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소외된 모든 이에게 건네는 아름다운 위로 : 날씨의 아이(2019)

  • 작성자 카임
  • 작성일 2021-07-21
  • 조회수 821

(글에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날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건 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오직 기도만으로 비 내리던 날씨를 맑게 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소녀는 흔히 생각하는 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부모를 잃고 동생과 단둘이 남겨진 모습은 신이라기엔 초라한 행색이고, 그런 소녀를 지켜주려는 가출 소년은 갈 곳이 없어 오히려 소녀에게 지킴을 받는다. 멋대로 자연 현상을 조종할 수 있다는 건 신이 아니고서야 가능한 일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이는 어째서 약자의 자리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을까. 영화 ‘날씨의 아이’는 소외된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한다.

 

왠지 숨이 막혀서요. 동네도 부모님도.’

이곳을 떠나고 싶어서, 그 빛 속에 들어가고 싶어서 달리고 달렸다.’

남자 주인공 호다카는 가출 소년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설명하는 그의 가출 사유는 너무도 황당하다. 영화 초반부에 ‘숨이 막혀서’라는 다소 사춘기의 반항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유를 들며 관객의 궁금증을 단순하게나마 해소한 뒤, 후반부에 가서는 ‘빛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라는 추상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이러한 이유만으로 가출했다기엔 그저 철없는 반항기 주인공밖엔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호다카의 진짜 가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영화에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도쿄로 향하는 배를 탄 호다카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반창고, 섬에서 자전거를 타던 호다카의 얼굴에 역시나 붙어있는 반창고를 보며 가출 이유가 가정폭력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도쿄는 참 무섭네.’라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라 말하는 호다카는 집에선 폭력을, 도쿄에서는 고립을 견디며 살아가는 청소년이다. 스가 씨와 나츠미의 식사에서 과하게 해맑은 모습이 그 안타까움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너 주는 거야, 비밀로 해.’

여자 주인공 히나는 부모님을 잃은 채 동생과 함께 살아간다. 나이를 속여가며 아르바이트하는 그녀는 호다카에게 몰래 햄버거를 건네주고, 그것이 첫 만남이다. 그 뒤로 호다카는 그 친절을 잊지 못하고 히나가 위험에 처했을 때 과감히 구해준다. 성매매 업소로 끌려갈 뻔한 히나의 손을 잡고 도망치는 걸 넘어, 히나를 끌고 가려 한 호스트를 총으로 위협하기까지 한다. 길에서 주운 총이라 진짜 총인지의 여부도 몰랐던 호다카는 이 사건을 계기로 히나에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며 혼이 난다. 그러나 호다카는 도쿄에서 받은 첫 친절에 보답하고 싶었을 뿐이다. 히나도 이를 모르지 않아 다시 돌아와 호다카와 여러 얘길 하며 가까워진다. 이렇게 두 약자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부터 하늘이 맑아질 거야.’

기도를 통해 비가 그치지 않는 도쿄의 날씨를 일시적으로 맑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히나는 그것을 호다카에게도 보여주고, 이를 본 호다카는 히나와 함께 ‘맑음 소녀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불행의 시작이다. 애초에 자연 현상을 멋대로 쥐고 흔드는 건 신에게만 허용된 일이지 않을까. 평범한 소녀가 그런 일을 하기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적절하다. 하늘을 맑게 할 때마다 히나의 몸이 투명해지는 것이다. 일정 이상 투명해지면 히나는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데 영화에선 이 공간을 ‘구름 위’로 표현한다. 결국은 하늘나라다. 즉, 투명은 죽음과 동일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이 비가 멎기를 바라니?’

호다카는 가출과 더불어 총기 혐의 소지로 경찰에게 쫓긴다. 호다카와 함께 경찰을 피해 도망친 히나와 나기는 청소년 셋을 받아주는 유일한 모텔에 묵게 된다. 모텔에서 함께 샤워하고, 노래 부르고,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모습은 오히려 나에게 불안감을 심었다. 행복해지기엔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진 캐릭터들이다. 신에게 ‘이제 무엇도 주지 마시고 무엇도 가져가지 말아주세요.’라며 독백하는 호다카의 기도는 위태로운 행복 위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아주 ‘사소한’ 바람이라 더 마음이 아프다.

