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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죽으리라 : 킹누의 「Prayer X」 뮤직비디오를 애니메이션 『바나나 피쉬』를 중심으로

  • 작성자 카임
  • 작성일 2023-12-02
  • 조회수 799



애니메이션 바나나 피쉬를 기반으로 킹누의 Prayer X」 뮤직비디오를 해석한 글입니다바나나 피쉬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킹누의 Prayer X 뮤직비디오는 기괴한 형태의 눈을 가진 노란 머리 소년으로 시작한다이는 금발의 헤어스타일과 초록색 눈을 가진 바나나 피쉬 속 애시 링크스를 떠올리게 한다기괴함과 모호함으로 범벅된 뮤직비디오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증거라고 할 것은 영상 속 애시 링크스(와 유사한 생김새의 주인공)이것은 뮤직비디오의 해석 방향이 명백히 바나나 피쉬와 연관되어야 함을 표상한다.

 


영상 속 노란 머리 소년은 몸을 완전히 뒤집은 채 무력하게 추락하다가도 몸을 비틀어 새처럼 날아가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그러다 알 수 없는 힘에 끌리기라도 하는 듯 이리저리 휘둘린다무표정의 소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추락할 뿐이지만 그것을 감상하는 입장에선 역시 그와 함께 무력해진다이는 바나나 피쉬 속 애시 링크스의 삶 전반에 걸친 감각과 유사하다어릴 적부터 마피아 조직의 보스 밑에서 강제로 매춘을 했던 그의 삶은 그때에 고여있다보스의 명령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웠고 그로 인해 숱하게 사람을 죽였지만 그것은 그의 외면만을 강하게 할 뿐이다속이 텅 비어있는 그의 무력감은 자신의 가장 끔찍한 과거인 매춘을 최선이자 최후의 방안으로 선택하고(그리고 그것은 애시의 예상대로 대개 잘 먹혀 들어간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갱단의 어린 보스답지 않게 살인이란 행위에 유독 심한 죄책을 느끼는 모습으로써 나타난다사실은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타인에 의해 종용된 삶의 방식에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무력을 배웠다영상 속 추락하는 소년의 모습은 벼랑 끝에서 악착같이 생에 매달렸으나 언제나 쓸쓸한 뒷모습을 하던 어린 보스의 내면을 연상케 한다.

 

영상 속 소년은 피아노 연주자다어린 보스였던 애시와는 사뭇 다른 역할이긴 하나 그들의 주변을 둘러싼 자들은 두 인물에게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년의 앞에는 검은 뒤통수들이 촘촘히 모여있고 이후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 검은 뒤통수들은 무력하게 앞을 걷는 소년을 향해 끝없이 절을 한다소년은 검은 뒤통수들에게 언제나 숭배의 대상이 된다이는 애시 링크스도 마찬가지다고르치네에 의하면 그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험한 짐승으로 완전한 천재로 치부된다그의 몸을 갖고 싶어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능력을 이용해 세계 최고가 되려는 자들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무려 1화부터 마지막 화인 24화까지그리하여 애시의 존재 자체와 그의 천재적이고 천부적인 재능은 언제나 숭배의 대상이 된다뛰어난 리더십, 200이 넘는 아이큐최고의 스승에게 배운 최고의 제자만이 선보일 수 있는 최고의 전투 능력.

 

근데 둘이 성격은 정반대네형은 조용한 시인이었는데.”

