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보바리 부인 - 현실과 이상의 영

  • 작성자 다이모니온
  • 작성일 2007-05-10
  • 조회수 1,415

 

  플로베르는 ‘불륜’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단순한 주제를 가지고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는 델핀느 드라마르라는 한 의사 부인이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불륜을 저지르고 자살에까지 이르자 이 사건에 착안하여 엠마 보바리라는 소설 속의 인물을 구상해낸 것이다. 플로베르가 이 소설을 쓸 당시 유럽에서는 낭만주의 문학이 성행하고 있었다. 소설 속의 보바리 부인은 낭만주의 문학에 빠져 현실을 망각한 삶을 살게 되고, 결국은 현실에서의 파멸을 불러오게 되는 인물이다. 플로베르는 이러한 보바리 부인의 인생을 통해서 냉정하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투영해 보이고 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보바리 부인이 자기 삶의 파멸을 불러오게 된 원인에 대한 깊은 분석과 인간의 삶이 행복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모색이라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그리고 보바리 부인의 파멸

  인류는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현실과 이상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는 고뇌와 갈등을 거듭해왔다. 대조되는 이 두 세계에 대한 구체적 이론을 가장 먼저 제시한 학자들 중 의 하나가 플라톤이다. 그는 [국가론]에서 세계를 현상계와 이데아계로 이분화하며 인간은 현재 모습의 현상계를 벗어나 영원불변의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계로 회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플라톤의 사상을 바탕으로 플라톤주의자들은 불완전한 현실의 무지를 벗어나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계를 추구할 것을 주장해 왔다.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주창하고도 오랜 세월이 흐른 18세기에 유럽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경시하는 고전주의, 이성제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이 일기 시작하면서 낭만주의가 불붙기 시작했다. 낭만주의는 혁명적 낭만주의와 병적 낭만주의로 나뉘는데 전자는 사회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에서 나온 것이며 후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연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을 가진 것이다. 혁명적 낭만주의와 병적 낭만주의는 그 시발점과 성격이 약간 다르기는 하나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난 새로운 이상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현실의 부조리를 넘어선 이상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는 플라톤주의의 근본적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사회 분위기를 따라 문학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이 때 생긴 것이 ‘낭만주의 문학’이다. 낭만주의 문학은 주로 기사도 정신, 남녀간의 영원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문학으로 이를 읽는 독자들에게 꿈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보바리 부인이 수도원에서 보낸 소녀시절에 푹 빠져 있던 소설들이 바로 이 때 나온 낭만주의 문학이다. 소녀 엠마는 샤토브리앙, 라마르틴, 월터 스콧과 같은 낭만주의 대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면서 소설과 같은 자신의 영원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을 꿈꾼다. 그러던 중 그녀는 샤를르 보바리와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생활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그녀는 지독한 현실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그녀가 소녀 시절 꿈꾸던 낭만적 사랑의 결정체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자상한 남편은 무능한 존재였고, 귀여운 딸은 자신을 귀찮게만 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불륜을 두 차례나 저지르게 된다. 그녀에게 불륜은 ‘불륜’이 아닌 ‘낭만’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생각은 이 책에서 묘사되는 사랑의 말이나 그들이 불륜행각이 이루어지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엠마는 로돌프에게 “나는 당신의 종이에요, 당신의 첩이에요! 당신은 나의 임금님, 나의 우상이에요!”라고 말하고, 로돌프는 엠마에게 “부인은 내 마음속에서 받침대 위에 높이 모셔 놓은 마돈나처럼 높고 확고하고 때 묻지 않은 깨끗한 곳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살기위해 부인이 꼭 필요합니다.”라는 낭만소설에서나 볼법한 사랑의 언어를 열거한다. 플로베르는 불륜의 현장을 엠마와 같은 시각에서 낭만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허무맹랑한 꿈에 젖어있는 한 부인이 저지르는 불륜의 수치스러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시간도 잠시뿐이었다. 자신이 낭만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불륜을 저지르던 보바리 부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이 아닌 다른 두 남자와의 사랑 또한 자신이 꿈꾸던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간다. 활활 타오르던 사랑의 불꽃은 점점 사그라져 갔으며 결혼생활에서와 같은 권태가 찾아온 것이다. 이에 따라 보바리 부인은 삶 전체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되고, 그녀의 정신은 병들어 간다. 이와 동시에 늘어나는 빚으로 물질적 파산까지 맞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보바리 부인은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내리고 만 것이다.