자정이 되고, 히나에게 생일 선물을 건네는 호다카는 2시간이 조금 안 되는 영화에서 가장 제 나이에 맞는 표정을 짓는다. 어리고 천진한 표정으로 말갛게 웃는 얼굴에는 상처도, 반창고도, 걱정도 없어 보여 문득 생각하게 된다. 보호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세상의 모서리에 베이는 청소년들에 대해서 말이다.

히나는 호다카에게 비가 멎길 바라느냐고 묻고 호다카는 그렇다고 답한다. 이 장면은 스가 씨와 나츠미가 이야기하는 장면과도 겹쳐 보인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중요한 것의 순서를 바꿀 수 없게 되더라.’라고 말하는 스가 씨는 자신과 자신의 딸을 위해 호다카를 내쫓았고, 호다카는 오랜 비가 멎으면 좋을 테니 단지 그것만을 위해 비가 멎길 바란다고 답한다. 그러나 하늘이 맑아지기 위해선 맑음 소녀인 히나가 하늘 위로 올라가야 한다. 맑음 소녀를 제물로 바쳐야 하늘이 맑아질 수 있단 것이다. 결론적으로 스가 씨와 호다카는 둘 다 이기적인 선택을 했지만, 누구도 스가 씨를 비난하지 않는다. 비교적 ‘손가락질이 쉬운’ 청소년 호다카만을 비난한다. 영화에서마저 약자는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모습이 한탄스럽다.

 

모두 뭔가를 짓밟으며 사는 주제에.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만 살 수 있으면서.’

하늘로 올라간 히나를 구하기 위해 선로 위를 달리는 호다카를 보며 사람들은 비웃는다. 히나의 희생으로 얻은 맑은 도쿄 아래에 서 있으면서도 모순적이게 호다카를 비웃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원망하는 호다카의 마음은 영화보단 소설에 잘 드러난다. ‘영웅’이란 단어로 포장된 개인의 희생은 너무 쉽게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를 짓밟아도 되는 걸까. 언뜻 보기엔 자신을 막으려는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너무 가벼운 이유로 가출하고, 오직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독단적으로 구는 모습이 이기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부터가 이기적인 것 아닌가. 히나의 희생은 정당한 것이 아니다. 히나에겐 도쿄를 구해야 할 의무가 없다. 자신을 위해 살면 되고, 그러기 위해 태어난 삶이다. 다른 이들은 자신의 삶을 위해 사는데 오직 히나만이 타인을 위해, 도쿄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옳을 리 없다. 우리가 호다카를 이기적이라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그저 맑음 소녀에게 감사하고 맑은 날씨를 즐기기만 하면 될 ‘다수’에 속하기 때문이지 않나. 우리가 우리의 이익을 생각하며 히나의 희생을 정당하다고 느끼니 호다카 또한 자신의 행복했던 추억들과 받았던 친절을 떠올리며 히나의 희생에 반발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호다카에게 이기적이라며 손가락질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이기적이니까.

 

にできることはまだあるかい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

히나에게 가려는 자신을 막는 스가 씨에게 ‘히나가 있는 곳으로 가게 해주세요’라고 외치며 호다카는 천장을 향해 총을 쏜다. 총을 쏘고 10초 정도의 정적 후 영화 주제곡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의 첫 소절이 흘러나온다. 이후 자신을 체포하러 온 경찰들에게 총을 겨누고 도리이 밑을 지나는 그 순간까지 내내 잔잔하게 깔리는 이 노래는 호다카의 상황과 맞아떨어져 영화의 감동을 극대화 시킨다.

