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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여름의 냄새>,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 비평

  • 작성자 몽포르
  • 작성일 2009-09-29
  • 조회수 697

 

청춘, 여름의 냄새


소년에게서는 여름 냄새가 난다. 결코 시들지 않을 것만 같은 녹읍의 찬란함, 저 하늘 위에 붙박여 사람들 모두를 집어삼킬 듯이 작열하는 태양의 패기, 한낮에는 프라이팬마냥 뜨겁게 달궈졌다가 저녁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식어버리는 거리의 변덕까지, 소년은 정말이지 여름을 닮았다. <올모스트 페이머스>는 그러한 ‘소년의 계절’ 중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온기가 온 세상 가득히 팽배해 마치 터져버릴 것만 같은 말복 무더위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붉은색과 초록색이 엉겨 붙어선 서로 떨어질 줄을 모르는 오묘한 여름의 자태, 소년은 마음속에서 작열하는 청춘의 태양과 마주하고 그 아름다운 이미지들에 현혹되고야만다. 소년은 주저 없이 총천연색의 인생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삶에 있어서 계산적이기보다는 무뎌지는 것. 바라는 무언가를 위해 맹목적으로 자신을 혹사시킬 수 있는 것. 그렇기에 소년이고, 여름이다.


1973년, 전 세계가 기타 반주에 맞추어 몸을 부비고, 십자가 대신에 피크를, 교회 대신에 콘서트 장을, 주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비틀즈를 숭배하던 그 시절. 젊은이들의 문화권이 로큰롤을 중심으로 하여 응집되던 그 환락의 시공간 속에서, 윌리엄은 마찬가지로 록 스타들의 LP판을 바이블로 여기며 뜻 모를 경외심을 품던 평범한 10대의 소년이다. 다만 그는 여타 그루피들과는 달리, 마약과 섹스를 즐겨하지 않으며 단지 음악을 듣고 그에 대한 글을 작성하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찮게 그의 글들이 유명 음악잡지의 편집부에 눈에 띄게 되고, 곧이어 신인 밴드인 ‘스틸 워터’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줄 것을 요구받는다. 운 좋게도 취재에 돌입한지 하루만에 ‘스틸 워터’의 멤버들은 큰 거부감 없이 윌리엄을 친구로서 맞아들인다. 그 이후에 그들과 함께 미국 전역을 누비면서 경험하게 되는 로큰롤 세계의 쾌락주의적인 일면들. 소년은 물밀듯이 쏟아져오는 신세계의 광풍 속에 휩쓸리면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로큰롤의 열성팬을 자처하는 매력적인 소녀, 페니 베일과 만나게 된다. 이렇듯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서사는 얼핏 보아, 여타 다른 성장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제공했던 보편적인 영화적 노선에 크게 편승한 듯이 보인다. 아직까지는 사회적으로 미숙한 소년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빠져나와 보다 넓은 세상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게 되면서 느껴지는 일종의 만족감과 혼란, 그리고 그 와중에 이성에 눈을 뜨게 되는 사춘기적 멜로드라마의 진행방식은 실상 매우 고리타분하고도 전형적인 것이다. 설사 로큰롤이란 음악적 아이템을 이에 접목시켰다 하더라도, 이러한 차용은 <벨벳 골드마인>과 묘한 기시감을 이루며 고유의 신선함을 퇴색시킨다. 허나 이러한 판단은 텍스트의 가장 기초적인 골격만을 파악하고 내리게 되는 관객들의 어리석은 속단에 불과하다.


