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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욕망에 대한 자유를 주장하다.

  • 작성자 금안백
  • 작성일 2024-01-02
  • 조회수 647

사드 후작의 작품들은 예술적학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만대부분 포르노에 가까운 내용을 가지고 있다하지만 이 글에서 얘기할 <사제와 죽어가는 이의 대화>는 사드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으면서도 그 내용이 선정적이지 않아 불쾌감을 느끼지 않고도 제대로 된 감상을 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전개는 꽤 간단하다그저 어느 죽어가는 이가 옆의 사제와 대화하고 논쟁하며 자신의 철학과 가치관으로 사제가 가지고 있던 종교관도덕적 가치관을 부정해 간다는 전개로 단조로울뿐더러 그 길이 또한 단편소설의 분량이다.

 아마 사드 후작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은 죽어가는 이의 철학과 가치관에 사드의 사상이 투영됐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죽어가는 이가 말하는 내용들은 자유주의와 무신론을 담고 있으며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그는 인간의 욕망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능력들은 자연이 빚어낸 이 세상의 법칙에 준하여 필연적으로 파생된 요소들이며터무니없는 희망과 두려움(달리 말하면 종교에 대한 신앙과 신념)만으로 욕구를 억제해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한다이는 인간을 아울러 모든 생물의 욕구와 자연의 법칙에 대한 사드 후작의 깊은 고찰이 담겨 있다실제로 우리의 성욕은 때론 일상 속에서 핍박받기도 하지만 인류가 번성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죽어가는 이의 입을 빌려 작품 곳곳에 신을 부정하는 내용을 말하고 있다심지어 작중에선 예수를 무식한 어릿광대이자 사악한 위험인물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는 종교에서 주장하는 도덕과 윤리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욕구를 억제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미신으로 그들의 사기나 궤변에 불과하다고 믿었다실제로 중세시기의 봉건제 사회에서 농노들은 그 어려움으로 인해 종교를 맹신하는 경우가 많았다당시 종교가 농노들에게 정신적 도움을 주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18세기 프랑스에서의 기독교는 심각하게 부패해 버려 그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지 못했다. (이는 사드의 다른 작품 <쥐스틴>에서 자세히 묘사되어있다그는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계몽주의적 사상을 작품 속 죽어가는 이의 입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드 후작그는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이 작품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고 이룰 자유가 있으며 그것을 구시대적 종교관과 지배층이 요구하는 도덕과 윤리로 억제해서는 아니 되며 또 이것은 자연의 이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그럼 우리는 이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사람에 따라선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욕망에 전적으로 귀의하여 문란하고 변태적인 삶을 살자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하지만 작품에서 죽어가는 이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사회의 법으로 우리의 그릇된 욕망과 살인 같은 악독한 죄악을 견제하고억제해야 한다고 말하니 현대 사회에서도 그런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이 작품이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단순한 향락주의와 '끌리는 것에 순응하라'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역할'과 문화적 자유주의에 더 가깝다따라서 나는 이 작품이 우리에게 구시대적 관점에 얽매이지 말고 인간의 욕구를 배척하거나 억제하기보다는 최소한의 윤리적 테두리 안에서 그에 순응하여 자연에서의 인간의 역할을 다하자는 말을 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드 후작을 변호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그는 생애에 납치나 엽기적인 성범죄 등 너무나도 많은 죄를 저질렀으니 말이다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그저 변태의 불경한 음란물로 치부하기에는 그 가치가 너무 높다나는 그의 작품의 메시지를 연구하고 오늘날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는 이 작품을 통해 계몽주의적 사상과 인간이 가진 욕구의 가치를 주장하고 있으며나는 그것이 이 작품이 가진 가치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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