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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뉘엘의 시네마와 이상한 세상에 대한 단상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3-12-11
  • 조회수 541

루이스 브뉘엘의 <황금시대>

(브뉘엘의 말을 빌리자면) 루이스 브뉘엘에게 영화는 유머/조롱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그와 (존경해 마지 않는) 살바도르 달리의 데뷔작  <안달루시아의 개(1929)> 부터였다. 눈을 찟어버리는 장면, 잘려있는 손을 담는 카메라, 교황을 창 밖으로 던져버리는 인물까지.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는 평단과 대중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거장의 등장을 선포하는 듯 해보였다. 그러나, <안달루시아의 개>이후 첫 장편작 <황금시대(1930)>를 끝으로 그들은 약 20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정부와 일부 단체에서 너무나도 진보적인 브뉘엘의 행보를 두고만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황금시대>는 그들의 가장 찬란하고, 패기넘치는 영화였다고 말하고 싶다. 


시네마 이야기

극 중 - 부르주아들이 새로운 땅의 개척을 자축하며 연회를 벌이는 사이, 지저분한 노동자들은 거대한 인력거에 탑승한 채 저급한 술을 마시며 능청스럽게 연회장을 배회한다. 이 말도 되지 않는 장면은 관객으로부터 호기심을 부를 법하지만, 부르주아들은 인력거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서로 이야기 하기에 바쁜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하는 일을 그르치고 노동자들에게 시선을 주기란 낭비와 같다. 순간 노동자들은, 그 자리를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게 되어버린다. 부르주아들은 스스로 노동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관심가지지 않으며, 그 존재를 지워버렸다. 연회장에는 더 이상 노동자들과 그들을 태운 거대한 인력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연회장 구석 주방에서 한 하녀가 불 붙은 몸으로 뛰쳐나와 죽는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노동자들에게 그랬듯, 죽은 하녀에게조차 관심을 주지 않는다. 하녀의 시신만 연회장 구석에 쓰러져 있다. 부르주아들에게 하녀는 자신들의 연회를 방해하는 존재다. 하녀 역시 의식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자 하녀의 시신은 불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주방 역시 언제 있었냐는 듯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상한 것은, 장면 이후에도 연회를 즐기는 부르주아들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지 모를 음식들을 요기하고, 어디에서 생겨났을지 모를 재산과 돈으로 작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대게 음식은 주방에서, 서빙은 하녀가, 돈과 재산은 노동자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상기해보자면 이상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바퀴없이 굴러가는 자동차처럼 모순적이다. 돈도, 음식도, 작위도 공급체가 없지만, (부르주아의 시선에서) 그 모든 것들은 계속하여 생겨나고, 존재하고 있다. 그건 불가능한 존재론의 사유와 다름없다.


시네마의 현상

관객은 그 이상한 장면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 첫 번째는 그것이 부뉘엘의 영화이기 때문이다(소수). 그 두번째는 영화표가 아까워서라도 자리에 남는 것일테고, 세번째는 영화가 자신이 본 것의 해답을 줄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혹은 쇼트와 컷이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다수) ) .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관객은 ‘어떻게되었든간’에 그 이상한 장면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상영되는 장면이 이상하더래도, 관객은 ‘순간 바뀐 쇼트와 컷만큼은 정상적일 것’이라는 희망을 건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보았던, 그 기괴한 장면을 머릿 속에 불편하게 간직한 채 다시 영화에 집중한다. 만일 당신이 이상한 장면을 가지고 한 참 곱씹던 도중 엔딩을 맞이했다면, 다시 보아야만 한다. 브뉘엘은 결코 이상한 씬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상한 장면을 생각 중에 있어 무언가를 놓친 것 같다면, 그 영화를 거의 보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 역시 끝까지 이상한 장면에 대한 단서 하나 제시하지는 않는다. 영화를 다 본 관객은 영화를 욕한다. 혹은 자신이 본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자기암시에 빠진다. 게다가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라는 홍보문구만 보고 단순 로맨스물로 착각하고 관람한 사람은, 두 남녀가 부르주아들의 방해로 사랑조차 하지 못해서 동상의 발을 빨아대며 겨우 애무하는 부분이나, 또는 다큐멘터리마냥 뜬근없이 전갈의 생태와 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분개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장르의 파괴와 다름없다. 혹자는 그 부분을 집어 이 영화를 관객에 대한 기만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고, 새로운 시도라고 호평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영화의 상영이 끝나면 객석은 말그대로 총체적 난국, 카오스가 된다. 다만 한가지 염두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브뉘엘은 카오스와 같은 자신의 영화를 유머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관객의 카오스도 유머의 연장선인가. 그렇다면 결국 이 카오스는, 브뉘엘의 것이다. 