맞아형은 글쓰기를 좋아해편지를 자주 보냈어.” - 바나나 피쉬 강을 건너 숲속에」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건 그가 자발적으로 꾸려낸 인생이 아니라는 것 정도실제로 애시 링크스는 미친 듯한 천재가 맞고 그것은 충분히 숭배의 대상이 될 만하다하지만 숭배자들은 그의 감성적이고 시적인 면모를 알지 못한다마치 자신의 과 비슷했던 애시의 어린 과거를 말이다과거 회상에서 등장하는 동그랗고 순한 눈매의 어린 애시는 정반대라고 주장하는 형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수틀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흘러갔을 삶이다하지만 그는 정반대의 삶을 살도록 키워졌다원치 않았던 삶의 형태가 숭배의 대상이 된다고 한들 좀 더 무기력해지고 비참해질 뿐이다그의 꽁무니에 얼마나 많은 숭배자들이 붙던지 간에 말이다영상 속 소년은 피아노를 연주한다수많은 검은 뒤통수-그의 숭배자앞에서 연주하던 그는 한껏 몸을 구부리는데 이는 곧 2분 40초에서 다시 연결된다그때 그는 완전히 건반에서 손을 놓은 채다곧 그의 표정은 클로즈업되고 우울한 듯 무기력한 표정의 이목구비는 마구 헝클어지다 이내 눈물 한 방울로 변해버린다마치 애시가 강한 척하다가도 이따금 혼자 우는 것처럼.-물론 그는 혼자 운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그의 소중한 일본인 친구에이지.-

 

검은 뒤통수의 숭배 장면이 끝나면 소년은 한층 기괴한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난다그의 몸은 정자로 서 있다가도 기역 자로 구부러지고구부러졌다가도 얼굴만 크게 클로즈업된 상태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다그것은 제 의지가 아닌 삶을 종용받았던 애시 링크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고르치네 혹은 애시와의 섹스를 위해 돈을 주고 그를 구매한 고위 관료직들그들에 의해서 그의 인생은 영상 속 소년처럼 그들이 원하는 모양과 형태로 이리저리 구부러져야 했다그렇게 해서 이리저리 굴러가는 소년의 눈동자는 아주 오래 뒷세계에 몸 담근 애시의 경계 태세 정도로 해석이 된다실제로 바나나 피쉬에서 애시는 아주 사소한 기척까지도 놓치지 않는다오직 자신의 육감만을 믿고 살아왔다는 그의 말처럼 애시의 경계심은 대단하게 작용한다그의 무의식에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노란 머리 소년이 있을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검은 뒤통수 대신 마피아 조직을 연상케 하는 검은 양복 무리가 등장한다피아노 연주자와는 관련 없어 보이는 듯한 그 관계성은 바나나 피쉬를 통해 연결된다책상에 앉아 있는 소년을 둘러싼 검은 양복 무리는 그에게 무언가를 학습시키려는 듯 보인다누군가는 그의 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하고 누군가는 총을 들고 있기도 하며 누군가는 거대한 덩치로 그의 뒤를 지키고 있기도 하다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강간해온 자들의 손에서 키워지고 학습 당해야 했던 애시의 모습과 겹쳐진다바나나 피쉬에는 애시가 뒷세계에서의 생존을 위한 수단을 학습해왔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 그가 어릴 적부터 그들의 손에 길러졌다면 총을 잡는 법 외에도 많은 학습이 있었을 것이다그들은 애시가 더욱 천재이기를 바랐고 그를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싶어 했으니까더군다나 애시에게 전투 능력을 심어주었던 그의 천재 같은 스승 블랑카는 타인을 죽이고 자신을 지키는 일 외에도 은근한 형태의 방식으로 애시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심어준다마치 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하고 총을 쥐고 있기도 한 그 검은 양복처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온전히 애시의 편에 서서 그 불쌍한 어린 애를 감정적으로 대하지는 않는다고르치네에게서 벗어나 살아가길 원하는 애시에게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 역시 블랑카였으므로그런 면에서 그는 영상 속 소년의 뒤를 지키는 검은 양복의 모습을 닮았다학습과 생존그리고 도망칠 수 없도록 그의 발목을 묶어두는 일까지여기까지 본다면 검은 양복 무리는 오히려 블랑카 한 사람만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하지만 1분 50초에 가서 검은 양복 무리는 블랑카 한 사람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책상에 앉아 있는 소년을 둘러싼 형태의 구도는 사라지고 양복 무리의 가운데에는 노란 금전들만이 나타난다이는 양복 무리들에게 소년은 사람이라기보단 금전적 가치의 대상에 불과했다는 걸 상징한다마치 바나나 피쉬 속 애시 링크스가 그를 노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 그 자체가 아니라 또 다른 수단으로서만 비추어졌던 것처럼고르치네 일당들에게 있어 어린 애시는 돈을 벌어다 오는 남창이었고 동시에 자신들이 따먹을 노리개였으며 그가 조금 더 성장해 그들을 증오하게 된 후에는 가장 아름답고 동시에 가장 천재적인 인간으로 언젠가 고르치네의 후계자가 되어 조직을 세계 최고로 이끌어야 할 존재였다그러니 그가 뒷세계 인간들에게 애시라는 사람 자체로 보였을 리 만무하다하물며 조직 일당들 외의 사람들에게도 그는 언젠가 다운타운의 우두머리가 될 자절대 죽을 리 없을 우리의 보스 뭐 그 정도의 타이틀은 따라붙었으니까영상 속 소년의 얼굴은 점차 기괴하게 일그러진다지독한 무력감과 모멸감그런 것이 그 일그러진 이목구비 안에서 읽힌다그리고 이어지는 소년의 모습은 고독하다홀로 모든 걸 짊어진 사람처럼이건 애시 링크스의 모습과 비교하면 꽤나 큰 차별점을 갖는다애시 링크스를 어떠한 수단이 아닌 애시 그 자체로 바라본 유일한 존재인 에이지는 바나나 피쉬에서 그에게 상당히 큰 심적 위안을 가져다준다물론 그의 존재 자체가 애시의 약점이 되기도 했으나 에이지를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는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해 내기도 한다작중에서 애시와 에이지의 관계를 지켜본 이베 씨는 애시는 에이지와 있을 때 정말 제 나이처럼 보인다라고 말한다에이지의 존재는 애시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리고 삶에 활기를 불러일으킨다하지만 영상 속 소년에겐 에이지와 같은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그를 둘러싼 건 검은 뒤통수와 검은 양복 무리뿐철저한 고독 속에 홀로 모든 걸 짊어지고 있는 것은 비유가 아니라 팩트일 지도 모른다소년은 에이지와 유대를 쌓기 전의 애시 링크스처럼 꾸준하게 무력해한다이 글에서 무력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빈도만큼이나 잦게.