めた だけが 勝者時代 どこで(포기한 자와 현명한 자만이 승자인 시대에 어디서 숨을 쉴까)

숨이 막혀서 가출을 했다는 호다카의 대사와 겹쳐 보이는 가사다. 삐뚠 뿌리가 깊게 박혀있는 세상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는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それでもあのもまだ 全正義 にいる (그런데도 그날의 네가 아직 나의 온 정의의 한가운데에 있어)

호다카에게 있어 ‘그날의 너’라 함은 햄버거를 건네는 히나일 거라 생각한다. ‘무서운’ 도쿄에서 처음 받은 친절이었으니. 자신에게 친절의 베푼 그날의 히나가 호다카의 정의 한가운데 자리 잡았을 테니 히나를 구하기 위해 경찰을 향해 총을 겨누는 등 현실의 정의에는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을 터다. 이 순간만큼은 호다카의 정의는 히나이니 말이다.

がくれた勇気だから のために使いたいんだ (네가 주었던 용기니까 너를 위해서 쓰고 싶어)

그리고 히나를 구하기 위해 달리는 호다카를 가장 잘 표현한 가사. 그 누구도 호다카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꿋꿋이 곁에 남아 위로하고 다독여줬던 히나는 결론적으로 호다카에게 용기를 줬을 거다. 어떤 형태의 용기든 상관없다. 도쿄에서 살아갈 용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용기, 누군가를 지켜내고 싶다는 용기. 정말 죽기 직전인 사람을 살려야만 생명의 은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노래 하나가 우울한 마음을 위로해, 그 곡을 부른 아티스트가 생명의 은인이 될 수도 있고, 힘든 시기에 읽은 책의 한 구절이 나를 위로해주어 그 책을 쓴 작가가 생명의 은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호다카에게 히나는 생명의 은인이다. 가장 힘든 시기에 집을 나와 도쿄를 헤매는 호다카의 마음을 꼭 안아줬으니 말이다. 누구든 자신을 살려준 사람을, 자신 또한 살려내고 싶은 법이다.

 

맑은 날을 두 번 다시 못 봐도 괜찮아.’

푸른 하늘보다 나는 히나가 좋아.’

날씨 따위 계속 미쳐 있어도 돼!’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하늘에서 추락하는 두 사람을 비추며 ‘Grand Escape’라는 노래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가장 절정이 되는 부분에서 펑하고 심장을 울리는 노랫소리는 ‘날씨의 아이’의 비정상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킴과 동시에 관객의 마음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락 장면이 각인되도록 한다.

らでって たるべきのために(우리는 꿈에 돛을 달고 앞으로 올 날을 위해 밤을 넘어서) いざ期待だけタンで あとはどうにかなるさと んだ (기대만 가득 찬 우리는 다음 일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어깨동무했지)

단지 히나가 좋아서, 함께하고 싶어서, 구하고 싶어서. 대책 없이 경찰에게 총을 겨누고, 한쪽 손목에 수갑을 찬 채 도망치고, 멋대로 히나를 구하러 하늘로 올라간 호다카를 잘 표현한 가사라고 생각한다. 클라이맥스를 이 가사가 메우고 빙글빙글 돌며 하늘에서 추락하는 히나와 호다카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할 수 없다. 호다카의 손을 맞잡은 히나는 그제야 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은 듯 제 나이에 맞는 표정을 지으며 활짝 웃는다.

くないわけない でもまんない (두렵지 않을 리 없지 하지만 멈추지 않겠어.)

히나가 지상으로 내려옴으로써 도쿄는 다시 비가 내릴 테고 호다카는 경찰에게 체포될 것이다. 어쩌면 히나는 내리는 비를 보며 내내 죄책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고 호다카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모르는 이 상황이 그들에게 두렵지 않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나와 호다카가 멈추지 않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준 용기가 있기 때문 아닐까. 서로의 손을 잡으면 두려울 게 없을 테니.

 

옛날엔 도쿄가 작은 만이었다지. 그러니까, 결국은 원래대로 돌아간 것뿐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마. 세상이란 건 어차피 원래부터 미쳐 있었으니까.’