허구 - 현실의 진화, 모순의 굴레

영화의 마지막, <소돔의 120일>의 문구와 함께, 예수와 세명의 동방박사들이 등장한다. (<소돔의 120일>은 성에 모인 네 명의 부르주아 주인공들이 여러 여인과 사람들을 강간, 살인, 유린하는 내용의 음란하기 짝이 없는 소설이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와 세명의 동방박사를 백작위로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기를 서슴치않았던 야설의 주인공으로 묘사했다는 것에 있다. 당시 기독교와 천주교가 판을 치고 있던 프랑스에서 정부와 기독교단체에 의해 이 영화는 상영금지 조치를 당했고, 수십년이 흐른 21세기에 와서야 그 모습을 제대로 들어낼 수 있었다. 

루이스 브뉘엘은 자신의 영화를 유머라고 말한 바 있다. 유머. 그 단어 하나. 정말 가볍지만, 그 자체로 순수한 의미를 지닌 무언가 아닌가. 그 유머는, 정부에 의해 심각한 사안이 되었고, 기독교 단체에는 멸시와 증오의 것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건 또다른 장르의 파괴와 같다. 예수조차도 많은 신도들과 자본을 거느렸던 부르주아임을 염두해둔다면, 기독교단체와 정부가 실행했던 <황금시대> 상영금지 또한 부르주아/예수의 권력행사와 다르지 않을 테다. 부르주아와 예수의 등장, 장르의 파괴 등을 기준으로, 루이스 브뉘엘의 《황금시대》는 말이 되지 않는다, 또는 너무 난해하다, 라는 대중의 질타를 받아왔다. 평단은 그의 영화가 실현 불가능의 것인 줄로만 알고, 브뉘엘을 초현실주의자로 불렀다. 그러나, 보라. 영화는 상영금지 조치(부르주아의 권력행사)를 받고, 유머를 상실(장르의 파괴) 했다. 결국 '대중으로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란 질타를 받은 그의 영화는, 내용과 그 방식만 다를 뿐, 실질적으로는 권력행사, 장르 파괴라는 동일한 형태의 결과로 실현되고 말았다. 로셀리니를 제외하면, 세상에는 브뉘엘만큼 리얼리즘의 대가였던 자도 없던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난해하고, 또 말이 되지 않던 세상에서 살고있었 다(혹은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의 해학과 풍자가 현실의 것이 되고 말았을 때. 그건 시네마의 위대함에 대한 또 하나의 반증이자, 세상의 비극에 대한 또 다른 증거가 된다. 그것은 비극이자 환희의 교차로서, 영원히 인류의 곁에 남아 예술과 현실, 그리고 부조리를 질문하는 역할로서 남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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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브레드버리가 쓴 의 60주년 영문 개정판 서문을 읽으며 매우 특이한 문장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술은 우리에게 진실들을 말해주는 거짓이다. (Fiction from Art is a lie that tells us true things, over and over)”처음에는 이 문장을 그냥 지나쳤으나, 책을 읽기에 앞서 그것이 나를 막아서고 있던 것이었다. 평소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픽션이라는 광범위한 예술 형식에 대해서 단 한 문장으로 함축하고 있는 이 문장에 담겨있는 여러 생략들을 곰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술은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 그건 단지 픽션과 문학에만 제한된 일이 아니다. 영화, 문화, 음악, 만화, 미술 같은 모든 예술 형식들 역시 문학과 마찬가지로 진실이 아니다.그것들은 서로를 이루는 것들이 있다. 문학의 경우, 그것은 텍스트의 연쇄로 이루어져있다. 작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텍스트들을 연결한다. 문장과 문장은 서로 연결되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 결과, 작가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고, 묘사하고 싶은 것만 묘사하며, 불필요한 이야기는 건너뛴다. 그들은 텍스트를 창조하고, 텍스트를 더했다가 빼기도 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그렇게 자신들만의 세상을 구축한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쇼트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감독은 쇼트와 쇼트를 이어붙여서 하나의 씬을 만들고, 씬과 씬을 연결해서 하나의 ‘시네마'를 만들어간다. 음악은 음표와 음표들을 연결해서 하나의 박자를 만들고, 멜로디를 만든다. 작곡가는 곡의 흐름을 만들어내므로서, 청중의 감각을 조작한다.결국 모든 예술은 완전한 현실이 아니라,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들로만 이루어진 왜곡된 현실이다. 그러니깐, 예를 들어 당대 프랑스 현실을 매우 적나라하고 암울하게 담아낸, 스탕달의 리얼리즘 걸작 을 만일 진정한 리얼리즘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리얼리스틱’한거지, ‘리얼’ 인건 아니다. 속 줄리앙 소렐이 실제 인물도 아닐 뿐 더러, 문학이 당시대 프랑스의 현실을 우리 앞에 데려오지는 않기 때문이다.유명인들이 쓴 자서전 역시 그런 의미에서 가짜처럼 보인다. 자서전은 형식상 증언과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장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자서전 역시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자서전에는 작가가 몇날 몇칠 몇번 동안 변소에 들렀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또한 그가 겪은 모든 날의 모든 사건과 모든 일, 인물들이 적혀있지도 않다. 그저 작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간추린 것 뿐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아무리 현실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그건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 그건 이미 작가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된 텍스트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9시간이란 런닝타임으로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영화 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증언들과 픽션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다.의 감독 클로드 란츠만은, 아우슈비츠에 존재했던 가스실에 대한 증거들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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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라는 사랑으로 - 김멜라의 <이응이응>