 

1분 5초 무렵에는 소년을 숭배하던 검은 뒤통수의 시선에서 검은색 적의가 표출된다하지만 그 검은 적의를 내뿜은 자가 누구인지는 구분할 수 없다사선으로 찢어진 눈과 웃고 있는 검은 입모두가 똑같은 얼굴을 한 채 여느 때처럼 소년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들은 어느샌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소년의 눈앞에 서로 모습을 드러내려 한다사실 적의를 품고 있던 건 클로즈업 되었던 한 명의 숭배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여기서 하게 된다바나나 피쉬에서 모든 마피아 조직이 애시 링크스를 쟁취하길 원했지만 그것이 꼭 숭배의 의미만을 지닌 것은 아니었던 것처럼모두 애시를 죽이고 싶어 했고 동시에 모두 그를 갖고 싶어 했다소년을 쟁취하려고 달려드는 숭배자들처럼.

 

리의 도움을 안 받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자도 고르치네를 싫어하니 우리에겐 아군 아니야?”

그렇게 무른 녀석이 아니야나랑 영감이 싸우게 된 이유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사건의 전말을 꿰뚫고 있을걸.” - 바나나 피쉬 죽음에서 아침으로」 

 

어떤 도움도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실제로도 순수한 호의는 아니다.) 의심하는 애시 링크스의 버릇은 Prayer X에서 숭배자들과 함께 흘러나오는 이 가사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듯하다.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해?