두 대사 모두 도쿄가 물에 잠기고 죄책을 느끼는 호다카에게 두 ‘어른’이 건네는 위로이다. 한 나라의 수도가 침수되었지만, 고작 그런 대사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모습이 탐탁지 않다는 평을 본 적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렇게 이유 없이 위로하고 편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우리는 살면서 언제 이런 위로를 들을 수 있을까. 나는 이럴 때일수록 픽션과 현실을 구분 짓고 싶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사회에서 고립된 약자들에게 픽션을 통해 건네는 위로라고 생각하고 싶단 의미다. 언급한 대사뿐 아니라 이 영화 자체가 말이다. 다수를 위한 세상에서 소수를 위한 픽션 정도는 남겨도 좋지 않겠는가.

 

大丈夫

괜찮아

서로가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호다카는 성인이 되어 다시 도쿄로 돌아온다. 그렇게 몇 년 만에 히나와 재회하는 장면에서 터져 나오는 주제곡 ‘괜찮아’는 2시간에 가까운 긴 영화의 엔딩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世界さな っているのが にだけはえて しそうでいると (세상이 너의 조그만 어깨에 얹혀 있는 게 나에게만은 보여서 울어 버릴 것 같으면)

교복을 입고 비가 그치길 간절히 비는 히나는 영화 내내 짊어지고 있던 자신의 숙명을 내려놓고 홀가분해 보이는 모습이다. 그와 동시에 저렇게 어린 소녀가 어째서 맑음 소녀로 일하며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는지 안타까워진다. 히나가 아닌 ‘맑음 소녀’로 불려야 했을 그 긴 시간들을 가늠하며 이제는 오래오래 웃을 일만 있길 바라게 됐다.

気付いてさ くから ("괜찮아?"라고 네가 눈치채고 물으니까) / なんでそんなことを うんだよ れそうなのは なのに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무너질 듯한 사람은 바로 너인데)

히나가 자신보다 누나였을 거라 생각한 호다카가 후에 히나의 나이를 알고 ‘오빠인 내가 지켜줘야 했는데’라며 후회하는 장면이 있다. 이 가사를 읽고 특히 그 장면이 생각났다. 항상 많은 걸 짊어지며 버겁게 지냈던 히나는 오히려 호다카를 챙기고, 이후 호다카는 히나를 지키지 못했음에 자책하는 모습. 그 자책의 순간 속에 호다카의 머릿속에는 얼마나 많은 히나의 얼굴들이 떠올랐을까. 늘 자신을 챙겨주기만 했던 히나의 모습과 처음으로 투명해진 몸을 보여주며 울음을 참던 히나의 모습이, ‘무너질 듯한 사람’의 형태를 한 히나의 모습이 호다카의 머릿속에 내내 떠다니지 않았을까. 무너지는 순간에도 호다카를 안아주던 히나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런 걸 생각하고 나면 그제야 성인이 된 호다카와 여전히 교복을 입고 있는 히나, 아무런 걱정 없는 얼굴로 호다카에게 ‘안기는’ 히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君を大丈夫にしたいんじゃない 君にとっての 「大丈夫」になりたい (너를 괜찮게 하고 싶은 게 아닌 너에게 있어서 "괜찮음"이 되고 싶어)

맑음 소녀로 살며 호다카에게 ‘괜찮음’이 되었던 히나. 이제는 호다카가 히나에게 ‘괜찮음’이 될 차례다. 손을 맞잡고 추락하며 타인이 아닌 자신을 위해 기도하란 말을 하던 호다카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로 히나와 손을 맞잡고 ‘우리들은 분명 괜찮을 거야’라고 말한다. 그 근거 없는 한 마디는 낭만적이고도 아름다워서 정말 세상 어딘가 히나와 호다카가 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약자와 약자가 손을 맞잡고 만들어낸 부드럽고 여린, 모든 것이 괜찮은 세상에서 말이다.

