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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수업」을 보고

  • 작성자 silmshady
  • 작성일 2009-11-14
  • 조회수 408

(연극)「수업」을 보고

 

 연극 대본을 보는 것과 직접 연극공연을 관람하는 것. 이 둘은 어느 차이가 있는가. 사람들은 흔히 연극 대본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연극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상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극은 분명 공연예술이다. 일반적인 문학처럼, 활자로 느낄 수 있는 감정과 다른, 연극만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무대 배경, 배우들의 손짓, 시작 전에 흘러나오는 음악 등, 연극은 건축물과도 같아서(모든 예술이 그러하겠지만) 많은 예술적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하나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단순히 활자화 된 대본보다는, 종합예술 본연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연극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족이 길어졌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연극「수업」줄거리는 간단했다. 지식을 갈망하는(극 중에선 종합박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한 소녀가 선생의 집에 찾아온다. 가정부가 소녀를 맞이하는데, 위층에서는 망치질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선생이 등장하고, 선생과 소녀는 수업을 시작한다. 먼저 이들은 수학을 배운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소녀는 기본적인 연산능력도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선생은 인자한 태도로, 소녀에게 1+1은 2가되고, 1+2는 3이 된다고 설명하지만 소녀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뺄셈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선생은 수의 단위, 수의 요소 같은 개념들을 늘어놓으며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만 소녀는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소녀는, 놀랍게도 192923749×6698547의 답이 129230880009270이 되는 것은 단번에 알아맞힌다. 논리적인 수학의 개념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모든 곱셈의 답을 외워버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들에 의해 이름 붙여진 논리적인 개념들과, 인간 내면에 있는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것의 대립이다. 극의 이 부분부터 점점 이오네스코의 철학적 사유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수학 다음으로 이어지는 수업은 언어학이다. 구제불능인 소녀를 상대하느라 이미 인자한 태도를 잃어버린 선생에게, 그 집 가정부는 언어학은 재앙이라고 말하며, 이쯤에서 그만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선생은, 수업을 계속한다. 선생은 우리나라의 언어가 언어학적으로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말하며, 여러 가지 언어 용어들을 늘어놓는다. 소녀가 이가 아프다고 말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선생은 소녀의 말을 듣지 않고 소녀에게 자꾸 방해를 하면 혼을 내겠다고 소리친다. 이때부터, 선생은 이성을 잃어가고 흥분하기 시작한다. 왜 이 간단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냐면서, 소녀를 다그치기도 하고 몸으로 밀쳐내기도 한다.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의 싸움. 선생은 전라도 사람이 전라도 사투리로 영어를 하면 그게 전라도말이지 왜 영어가 되느냐며 소녀를 가르치기도 하는데, 극의 이 시점부터 선생도 자신의 논리적인 마인드를 잃어가고 흥분하기 시작한다. 부조리가 정점에 달하는 것이다. 선생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한다. 식칼을 한국말로 하면, 한국 식칼. 식칼을 미국말로 하면, 미국 식칼. 식칼을 중국말로 하면, 중국 식칼. 이런 식으로 언어학 수업을 진행하는데, 여기서는 애초에 선생이 가지고 있던 논리적인 사유의 방법이 본능적인 사유의 방법으로 돌아서는 느낌을 준다. 어쨌든, 소녀는 선생의 설명을 듣는 동안 끊임없이 이가 아프다고 울부짖으며 결국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는 지경까지 이른다. 선생은 이런 소녀의 모습을 보고 극도의 흥분상태에 빠진다. 이미 땀으로 온 몸이 흠뻑 젖어있고, 식칼을 직접 가져오며 실물로 설명을 해주겠다고 한다. 결국, 식칼을 보자 겁을 지레 먹는 소녀를 식칼로 찌르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가정부가 등장하여, 벌서 39번째라며 박사의 뺨을 때린다. 박사는 겁먹은 표정으로 가정부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빈다. 소녀가 공부했던 교탁은 소녀의 관이 되어 소녀를 그 안에 넣고 박사가 장도리 질을 한다. 이 때 울리는 초인종 소리. 또 다른 학생이 찾아온 것이다. 역시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박사의 망치질 소리가 이층에서 울리고 그 학생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극은 끝난다.

