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노년의 비애 - 파과 / 구병모

  • 작성자 조셉 고든 레빗
  • 작성일 2013-12-16
  • 조회수 860

1.

 

행간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어떤 공기는 작품의 총체적 분위기를 결정짓는다. 구병모소설의 빈공간을 남김없이 메꾸는 냉소의 기운은 행간에서부터 영역을 확장하며 이야기 곳곳을 깊숙이 침투해나간다. 단락 하나 문장 하나를 읽을때마다 짙게 묻어나오는 이 냉소는 타인의 지저분한 얼굴을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까지 눈살을 찌푸리는 작금의 보편적 일상을 지긋이 마주보고 지적해냄과 더불어, 좀 더 거시적 차원의, 성취감과 상승의지라는 그럴듯한 어휘로 포장된 사람들의 속물적인 목적의식,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이면을 예리하게 관철해낸다.(-방주로 오세요) 그러나 이 냉소는 최근작인 본작에 이르러서 다소 이질적인 양샹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슬픔과 체념이라는 감정과 함께 병존하며 시간의 흐름을 피부로 체감케되는 노년의 비애를 강렬하게 내비친다.

 

2.

 

작가가 감정에 지나치게 도취된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은 그 감정이 독자의 심상에까지 전이되지 못하고 금세 소모되어 버리기 마련이다. 일순간 고양되고 폭발하는 감정또한 찰나의 분출이 으레 그렇듯 독자의 가슴에 어떠한 자취도 남기지 못한다. 구병모의 소설들이 줄곧 일관되게 유지하던 냉소의 기운을 본인이 유난히도 좋아하는 이유는 어설픈 감정적 접근을 일절 배제해버린 이른 포기의 태도를 포함했기 때문이다. 작가 본인조차 겪어보지 못했던 감정의 격정을 흉내내려 하기보다 자신의 장기인 현실에 대한 냉소를 집요히 투영시킨 그녀의 소설은 메마른 감성을 지녔지만, 허위로 물든 세상의 비정함을 환기시키며 더욱 짙은 여운을 자아낸다. 이러한 관조의 차원을 넘어선 염세적 세계관은 문체에서도 쉬이 추적할 수 있다. 많은 어휘를 포괄하는 만연체의 문장은, 사물을 묘사하고 인물을 설명할 때 조차 서늘한 냉기가 베어나오지만 시종 명쾌하고 단단하며 난잡히 흩어진 어휘들을 꿰고 덧붙여 운율을 자아내려는 무리한 시도또한 하지 않는다. 산문이 결코 시의 리듬을 따라 갈 수 없고, 단순히 어휘를 나열한 것으로 문장이 성립될 수 있음에도 그녀가 구사하는 문장은 음악적 선율이 느껴질 만큼 리드미컬하고 매끄럽다. 이 모든 것들은 본작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문장은 시퍼렇게 날이 서있고, 냉소도 이전과 다를바 없지만, 이전의 구병모 소설에선 볼 수 없었던 감정의 파장이 소설 전반을 에워쌓고 있다. 이질적이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3.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보니의 총합이었다.

아무리 구조가 단단하고 성분이 단순명료하다 해도 사람의 영혼을 포함해서 자연히 삭아가지 않는 것은 이세상에 없다. 존재한 모든 물건은 노후된 육체와 마찬가지로 연속성이 단절되며 가능성은 협착된다.

 

