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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받은 유다

  • 작성자 유쾌한
  • 작성일 2006-02-11
  • 조회수 261

 

<서언>

-이카로스의 날개를 가진 나의 옛 친구에게 보내는 글 

 

달이 뜨지 않는

영원한 태양의 나라를

그대는 소원하였지.

원한다면 들여보내 주겠다.

그대가

찬란하게 빛나는 저 태양을

견딜 수 있게 된다면 언제든지.

 


<용서 받은 유다>

1.

어깨를 스치는 그녀의 짧은 머리칼에서는 항상 은은하게 꽃향기가 났다. 나는 그 향기를 맡으며 그녀와 함께 길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좋아했던 그녀는 내가 아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종교나 사상, 철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즐겼다. 사실 그런 것을 따분하다 여겨 멀리했던 나였지만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아는 척을 하기도 하고 평소의 성격답지 않게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녀가 만족하면 나도 즐거웠다.

나는 언젠가 그녀와 종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무교였고, 종교에 별 흥미가 없었기에 상식적인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성서나 고전문학을 읽고 먼저 아는 척 이야기했다.

 

-나는 야훼가 정말로 신이라면, 예수가 정말로 성자라면, 예수를 배신한 그를 용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게 정말 신다운 것 아니야?

 

나의 말에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보였다. 어쩐지 동의하지 않는 눈치다. 이런, 내가 또 잘못 짚은 건가? 하지만 종교는 항상 용서, 자비 운운하지 않아? 허긴, 그런 식으로라면 타락천사-그러니까 악마도 없을 거고, 지옥도 없을 터인데.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녀가 반박할 말을 추측했다. 무조건 용서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용서는 더 의미 있고 빛나는 것인가?

그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습관적인 첫마디도 잊지 않고.

 

-잘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런 말을 자주 입에 담고는 했다. 빛을 위한 어둠. 선을 위한 악. 그때 내가 필요로 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2.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초혼부부가 아니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재혼해서 낳은 자식이 나다. 그래서 내게는 서너 살 차이의 배다른 형과 누나가 있다. 그들은 항상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대한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내가 태어난 다음 날 이복형과 누이의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좋았을 걸. 그러면 마음 편히 나에게 한풀이 하는 그들을 원망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덕분에 아버지는 죄책감에 아직도 그들의 눈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들의 눈치를 보며 어머니의 옆에 앉는다. 그러나 그 이상은 자리가 없다. 나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 기억이 없다. 같이 찍은 사진도 몇 장 없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난 정말 형식적인 대화만을 주고받았다. 학교의 교과서 같은 짧은 대화. 요즘 학교생활은 어떠니? 불편한 곳은 없니? 피곤해 보이는 구나, 이제 그만 들어가 쉬어라. 내가 짧게 ‘네’하고 답하면 끝나는 질문들. 아니, 답하기 전에 이미 그 질문들은 저 멀리 날아가, ‘네’아닌 다른 응답은 소용도 없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안다. 아버지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원망하는 그들은, 사실 아버지를 사랑했었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눈빛이 나를 이렇게 억누르진 못했을 것이다.

나의 집은 이렇다. 이리 답답하다. 내가 앉을 자리도, 숨 쉴 수 있는 구멍도 없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관심받기 위해 몸부림 쳤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안 해 본 일이 없다. 술, 담배, 폭행, 자해, 자살소동……. 어느 정도 치료를 받은 나이지만, 그때부터 습관적인 나의 나쁜 손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억눌린 집 분위기에 뒤틀릴 대로 뒤틀린 나 자신은 물론이고.

그녀와 만난 건 그런 때였다.


3.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와 다툰 나는 그녀를 먼저 집으로 보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심사가 불편한 나를 알아채고 자리를 피해주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시간이 지나니 나의 행동이 참으로 한심하고 유치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녀는 그저 일주일 뒤에 대학교 M.T에 가서 한 동안 못 볼 거란 이야기를 했던 것뿐인데, 여러 가지 집안 사정으로 기분이 심란했던 나는 괜히 모든 것이 짜증이 나 그녀에게 화풀이를 해 버린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재수생인 내 앞에서 대학교 이야기 하지 말라면서 지금까지 너는 나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먼저 나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전혀 연결이 안 되고 말도 안 되게 튀어버렸지만 나는 사과도 하지 않고 입을 닫아버렸다. 나와 같이 화를 낼 것 같았던 그녀는 금방 조용히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곧 할 일이 있었다며 그 자리에서 인사하고 헤어졌다.

