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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 작성자 GLOBE
  • 작성일 2020-09-26
  • 조회수 169

탈출

 

-프란츠 카프카,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2012.

 

 카프카는 그의 작품 ‘변신’으로도 유명하지만 짤막하고 난해한 그의 단편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 단편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 한다. 흔히 카프카는 실존주의 작가로 분류된다.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변신)가 실존의 부조리에 직면한 인간의 이야기라면,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은 그런 인간의 소망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은 불과 7줄에 불과하여 한 페이지에 전문이 모두 들어간다. 소설은 인디언이 되었으면! 하는 화자의 말로 시작된다. 그 후로 그는 야생마를 타고 대지와 광야를 달렸으면 하는 소망을 이야기한다. 박차를 내던지고 고삐를 내던지고 싶다고 하는데, 사실은 박차와 고삐 역시 없다는 이야기도 한다. 이것은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되었다. 마침내는 이미 말 모가지와 대가리도 없다고 하며 소설은 끝난다.

 나는 이 소설을 보았을 때 아주 짧은 분량에 놀라고, 너무나도 제목에 충실한 서사에 놀랐다. 당연히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라고 말했다. 워낙 분량이 짧아 5번은 더 읽어보니 무언가가 찬찬히 머릿속에 들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인디언을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은 자연과 자유에 관련한 것들이다. 문명화를 거부하고, 야생마를 타며 살아가는 자유의 삶. 그런 것들이 우리가 인디언을 말하면 떠올리는 것들인데, 화자는 그런 인디언이 되고 싶다고 한다. 나만 해도 어릴적 그런 생각을 했다. 다만, 지금까지 달려온 걸음들을 무시하고 그런 삶을 살기가 두려워진 때가 왔다. 그 시점은 은연 중 찾아왔으며 나는 어느새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이미 박차를 신고, 고삐를 채웠다고 믿었다. 그런 나에게, 아니, 사람들에게 카프카는 말한다. 사실 그런것은 없다고.

 그렇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씌운 여러 상황들은 지극히 인위적이여서 우리의 실존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이들자 이 모든게 덧없어 보였다. 다만, 나의 성격은 급진적인 것과 거리가 멀어서 당장 인디언처럼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러길 소망할 뿐이다. 어쩌면 카프카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허상을 벗어던지고 달리는 말도 허상이라 표현했을 것이다. 모든게 허상이지만 실존한다. 아이러니 하지만 설득되는 말이다.

 인디언이 되는 것은 허상의 세계에서의 탈출이며, 실존에 이르는 여정이다. 과연 그의 소망처럼 카프카는 실존에 도달했을까? 그렇다면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생각에 잠긴다.

 

( 멘토님이 독문학을 연구하신다여 평소 좋아하던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대해서 글을 써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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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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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02 16:19:22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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