일반인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박사의 행동. 박사가 소녀를 죽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저 소녀가 자신의 설명에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해서?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부조리극이다. 철학적 이유가 없이 그저 본능적인 충돌에 의해 살인을 저질렀다면, 선생과 소녀가 지금껏 보여준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에 대립. 이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만다. 이오네스코는 인자한 태도를 고수하던 선생을 본능적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흥분하는 상태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것은, 논리와 비논리의 대립에서 비논리, 즉 본능과 감각에 손을 들어줬다는 이야기다. 나는 적어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부조리극이기 때문에, 확실한건 추론하기 어렵다. 부조리라는 말 자체가 약간 애매모호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린다거나, 갑자기 죄 없는 사람에게 욕을 하는, 이러한 부조리극은 카뮈와 사르트르에서부터 시작된 실존주의 사조와는 조금 다른 것으로 보인다. 카뮈가 부조리를 사실대로, 묘사하고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면, 현대의 부조리극은 조금 다르다.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채 사람을 죽이고 욕을 하며 짓밟는다. 「수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박사의 행동에 명확한 필연성이 제시되지 않는다. 그저 논리와 비논리와의 대립구조에 한해서 이 연극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어딘가 한계점이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 한계점은 빈약한 필연성에서 찾을 수가 있다. 박사의 행동과 소녀의 여러 가지 행동들(예를 들면 갑자기 이가 아프다거나 하는)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이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과 말들을 통해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나타내고자 한 것일까. 논리와 비논리의 대립. 그 사이를 파고드는 인간의 본능. 이것이 카뮈와 사르트르가 표현했던 부조리와 달리, 사무엘 베케트와 이오네스코는 좀 더 연극적인, 회화적인 방향으로 그들만의 부조리 사조를 탄생시키고 있다.

 연극에서 고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그 연극이 상영되었을 때 연기한 배우들이 나와서 그대로 연기를 펼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고전인데, 연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햄릿」을 하는 극단에 따라 관객이 받는 느낌이 달라지고, 작품의 질이 달라진다. 또 작품을 하는 시대에 따라 작품의 세계관이 달라지고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도 달라진다. 따라서 연극은 문학보다는 조금 더 유동적인 위치에 존재하는 예술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수업」도 극단의 개성을 살리고 현대의 감성을 넣어 각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또 다른 학생이 들어오는 부분에서, 여장을 한 남자가 교복 치마를 입고 들어오는데, 여기서 극의 분위기는 반전된다. 경쾌하고 조용한 음악소리가 무대에 퍼지고 선생이 소녀를 죽인, 극도의 흥분은 무대에서 찾아볼 수 없다. 깊은 철학적 사유를 가진 작품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마지막에 분위기의 변화를 추구해서 풍자적, 희화적인 이미지를 남기는 데 성공했다. 이렇듯, 똑같은 이오네스코의 「수업」을 봐도 그 연극을 독자적으로 재창조시키는 것은 극단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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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lmshady
  • 201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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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또한 이러한 비상식적인 부조리가 반복하는 이유 등에 설명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해석하여 덧붙이는 것이 독자이자 평론가의 몫이라고 봅니다. 이를 덧붙여 보아야 하겠습니다.

    • 2009-11-18 19:46:50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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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이란 부조리극을 요약적으로 제시하며 자신의 느낌을 약간 씩 덧붙이고 있군요. 관심의 폭이 넓은 학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매우 반가웠습니다. 다만 이 작품은 부조리극이므로 독자가 작품을 제대로 해석하기를 요구하는 정도는 더 커진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이 글에서는 소녀가 단숨에 수학답을 말하는 것의 의미, 언어학 시간에 교수와 학생이 서로 의사가 통하지 않는 것의 의미, 하녀가 빰을 때리는 행위, 박사가 관에 망치질을 하면서도 새로운 학생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행위에 대한 추론이 없습니다.

    • 2009-11-18 19:46:16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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