하늘이 어둑어둑 해 지자 거리는 형형색색의 정신없이 반짝이는 인조 빛으로 가득 찼다.  만사가 다 지겹게 느껴지고 싫어졌다. 이유 없이 저 요란한 빛을 내는 모든 기계들을 부수고 싶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빨강머리 안? 이거 참 오랜만에 보네.

-아. 그러네.

 

나의 별명을 아는 이들은 방황하던 시절에 사귄 골목의 친구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내게 ‘친구’라기 보단 ‘같이 놀던 애들’이었으니까. 서로 따분하던 참에, 서로를 이용하며, 그저 즐겼던. 그들은 장난스레 키득거렸다. 그리고 습관처럼 한 손으로 작게 원을 만들어 입 주변에서 들어올렸다.

 

-한 잔 할래?

 

나는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내려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


4.

 

-이런, 내가 말 안 했나? 나 애인 있어.

 

나는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벌써 술을 마신지 4시간이 흘렀다. 속이 타는 것 같이 뜨겁고,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붕 뜨는 기분이 오랜만이라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고 싶었다.

퐁당

나도 그들처럼 안 그래도 독한 양주를 섞어 마셨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내가 여유 있게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고 있는데 그들이 나의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런 놈이 옆에 여자 끼고 술 마시고 있냐?

-요즘 애인 있는 놈들은 혼자 밤거리를 싸돌아다니나 보지?

-나랑 좀 싸웠거든. 이제 말하지만, 내 애인은 이 옆에 있는 계집보다 훨씬 더 예뻐.

 

옆에 앉아있던 여자가 토라진 듯 옆으로 고개를 피하며 멀리 떨어지자 나는 미안하지만 사실이라며 그 여자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내 오른 쪽에 있던 친구가 내기를 걸어왔다. 나와 싸운 그녀를 이 곳으로 데려올 수 있다면 나의 말을 믿어 주겠다고. 대신 내 말이 거짓말이거나, 그녀를 데려오지 못하면 다음번엔 내가 술을 사야한다고 했다. 취한 이는 나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찍부터 나는 다음번에 그들과 만날 생각이 없었기에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들은 그녀의 목소리에 환호했고, 그녀를 부르는 나의 애절한 목소리에 야유했다. 나는 가끔씩 조용히 하라면서 검지를 내 입술에 가져갔다.

 

-올까, 올까?

-온다고 했어. 미리 말해두겠는데 내 애인한테 반하면 죽인다.

 

그들은 먼저 그녀가 온 다음에 그런 말을 하라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정말로 통화를 하고 오래지 않아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술을 마셔 알아들을 수도 없게 횡설수설한 나의 설명을 용케도 알아듣고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허름한 상가의 지하실로,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희미한 조명, 회색의 습기 찬 벽, 술과 담배 냄새, 한눈에 봐도 거칠어 보이는 남자와 여자들. 가끔씩은 나도 견디지 못하는 것 들이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그 견디지 못할 것들 중 하나가 되어 가장 눈에 띄는 조명 바로 밑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옆에 앉은 곱상한 여자의 어깨를 안고서. 나는 당황한 그녀에게 앉으라며 고개 짓 했다. 그러나 곧 평정심을 찾은 그녀는 침착하게 나를 내려다 볼 뿐, 못 박힌 것처럼 꼼짝을 않았다.

그러자 나의 친구가 웃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대충 그녀가 예쁘다며 칭찬하며 나의 재주 좋음에 감탄 한 것 같았다. 세상이 빙빙 돌아 힘들었지만 나는 그와 눈을 맞추려 애쓰며 말했다. 그 녀석도 눈을 보니 이미 맛이 간 것 같다.

 

-형님이 원래 재주가 많지. 꼬리가 아흔아홉 개는 된단다. 크큭, 내가 말했지? 온다고. 쉬워, 쉬워. 여자들은 대충 달콤한 말 한마디만 속삭이면 몇 번이고 자기 입맛대로 되씹고 곱씹고는 좋아한다고. 결국 자기 멋대로 소화시키고는.