늙는다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신이 놓여졌던 선택의 순간을 복원하고 지난날에 하지 못했던 또 다른 선택을 후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을 더듬고 곱씹어보며 또 다른 나를 상상해보지만 이내 체념하고 당도한 현실에 몰입하기 바쁜것이 청년과 노년의 중간이라면, 육신이 소실되는 과정을 거칠때마다 선택의 순간을 한숨과 함께 그리워하는 것이 노년이다. 그래서 노년은 비애다. 본작이 지닌 정서가 이것이다. 살인청부업의 세계에서 이미 퇴물이되어버린 킬러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은 기실 '레옹'에서 파생된 '아저씨'나 '테이큰'과도 이야기의 맥락을 같이한다. 살인이 일상인 자신의 세계에 염증을 느낀 킬러, 자신이 겪어보지 못했던 삶에 매혹을 느껴 그 동안 이룩했던 것을 털어버리려 하지만, 이내 맞는 비극적 최후. 여러 콘텐츠에서 변주되고 재생산된 이러한 류의 장르물은 이제는 자못 통속적이기 까지만, 본작에서 체감되는 공기는 오락적 재미의 추구뿐만이 아니다. 선택과 우연이 한데모여 완성시킨 삶의 운명적인 속성을 빼어나게 묘사하는 한편, 원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더 이상 갈망할 수 없는 노년의 육체에대한 슬픔을 특유의 필치로 그려낸다. 주인공 본인의 슬픔이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소설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다. 목표물을 눈앞에 두고도 폐지줍는 노인에게 연민을 느껴 살인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만족적인 우월감의 연민 때문이 아니다. 동질감에서 비롯된 연민 때문이다. 선명하게 새겨진 굵은 주름 뿐만 아니라 소멸의 지점에 근접해선 누구나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음의 깨달음이, 생면부지의 타자에게서 투사된 것이다. 킬러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일절 면식이 없던 타인에게 어줍잖은 위무와 연민의 손길을 뻗던 자신을 비판하면서 이것은 금방 체념으로 귀결되는듯 하다.

 

잠깐이나마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룬 살점과 핏방울과 뼛조각을 잊고 긴장이 풀린채 따뜻한 꿈을 꿀 뻔했던 순간을, 소독약과 스킨섞인 독특한 냄새를, 한 폭 주단과도 같던 미소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마음속에 피어오른 것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일상이 아닌 다른 세계와 접속했기 때문에 생겨난 작은 흥분에 불과하며 거기 몸을 깊이 담그지 못하고 발만 살짝 적셨다가 돌아나온데서 비롯한 아쉬움의 반영일 뿐이다.

 

그러나, 무의식 한켠에 염원하고 있던 것, 화목하지만 파국을 앞둔 가족을 위기에서 구출해내면서 '주어진 상실'에 대한 의지를 다짐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사라진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소설에서 또하나 인상적인 것은 '투우'라는 캐릭터이다. 그는 어린시절, 주인공 '조각'에게 살해당한 이의 자녀이다. 자신의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그녀의 본래목적을 짐작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환대받지 못하던 본인에게 잠깐이나마 관심의 손길을 보여준 그녀를 궁금해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날, 그녀가 일을 수행하고 공연히 자신에게 보내던 눈빛을 잊지 못한채, 투우 자신또한 킬러의 세계로 입문한다. 이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며 조각의 입지를 위태로이 하는 한편, 그녀 주변을 맴돌며 방해의 손길을 뻗치지만, 이것은 네가 내 가족을 무너뜨렸다는 복수심의 발로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타인에게 자신의 인상을 남기려는 행위의 본질과 같다. 조각으로 인해 가정의 해체를 겪었지만, 기실 그에겐 해체후 또한 이전의 삶과 변함이 없는 무관심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조각이 보여준 관심과 마지막 순간을 잊지 못하고 그녀만은 자신을 기억하리라는, 아니 너만은 나를 기억해내야 한다는 상념을 이러한 킬러로서의 행동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 조각에게 죽임당하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어렴풋이 떠올리는 제스처를 취하자 옅은 웃음을 짓는 것도 이같은 맥락일 것이다.

 

4.

 

분명 장르문학의 서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오락적 쾌감이나 엔터테인먼트적 요소의 발현이 눈에 띄는 소설은 아니다. 그보다 더욱 체감되는 것은 '노년의 비애' 라는 주제의식이며, 이러한 주제를 순문학의 형태가 아닌, 다소 이질적인 장르문학의 화법과 접목시켰다는 것이 본작의 가장 큰 이점이다. 이 같은 진부한 수식어를 덧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역시 구병모' 라는 말이 자연스레 새어나온다.