  우리는 보바리 부인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결코 자신의 현실에 대해 완벽한 만족함을 얻지 못한다. 현실 세계란 항상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는 이데아계를, 꿈에서 그리는 모든 것들이 펼쳐지는 낭만주의의 세계를 동경해온 것이다. 인간의 이상을 동경하는 습성 때문에 이 세계의 모습은 인간에 의하여 계속 변모되어 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세계에 대하여 목말라한다. 이는 아무리 높은 이상을 추구할지라도 그 이상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면 그것은 이미 이상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에 근거를 둔다. 이러한 세상의 순리에 승복하지 못하고, 이상에 대한 꿈을 끝끝내 져버리지 못한 보바리 부인은 결국 현실에의 적응에 실패하여 자기 파멸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길

  보바리 부인의 파멸을 보면서 우리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인간적 갈등을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길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

  [보바리 부인]에는 ‘오메’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부와 명예를 좇는 기회주의자로 보바리 부인과는 대조적으로 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우리는 보바리 부인이 지나친 낭만주의적 망상에 의한 자기 파멸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 보바리 부인과 대치되는 인물인 오메의 삶은 과연 옳았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메는 인간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자신이 얻게 되는 득실을 치밀하게 계산한다. 그는 보바리 부인이 자신의 가게에 있던 비소를 먹고 죽게 되자 그녀가 바닐라 크림을 만들면서 비소를 설탕으로 잘못 알고 넣어 일이 벌어졌다고 알리고 다닌다. 또한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는 자신의 명예욕을 불태우며 훈장을 손에 넣기 위한 무서운 노력을 감행한다. 이러한 그의 삶과 보바리 부인의 삶을 비교해 보았을 때 현실적, 과대 망상적 삶이란 구분 외에도 허위로 가득 찬 삶과 보다 진실한 삶이란 구분 또한 가능하다. 오메는 현실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성공하기 위한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보바리 부인에게 있었던 인간적 감정에 대한 솔직함과 그에 따른 삶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메와 보바리 부인이라는 양극단의 삶을 산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히 현실과 낭만이 조화를 이루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꿈꾸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파멸을 피하고 각자가 소속되어있는 세상에 적응을 하기위해선 오메와 같은 현실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현실적인 사고와 생활방식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활의 안정감과 세상이 가져다주는 적절한 보상(예를 들면, 오메의 훈장과 같은)에 따른 만족감을 얻게 해준다. 그러나 현실에만 충실한 삶은 인간의 삶을 생존 원칙에 충실한 것 이상의 아름다운 삶으로 끌어올리지 못한다. 인간적 감정에 어느 정도 충실하고, 현실과는 다른 좀 더 나은 이상의 세계를 꿈꿀 수 있는 것은 일반 동물들은 누릴 수 없는,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완전하지 않은 현실에서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꿈을 꾸며 가끔은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것은 인간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 원동력이 되는 즐거움과 희망을 안겨다주기 때문이다. 다만, 보바리 부인과 같이 현실을 철저히 무시한 채 감정과 꿈에만 충실하게 될 경우, 삶의 희망과 즐거움을 얻게 되기보다는 꿈속에서 존재해오던 아름다운 세계에 다가가려고 할수록 희망의 세계도 결국 현실과 같은 권태와 지루함만을 안겨주게 될 뿐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내면의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보바리 부인은 일상에서 얻을 수 없는 낭만의 세계에서만 행복을 찾으려고 하였다. 오메는 인간적인 감정을 베풀거나 내면의 덕을 쌓음으로써 오는 행복보다는 명예나 훈장과 같은 가시적인 것으로부터의 행복만을 갈구하였다. 이 둘은 그 성격이 조금은 다르지만 이상의 세계라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환경의 조성, 명예나 부와 같은 내면적이기 보다는 외부적인 요인으로부터만 행복이 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떠한 외부적인 요인도 인간에게 본질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보바리 부인이 꿈꾸던 낭만의 세계는 현실 속에서 더 이상 낭만의 세계가 아니었으며, 오메는 명예와 부를 손에 넣게 되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명예와 부를 갈망하였다.