 

天気

‘날씨의 아이’는 사회가 던지는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청소년, 다수를 위해 희생을 강요받는 소수, 비난과 조롱을 견디며 사는 모든 약자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영화라 생각한다. 호다카의 무모한 행동이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도, 짜증 날 수도,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한가. 모두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지 않는다 한들 그것이 이 영화를 보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타인과 다른 생각을 말하거나 하면 강하게 비판받고 공격받는 현상, 뭔가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하면 일거에 무너질 만큼 두들겨 맞는 일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 대신 히나를 선택한 것이 남들과는 ‘다른’ 선택이었다는 이유로 ‘민폐캐’ 소리를 듣는 호다카를 보면 감독의 말마따나 세계는 다름에 너무도 혹독하단 것이 느껴진다. 그렇기에 더욱 그런 설정과 서사를 가진 호다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보며 아름다웠던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약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내내 맑음 소녀와 가출 소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감독이 건넨 위로에 나의 마음까지도 물들었기 때문이다.

카임
카임

추천 콘텐츠

사랑하며 죽으리라 : 킹누의 「Prayer X」 뮤직비디오를 애니메이션 『바나나 피쉬』를 중심으로

※애니메이션 『바나나 피쉬』를 기반으로 킹누의 「Prayer X」 뮤직비디오를 해석한 글입니다. 바나나 피쉬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킹누의 Prayer X 뮤직비디오는 기괴한 형태의 눈을 가진 노란 머리 소년으로 시작한다. 이는 금발의 헤어스타일과 초록색 눈을 가진 바나나 피쉬 속 애시 링크스를 떠올리게 한다. 기괴함과 모호함으로 범벅된 뮤직비디오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증거라고 할 것은 영상 속 애시 링크스(와 유사한 생김새의 주인공)로, 이것은 뮤직비디오의 해석 방향이 명백히 바나나 피쉬와 연관되어야 함을 표상한다. 영상 속 노란 머리 소년은 몸을 완전히 뒤집은 채 무력하게 추락하다가도 몸을 비틀어 새처럼 날아가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그러다 알 수 없는 힘에 끌리기라도 하는 듯 이리저리 휘둘린다. 무표정의 소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추락할 뿐이지만 그것을 감상하는 입장에선 역시 그와 함께 무력해진다. 이는 바나나 피쉬 속 애시 링크스의 삶 전반에 걸친 감각과 유사하다. 어릴 적부터 마피아 조직의 보스 밑에서 강제로 매춘을 했던 그의 삶은 그때에 고여있다. 보스의 명령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웠고 그로 인해 숱하게 사람을 죽였지만 그것은 그의 외면만을 강하게 할 뿐이다. 속이 텅 비어있는 그의 무력감은 자신의 가장 끔찍한 과거인 ‘매춘’을 최선이자 최후의 방안으로 선택하고(그리고 그것은 애시의 예상대로 대개 잘 먹혀 들어간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갱단의 어린 보스답지 않게 살인이란 행위에 유독 심한 죄책을 느끼는 모습으로써 나타난다. 사실은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타인에 의해 종용된 삶의 방식에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무력을 배웠다. 영상 속 추락하는 소년의 모습은 벼랑 끝에서 악착같이 생에 매달렸으나 언제나 쓸쓸한 뒷모습을 하던 어린 보스의 내면을 연상케 한다. 영상 속 소년은 피아노 연주자다. 어린 보스였던 애시와는 사뭇 다른 역할이긴 하나 그들의 주변을 둘러싼 자들은 두 인물에게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년의 앞에는 검은 뒤통수들이 촘촘히 모여있고 이후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 검은 뒤통수들은 무력하게 앞을 걷는 소년을 향해 끝없이 절을 한다. 소년은 검은 뒤통수들에게 언제나 숭배의 대상이 된다. 이는 애시 링크스도 마찬가지다. 고르치네에 의하면 그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험한 짐승’으로 완전한 천재로 치부된다. 그의 몸을 갖고 싶어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능력을 이용해 세계 최고가 되려는 자들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무려 1화부터 마지막 화인 24화까지. 그리하여 애시의 존재 자체와 그의 천재적이고 천부적인 재능은 언제나 숭배의 대상이 된다. 뛰어난 리더십, 200이 넘는 아이큐, 최고의 스승에게 배운 최고의 제자만이 선보일 수 있는 최고의 전투 능력. “근데 둘이 성격은 정반대네. 형은 조용한 시인이었는데.”“맞아, 형은 글쓰기를 좋아해. 편지를 자주 보냈어.” - 바나나 피쉬 「강을 건너 숲속에」 中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건 그가 자발적으로 꾸

