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내게 돌아온다고 말했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 이디스 워튼의 「여름」
- 작성자 난바다
- 작성일 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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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름을 싫어한다. 그럼에도 여름을 사랑한다. 신기하게도 여름이란 단 두 글자는 나에게 참 다양한 감정을 선사해주는 단어였다. 분명 여름이 왔을 때에는 찝찝하고 더워 금방 가기를 원하다가도 되돌아보면 여름 감성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아련하니. 여름은 그 두 음절마저 애틋했다. 이디스 워튼의 「여름」 역시 마찬가지다. 가수는 노래 제목에 따라 산다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여름」은 말 그대로의 계절, 그래 그 여름을 닮았다. 솔직히 말해 이 책의 홍보 글귀에서처럼 ‘여성의 성적 열정을 솔직하게 다룬 최초의 작품’, 이라던가 ‘인습과 전통에 맞서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는 여성을 묘사하여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작품’, 이라던가. 그런 거창한 말과는 잘 어울리지 않은 작품이면서도 묘한 충격을 준 작품이라 한동안 나는 「여름」에 대하여 곱씹었다.
“그런데 말이죠, 공기와 햇볕을 조금만 쏘여도 이 책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꽤 귀한 책이거든요.” (p.19)
채리티는 로열 씨가 산에서 데려온 아이로, 자유를 갈망하는 여성이다. 그녀가 이 책이 시작된 이후로 처음 내뱉은 말은 다름 아닌 모든 게 지긋지긋하다는 말이었는데 그럴만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채리티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로열 씨가 그녀에게 청혼을 한 것. 그녀와 큰 나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키워준 거나 다를 바 없는 로열 씨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자 채리티는 당황하면서도 동시에 그에게 큰 경멸을 느끼게 된다. 한편, 해처드 부인의 사촌 동생인 하니는 그녀가 살던 노스도머에 놀러오는데 그는 도서관에서 책을 관리하는 채리티와 첫 만남을 갖게 된다. 이것이 채리티에게 있어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나 역시 아직까지도 헷갈리는 부분이다.
노스도머에 머문 열흘 동안 루시어스 하니는 단 한 번도 채리티에게 사랑의 말을 고백하지 않았다. (p.71)
채리티는 도시에서 온 하니와 만나서는 안 된다는 주위의 염려와 계속해서 그와 가까이 지내지 말자며 연신 자신에게 다짐의 말을 하면서도 채리티와 하니는 만남을 지속해왔다. 결국 로열 씨까지도 그 소식을 알게 되는데 로열 씨는 그런 채리티에게 자신과 결혼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며 청혼을 재차 하지만 채리티는 이미 하니에게 사랑에 빠진 후였다. 그러나 하니는 그런 채리티에게 사랑의 말을 고백하지 않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니가 약혼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리티는 그런 하니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왜 알리지 않았냐며 따지지만 한 편으론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하니는 그런 채리티에게 약혼을 취소하고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한다. 채리티는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애너벨 볼치와 결혼을 약속했다면 그녀와 결혼했으면 해. 당신은 그 일로 내가 몹시 가슴 아파할 거라고 걱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나는 당신이 옳게 행동했으면 하는 마음이야.
-당신을 사랑하는 채리티-
(p.203)
채리티는 돌아오지 않는 그에게 편지를 부쳤다. 약혼을 진행하라는 말을 담은 채. 그녀는 자신의 배를 흘낏 쳐다보았다. 하니가 그녀에게 남긴 것은 사랑이란 감정뿐만 아니라 그녀의 뱃속 깊은 곳에 자리한 작은 생명도 있었다. 그녀는 그런 아이가 미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이미 약혼을 했을 하니의 아이는 결국 아비 없이 클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채리티는 산에 있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간다. 자신이 태어난 산에서 그의 아이를 키울 생각을 하며. 그러나 그녀가 산에 갔을 때에 이미 채리티의 어머니는 죽어 있었다.