  보바리 부인이나 오메와 같이 외부적 요인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삶의 습성은 현대인에게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이러한 현대인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 프롬에 따르면 현대 산업사회는 사람들을 ‘그가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데 이와 같이 ‘소유(Haben)’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은 사람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하도록 만든다. 또한 그는 인간은 소유를 추구함으로써 무력감과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불행히도 소유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어 소유에의 추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하면서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하여 ‘존재(Sein)’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프롬의 말 속에서 직접적으로는 오메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존재’보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조건에 집착하는 보바리 부인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문제점에 대한 해답은 ‘존재’, 즉 인간의 내면에의 집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베트남의 승려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 스님 또한 그의 저서 [힘]에서 ‘천국은 관념이 아니다. 이 삶 너머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다면, 미래의 그 어디에서도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라. 그리고 나면 많은 것이 달라 보일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좀 더 많은 힘과 자유, 행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틱낫한 스님 또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내면에 귀를 기울인다면 삶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나타낸다. 보바리 부인은 틱낫한 스님이 말하는 행복의 자세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자상한 남편이나 귀여운 딸이 있었고 그녀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일상과 그녀 자신의 내면에서 행복을 찾았다면 결코 파멸은 없었을 것이다. 오메의 경우에도 자신의 명예와 부에 대한 욕망을 제한하고 좀더 소박한 일상이나 좀더 진실한 인간관계를 통한 내면의 덕을 쌓는 데에서 즐거움을 찾았다면 끊이지 않는 욕망으로 삶의 행복을 찾지 못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의 적응과 이상을 향한 꿈이 조화를 이루는 삶, 내면으로부터, 소박한 일상으로부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끊임없는 욕망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플로베르가 단순한 불륜 사건에 착안하여 쓴 이 소설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근본적 고민인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갈등과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통해 인간이 행복한 삶을 꾸릴 수 있는 방향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해볼 수 있었다. 인간은 태초부터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적인 감정을 지니고 미래나 이상을 꿈꿀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런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근본적 갈등을 낳은 것이다. 지나친 이상주의나 낭만주의에 빠져 현실을 망각하면 보바리 부인과 같이 자기파멸을 불러오게 된다. 반면, 인간적 감정이나 그에서 비롯되는 인간 간의 진실의 교류 등을 무시한 채 지나친 현실주의를 추구할 경우 인간은 결국 고독과 허무의 늪으로 추락해 영원히 만족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성과 감성을 적절히 조화시켜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이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통해 삶의 원동력을 얻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법정스님은 ‘참다운 행복을 찾는 길’이라는 주제로 한 법회에서 “자동차, 좋은 가구, 권력 등에 대한 욕망들은 막상 갖게 되면 한동안 행복할진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시들해진다. 이들은 덧없는 것들이고, 늘 변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이 다음에 이루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보바리 부인이나 오메처럼 지금 이 순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하는 것을 손에 쥐기 위한 분투에만 혈안이 되어있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모든 조건들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되면 결국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다운 꿈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고루한 것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꿈을 가지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과 자기 자신의 내면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 때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다이모니온
다이모니온