윌리엄이 밴드 ‘스틸 워터’와 미국 전역을 누비면서 스쳐지나가는 세상은, 섹스와 마약으로 점철되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갖가지 쾌락을 종용하고 있지만, 결코 타락과 절망의 깊은 딜레마에 빠져있지는 않다. 록 밴드와 그들을 숭배하는 무수한 열성팬들은, 불투명한 미래 따위는 제쳐둔 채, 현재의 삶을 즐기면서 스스로를 마음껏 치장시킨다. 누군가는 여자들과 호텔방을 나뒹굴며 성적 판타지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주저 없이 환각제를 들이키거나 연신 대마초를 피워대면서 자신의 온전한 정신을 괴롭히는 등, 로큰롤의 삶에는 불확실한 내일 대신에 지금 발 디디고 서있는 선명한 오늘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실상 <벨벳 골드마인>의 그것과 무척이나 흡사한 구석이 있지만, 한 가지 크나큰 차이점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모든 서사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밴드 ‘스틸 워터’는 분명코 유능한 뮤지션들이긴 하나, <벨벳 골드마인>에서 전 세계를 풍미했던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장하는 ‘브라이언 슬레이드’와는 달리, 아직 결성된 지 채 얼마 되지 않은 풋내기들이다. 그렇기에 <올모스트 페이머스>에서는 청춘의 고뇌나 고된 세월의 맞바람을 견디어 내느라 울부짖는 짐승의 비애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기나긴 삶의 여정에 첫걸음을 내디딘 자들의 곁가지에서 피어난 저 싱싱한 나뭇잎들, 현재를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킬 수 있는 저 무모함, 그리고 여름 냄새만이 존재할 뿐이다. 록 저널리스트의 허울을 뒤집어 쓴 윌리엄이나, 스스로를 밴드 에이드라 일컫는 페니 베일에게마저도 이러한 향내가 온몸 구석구석에 깊숙이 배어있다. 그들은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사실상 모두가 하나같이 성장하고 있는 소년들이다. 물론 밴드 멤버들 간에 벌어지는 소소한 갈등이나, 페니 베일을 둘러싼 일종의 삼각관계가 암묵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이 그들의 삶 전체를 뒤흔들 만큼의 격정적인 형태를 하고 있지는 않다. <벨벳 골드마인>이 정점에 오른 록 스타의 비애와 환멸을 그려낸 작품이라면, <올모스트 페이머스>는 바로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들어선 입구에서 느끼는 설레임과도 같은 작품이다. 열정을 위한 소년들의 앳된 몸놀림이 영화 포커스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러한 청춘의 계절 속에서도 뜻 모를 아련함과 서글픔이 묻어나오게 마련이다. 여름은 분명코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찬란한 계절이지만, 때로는 치솟는 온도 때문에 잠을 뒤척이거나,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괜스레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심지어 갓 출발선에서 비어져 나온 마라토너조차도 발을 헛디뎌서 주춤하거나 넘어질 수도 있다. <올모스트 페이머스>속에서 청춘의 언어를 입에 문 소년들은 때때로 현실을 왜곡한다.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이러한 불찰은, 소통에 대한 단절에 근거하고 있다. 윌리엄은 오로지 취재 활동에만 전념하게 되면서 홀로 남은 자신의 어머니를, ‘스틸 워터’의 리더이자 영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삼각관계의 발로인 러셀은 팽배하는 쾌락주의에 휩쓸려 그의 연인인 페니 베일을, 일종의 히로인 역할을 자처하는 페니 베일은 오로지 ‘스틸 워터’의 발자취만을 뒤쫓아 다니면서 자신의 진정한 목표점을, 무의식적으로 경시하고 있다. 사실상 그들이 폐쇄시켜버리는 소통의 공간은 이보다 비교적 다양한 층위를 지니고 있다. 섹스와 마약에 놀아나느라 윌리엄의 인터뷰에 진심을 담은 이야기를 내뱉지 못한 러셀의 에피소드 또한 마찬가지의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로큰롤이란 특정한 장르적 매체로 상정되는 1974년의 풍경은, 사실상 일종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통렬한 기타의 선율을 뿜어내며, 삶의 애환을 부르짖는 뮤지션들은 분명코 로큰롤이란 음악 장르가 자신들의 삶 자체로서 귀결되지만, 그들이 무대나 음반을 통해 선보이는 창작물 내지는 퍼포먼스에 열광하며 로큰롤이란 여과기에 걸러진 스타일들을 끊임없이 재생산시키는 대중들의 경우, 로큰롤은 삶 자체라기보다 일종의 소비 매체, 즉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대중들이 이러한 사실을 호도하고, 로큰롤이라는 장르 자체를 현실화시키고 자신의 인생과 마침내 유리될 때, <올모스트 페이머스>속에 잠재된 일종의 비극적 장치가 작동된다. 물론 러셀은 ‘스틸 워터’를 이끌고 있는 뮤지션이지만, 그 또한 음악 자체의 가치 대신에 그것의 곁가지인 쾌락주의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될 경우, 마찬가지의 파국을 맞는다. 이것은 단지 로큰롤의 세계에서만 적용되는 논리만은 아니다. <올모스트 페이머스>는 대중 매체나 칼럼 몇 줄에 혹하여 쉽사리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는 무지한 청춘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진혼곡과도 같은 영화다. 이러한 성향은 여타 다른 성장 영화들과는 차별화되는 소통 방식이다. 청춘의 언어를 토해내는 많은 작품들이 단지 관객들의 마음속을 휘젓는 불쏘시개의 역할에만 그쳤다면, <올모스트 페이머스>는 작열하는 청춘의 불꽃과 젊은이들 간에 벌어지는 괴리감을 로큰롤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내재화시키는 독특한 풍미를 지녔다. 여름의 녹읍과 햇살에 취해 온종일 바깥만을 쏘다니거나, 후덥지근한 공기가 꺼려져 집구석에만 쳐 박혀있는, 청춘의 양극단에 서있는 자들 모두를 포섭할 수 있는 활용도 높은 텍스트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한 가지 환기해야할 점은, <올모스트 페이머스>가 관객들을 위해 연주하는 청춘의 진혼곡이 결코 비애감에 젖어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오로지 성장하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소년을 위한, 소년에 의한, 소년의 영화이다. 허울뿐인 청춘의 종말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경종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 전반의 분위기는, 설사 그것이 삶에 대한 괴리감을 역설하고 있다 하더라도, 설레임에 대한 감정을 끝까지 유지시킨다.