나는 로열 씨와 결혼했어.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억할게. (p.262)
채리티는 산에서 내려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로열 씨에게로 돌아왔다. 끝내 그녀는 로열 씨가 다시 한 번 물어보는 청혼에 승낙을 한다. 로열 씨는 채리티와 결혼을 하였으나 늘 부부가 같이 자야 할 침대에 불편하게 웅크려 누워 잠을 자며 채리티를 안심시켜주려고 하지만 그녀는 그저 그를 보며 서서히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배를 끌어안았다. 여름은 떠나고 가을이 서서히 찾아왔다.
1. 「여름」은 과연 성장 소설인가.
「여름」의 뒷 표지를 보며 여성의 성장 소설이란 말이 적혀 있다. 이 책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 큰 감명을 받은 것도 사실이나 나는 이 책이 성장 소설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처음 부분만 읽어도 채리티는 다소 철이 없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자유를 그 누구보다 갈망하며 진취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는데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벗어나려고 했던 로열 씨의 곁으로 돌아와 결혼을 했다는 것은 결국 그 시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맞춰 살았다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아쉬움이 느껴졌다. 채리티가 성숙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성숙해지는 과정 속에서 본래 채리티가 가지고 있던 자유와 진취성을 사라진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한 사랑을 배우는 과정 역시 능동적인 태도라고 보기 어려웠다. 하니가 그녀를 버리고 떠났을 때에 그녀가 끝내 배운 것은 ‘사랑’이 아닌 ‘체념’이 아니었을까. 성장 소설이라고 하기엔 채리티는 너무나도 아팠고 그 결말 역시 아팠다.
2. 「여름」에 등장하는 사랑의 방법이란 무엇일까.
소설 속에서는 하니를 도시에서 온 남자로 멋들어지게 표현한다. 나는 그러나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니라는 인물이 채리티에게 있어 가장 큰 행운이자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려준 것은 사실이나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 준 불행이 너무나도 크기에 보면서 하니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문점과 묘한 감정이 들었다. 작품 해설을 보면 하니와 채리티의 ‘사랑’이라 표현을 하는데 나는 ‘사랑’이란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채리티에게 사랑이었을지 몰라도 하니에게 있어 그것은 ‘사랑’일지, 아니면 그저 작은 ‘유흥’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의 방법은 세상에 너무나도 많고 다양하지만 이것 역시 사랑의 방법에 포함이 된다고 한다면 가장 아픈 사랑의 형태일 것이다. 로열 씨와 채리티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물론 사랑에는 나이 차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채리티는 로열 씨의 청혼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려고 하는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해설에 따르면 채리티가 로열 씨와 같은 권력 있는 남자의 청혼을 거부한 것이 진취적인 행동이라 하지만 결국에 그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점은 결국 채리티 역시 수동적인 인물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남게 만들었다. 채리티와의 로열 씨의 관계가 사랑의 한 방법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것 역시 방법에 포함된다 한다면 제일 잘못된 형태의 사랑이라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3. 「여름」의 결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름」의 문체와 그 작품 속 묻어져 나오는 분위기와 묘사 등 모든 것이 황홀한데다 나 역시 그 부분을 사랑하나 「여름」의 결말은 다소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 때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혼자 아이를 키우기에는 (심지어 어린 여자에, 돈도 권력도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안 봐도 뻔하다) 벅찰 것이 분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름」을 성장 소설과 여성으로서의 성적 열망을 솔직하게 표현한 작품, 진취적인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결말이었다. 이 작품 속 중요인물인 하니, 채리티, 로열 씨. 모두에게 쓰라린 상처만 남길 결말이라고 해야 할까. 채리티는 벗어나려고 했던 로열 씨 곁에서 남게 되고 로열 씨는 그토록 얻고 싶었던 채리티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하니는 자신의 아이가 있었는지 조차 모른 채 약혼을 진행하게 될 테니. 채리티의 돌아오겠다는 이 선택조차 채리티의 의지라고 말하는 의견들이 몇 몇 있긴 하였으나 과연 채리티에게 선택지가 많았을까. 앞서 말했듯이 채리티는 어린데다 돈도, 권력도 없어 로열 씨가 후견인으로서 산에서 데리고 온 여성이다. 그런 그녀에게 로열 씨의 곁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 외에 뭐가 있었을까. 그 탓에 나는 채리티를 두고 떠난 하니에 대하여 굉장히 복잡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망에 가까운 마음일 것이다. 채리티를 두고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녀와 사랑을 나누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그녀에게 먼저 연락을 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채리티는 여전히 동네를 뛰어다니는 소녀이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그 탓에 결말 부분에서 결국 채리티가 성장을 한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단 그녀가 갈구하던 자유도, 사랑도 잃은 채 로열 씨 곁에서 산다는 그 부분만 눈에 띄었다. 아마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채리티가 성숙해지는 과정이겠지만 그 과정을 전부 잊게 만들 정도로 결말은 파격적이면서도 많이 아쉬웠다.