 

주변의 친구들은 웃었지만 그녀는 전혀 딴 그림처럼 그 사이에 서 있었다. 목이 탔다. 사실 마시고 싶은 것은 물이었으나 나는 앞에 있는 폭탄주로 갈증을 달래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비비고 가늘게 뜨며 그녀를 더 자세히 봤다. 쳇, 하고 다시 뒤로 물러선 나는 그녀를 재미없는 여자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그때 그녀의 떨리는 입술이 흔들리는 시야에 들어왔다.

 

-허어?

 

이제 보니 그녀의 좁은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무표정 가장한 얼굴과는 달리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순간 또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나의 앞에 섰다. 내가 아무리 그래 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듯한 태도로.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나는 내가 옆에 끼고 앉은 여자가 미리 만들어 놓은 폭탄주를 더듬더듬 들고 그녀에게 물었다.

 

-마실래?

 

그녀는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다. 눈썹하나 꿈쩍이지 않는다. 그러더니 이번에도 그녀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딱 5초 후에 빠르게 몸을 돌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결국 그녀는 내 손바닥 안이었다. 나는 앞에 있는 상을 발로 밀어 치우고 돌아가려는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그냥 가시면 섭하죠, 사랑하는 임이여.

 

그녀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자 나는 놓치지 않고 다른 여자를 안았던 반대 손으로 그녀의 작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내가 만족스러운 미소 지었다. 그녀가 내게 자석처럼 끌려왔다. 그 것을 안 그녀는 긴장하며 눈을 감았다. 자, 이제 그럼 그녀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시작해 볼까.

더 가까이 그녀를 끌어당기자 그녀와 나의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붉어 체리향이라도 날까 했는데 그녀의 입에서는 싸한 박하향이 났다. 나는 그것이 나쁘지 않아 더 깊숙이 그녀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차가운 입술과는 달리 파고들수록 안은 뜨거웠고, 향이 더 짙어졌다. 주변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싫었는지 그녀의 입술이 주춤거리며 물러서자, 나는 그녀를 더 세게 안았다. 그러면서 나는 떠는 그녀를 알아챘다. 그래서 나는 옆에 앉아있던 여자를 밀어내고 기진맥진해진 그녀를 눕혔다. 내가 그 위에서 가볍게 입술을 떼자 그녀는 힘들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뜩이나 술 때문에 어지러워 죽겠는데 주변이 너무 시끄럽다. 그들 중 두세 명은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사실 한 명이 불었을 지도 모른다. 모든 사물이 번져 보이고, 여러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들려왔다. 나는 살짝 머리를 흔들고 그녀만을 의식하려 노력했다.

이렇게 눕혀보니 그녀가 더 예뻐 보였다. 하얀 피부며, 붉게 상기된 볼이며, 하얀 목덜미며.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가 입은 외투의 지퍼를 반쯤 내리고 셔츠의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다 들어난 그녀의 목에 가볍게 입마추고 조금 더 가까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능숙하게 그녀의 목을 젖혀 보였다. 나는 그렇게 그녀의 목을 타고 올라와 그녀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제길, 머리가 아찔하다.

 

-알아? 너한테서 달콤한 꿀 내가 나는 거. 가끔씩은 너의 향기에 취해 미칠 것만 같았다고. 지금까지 참아 온 내가 대견하지 않아?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쓸어 올려주었다. 몰랐는데 들어난 그녀의 작고 둥근 귓불이 귀엽게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 입 베어 먹는 것 정도는 허락해 줄 수 있겠지?

 

나는 세 번째 단추를 풀며 그녀의 수줍은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녀와 눈을 맞추려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큰 눈에 눈물이 맺혔기 때문이었다. 나의 눈을 피하려던 그녀는 그런 자신을 보는 나를 알아채고는 거칠게 나의 어깨를 밀었다. 그리고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친구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나에게 어린 애에게 차였다고 놀리면서. 그러면서 옆에 있는 여자와 우스갯소리로 ‘시범을 보여주랴?’하고 지껄이더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로 입을 맞추었다. 또 다른 볼거리에 친구들은 환호했다.

