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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 작성자 비틀즈
  • 작성일 2012-06-18
  • 조회수 435

세상의 끝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김중혁)

미래라는 건 내가 그릴 수 있는 지도의 영역 바깥에 위치한 것이었다. 삼촌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을까 생각해 봤지만 생각이 나질 않았다. 삼촌의 얼굴도 아렴풋이 떠오를 뿐이었다. 눈앞에 떠오른 삼촌은 나보다 훨씬 어린 모습이었다. (중략) 나흘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디로 돌아가셨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지금 이곳에 없다는 생각을 해보면 여전히 실감이 나질 않았다. 배신을 당한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함께 전속력으로 100미터 달리기를 하다가 뒤를 보니 아무도 없다, 그런 느낌이었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세상과 친해지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달리기를 하는 등 그 방법은 지구 전체의 인간들의 수만큼 무수히 많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남자는 그 방법들 중 하나인 ‘지도그리기’를 초등학교 때 선택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계속 지도를 그리다보니 어느새 오차측량원이라는, 상당히 생소한 이름의 직업을 가진 채 살아간다. 남자에게 세계는 바로 ‘지도’로 정의된다. 지도 안에 갇혀 사는 그에게 바깥이란 차마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공간 즉, 불연속성으로 대변되는 공간이다. 그의 지도 밖 어딘가에서 실존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생각하는 세계에서 삼촌이라는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지도 바깥에 있는 삼촌의 얼굴은 언제나 그가 본 마지막 얼굴로써 남아 있다. 그 이상의 형태적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남자에게 지도를 벗어나기 전의 얼굴 이상은 기억되지 않는다. “오차와 오류는 어디에나 있다. 지도에도 있고, 자동차에도 있고, 사전에도 있고, 전화기에게도 있고, 우리에게도 있다. 없다면 그건, 뭐랄까,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의 유일한 세계인 지도에서 결코, 오차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 남자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 자기 자신을 잃은 상태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에 설명된다.

약간 멀리 떨어져서 보면 사람의 옆 얼굴을 닮은 듯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면 시냇물의 흐름을 깎아놓은 듯한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으니 괜스레 마음이 편안해지기까지 했다. 감촉도 좋았다. 바다에 씻기고 바람에 깎인 표면을 만지면 마치 어머니의 손을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았던 어머니의 실체가 갑자기 생생해졌다. 어머니의 살가죽을 닮은 표면을 만지고서야 어머니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 한심했다. 어째서 기억이란 것은 매개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무 조각이 없었더라면 나는 어머니 손등의 감촉조차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죽음 후에야 남자는 삼촌이 일주일 전 보낸 소포를 뜯어본다. 소포 안에는 흔한 안부나 소식도 없이 겨우 나무 조각 하나가 들어있었다.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나무 조각의 까칠한 표면은 남자에게 어머니를 다시금 환기시킨다. 언젠가 남자가 만져보았을 어머니의 손등이 나무 조각에 투영된 것이다. 나무 조각 같은 매개체에서만 떠올려지는 어머니의 향수에 남자는 모성적 존재를 잊어간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한다.

  지도는 목적지를 찾아가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현재 스스로의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위 문단에서 말했듯 남자는 자기 자신을 잃은 상태, 그것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주로 의도적으로 읽혀지지만) 결국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달이나 별을 올려다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자기 위치가 어디쯤인지를 알 수 없다. 위를 올려다보지 않으면 아래에 뭐가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다.”에서 알 수 있듯 남자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달이나 별 등의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나오는 나무 조각이 바로 그 기억의 매개체로써 작용한다. 나무 조각을 매개체로 인식하는 순간 남자는 대략적인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내 손에는 지도가 있었지만 그건 내가 그린 지도였기 때문에 나를 믿고 지도를 믿을수록 길을 찾기는 더욱 힘들어졌다. 나는 길을 찾으면서도 계속 지도를 그렸고 지도는 점점 오리무중, 첩첩산중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결국 나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동네에 익숙해지자 나는 지도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골목 하나의 차이였을 뿐인데 모든 길이 어긋나고 말았다. 지도가 위험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중학교 2학년 때 남자가 이사를 가서 지도를 그리고 있었을 때의 상황이다. 고작 ‘골목 하나의 차이’일 뿐인데, 그것은 모든 길을 송두리 째 바꿔놓았다. 이것은 지도의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도는 우리가 필요한 곳으로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하지만, 조금이라도 오차나 오류가 있을 경우 이렇게 위험해진다. 남자 스스로 그린 지도를 믿다가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지도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자가 그린 지도를 삶으로 치환해 본다면, 이 상황은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장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지도를 그리며, 저마다의 오류를 만든다. 오류마저도 삶의 귀퉁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이기에, 오류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지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든 지도의 중심에는 내가 살던 집이 그려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를 먼저 그리고 내 주위의 것들을 그리는 게 당연하지, 라고 생각해 봐도 이상한 공통점이었다. 커다란 빌딩을 한가운데 그릴 수도 있을 것이고 동네에서 가장 큰 학교를 중심에 둘 수도 있었을 텐데 지도 한가운데는 언제나 내가 살던 집이 있었다. 모든 골목이 우리 집에서 뻗어나갔고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 역시 우리집이었다. 세계의 중심은 언제나 나였다.