-저녁때까지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p.115)
「여름」은 내가 총 세 번을 읽은 책이다. 본래 한 책을 이렇게 많이 읽는 편은 아닌데 여름날이면 한 번씩 읽다보니 어느 새 총 세 번을 읽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눈에 밟히는 부분이 하나가 있다. 하니가 보낸 편지를 보면 채리티를 기다리겠다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 「여름」을 한 번 읽은 뒤 또 읽는다면 이 부분이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 기다리겠다는 말. 마지막까지도 하니는 채리티에게서 기다려 달라, 꼭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 부분을 보면서 너무나도 가슴 아팠고 그 탓에 세 번 보는 내내 이 부분은 아직도 보면 볼수록 마음이 아팠다.
「여름」의 결말과 전개 과정이 나에게 아쉬움이 많이 남아 그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하였으나 그 점을 제외하자면 「여름」은 굉장히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들의 감정 묘사도 좋았고 그 분위기마저 말 그대로의 여름 그 자체라 마치 등장인물들과 같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특히 기억나는 부분은 하니와 채리티가 호수에서 데이트를 즐겼던 부분인데 그 부분은 정말로 나 역시 그들의 곁에서 연인과 같이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수채화 같다고 해야 할까. 「여름」은 고요히 비 내리는 어느 여름날에 가끔 떠올랐다.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면서 돌아오지 않았던 하니와 달리 「여름」은 그렇게 여름날마다 내 곁에 있는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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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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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사람’이란 단어 역시 좋아한다. 꽤나 뜬금없는 말이지만 나는 사랑과 사람이란 단어는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사랑의 받침을 바꾸면 사람이 되고. 사람에서 또 받침을 슬며시 바꾸면 다시 사랑이 되고.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사랑이란 감정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나는 사랑 없이는 성숙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 아직은 성숙한 사람이 아닌 한낱 고등학생인데다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열심히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밟는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글은 섣부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사랑만 있다면 그냥, 사람이 되기에.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이라는 이 책은 그러한 내게 있어 사랑과 사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더욱 잘 알려주었다.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꽤나 단순한 이유였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지금은 떠났지만 유독 책에 열정적인 선생님이 있었고 그 선생님과 나는 꽤나 친한 사이였던 것 덕분이었다. 자연스레 선생님의 추천으로 이 책과 관련된 프로그램에서 조교와 같은 역할을 제안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 책과의 연은 시작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과의 연이 이리 오래 갈 줄은 몰랐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책도 보고, 생기부도 채울 수 있겠다는,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이었다. 선생님은 그런 내 마음을 아시기라도 하셨는지, 아마 너 이 책을 보면 평생 기억할 걸?, 이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나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앞으로의 내 미래를 다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냥, 사람」에 대해 말하기 앞서, 이 책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홍은전 작가의 삶, 그니까 작가님이 노들야학 (장애인 야간학교)에서 활동하며 쓴 글을 이어붙인 글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장애인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은 적이 없었던 탓에 이 책이 더욱 더 신선하게 느껴졌다. 물론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만 다룬 것이 아닌, 홍은전 작가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월호, 젠더, 아이 등 사람에 관한 이야기뿐만이 아닌 동물의 문제들도 다양하게 다루고 있지만. 나는 장애인이라는 그냥,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 글을 전개해 나가고 싶다. 1. 