추천 콘텐츠

<데미안>을 읽고 기쁨에 사로잡

몇 번을 읽어도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과 감동이 전해져 온다는 것이었다. 또한 내가 전혜린에 푹 빠져 있을 그 무렵 한 친구가 <데미안>을 들고 다니며 읽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읽고픈 마음이 간절해졌다.   알을 깨야 한다. 알을 깨지 않은 새는 세상의 본질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불행한 존재일지니.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일전에 내 꿈에 대해 글을 쓸 일이 있었을 때 내가 말하고자 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법률가, 피아니스트, 배우, 정치가, 선생님 등이 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나는 나를 찾고 싶을 뿐이다. 세상에 묻혀, 집단에 묻혀 다른 이들과 동일시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끔찍하다면 끔찍하리만치 고독한 자유로부터 도피하면서까지 나 개인의 운명을 전체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 고독해야만 한다면 고독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내가 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고독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해진 것을 피부로 느끼지 않았던가. 나의 내면은 그 누구에게도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경험과 다른 사고 체계를 지니고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방식으로 내면화하는데 어떻게 내가 아닌 남을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도 아주 온전히. 가끔 뼈에 사무치도록 외로울 때면 나의 느낌과 생각을 공유해보려고 시도를 해볼 뿐이다. 내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글로 쓰고 또 글로 쓰면서…….   '자기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한 확신, 믿음으로 가득 차 그 운명을 빗겨나게 될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 운명의 길에서 결코 탈선하지 않을 수 있다. 곧 자신이 바라는 성공적인 삶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왜 실패를 하는가. 그들은 자기 운명에 대한 확고한 관념 체계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지극한 열망, 자신의 운명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을 통한 사색과 깨달음은 내 삶을 한층 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오후 내내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기숙사로 돌아올 때 나는 일반적으로 다니는 언덕길이 아닌 국궁장을 지나는 언덕길로 올라왔다. 그 길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오늘도 아름다웠다. 구불구불한 언덕길 양쪽의 나무들에서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회색빛으로 흐린 하늘에는 희미하고도 영롱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고 , 바람은 세지만 부드럽게 불고 있었다. <데미안>을 통한 기쁨에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인한 기쁨이 더해져 내 마음은 한없이 밝아졌다. 그래서 언덕을 올라오는 10분 내내 신나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더욱 좋았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넌 데미안이고 난 싱클레어라고 생각했어." 이건 사실 작년 11월 즈음에 쓴

  • 다이모니온
  • 2007-06-17
집이 없는 사나이의 회고록

  • 다이모니온
  • 2006-10-17
우리의 역사, 우리의 미래

(북한 핵문제 발발하기 전에 쓴 글이라 현재로서는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지만 일단 올려봅니다.^^)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 위치이다. 세계의 200개가 넘는 국가들 중에서 이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분명 선진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잠자는 사자의 등을 기어오르는 쥐 마냥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스스로를 선진국이라 일컫지 못한다. 그 까닭은 지정학 상으로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라는 세계 초강대국 사이에서 지구본에서 찾기 힘들 정도로 작은 영토를 지녔을 뿐 아니라 그 작은 규모의 국가마저 분단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이처럼 불리한 여건 속에서 현재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의 각종 역사 왜곡에 따른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지속적 발전과 밝은 비전의 수립을 위하여 양국 역사 왜곡에 대항하여야 할 때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변국 역사 침탈에 맞서기 위하여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모색해보기로 하겠다.   첫째, 사회간접자본을 하나로 묶어 남북 간 경제교류를 활성화 시켜야 한다. 남북 경제 협력체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면 북한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는 급격하게 저하될 것이다. 또한 얼마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언급하였듯이 남북 정상급 회담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남북 간의 진솔하고 끊임없는 대화만이 평화적 협력과 발전을 가능케 할 것이다. 이처럼 남북이 평화적 협력 관계를 구축해나갈 때에야 비로소 중국의 동북공정에 남북이 힘을 합쳐 더욱 신속하고 강경하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사 교육의 중요성에 대하여 역설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국사 관련 교육과정은 심히 잘못되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모든 학생들이 국사를 배우게 되긴 하지만 수능시험 과목에 있어서 역사는 사회탐구 영역의 선택과목에 불과하다. 이런 까닭에 수능시험에서 국사를 선택하지 않는 학생들은 고1 이후로 국사를 전혀 공부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 초래된다. 우리의 역사를 모르는 꿈나무들의 손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고스란히 맡겨지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역사의식이 갖춰지지 못한 국민들에게서 우리의 미래는커녕 역사 왜곡 문제조차도 맡길 수 없다. 이러한 교육과정을 개혁해야 함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중․고등학교 역사 수업시간은 교과서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역사 관련 시사문제를 다루면서 학생들이 넓은 역사적 시각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주안점을 두고 교육해야 한다. 역사 교과서만 배운 국민은 그 역사적 지식을 활용하는 데에 있어서 문외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국사를 바로 알고 역사적 지식을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로 활용할 줄 아는 국민을 필요로 한다.