 

2분 4초 무렵에 검은 적의는 다시금 존재감을 드러낸다이 적의의 화면 이후 등장한 피아노 앞 소년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건반에 손을 올리지도 않은 채 무력하게 팔을 축 내리고 있다.

애시 링크스가 수많은 실전 속에서 습득했을 미친 육감은 언제나 그를 살렸다자살이 아니면 절대 죽지 않을 것 같은 사람그러니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있는 사람그것은 바나나 피쉬 속 애시 링크스다피아노 연주자인 노란 머리 소년은 그 정도의 육감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피아노 앞에 앉아 있기만 할 뿐인 무력한 모습그를 향해 달려드는 검은 뒤통수의 숭배자들고독하게 앉아 있는 소년과 다시금 추락하기 시작하는 그의 육신어쩌면 그것은 에이지를 만나기 전 애시의 모습일 수도 있고영영 에이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드러났을 애시의 모습일 수도 있다애시 링크스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무력함을 표현하는 노란 머리 소년사실상 그를 애시 링크스와 동일 선상에 두는 것보단 애시의 내면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더 잘 맞아떨어진다.

 

난 몇 번이고 들었어네가 자다가 우는 소리를어린애처럼 몸을 웅크리고 도와 달라고 했지엄마를 찾으면서모른 척했지만 가슴 아팠어대체 어떤 악몽에 시달리는 걸까?’ - 바나나 피쉬 킬리만자로의 눈」 

 

애시는 전형적인 외강내유의 형태를 취하는 인간이지만 그것이 시도 때도 없이 외부에 우는 모습을 드러낸다는 의미는 아니다자신의 내면과 가장 맞닿는 순간그때에 그는 자주 눈물을 흘릴 뿐.

-흘러넘치는 눈물처럼 한때의 반짝이는 목숨이라면

하지만 Prayer X의 노래 가사에서 눈물에 대한 서술은 상당히 자주 나온다이것이 하이라이트 부분이기 때문이다애시를 표현한 노래에서 굳이 눈물에 대한 얘기를 하이라이트로 삼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그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는 영원히 마르지 않을 눈물샘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그리고 그런 그의 내면을 가사라는 형태로 짧고 강렬하게 나타내는 방법은 눈물이란 단어의 사용뿐이다.

 

무력감에 시달리는 노란 머리 소년은 결국 죽는다이전까지는 그에게 엎드려 절하기 바빴던 숭배자들이 원흉이 되어그들은 어떠한 이탈도 없이 모두가 똑같은 모습으로 소년을 숭배해 왔다하지만 노래가 끝나갈 무렵 2분 58초에 하나의 이탈이 생긴다숭배자들 중 한 명이 칼을 든 채 소년을 향해 달려들고 무방비 상태의 그의 가슴을 찌른다하지만 소년은 아무렇지 않게 칼을 뽑아버리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자살한다숭배자들 중 한 명의 이탈자로 인해 칼을 맞은 것이 발단하지만 정작 그의 죽음은 스스로의 결정이다소년에겐 애시와 달리 에이지의 존재가 없다는 치명적인 차이점이 있다그러나 바나나 피쉬 속 애시의 최후 역시 소년과 유사하다는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친구웃기는 소리 하지 마네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애시 링크스와 친구라는 거지그놈에게 친구는 필요 없어애시는 야수야자유롭고 통제할 수 없는 아름다운 야수그에게 필요한 건 숭배자나 오서 같은 적대자일 뿐 그 외엔 필요 없어.” - 바나나 피쉬 밤은 부드러워」 

 