장애인이라는 이름의 사람. 일단 이 책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나의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나의 할아버지가 장애인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선천적 장애인이 아닌 후천적 장애인. 장애를 얻게 된 사정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할아버지가 나와 비슷한 나이였던 그 시절, 일본 군인에게 총을 맞아 거동이 불편하게 되셨다는 것도, 거동이 불편한 탓에 걸으시다 그만 크게 넘어져 장애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도. 꽤나도 아닌 많이 어두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의 할아버지는 그러한 사정과는 달리 밝은 사람이었다. 늘 산책하시는 걸 좋아하여 매일같이 할머니가 끌어주는 휠체어를 탔고, 카페에 가 언니와 내게 줄 과자를 구경하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고 말할 정도였다. 전동 휠체어를 탄 이후에는 할머니 없이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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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4
나의 할머니께서는 시인이시다. 그 탓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 주위에는 시가 함께 있었다. 시인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모두 낭만적으로 바라보시며 그것들을 사랑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덕분인지. 할머니께서는 고령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낭만적이시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적, 그니까 산과 바다와 함께 지냈을 때에는 지금보다도 더 낭만적이셨다. 예를 들어, 바다를 좋아하는 내게 있어 바다와 관련된 시를 즉석에서 짜 선물을 해 주신다거나 편지를 쓰실 때면 집 앞 들꽃을 꺾어 한데 엮은 뒤에 내게 주신다거나. (그 덕인지 아직도 할머니의 편지를 다시 읽으면 꽃향기가 난다.) 가끔은 글자가 이미 적힌 책 위에 자신의 글자를 덧입혀 쓰시기도 하셨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 물으면 할머니께서는 그러면 책의 향기가 더욱 잘 기억이 된다고 답하셨다. 그러다 보니 나도 어느 순간부터 시집을 읽을 적에 그 옆에 내 글씨체로 그 시를 똑같이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데 그 중, 내가 가장 기억에 남고 사랑하는 시집이 있다면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몇 가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뼈를 녹아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춤을 춘다.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이 노래 끝의 공포를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나는 이것만은 알았다.이 노래의 끝을 맛본 이들은자기만 알고다음 노래의 맛을 알려 주지 아니하였다.) 하늘 복판에 아로새기듯이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의 최초의 시로 열여덟의 나이에 쓴 글로 알려져 있다. 이 시의 해석을 보아하면 삶과 죽음을 면밀하게 표현하여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닌, 같은 것이라는 윤동주 시인의 인식이 반영된 작품이라고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삶이 죽음의 서곡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이상’을 추구한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위인이라 부를 수 있노라고 말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사실, 난 이 작품 해석을 보았을 때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에 나는 우습게도 위로를 받았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한 번이라도 그랬듯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살아가지 아니한가. 어떤 이들은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는 것만 생각할 수 있고 또 다른 이들은 오히려 죽음을 바라며 죽음만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다. 그 중 한 가지만 꼽자면 나는 후자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그 당시에 자존감이 매우 낮았고 (지금도 자존감이 낮긴 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 탓에 몇몇 아이들에게 나는 굉장히 만만한 존재였는데 그 것 때문에 더 그런지 몰라도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죽음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곤 했다. 하루라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고 내가 그리워하는 바다와
- 난바다
- 202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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