*최대한 짧게 쓰려고 했지만,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말을 아낀다는 게 썩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논점도 흐트러지고 가끔씩 일탈도 범하며, 문장이 지저분해서 의도가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긴 글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당신이 을 읽지 않으셨다면, 부디 이 글을 읽기 전 멈춰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을 읽고 머뭇거리던 분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이론이 아닌) 비평은 언제나 타 작품을 베이스로 그려져온 또 다른 하나의 메타예술이라는 점을 알아부셨으면 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만날 날을 다음으로 기약하며...)비평이란 평론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 이상의) 장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비평은, 글을 읽고 있는 나와 작가의 의식이 맞닿는 지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고, 평론은, 수학적이고, 작품의 가치 평가를 주로 삼으며 ‘이론’을 주체로 이루어진다.비평에는 감상한다는 즐거움이 있고, 써야한다는 즐거움이 있다. 다만 평론에는 그러한 즐거움이 없다. 대신 내가 그 작품을 모조리 해체하고 해부하여 뼛 속까지 알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쓰여진 것이 평론이다. 그것에는 배움이라는 즐거움이 있지만, 동시에 내가 사랑하는 것의 모든 것들을 전부 들춰보고 그 사랑을 끝내려는 행위같은 느낌이 더욱 크다. 그 속에는 오직 ‘작품’을 알고싶다는 매우 일방적인 사랑의 욕망만이 담겨있을 뿐이다. 작품을 상대하는 주체 역시 ‘내가 아닌 이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거짓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설령 평론의 그것이 진정 사랑이라고 해도, 사랑은 타자나 나의 그 무엇 하나 없이는 성립조차되지 않는 것이어서, 어찌보면 진정으로 끌리게되는 것은 언제나 비평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멜라의 은 '나의' 비평에 있어서 가장 부합하는 소설일 것이다. (이 말은 곡해될 가능성이 있다. '나'의 비평이란 것은, 오직 나와 책, 이 두명만이 나눈 매우 사적이고도 비밀스러운 대화를 뜻한다. 또한 은 평론으로서도 매우 좋은 작품이다. 추상적인 이미지를 거부하고 오직 감각적인 문체들의 연쇄로 이루어져서 텍스트로만 받아들여지도록 쓰여졌다는 점이나, 김멜라 작가의 작품들에 결부되어왔던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 한번 상기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것으로만 이 소설의 작품성에 대하여 말하기는 한 없이 부족하다.) 본래 김멜라씨의 소설들이 으레 젊은작가상으로 주목받기 훨씬 더 이전부터 관심을 두어왔던 한명의 독자로서 늘 씨의 작품들에 눈을 두고 있었는데, 자주 드나들던 문학광장에서 이란 작품이 기고된 것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읽었던 것이 벌써 일년 전이다. 그 일년 사이에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했다. 본래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것이 썩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어제 만난 사람도 막상 말을 섞고 밥상을 함께하고 나면 헤어지기가 매우 꺼려진다. 그건 누군가 떠나고나면 혼자 외로운 고독 속에 남겨져서 겸허히 받아들여야만할 이별이 두려워서거나, 또는 그 공허한 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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