애시의 유일한 약점은 에이지의 존재다에이지와 함께 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외로움과 무력감에서 회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하지만 지나치게 허술해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에이지의 마지막 편지를 읽던 중에 애시는 한때 그의 동료 중 한 명이었던 라오의 칼에 찔린다곧장 칼을 빼낸 애시는 피를 뚝뚝 흘린 채 나머지 편지를 읽어나간다그렇게 그는 과다출혈로 죽는다곧장 치료했더라면 분명히 살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사리 분별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우정에 눈이 멀어서라기보단 일종의 자살 행위로 비추어진다총으로 제 머리를 쏴 자살한 소년과는 다르게 간접적인 방식의 자살이지만 둘의 최후는 상당히 유사점이 많다대체 그 기저에는 둘의 어떤 공통점이 작용한 것일까나는 이것을 위에서 인용한 웨룽의 대사로 해석한다숭배자와 적대자의 존재 사이에 놓인 소년에게는 무력감만이 남았을 뿐 살아야 할 다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가르쳐 줘무르고덧없는 날들 속 고통과 슬픔마저 들이킨 지금우린 도대체 무엇을 믿으면 돼?

Prayer X의 가사처럼 말이다그렇다면 애시의 경우 무의식의 내면엔 숭배자와 적대자 존재 사이의 무력감이 있다그걸 잠시나마 잊도록 한 것은 에이지의 존재이고에이지의 편지를 읽으며 이런 인생에 의미를 찾았을지 모를 애시는 칼에 찔리는 순간 결국 자신에게는 숭배자나 적대자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했을지 모른다죽음 직전의 무의식의 표출순간적인 무력감을 느낀 동시에 에이지의 편지를 통해 숭배자나 적대자 그 외’ 존재인 친구라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하지만 그것이 그를 더 살고 싶게 했을 것 같지는 않다이미 그는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이 많은 숭배자와 적대자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언젠가 일어날 일인 걸 알면서도 왜 계속 옆에 두고 있었지보호하지도 못할 거면서 외로움만 해결하고 싶었던 거야그는 널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야!” - 바나나 피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첫째로 그는 자신의 존재가 에이지에게는 영영 위험으로 남을 것이란 걸 알았다블랑카의 대사를 기점으로 그것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명확해진다애시를 향한 죽음의 칼날이 언젠가 에이지의 목숨까지 앗을 것이란 걸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우정에 미쳐 바보가 되는 사람은 아니다그는 에이지를 위해서 죽어야 했다하지만 이것은 친구라곤 없는 영상 속 소년의 자살 이유와는 조금 다른 근거이다.

 

애시는 증오의 지배자가 아니라 사랑하며 죽는 걸 택했습니다.” - 바나나 피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둘째로 그는 수많은 증오를 밟고 올라서 계속 생존할 인물이 아니다아무리 뒷세계에서 길러진 인간이라 한들 그 본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차라리 에이지의 존재를 마지막까지 사랑하며 죽기를 택한 것이다이것은 영상 속 소년이 애시의 내면일 경우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다소년 역시 증오를 밟고 계속해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었을 것 같지는 않다소년과 애시둘 다 그 본성의 영역엔 증오의 지배자가 아닌 사랑하며 죽는 자의 피가 흐를 테니까.

 

넌 혼자가 아니야내가 옆에 있어내 영혼은 언제나 너와 함께야.’ - 바나나 피쉬 호밀밭의 파수꾼」 

 

에이지의 마지막 편지는 애시가 사랑하며 죽는 자가 되게 한다칼에 찔린 상처를 치료하지도 않은 채 에이지의 편지를 마저 읽어야 할 이유는 그에게 충분하다.

-분노에 삼켜지며 빛을 동경하며 오늘도 하늘을 응시하는 거겠지

2분 무렵에 소년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지도 않고 단순한 무력감에 젖어있지도 않은 채 숭배자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응시한다살아온 환경 탓에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자들을 죽여야 했지만 그럼에도 애시는 자주 하늘을 쳐다봤던 것처럼그리고 자신의 잔혹함에 대해 오래오래 고통받았던 것처럼.

웨룽의 말은 틀렸다소년과 애시에게 필요한 건 숭배자나 적대자가 아니라 그가 동경할 빛이었다그리고 그건 에이지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된다.

