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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지키기 위한다는 이유로 적을 몰살시키며* : 표절 논란을 통해 바라본 ‘정의로운 대중’

  • 작성자 카임
  • 작성일 2022-07-30
  • 조회수 992

한 유명 음악가의 표절 논란을 시작으로 한국 음악계의 표절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실 나는 이 논란에 관심이 없었다. 누가 표절을 했단 소식을 우연히 접한 뒤 내게 남은 생각은 ‘그 사람 표절했나 보네.’ 였을 뿐 별다른 감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여전히 그렇다. 이 노래와 그 노래의 유사성이 어느 정도이고, 그 사람이 몇 곡이나 표절했으며, 얼마나 오랜 기간 대중을 속여왔는지에 대한 것은 여전히 관심 밖의 일이다. 그리하여 이 글은 표절에 대한 나의 비평이 아니다. 오히려 표절과는 아주 동떨어진, 그런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표절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이무진의 <신호등>이란 노래에 대한 표절 논란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무진의 대표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호등>은 이전부터 수면 아래에서 일본 그룹 세카이노 오와리의 <Dragon Night>라는 노래와의 유사성이 언급되어왔다. 그러던 와중, 음악계의 표절 논란이 연이어 터지면서 이무진의 <신호등> 역시 대중들의 레이더망을 피할 수 없었다. 이무진 측에서는 표절이 아니라는 입장을 확실히 밝혔으나 많은 인기를 얻었던 곡인지라 그 파장이 더욱 큰 듯했다.

말하자면 나는 세카이노 오와리의 팬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절 논란이 일기 전부터 <신호등>과 <Dragon Night>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표절 ‘논란’이 될 정도로 유사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기사를 접하고 나서 많이 놀랐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두 노래의 유사성도, 표절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도 아니다. 이 표절 논란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다.

내가 이무진의 편이든 세카이노 오와리의 편이든, 이러한 표절 논란은 어느 편에서라도 달갑지가 않다. 그 까닭에 대해 내가 누누이 말해오던 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표절을 한 쪽이든 표절을 당한 쪽이든 댓글 창이 엉망(순화시킨 표현이다)이 되기 때문’이다.

논란을 알게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스트리밍 사이트에 들어가 <Dragon Night>의 댓글 창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팬들이 남긴 정성스러운 감상으로 가득하던 댓글 창은 순식간에 표절 얘기로 가득했다. 표절에 대한 언급이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정말 문제는 다음의 댓글들에서 나타난다. ‘덕분에 신호등보다 훨씬 좋은 노래 알고 가네요.’, ‘일본XX들이 한국에서 뺏어간 게 얼마나 많은데 우린 좀 뺏으면 안 되냐?’, ‘괜한 표절 트집 때문에 싫어하는 일본 노래 들었네.’ 같은 것들. 평소 이용하던 한 군데의 스트리밍 사이트의 댓글만 옮겨온 것이므로 다른 사이트나 유튜브 댓글까지 합치면 또 어떤 기상천외한 내용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물며 표절을 당한 쪽의 댓글도 이런데 <신호등>의 댓글 창은 또 어떨지,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이것들이 문제인 이유는 ‘정의로운 대중’의 가면을 덮어쓰고 맥락 없는 혐오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이는 혐오를 하기 위해 혐오를 한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너무 정의에 도취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표절에 대한 대중의 적절한 반응이란 무엇일까. 답은 없겠지만 오답은 있다. 앞서 보여준 댓글 같은 모습이 오답이다. 한쪽을 한껏 낮추고 반대쪽을 추켜세우는 댓글은 어느 쪽도 기쁘게 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가 일본 그룹이라는 것에서 오는 맥락 없는 일본 혐오도 지금의 논란에 꼭 필요한 비판인가 싶다. 사회 전체적으로 ‘정의로운 나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이 만연해 있다. 되레 세카이노 오와리를 비난하는 쪽의 댓글은 정말 ‘무無맥락 혐오자들’이 맞지만, 이무진을 한껏 끌어내리고 세카이노 오와리의 노래를 추켜세우는 것은 정의에 도취해 자신이 쏟아내는 혐오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당장 유튜브의 썸네일이나 뉴스 기사들의 헤드라인만 보아도 모두 자극을 추구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일 것이다. 너무 매운 음식이나 짠 음식이 몸에 좋지 않은 것처럼, 너무 자극적인 사회도 우리에게 좋지 않다. 애초에 표절이라는 것은 자연스레 표절을 한 사람 혹은 당한 사람에게 화살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게다가 자극을 쫓는 대중의 ‘자극적인 정의’는 무엇보다 날카롭게 갈아져 있다. 이러한 논란들을 지켜보다 보면 ‘누구 하나 죽겠네’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잘못을 비판하는 일에 언제부터 비난이 디폴트가 되었는가. 우리는 남을 끌어내리지 않고도 적당한 비판을 할 줄 아는 생물체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대중의 의무이다. 비난은 우리의 권리였던 적이 없다.