나는 옷을 정리하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금방 또 목이 타 옆에 있던 술을 다 비워 마시고는 수직으로 술잔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나는 가볍게 웃었다.

 

-쳇, 짠순이 같으니.


5.

다음 날 아침 늦어서 눈을 뜨는데 머리가 무거웠다. 비싼 술은 마셔도 다음날 별 후유증이 없다 들었는데, 폭탄주는 예외인가 보다.

 

-폭탄주?

 

나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든 것이 흔들리던 어젯밤, 내가 그녀에게 그 것을 권했던 기억이 난 것이다.

왜? 왜 이 곳에 그녀가 있었지? 착각인가? 내가 술을 너무 마신 건가? 그래, 꿈을 꾸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 곳은 나도 정말 오랜만인데, 그녀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러나 곧 친구들과 내기를 해서 그녀와 통화 했던 기억이 났다. 아니, 이건 아닌데. 아닐 텐데. 그럴 리가 없다.

손끝이 불안하게 떨려온다. 조금 더 기억해 보자. 그녀를 부른지 오래지 않아 그녀가 왔다. 나는 술을 권했고, 떠는 그녀를 보았다. 기분이 상해 가려는 그녀의 팔목을 잡고 나서, 그리고, 그리고 또…….

아니다. 아니다. 내가 술에 취해 착각하는 거다. 그런 일은 전에도 있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어서 현실로 착각해 버린. 내가 그녀를 이런 곳에 부르다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보로, 가벼운 여자로 만들어 버리다니. 내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마음을 진정시키려던 나는 갑작스런 두통에 머리를 싸맸다. 그때 내 친구가 물과 함께 약을 주며 말했다.

 

-이제 일어났냐. 마시면 끝장 보는 거 여전하구나. 자, 이거 속 쓰릴 때 먹는 거야. 해장 효과도 있다.

-제길, 미치겠네. 아무튼 고마워. 머리가 빠개질 것 같다. 두통약은 없어?

 

그러자 그가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재워줬더니 안방주인 노릇 하긴. 그건 그렇고, 야, 너 괜찮냐? 어제 애인을 그렇게 보내 놓고 넌 아주 천하태평이다. 미인이었는데 아깝다. 허긴, 너는 예전부터 꾼이었지?

 

나는 놀라서 컵을 떨어뜨릴 뻔 했다. 이제 왼 손으로 약을 받으려 하는데-. 제길. 빌어먹을. 내가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을 한 거지?

나의 왼 손에 그녀의 지갑이 들려 있었다.


6.

나는 며칠을 앓아누웠다.

다시 돌아온 집은 웬일인지 조용했다. 그것은 병자인 나를 배려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다시 또 어떤 큰 사고를 저지를지 모르는 망나니를 길들이기 위함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내 귀에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일 수도.

나는 침대에 누워 책상위의 그녀의 지갑을 보았다. 그리고 옆에 던져 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봤자 그녀의 전화를 받을 용기도 없었으면서.

그날 일이 생각났다. 내가 그녀에게 그런 더러운 장난을 치다니. 여러 가지 장면이 뒤죽박죽되어 빠르게 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러다 한 장면에서 움직임이 멈추고 만다.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빠르게 몸을 뒤척여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 잊고 싶다. 그저 편히 쉬고 싶었다.

‘즐길 수 있다면 최대한 즐겨라.’ ‘이용할 수 있다면 최대한 이용하라.’ ‘모든 건 재미, 그리고 장난.’ 모두 입버릇처럼 내가 읊던 말이었다. 그녀와 있는 동안 잊고 있었던.

고개를 흔들던 나는 이내 눈을 감았다. 그러다 기억해 냈다.

아주 작은 장난에서 그녀와 나의 만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7.

