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인
- 작성자 187
- 작성일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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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난 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보다 어디까지 가고 있는가?'
'아니 그것보다도 멈출 수는 있는 것인가?'
지금 영문도 모른 채 난 우주인이 되었다. 아니 되어있다. 기억은 당연히 없다. 그저 이 조그마한 우주선에 몸을 맡겨 드넓은 이 미지의 공간을 유영할 뿐이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수많은 물음표들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방향도 목적도 의미도 끝도 알 수 없다. 한데 순간, 보인다. 빨간 행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어둠 속 처음으로 드러난 이 행성이 무척이나 반갑다. 최선을 다해 다가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행성에 착륙하리라. 하지만 처음 보는 계기판은 미지의 세계이다. 체계, 방법, 요령 뭐 하나 아는 게 없다. 용기는 객기가, 끈기는 고집이 되어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온다. 빨간 행성이 점점 멀어져만 간다. 그러고, 행성 대신 행성만큼 아니 행성보다 커다란 절망이 내게 온다. 겪어본 적 없는 좌절감. 희망으로 겨우 눌렀던 공포가, 미래와 어두운 공허에 대한 그 커다란 공포가 내게 찾아온다.
그런데 또 다음 순간, 또 행성이 보인다. 파아란 행성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계기판을 다시 한번 움켜쥔다. 희망을 원동력으로 힘을 내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의 희망을 비웃듯 다시 한번 지나친다.
하지만 또 잠시 후
다시 보이고
계기판을 잡고
지나치고
또
다시 보이고
잡고
지나치고
보이고
..
잡고
...
지나치고
그렇게 계기판 조종과 절망이 능숙해졌을 무렵이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른다. 하염없이 떠돌던 그때, 이번엔 행성 말고 다른 것아 나타난다. 블랙홀. 엄청난 인력이 날 끌어당긴다. 하지만 그 순간에 조종칸을 잡은 것은 어느 이유에서 일까. 그만한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무력감? 분노? 어쩌면.. 아직도.. 희망? 땀에 젖은 손이 떨려온다. 곧이어 엄청난 흔들림이 날 집어삼킨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손에 잡잡힌 핸들의 감촉만은 여전하기에 필사적으로 수평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 길고 끈적한 어둠을 날 놔주려 하지 않는다. 어림잡아도 며칠 동안이나 날 잡고 흔든다. 그래도 마침내, 서서히 빛이 보인다. 블랙홀의 끝이.. 끝이 다가온다. 그리고 환한 빛 너머로 거대한 성단이 보인다. 수많은 별들이 자신을 뽐내듯 스스로 발광한다. 난 기쁨을 너머 황홀에 빠진다. 조금만 더 가면 끝이다. 조금만 더 가면 드디어..
그런데, 어라?
너무 무리했…
'쿵!'
'어머 얘 좀봐? 또 잠들었잖아? 야 이 한심한 놈아.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한다니까. 대학 가면 네가 원하는 것들? 다 이룰 수 있어 그런 꿈의 세계가 펼쳐진다니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웅웅 거리는 잔소리 사이엔 책상에 앉은 우주인 한 명이 있었다. 고독한 우주인 한 명이 하염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땀에 젖은 계기판을 움켜쥔 채.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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