. 어릴 때는 얼마나 화려한 미래를 꿈꾸었던가. 참으로 덧없었다. 내가 실패 없이 성공만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 할지라도 나의 이런 생각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든 지금 내 마음 속에는 안식처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껏 나만을 위한 삶을 단 한 순간도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여유로운 가운데 지난날을 돌아보니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에 눈이 번쩍 뜨인다. 늙은이의 이런 지혜는 왜 이리도 늦게 찾아오는 것인지……. 이미 청춘은 가버렸다. 나의 안식처를 짓기에는 너무나도 늦은 감이 있다. 이 마음이 쉴 곳이 없으니 고독한 것을 피할 방도가 없다. 나의 아내도 아마 이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저 이 고독함을 잊어보려고 현실에서 행복감을 안겨다 주는 것들에 몰두하려고 노력하지만 순간순간 엄습해오는 고독은 어찌할 수가 없다. 허허허. 그저 이제는 이렇게 글이나 쓰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에 몰두하려고 노력하면서 고독감을 조금씩 몰아내려 몸부림치며 여생을 보내야겠다. 물론 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는 깨달음을 고독을 통해 얻는 것이요, 내 자식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안식처 하나쯤은 지어 넣기를 하고 바라는 바이다.

  우리 아이들과 귀여운 손주 녀석들이 내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이 글을 보리라 생각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란 사람을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옹졸한 소망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나의 못난 삶에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스며들어 있으니 그것을 얻어감으로써 그 아이들의 인생은 좀더 나은 것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시절에 그들의 마음속에 안식처를 꾸준히 지어나감으로써 나처럼 인생 황혼녘에 고독을 느끼기 보다는 저물어 가는 노을을 볼 때의 낭만을 느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여기서 내 생애는 끝났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앞으로의 삶은 기록될 것이 없다. 그저 조용히 내 집에서 텃밭이나 가꾸며 아내와 아름다웠던 과거를 이야기하고 자식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나 보다가 그렇게 생애를 마무리 지을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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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읽고 기쁨에 사로잡

몇 번을 읽어도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과 감동이 전해져 온다는 것이었다. 또한 내가 전혜린에 푹 빠져 있을 그 무렵 한 친구가 <데미안>을 들고 다니며 읽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읽고픈 마음이 간절해졌다.   알을 깨야 한다. 알을 깨지 않은 새는 세상의 본질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불행한 존재일지니.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일전에 내 꿈에 대해 글을 쓸 일이 있었을 때 내가 말하고자 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법률가, 피아니스트, 배우, 정치가, 선생님 등이 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나는 나를 찾고 싶을 뿐이다. 세상에 묻혀, 집단에 묻혀 다른 이들과 동일시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끔찍하다면 끔찍하리만치 고독한 자유로부터 도피하면서까지 나 개인의 운명을 전체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 고독해야만 한다면 고독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내가 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고독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해진 것을 피부로 느끼지 않았던가. 나의 내면은 그 누구에게도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경험과 다른 사고 체계를 지니고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방식으로 내면화하는데 어떻게 내가 아닌 남을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도 아주 온전히. 가끔 뼈에 사무치도록 외로울 때면 나의 느낌과 생각을 공유해보려고 시도를 해볼 뿐이다. 내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글로 쓰고 또 글로 쓰면서…….   '자기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한 확신, 믿음으로 가득 차 그 운명을 빗겨나게 될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 운명의 길에서 결코 탈선하지 않을 수 있다. 곧 자신이 바라는 성공적인 삶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왜 실패를 하는가. 그들은 자기 운명에 대한 확고한 관념 체계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지극한 열망, 자신의 운명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을 통한 사색과 깨달음은 내 삶을 한층 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오후 내내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기숙사로 돌아올 때 나는 일반적으로 다니는 언덕길이 아닌 국궁장을 지나는 언덕길로 올라왔다. 그 길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오늘도 아름다웠다. 구불구불한 언덕길 양쪽의 나무들에서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회색빛으로 흐린 하늘에는 희미하고도 영롱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고 , 바람은 세지만 부드럽게 불고 있었다. <데미안>을 통한 기쁨에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인한 기쁨이 더해져 내 마음은 한없이 밝아졌다. 그래서 언덕을 올라오는 10분 내내 신나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더욱 좋았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넌 데미안이고 난 싱클레어라고 생각했어." 이건 사실 작년 11월 즈음에 쓴