로큰롤에 심취된 젊은 영혼들은 끊임없이 방랑하고 서로 뒤엉키면서, 결코 이별은 생각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새 거리 구석구석 가득히 내려앉은 햇살은 시원한 바람에 휩쓸려 내년을 기약하고 우리 곁을 떠나버리기 마련이다. 짙은 푸르름으로 우거졌던 녹읍의 풍경 또한 어느새 울긋불긋한 낙엽으로 뒤덮인다.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이별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윌리엄과 그의 친구들은, 쾌락으로 점철된 자신들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어느새 하나 둘씩 현실 세계로 비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러셀은 그러한 와중에 페니 베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다시금 그녀를 찾는다. 페니 베일이 전화로 일러준 주소만을 쥐어들고 한걸음에 내달려온 러셀. 그러나 그녀는 오래전부터 기약했던 모로코 여행을 떠난 지 오래고, 주소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윌리엄의 집이다. 윌리엄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러셀에게 무심코 묻는다. “음악의 어떤 점이 좋아?” 러셀은 주저 없이 대답한다. “모든 게 좋아.” 섹스와 마약이란 허울을 걷어내고 그들에게 남은 진실 된 이야기. 마침내 오늘을 위한 삶과 절연하고, 찬란했던 여름과 이별한다고 해도,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분 좋은 여름 냄새는 영원토록 옷깃에 배어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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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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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포르
  • 2010-09-13
레버로프 님, 답변 드립니다.

(댓글로 답변을 드릴까하다가, 조금 장문의 글이 될 것 같아서 이 글로 대체합니다. 앞서 이 글은 레버로프 님의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반박의 형식으로 서술되었음을 밝혀둡니다.) “나는 불의를 타파하기 위해 불의와 타협한다.” 그럴싸해 보이는 외양을 지녔지만, 사실상 명백한 언어도단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러한 저열한 논리에 입각해 대한민국을 폐허로 만들어왔던 숱한 중도주의자들을 너무도 많이 목격해왔습니다. 불의는 타협할 수 없기 때문에 불의입니다. 재차 언급하지만, 과거 참여정부가 개혁이라는 번듯한 옷차림새를 하고 민중들에게 들이밀었던 서슬 퍼런 칼날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참상입니다. 보수 언론의 부패와 지역주의를 뿌리 뽑겠다던 그들의 개혁바람은 ‘국익을 위한 끊임없는 타협’들 속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로,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파병전략으로 덧없이 추락해갔습니다.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한때 민족해방과 노동해방을 부르짖던 7,80년대의 민주화 세대들은 87년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성립되고, 그로인해 중산층들의 삶이 개선되자, 곧바로 그들의 정치적 슬로건들을 의식 저편으로 걷어치우고 좌파 정적주의로 돌아섰습니다. 불의를 타파하기 위해 불의와 타협할 수 있다는 허망한 논리가 실증할 수 있는 역사란 결국 이러한 악순환들뿐입니다. 중도주의는 수차례 좌초되었고, 그러한 과정들이 남긴 것은 정치적 무관심과 팽배한 이기심뿐입니다. 그들의 개혁은 다름 아닌 개뼈에 불과합니다. 혁명은 그 위에 자본과 권력의 야욕이 분칠되는(혹은 이에 귀속되는) 순간부터 낡고 헤진 것으로 전락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중도의 덫이자 그것을 표방하는 이들에게 남겨진 최대의 함정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도권 내에 편입된 이들(혹은 그러기를 욕망하는)이 개별적으로 간직한 혁명의식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무척이나 회의적입니다. 레버로프 님이 주장하시는 순응에의 변화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재의 부조리한 체제에 편승하여, 훗날 그 체제의 고위직에 올라 세상을 바꾸면 된다는 부분은 어느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늘어놓는 궤변들만큼이나 비현실적입니다. 그러한 차선을 택한 이들이 자신들의 혁명의식을 품고 걸어갈 가시밭길이 너무도 험준하고 아득하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이 적용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기득권 세력들은 끊임없이 제 자식들을 엘리트들로 재생산시키고, 그로인해 자본과 권력을 세습합니다. 우리가 승자독식체제에 편승하여 고위직 인사를 차지하기 위해 겨뤄야할 상대는 엇비슷한 가정환경의 아이들, 즉 개천에서 헤엄치는 올망졸망한 올챙이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이미 그러한 조건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선택받은 이무기들입니다. 물론 간혹 올챙이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고작해야 인문계 고등학교 정문에 입학철만 되면 내걸리는 ‘명문대 합격자 명단’ 따위의 팸플릿으로나 기억되겠지요. 왜

  • 몽포르
  • 201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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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이 정점에 오른 록 스타의 비애와 환멸을 그려낸 작품이라면, 는 바로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들어선 입구에서 느끼는 설레임과도 같은 작품이다. 두 작품 다 빛나는 청춘들의 자기 정체성 찾기에 관한 서사적 내용이 주로 담겨있는 영화로군요. 음악과 춤, 환락적인 일탈의 축제 등이 어우러져 참으로 풍성한 볼거리를 주는 영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 개의 작품을 비교해가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대비하여 주장을 펼쳐나가는 점이 독자의 이해를 잘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 2009-10-09 17:08:10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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