조셉 고든 레빗
조셉 고든 레빗

추천 콘텐츠

귀속과 관성의 삶 - 낭만적 밥벌이

1.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길바닥의 모래알들을 훑으며 공간을 유유히 배회하는 바람 너머에, 버스정류장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군요. 군데군데 갈라진 틈을 싸구려 페인트 색으로 메꾼 낡은 벤치와, ‘버스’라는 글자마저 이미 색이 바랜 조악한 표지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니, 어쩌면 정류장이라 명명하는 것은 어색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벤치 한 귀퉁이엔 웬 여자 한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구 치뻗은 머리칼과 거무튀튀한 얼룩이 군데군데 서려있는 허름한 옷차림과는 달리, 여자의 외모는 사뭇 어려보입니다. 새근거리며 잠을 자고 있는 아기를 등에 업은 채, 여자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표정으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게 아니었던 걸까요? 시간이 흘러 버스 몇 대가 여자의 앞에 멈춰섰지만, 여자는 초조한 기색으로 발을 동동 구를 뿐이지, 정작 버스엔 오르지 않습니다. 몇 분이 흐르고, 또 몇 시간이 흘러 사위가 붉어지고, 밤의 군대가 화공을 시작할 무렵, 끝내 마지막 버스에도 오르지 않은 여자는, 왔던 길을 헤아리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의 표정엔, 쓸쓸함과 안도의 기색이 동시에 병존하고 있어, 여자의 속내가 무엇인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2.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느닷없이 뜀박질을 시작하는 나 자신을 상상해 봅니다. 시원한 바람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감각과 사고가 명료해지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긍정이 이내 온 몸을 채우면, 뛰는 것을 멈추고 갑작스레 의욕적이 되어 매번 지나치기만 할 뿐인 낯선 공간에 발을 들이거나, 눈인사만 주고 받던 또래의 여자에게 자신있게 말을 붙이기 시작하는 거죠.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입니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터무니없지만 매력적인 공상을 현실에서 실행하기엔, 저는 겁이 많고 용기도 부족합니다. 여러분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낯선 것들을 시작하기엔, 우리 모두는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낯선 것들이 지금 안주하고 있는 현실의 것들보다 나을 거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결국 도전은 실패로 귀결될거라는 식의 걱정 말이죠. 사소한 걱정들 때문에 우리의 삶은 무료하고 건조한 일상으로 패턴화 되고, 시시하다고 느껴짐에도 그런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가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나가고 헤쳐나가는게 아니라, 삶이라는 거대한 형체가 우리모두를 종속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접근해보자면, 제가 생각하기에 본 소설은 삶에 구속된 이들의 어설프기 짝이없지만 동시에 유쾌함을 머금은 일상탈출기입니다. 삶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미친짓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객기를 차근차근 실천해나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은, 종종 읽는이들을 뜨끔하게 만듭니다. 이들이 까페를 차려나가는 과정속에서 종종 드러나는 허술하고 순진한 면모에 키득거리게 되지만, 동시에 삶의 인력을 과감하게 뿌리친 주인공들의 용감한 면면을 보며

  • 조셉 고든 레빗
  • 2014-10-18
고통을 의식하는 행위로서의 문학

*   연민이란 감정에 회의감을 느낀 일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상의 무력감과 권태로움에 휩쓸려 타인의 불행을 대상화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음을 깨닫고 싶을 때 느끼는 자기만족적인 우월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남이 겪은 불운에 대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동정의 표식을 드러내거나 과장된 한숨과 함께 탄식을 내뱉지만, 이는 고통받은 이들의 삶과 자신들의 평탄한 일상을 선연히 분별짓는 위선에 찬 행위이며 얼마 안가 모조리 소모되어 버리는 순간적인 감정의 표출에 불과하다고, 그렇기에 연민은 한시성을 지니고, 가슴에 새겨지는 선명한 자취, 씻어지울 수 없는 각인을 자아내는게 아닌, 언젠가는 깨끗이 세척되고야 마는 아련한 얼룩만을 남길 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본인 나름대로 고통의 과정을 겪어낼 때, 툭 툭 내뱉는 몇 마디의 말들이, 금세 허공으로 흩날리는 몇몇의 단어가 크나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체감 하고 나선 연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 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인지하고 있기에, 문학으로 구현된, 타자에게 보내는 위로 역시 무용하지 않음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고통과 위로를 주제로 구현된 시들을 다루고자 한다.   *   윤동주 -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윤동주 - 위로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病院) 뒤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屋外 療養)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치어다보기 바르게──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파닥거려도 파닥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는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세(歲)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病)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慰勞)할 말이──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慰勞)의 말이 없었다.     곽재구 -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