  • 다이모니온
  • 2006-10-16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물처럼

    다만 문장표현에서는 조금 신경을 쓰실 분이 옥의 티처럼 남았습니다. 일본식 어법이 들어간 어색한 표현이 많군요. 예를 들면 ' 인간의 내면에의 집중'과 같은 문장은 '인간의 내면을 향한 집중'으로 쓰고, ' 현실에의 적응'이란 표현도 '현실에 적응하기'와 같은 형태로 부드러운 표현을 썼으면 합니다. 발음하기도 많이 불편한 점도 문제가 있다고 보아 조언합니다.

    • 2007-05-21 00:09:32
    물처럼
    0 /1500
    • 0 /1500
  • 물처럼

    하지만 그 글들은 엄청나게 성의가 가득고 치밀한 글이었습니다. 논제를 뽑아주신 분이 선생님이었고, 이런 책을 읽으며 사유의 넓이와 깊이를 이렇게까지 끌어올 수 있게 지도하는 선생님이 계시다면 정말 그 선생님은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이모니온'이 스스로 생각해 본 거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겠지요. 앞으로도 건필 바랍니다.

    • 2007-05-21 00:07:10
    물처럼
    0 /1500
    • 0 /1500
  • 물처럼

    플라톤의 '현상계와 이데아계'를 이끌어오고, 오메와 보봐리 부인의 삶에 대해서 요약하고, 비교 대조하며 분석하고 평가하고, 에리히 프롬의 ‘소유(Haben)’와 ‘존재(Sein)’의 논리로 연결하여 다시 확대하여 평가하고, 틱낫한 스님의 [힘]이라는 책과 법정스님의 법어까지 모두 끌어와서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통합논술적인 사고가 매우 잘 잡힌 글이어서 매우 칭찬합니다. 여태까지 올린 글들이 논술문제를 학교에서 공부하는 과정에서 답안을 쓴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 2007-05-21 00:02:01
    물처럼
    0 /1500
    • 0 /1500
  • 물처럼

    예외 없이 모든 학생의 글에 댓글을 달려고 하는 제 원칙이 무너진 경우가 있었군요. 미안합니다. '보바리 부인 -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줄다리기'라는 이 글은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성과 감성을 적절히 조화시켜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이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통해 삶의 원동력을 얻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라는 메시지가 중요내용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어쩌면 이런 명제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그와 같은 명제를 구체화 해가는 전략이 매우 훌륭합니다.

    • 2007-05-20 23:56:20
    물처럼
    0 /1500
    • 0 /1500
  • 물처럼

    500 우리의 역사, 우리의 미래 [1] 다이모니온 2006.10.16 490 개인이 아닌 세상에게 물어보라 [3] 다이모니온 2006.10.11 463 '달'이냐 '6펜스'냐 [6] 다이모니온 2006.09.25 456 느림의 철학(밀란 쿤데라의 '느림'을 읽고) [5] 다이모니온 2006.09.19 그 글 하나 하나가 모두 정성과 실력이 가득 담긴 글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503번글은 상상력이 풍부한 글인데 제가 불찰로 댓글도 안달았던 적이 있었군요.

    • 2007-05-20 23:54:01
    물처럼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