  • 카임
  • 2023-12-02
정의를 지키기 위한다는 이유로 적을 몰살시키며* : 표절 논란을 통해 바라본 ‘정의로운 대중’

한 유명 음악가의 표절 논란을 시작으로 한국 음악계의 표절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실 나는 이 논란에 관심이 없었다. 누가 표절을 했단 소식을 우연히 접한 뒤 내게 남은 생각은 ‘그 사람 표절했나 보네.’ 였을 뿐 별다른 감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여전히 그렇다. 이 노래와 그 노래의 유사성이 어느 정도이고, 그 사람이 몇 곡이나 표절했으며, 얼마나 오랜 기간 대중을 속여왔는지에 대한 것은 여전히 관심 밖의 일이다. 그리하여 이 글은 표절에 대한 나의 비평이 아니다. 오히려 표절과는 아주 동떨어진, 그런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표절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이무진의 <신호등>이란 노래에 대한 표절 논란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무진의 대표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호등>은 이전부터 수면 아래에서 일본 그룹 세카이노 오와리의 <Dragon Night>라는 노래와의 유사성이 언급되어왔다. 그러던 와중, 음악계의 표절 논란이 연이어 터지면서 이무진의 <신호등> 역시 대중들의 레이더망을 피할 수 없었다. 이무진 측에서는 표절이 아니라는 입장을 확실히 밝혔으나 많은 인기를 얻었던 곡인지라 그 파장이 더욱 큰 듯했다. 말하자면 나는 세카이노 오와리의 팬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절 논란이 일기 전부터 <신호등>과 <Dragon Night>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표절 ‘논란’이 될 정도로 유사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기사를 접하고 나서 많이 놀랐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두 노래의 유사성도, 표절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도 아니다. 이 표절 논란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다. 내가 이무진의 편이든 세카이노 오와리의 편이든, 이러한 표절 논란은 어느 편에서라도 달갑지가 않다. 그 까닭에 대해 내가 누누이 말해오던 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표절을 한 쪽이든 표절을 당한 쪽이든 댓글 창이 엉망(순화시킨 표현이다)이 되기 때문’이다. 논란을 알게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스트리밍 사이트에 들어가 <Dragon Night>의 댓글 창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팬들이 남긴 정성스러운 감상으로 가득하던 댓글 창은 순식간에 표절 얘기로 가득했다. 표절에 대한 언급이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정말 문제는 다음의 댓글들에서 나타난다. ‘덕분에 신호등보다 훨씬 좋은 노래 알고 가네요.’, ‘일본XX들이 한국에서 뺏어간 게 얼마나 많은데 우린 좀 뺏으면 안 되냐?’, ‘괜한 표절 트집 때문에 싫어하는 일본 노래 들었네.’ 같은 것들. 평소 이용하던 한 군데의 스트리밍 사이트의 댓글만 옮겨온 것이므로 다른 사이트나 유튜브 댓글까지 합치면 또 어떤 기상천외한 내용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물며 표절을 당한 쪽의 댓글도 이런데 <신호등>의 댓글 창은 또 어떨지,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이것들이 문제인 이유는 ‘정의로운 대중’의 가면을 덮어쓰고 맥락 없는 혐오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이는 혐오를 하기 위해 혐