 


Prayer X 뮤직비디오 속 소년과 바나나 피쉬의 애시 링크스는 비슷한 듯 다르고 다른 듯 비슷하다나는 그것이 무력감만이 남은 사람과 적어도 사랑이라는 걸 인지하게 된 사람의 차이 정도로 생각한다. Prayer X는 바나나 피쉬의 13화까지의 엔딩곡으로 사용되었다나는 13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애시의 대사로 둘의 관계가 더 명확해졌다고 여긴다.

애시가 오서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에이지에게 애시는 외친다.

 

일본으로 돌아가… 네게 이런 모습 보이기 싫어!” - 바나나 피쉬 킬리만자로의 눈」 

 

그것이 순도 100퍼센트의 진실된 사랑을 자각한 자의 처절한 외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무의식의 내면에서도 차라리 사랑을 택할 애시 링크스사랑이란 걸 아직 인지하지 못한 또 다른 애시 링크스가 등장하는 Prayer X라는 곡이 그 장면을 기점으로 더는 등장하지 않는 것에서나는 그것을 느끼게 된다.

카임
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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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임
  • 2022-07-30
아무튼 죽음으로 귀결되는 우리는 : 센치밀리멘탈, 死んでしまいたい、(죽고 싶어,)

センチミリメンタル 「死んでしまいたい、」 (노래 링크를 함께 첨부합니다. 클릭하면 영상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죽고 싶단 생각을 시작하는가? 정확히 측정할 수도, 모두 같을 수도 없지만, 일단 죽고 싶음의 시작점에 발을 들인 이상 멈추기란 불가능하다. 이따금 살고 싶어질 때가 존재하지만 어쨌든 우리에겐 늘 죽고 싶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점에서 센치밀리멘탈의 死んでしまいたい、(죽고 싶어,)는 3분이란 시간 속에 우리의 삶을 압축한다. 죽음과 필연적인 관계에 놓인 우리를 향해 쏟아내는 가사는 어쩐지 독특하다.   捨てたくても 捨てられずに 積み上げたままのゴミみたいなこの僕の「いのち」を今日も生きているよ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고 쌓아놓은 쓰레기 같은 나의 생명을 오늘도 살아가고 있어) 노래는 흔한 자기 비하로 시작한다. 자신의 삶을 쓰레기에 비유함과 동시에 흘러나오는 가녀린 피아노 선율은 후반의 '나의 생명을 오늘도 살아가고 있어'라는 가사와 함께 강렬해지기 시작한다. 죽음과 삶의 구조로 생각하면 어쩐지 살아가는 것에 형광펜을 칠하는 듯한 느낌이다. 자신을 혐오하는 우울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어쨌든 살아있음에 악센트가 붙는다. 死んでしまいたい、 死んでしまいたい、 死んでしまいたい、 死んでしまいたい、 死んでしまいたい、 死んでしまいたい、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노래의 가사를 찾아보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다. 제목과 동일한 '죽고 싶어'라는 가사를 한 번에 여섯 번씩 반복하는 모습은 뇌리에 박힐 수밖에 없다. 바로 직전, 살아가고 있음을 노래하던 구간에서 강렬하게 내리꽂던 피아노 선율은 이 구간에 와서 조금은 가녀려진다. 덕분에 어디선가 치이고 치여서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죽고 싶어"라고 중얼거리는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다. 더구나, '죽고 싶어'라는 단조로운 문장이 반복되는 이 구간은 오로지 멜로디만 달라지며 진행된다. 고음을 지르기도, 가성을 섞기도, 낮게 깔기도 하며 다양한 '죽고 싶어'를 말한다. 그리고 이 무렵 뮤직비디오는 현실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비춰준다. 전화를 받으며 머리를 조아리는 직장인, 무표정한 얼굴로 빨래를 개는 주부, 공부 중인 학생, 누워서 휴대폰을 하는 백수. 여섯 번의 '죽고 싶어'가 서로 다른 멜로디를 가지듯 우리가 외치는 "죽고 싶어"는 모두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でも、死ねないのは (하지만 죽지 못하는 건) '죽고 싶어'라는 가사를 여러 번 반복한 후, 어쩐지 체념한 듯한 어조로 다음 가사가 흐른다. 나의 경우엔 '죽고 싶어'부터 '죽지 못하는 건'까지의 부분을 들으며 왠지 익숙하단 기분을 받았다. 나는 미치도록 현실이 옥죄어오던 날, 죽고 싶다는 말을 노트에 가득 썼던 적이 있다. 팔뚝에 자해의 형태를 띤 부적을 새기고 머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다가, 어차피 죽지 못함을 깨달았을 때 "이래 봤자 죽지도 못하잖아."라는