  • 다이모니온
  • 2007-06-17
보바리 부인 - 현실과 이상의 영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주창하고도 오랜 세월이 흐른 18세기에 유럽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경시하는 고전주의, 이성제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이 일기 시작하면서 낭만주의가 불붙기 시작했다. 낭만주의는 혁명적 낭만주의와 병적 낭만주의로 나뉘는데 전자는 사회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에서 나온 것이며 후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연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을 가진 것이다. 혁명적 낭만주의와 병적 낭만주의는 그 시발점과 성격이 약간 다르기는 하나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난 새로운 이상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현실의 부조리를 넘어선 이상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는 플라톤주의의 근본적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사회 분위기를 따라 문학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이 때 생긴 것이 ‘낭만주의 문학’이다. 낭만주의 문학은 주로 기사도 정신, 남녀간의 영원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문학으로 이를 읽는 독자들에게 꿈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우리는 보바리 부인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결코 자신의 현실에 대해 완벽한 만족함을 얻지 못한다. 현실 세계란 항상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는 이데아계를, 꿈에서 그리는 모든 것들이 펼쳐지는 낭만주의의 세계를 동경해온 것이다. 인간의 이상을 동경하는 습성 때문에 이 세계의 모습은 인간에 의하여 계속 변모되어 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세계에 대하여 목말라한다. 이는 아무리 높은 이상을 추구할지라도 그 이상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면 그것은 이미 이상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에 근거를 둔다. 이러한 세상의 순리에 승복하지 못하고, 이상에 대한 꿈을 끝끝내 져버리지 못한 보바리 부인은 결국 현실에의 적응에 실패하여 자기 파멸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길   오메와 보바리 부인이라는 양극단의 삶을 산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히 현실과 낭만이 조화를 이루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꿈꾸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파멸을 피하고 각자가 소속되어있는 세상에 적응을 하기위해선 오메와 같은 현실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현실적인 사고와 생활방식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활의 안정감과 세상이 가져다주는 적절한 보상(예를 들면, 오메의 훈장과 같은)에 따른 만족감을 얻게 해준다. 그러나 현실에만 충실한 삶은 인간의 삶을 생존 원칙에 충실한 것 이상의 아름다운 삶으로 끌어올리지 못한다. 인간적 감정에 어느 정도 충실하고, 현실과는 다른 좀 더 나은 이상의 세계를 꿈꿀 수 있는 것은 일반 동물들은 누릴 수 없는,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완전하지 않은 현실에서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꿈을 꾸며 가끔은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것은 인간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 원동력이 되는 즐거움과 희망을 안겨다주기 때문이다. 다만,

  • 다이모니온
  • 2007-05-10
우리의 역사, 우리의 미래

(북한 핵문제 발발하기 전에 쓴 글이라 현재로서는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지만 일단 올려봅니다.^^)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 위치이다. 세계의 200개가 넘는 국가들 중에서 이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분명 선진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잠자는 사자의 등을 기어오르는 쥐 마냥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스스로를 선진국이라 일컫지 못한다. 그 까닭은 지정학 상으로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라는 세계 초강대국 사이에서 지구본에서 찾기 힘들 정도로 작은 영토를 지녔을 뿐 아니라 그 작은 규모의 국가마저 분단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이처럼 불리한 여건 속에서 현재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의 각종 역사 왜곡에 따른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지속적 발전과 밝은 비전의 수립을 위하여 양국 역사 왜곡에 대항하여야 할 때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변국 역사 침탈에 맞서기 위하여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모색해보기로 하겠다.   첫째, 사회간접자본을 하나로 묶어 남북 간 경제교류를 활성화 시켜야 한다. 남북 경제 협력체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면 북한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는 급격하게 저하될 것이다. 또한 얼마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언급하였듯이 남북 정상급 회담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남북 간의 진솔하고 끊임없는 대화만이 평화적 협력과 발전을 가능케 할 것이다. 이처럼 남북이 평화적 협력 관계를 구축해나갈 때에야 비로소 중국의 동북공정에 남북이 힘을 합쳐 더욱 신속하고 강경하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사 교육의 중요성에 대하여 역설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국사 관련 교육과정은 심히 잘못되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모든 학생들이 국사를 배우게 되긴 하지만 수능시험 과목에 있어서 역사는 사회탐구 영역의 선택과목에 불과하다. 이런 까닭에 수능시험에서 국사를 선택하지 않는 학생들은 고1 이후로 국사를 전혀 공부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 초래된다. 우리의 역사를 모르는 꿈나무들의 손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고스란히 맡겨지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역사의식이 갖춰지지 못한 국민들에게서 우리의 미래는커녕 역사 왜곡 문제조차도 맡길 수 없다. 이러한 교육과정을 개혁해야 함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중․고등학교 역사 수업시간은 교과서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역사 관련 시사문제를 다루면서 학생들이 넓은 역사적 시각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주안점을 두고 교육해야 한다. 역사 교과서만 배운 국민은 그 역사적 지식을 활용하는 데에 있어서 문외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국사를 바로 알고 역사적 지식을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로 활용할 줄 아는 국민을 필요로 한다.

  • 다이모니온
  • 200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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