 

‘세카이노 오와리’라는 그룹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으로서 이번 논란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더욱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세카이노 오와리는 무엇보다 평화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그룹이다. 특히 대부분의 곡을 작사하는 보컬 후카세가 그렇다. 선과 악, 정의, 평화, 생명, 사람의 모순, 이런 것들에 대한 깊은 사유가 그들의 가사에는 잘 드러나 있다. 후카세의 철학적인 가사들은 그가 얼마나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고뇌하고 있으며 평화를 갈망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표절 논란에서 언급된 <Dragon Night>는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 일어난 크리스마스 정전을 모티브로 지어진 노래이다.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군인들이 크리스마스가 되자 전쟁을 잊고 적군과 아군 구분 없이 함께 노래 부르고 환호하고 음식을 나눠 먹고 적군의 시체를 땅에 묻어주며, 평화로운 순간을 보냈다고 한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피어난 평화라는 모순. 사실 나는 평화라는 세상 속에서 피어난 전쟁이라는 모순, 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리하여 이러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지어진 <Dragon Night> 역시 평화와 정의(전쟁)의 모순에 대해 노래한다.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싸움도 오늘 밤은 휴전의 증표인 불을 지펴

사람은 각자 다른 정의가 있어서 서로 다투는 건 어쩔 수 없는지도 몰라

하지만 나의 정의가 분명 그 사람을 상처입혔겠지

오늘 밤 우리들은 친구처럼 노래하겠지

오늘 밤 우리들의 싸움은 끝나는 거야 SEKAI NO OWARI Dragon Night

<Dragon Night>는 싸움의 끝을 노래하는데 어째서 이 노래의 댓글 창엔 싸움의 불이 붙었는가. 전쟁이란 상황 속 피어난 평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 노래가 어째서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데 사용되고 있는가. 나는 이번 표절 논란을 지켜보며 평화를 이야기하는 노래 밑으로 달린 평화롭지 않은 댓글들에 대해, 그러한 모순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세카이노 오와리가 이번 표절 논란에 대해 말한 적은 없으므로 그들의 정확한 입장은 모르겠다. 다만, 논란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아무래도 세카이노 오와리가 크게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다. 정의란 명목으로 상대 가수를 깎아내리고 자신들을 추켜세워주는 방식을 과연 그들이 좋아할까? 사실 이것은 질문이라기보단 확신이다. 좋아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 누구도 기뻐지지 않는 정의에 대한 비판을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Dragon Night>라는 노래가 가진 의미와 세카이노 오와리라는 그룹의 정체성, 그리고 표절 논란에 대한 어긋난 방향의 정의에서 오는 아이러니함에서 시작했다. 사실 나만이 옳은 과도한 정의에 도취한 자들에겐 노래의 의미라든지 그룹의 정체성, 하물며 표절에 대한 사실 여부마저도 별로 중요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글을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의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 것치곤 나 역시 정의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고 사실 완벽한 정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방식의 정의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누군가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것과 ‘누구 하나 죽겠다’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방식 같은 건 아무래도 정의가 아니다. 그저 혐오에 불과하다. 혐오가 정의처럼 감싸진 이 사회에 대해서 누군가는 말을 해야 했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혐오가 ‘사이다’고 ‘참교육’인 줄 아는 사람들에게 그런 건 ‘사이다’도 ‘참교육’도 아니라는 말을, 이번 표절 논란을 통해서 말이다. 내 메시지가 누군가에게는 닿았길 바란다.

 

 

*SEKAI NO OWARI 「Love The Warz」가사 변형

카임
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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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교

    카임 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정의에 도취된 혐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고, 저도 최근 일어났던 여러 표절 이슈와 이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던 터라 이 글이 더 반갑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정말로 표절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다양한 영향관계들을 어떻게 모니터링하고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펼쳐지기 보다 무분별한 테러와 혐오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환멸과 허무 속에서 나가떨어지거나 극단적 언행만 남게된 것 같아요. 카임 님께서 잘 지적해주셨다시피 우리 시대의 혐오의 실상은 정의나 공정이라는 옳은 가치를 외피를 삼으며 번성한다는 사실이 작금의 온라인 커뮤니티의 주요한 특징인 것 같아요. 그래서 카임 님 글에도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온라인 덧글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민주적인 의견 표명의 공론장으로 기대되었었는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가 않죠. 제가 음악에는 문외한이라 이러한 논란들의 진위여부에 판가름할 입장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테러를 당해야 할 사람, 맞아도 싼 사람, 사장되어야 할 사람을 찾는 방식으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소개해주신 세카이노 오와리 그룹의 음악적 성격을 보니 더욱 그렇네요. 문제 설정과 입장 등을 잘 표명해주신 글 같습니다. 다음 번에도 고민하고 있는 것들 함께 나눠주세요.

    • 2022-09-09 14:00:20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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