  • 카임
  • 2022-01-28
소외된 모든 이에게 건네는 아름다운 위로 : 날씨의 아이(2019)

(글에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날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건 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오직 기도만으로 비 내리던 날씨를 맑게 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소녀는 흔히 생각하는 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부모를 잃고 동생과 단둘이 남겨진 모습은 신이라기엔 초라한 행색이고, 그런 소녀를 지켜주려는 가출 소년은 갈 곳이 없어 오히려 소녀에게 지킴을 받는다. 멋대로 자연 현상을 조종할 수 있다는 건 신이 아니고서야 가능한 일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이는 어째서 약자의 자리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을까. 영화 ‘날씨의 아이’는 소외된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한다.   ‘왠지 숨이 막혀서요. 동네도 부모님도.’ ‘이곳을 떠나고 싶어서, 그 빛 속에 들어가고 싶어서 달리고 달렸다.’ 남자 주인공 호다카는 가출 소년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설명하는 그의 가출 사유는 너무도 황당하다. 영화 초반부에 ‘숨이 막혀서’라는 다소 사춘기의 반항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유를 들며 관객의 궁금증을 단순하게나마 해소한 뒤, 후반부에 가서는 ‘빛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라는 추상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이러한 이유만으로 가출했다기엔 그저 철없는 반항기 주인공밖엔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호다카의 진짜 가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영화에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도쿄로 향하는 배를 탄 호다카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반창고, 섬에서 자전거를 타던 호다카의 얼굴에 역시나 붙어있는 반창고를 보며 가출 이유가 가정폭력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도쿄는 참 무섭네.’라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라 말하는 호다카는 집에선 폭력을, 도쿄에서는 고립을 견디며 살아가는 청소년이다. 스가 씨와 나츠미의 식사에서 과하게 해맑은 모습이 그 안타까움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너 주는 거야, 비밀로 해.’ 여자 주인공 히나는 부모님을 잃은 채 동생과 함께 살아간다. 나이를 속여가며 아르바이트하는 그녀는 호다카에게 몰래 햄버거를 건네주고, 그것이 첫 만남이다. 그 뒤로 호다카는 그 친절을 잊지 못하고 히나가 위험에 처했을 때 과감히 구해준다. 성매매 업소로 끌려갈 뻔한 히나의 손을 잡고 도망치는 걸 넘어, 히나를 끌고 가려 한 호스트를 총으로 위협하기까지 한다. 길에서 주운 총이라 진짜 총인지의 여부도 몰랐던 호다카는 이 사건을 계기로 히나에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며 혼이 난다. 그러나 호다카는 도쿄에서 받은 첫 친절에 보답하고 싶었을 뿐이다. 히나도 이를 모르지 않아 다시 돌아와 호다카와 여러 얘길 하며 가까워진다. 이렇게 두 약자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부터 하늘이 맑아질 거야.’ 기도를 통해 비가 그치지 않는 도쿄의 날씨를 일시적으로 맑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히나는 그것을 호다카에게도 보여주고, 이를 본 호다카는 히나와 함께 ‘맑음 소녀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불행의 시작이다. 애초에 자연 현상을 멋대로 쥐고 흔드는 건 신에게

  • 카임
  • 2021-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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