  • 카임
  • 2022-07-30
아무튼 죽음으로 귀결되는 우리는 : 센치밀리멘탈, 死んでしまいたい、(죽고 싶어,)

センチミリメンタル 「死んでしまいたい、」 (노래 링크를 함께 첨부합니다. 클릭하면 영상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죽고 싶단 생각을 시작하는가? 정확히 측정할 수도, 모두 같을 수도 없지만, 일단 죽고 싶음의 시작점에 발을 들인 이상 멈추기란 불가능하다. 이따금 살고 싶어질 때가 존재하지만 어쨌든 우리에겐 늘 죽고 싶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점에서 센치밀리멘탈의 死んでしまいたい、(죽고 싶어,)는 3분이란 시간 속에 우리의 삶을 압축한다. 죽음과 필연적인 관계에 놓인 우리를 향해 쏟아내는 가사는 어쩐지 독특하다.   捨てたくても 捨てられずに 積み上げたままのゴミみたいなこの僕の「いのち」を今日も生きているよ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고 쌓아놓은 쓰레기 같은 나의 생명을 오늘도 살아가고 있어) 노래는 흔한 자기 비하로 시작한다. 자신의 삶을 쓰레기에 비유함과 동시에 흘러나오는 가녀린 피아노 선율은 후반의 '나의 생명을 오늘도 살아가고 있어'라는 가사와 함께 강렬해지기 시작한다. 죽음과 삶의 구조로 생각하면 어쩐지 살아가는 것에 형광펜을 칠하는 듯한 느낌이다. 자신을 혐오하는 우울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어쨌든 살아있음에 악센트가 붙는다. 死んでしまいたい、 死んでしまいたい、 死んでしまいたい、 死んでしまいたい、 死んでしまいたい、 死んでしまいたい、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노래의 가사를 찾아보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다. 제목과 동일한 '죽고 싶어'라는 가사를 한 번에 여섯 번씩 반복하는 모습은 뇌리에 박힐 수밖에 없다. 바로 직전, 살아가고 있음을 노래하던 구간에서 강렬하게 내리꽂던 피아노 선율은 이 구간에 와서 조금은 가녀려진다. 덕분에 어디선가 치이고 치여서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죽고 싶어"라고 중얼거리는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다. 더구나, '죽고 싶어'라는 단조로운 문장이 반복되는 이 구간은 오로지 멜로디만 달라지며 진행된다. 고음을 지르기도, 가성을 섞기도, 낮게 깔기도 하며 다양한 '죽고 싶어'를 말한다. 그리고 이 무렵 뮤직비디오는 현실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비춰준다. 전화를 받으며 머리를 조아리는 직장인, 무표정한 얼굴로 빨래를 개는 주부, 공부 중인 학생, 누워서 휴대폰을 하는 백수. 여섯 번의 '죽고 싶어'가 서로 다른 멜로디를 가지듯 우리가 외치는 "죽고 싶어"는 모두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でも、死ねないのは (하지만 죽지 못하는 건) '죽고 싶어'라는 가사를 여러 번 반복한 후, 어쩐지 체념한 듯한 어조로 다음 가사가 흐른다. 나의 경우엔 '죽고 싶어'부터 '죽지 못하는 건'까지의 부분을 들으며 왠지 익숙하단 기분을 받았다. 나는 미치도록 현실이 옥죄어오던 날, 죽고 싶다는 말을 노트에 가득 썼던 적이 있다. 팔뚝에 자해의 형태를 띤 부적을 새기고 머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다가, 어차피 죽지 못함을 깨달았을 때 "이래 봤자 죽지도 못하잖아."라는

  • 카임
  • 2022-01-28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카임

    감상과 비평 게시판을 이용해보는 것도, 이런 종류의 글을 각 잡고 써보는 것도 처음이에요. 무언가를 감상하고 내 생각을 텍스트로 녹여낸다는 건 정말 어렵네요? 그렇지만 더 연습해나가며 앞으로도 감상과 비평 게시판을 자주 이용할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1-07-21 00:25:43
    카임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