  • 조셉 고든 레빗
  • 2014-09-08
당신이라는 타투 - 은반지 / 권여선

1.   사물과 현상에 있어서도 정의내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순조롭고 유려하게 흘러가는 논리와 치밀한 관찰 끝에 얻은 결과에 따라 사물과 모양을 지각하고 그 뜻을 규정해보지만, 이내 외관 속에 머물렀던 본질이 비어져 나와 막힘없어보였던 당연한 이치를 부정하는 순간이 더러 있기에, 어떤것에 정의내린다는 것은 무척이나 까다롭고 복잡한 일임이 명백하다. 서로간의 관계에 정의 내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나와 상대방을 지탱해주었던 관계속의 끈끈한 인력은 몇마디의 실언과 잠깐의 실수로도 어느새 서로를 거부하는 척력이 되어 짦게나마 공유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조차 염증을 느끼게 만든다. 친구와 가족의 관계라고 명명하고 금세 우리의 사이를 단정짓지만 그 관계속에 도사리고 있는 타인의 심상과 감정을 결코 눈으로는 목격할 수 없기에 쉽사리 부서지고 허물어내리는게 관계이다. 권여선은 이것을 포착해낸다. 이제는 복구가 불가능할 지경으로 도태되어버린 인간관계에서 원인을 규명하는 처사따위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문학으로 담아내며 흉터를 씻어지울 수 없듯,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기억속의 흔적을 남기고 간 당신이라는 타투를 지긋이 응시한다.   2.   똑같은 사물을 대면하고 있더라도 그것에 대한 나와 타인의 생각이 동일한 범위에 속해있다고 단언할 수 없듯, 같은관계를 공유하지만 이 관계에대한 상대방의 의중 역시 결코 수를 세는 것 마냥 쉬이 헤아릴 수 없다. 우선 작품속으로 들어가보자. 주인공은 어느덧 이마에 굵은 주름이 패인 노파(오여사)로,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 없이 그런대로 자기나름의 삶을 영위하는 중이다. 그녀에게 걸리는 문제가 한 가지 있다면 얼마전까지도 자신의 집에서 동거하다가 갑작스레 훌쩍 떠나버린 심여사와의 관계이다. 비록 심여사가 자신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였지만 그녀 자신은 심여사에게 단 한번도 '눈치를 주거나 모멸감을 느끼게 한일이 없었'으므로, 꽤나 괜찮은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자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딸네 집으로 간다는 통고 한마디만 남긴 채 연락을 끊어버린 심여사의 행동에 오여사는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벌써 반년이 지나갔다. 계속해서 자신의 비위를 건드리는 딸들의 전화를 받고 문득 울화가 치민 오여사는,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지속했던 심여사를 그리워하며 기필코 그녀를 한번 만나보리라 결심한다. 유려하지만은 않은 과정을 거쳐 심여사가 머무르고 있다는 요양소에 당도했지만, 그녀가 기대했던 환대와는 달리 심여사의 얼굴엔 당혹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대화가 계속될수록 거북함과 불편함만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돈다.   다 지나간 얘기지만, 아니, 이런 얘긴 안 하는게 좋겠어요. 아니 얘기해봐요 심여사.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가 있어? 제가 일본에 있는 딸네 집에 가기 전에 말이지요 몇날 며칠을 두고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몰라요. 간다는 얘길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오 여사님 앞에만 가면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왜 그런가 했더니 오 여사님이 절 못 가게 붙들까봐 그런 거 였어요. 오 여사님

  • 조셉 고든 레빗
  • 2014-01-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