  세계는 언제나 그것을 바라보는 ‘나’에서 출발한다. 그 법칙은 ‘나’가 만드는 지도에도 고스란히 옮겨지는데, 그것은 ‘나’의 가장 소중한 무언가가 지도 속에서 중심적 위치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려온 지도의 중심에 항상 ‘집’이 있다는 말은 즉, 그 ‘집’은 이 지도를 만든 사람에게 있어서 언제나 변함없는, 혹은 그럴 것이라 믿고 있는 사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집’을 중심으로 지도를 그린다는 설정으로 작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 걸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집의 존재이다. 원초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자궁에서의 10개월을 보낼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무덤이라는 무한의 집을 가지게 된다. 이 소설 외에서도 많이 나오는 상징이간 하지만, 집은 결국 ‘품어주는’ 존재로써 모태적 상징을 가진다. 소설 안에 들어가 보면, ‘나’라는 존재는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을 잊기 위해 삼촌의 소포를 풀어보기도 하고, 일에 몰입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그린 모든 지도의 중심인 집과 동일시된 ‘나’만의 집인 것이다. 여기서 ‘나’는 그 ‘집’의 존재를 상실함으로써 지금 당장은 지도를 그릴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것이다.

  “나는 머리 속에 펼쳐진 지도를 모두 지웠다. 그리고 종이 왼쪽 귀퉁이에다 내가 살고 있는 원룸을 표시했다. 자, 이젠 어쩌지? 나는 원룸을 표시한 다음에는 아무것도 그릴수가 없었다. 원룸에서 뻗어 나가는 길을 그리고 싶었지만 도대체 어떤 방향으로, 어느 정도의 길이로 선을 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지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상상하는 지도입니다. 손가락을 나무 지도의 틈새에 넣은 다음 그 굴곡을 느껴야 합니다. 그 굴곡을 느낀 다음에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해안선의 굴곡을 상상해야 합니다. 촉각과 상상력이 완벽하게 일치해야만 당신은 당신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손가락으로 나무 조각을 더듬자 조금씩 새로운 것이 느껴졌다. 에스키모가 거닐었던 해변의 굴곡이 손끝으로 느껴졌다고 하면 아무래도 과장이겠지만 어떤 공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방 안의 불을 끄고 다시 한번 지도의 굴곡을 느껴보았지만 그 이상의 감각은 없었다.

  남자가 나무 조각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자(또는 중요하게 생각하나 그렇지 않은 척 하자), 함께 팀을 이루고 있는 여자가 사이트를 통해서 그것이 에스키모들이 만든 입체지도라는 걸 알아낸다. 남자는 그 사이트에 들어가 입체지도를 읽는 법과 에스키모들이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읽어본다. 처음에는 여전히 어머니의 손등만을 떠올리지만 서서히, 어떤 다른 공간을 느끼기 시작한다.

  순전히 촉각과 감각으로 읽어야 하는 나무 조각.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를 상상하는 것처럼 ‘느껴’야지만 알 수 있는 지도는 신선하다. 보편적으로 지도는 눈으로 보는 것으로 그 가치가 성립되는데 반해, 이것은 오로지 상상으로만 읽는 것이다. 이 지도는 한 번도 본적 없는 것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남자가 일평생 그려 온 지도와 상반된다. 남자가 처음으로 지도 바깥의 것들과 ‘소통’하게 만드는 것이다. “에스키모에게는 ‘훌륭한’이라는 단어가 필요 없다. 훌륭한 고래가 없듯 훌륭한 사냥꾼도 없고, 훌륭한 선인장이 없듯 훌륭한 인간도 없어. 모든 존재의 목표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지 훌륭하게 존재할 필요는 없어”에서처럼 남자에게도 사실 훌륭한 지도는 필요치 않다. 삶의 지도에 오류와 오차가 있더라도 계속 목적지로 나가게끔 하는 어떤 것, 이를테면 엄마와 같은 ‘집’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내비게이션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지도는 상당히 낯설다. 갈수록 더 빠른 것, 더 편리한 것만 추구하는 우리들은 아날로그보다는 디지털에 익숙하다. 이 사태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던졌다. 그러나 지금껏 봐왔던 문제의식이란 고작 디지털에 길들여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위험을 제기하는 것에서 그칠 뿐이었다. 그러나 김중혁은 다르다. 김중혁은 ‘다르게 보는’ 시점으로 문학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서 문제의식을 ‘에둘러’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시와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에게 시를 가르쳐준 선생님 말씀을 인용하자면, 시는 무조건 구체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표현해야 한다. 물론 단지 그것만으로 시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 인식을 다른 사물을 통해 ‘에둘러’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김중혁의 다른 단편소설 ‘무용지물 박물관’이나 ‘회색 괴물’등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무용지물 박물관에서는 ‘라디오’, 회색 괴물에서는 ‘타자기’라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일으키는 사물을 사용하여 단지 현대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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