나는 공부할 수 있는 머리도,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던-당연히 말로만-재수생이었다. 하지만 혼자 조용히 집에 있자니 너무도 답답하여 도망치듯 도서관으로 갔다. 가방을 들고 있긴 했지만 그것은 지나가며 보기에도 텅 비어 있다는 게 빤히 들여다보였고 싸구려는 아니었지만 옷차림이 꽤나 불량스러워 아무도 나를 도서관에 가는 학생으로 보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상관이 없었다. 꼭 들고 갈 것이 있어야만 가방을 메고, 꼭 목적이 공부에 있어야만 도서관에 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를테면 나같이 자판기에서 커피나 빼다 마시며 졸리면 자고, 볼일 보고 싶으면 화장실이나 가는, 일명 도서관의 유령놀이를 즐기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가끔 죽어라고 공부만 하는 그들을 놀래 키며 괴롭히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런 나에 대해서 불만이라고 누가 멱살이라도 잡고 따질까 싶었다. 

나는 그날 오후도 나는 제 2 열람실에 앉아 다음 사냥감을 노리고 있었다. 오후 3, 4시가 되니 슬슬 심심해 진 것이다. 아, 그래 금방 찾았다. 저 가운데에서 책에 들어갈 듯이 고개 숙여 공부하는 여학생. 머리가 그리 긴 것은 아닌데 워낙에 숱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너무 고개를 숙여서인지 얼굴이 안 보인다. 저러다 눈 나빠지지. 시력을 잃으면 공부가 문제냐. 나는 괜히 열심히 무언가를 하는 모습에 심술이 나서 다른 사람보다 아주 조금 더 짓궂은 장난을 치기로 했다. 나는 캔 커피를 들고 곁을 지나가며 살짝 발을 헛디딘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크, 어떻게 하려나. 연출 상 중심을 잃은 나는 실수로 커피를-그것도 내가 몇 모금 먹다 남긴 커피를-그녀의 머리 위에 쏟았다.

 

-앗,

 

내가 연기에 소질이 있나, 하고 스스로도 생각할 정도로 누가 봐도 자연스러웠다. 이 통쾌한 웃음을 민망한 웃음으로 소화시키는 일쯤이야 나에겐 문제도 아니다. 커피가 머리카락을 타고 그녀의 옷에 떨어졌다. 그녀가 입은 게 흰 스웨터였기에, 나도 조금은 안 됐다고 생각했다.

 

-괜찮아요? 죄송해요. 제겐 마땅히 드릴 손수건 한 장 없네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시는 것 같던데, 찬 물도 아니고 더운물을 끼얹게 되다니, 대단히 죄송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말에도 여자는 한참동안 반응이 없었다. 이제 보니 체구가 작은데, 내가 정말로 실수한 건가 싶었다. 우는 것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허리를 숙여 상대방 얼굴을 보려 하는데 그 쪽이 먼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저는 괜찮으니까 이만 가보시죠, 유령양반.

 

그녀는 무표정으로 짧게 이야기하고는 돌아서서 다시 펜을 똑딱이며 책장을 넘겼다. 정말로 다시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아직도 머리에선 커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이 황당한 여자의 말과 행동으로 멍 해졌다. 그런데, 유령양반이라고? 그렇다면 저 여자도 거의 매일같이 이 도서관을 드나드는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모두가 나를 유령이라 부를 리가 없을 텐데. 이건 나 혼자서 지어 만든 놀이니까. 나를 유령이라 칭하는 것도 나 혼자 뿐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로 내가 유령임을 알아챈 거라면 이 놀이는 이제 끝나버린 거다. 실체 없이 떠돌다 심심하면 가끔 가벼운 장난이나 치는 게 유령이다. 존재감이 느껴지더라도 손이 닿을만한 거리에서 사라질 줄 알아야 하고, 두려워하며 안타까워하는 그들을 비웃어 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한순간 그 정체를 보이면 유령의 생명은 끝이란 이야기.

그 때 나의 놀이는 끝났다. 나는 진 대가로 이 곳 어딘가에 있을 진짜 도서관의 유령에게 500원짜리 동전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다음 내기가 시작되었다.


8.

나는 비틀거리며 외출을 위해 외투를 입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너무 오랫동안 누워있었다. 더 지체해선 안 됐다. 나는 그녀를 만나야 했다.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아 두통이 심하고 미열이 있었으나, 그 역시 참을 만 했다. 죽기야 하겠냐고 중얼거리던 나는 차라리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무거운 지갑을 챙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 날, 그녀가 기운이 없어 보였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그때 그녀의 감기가 나에게 옮긴 것이었으리라. 확신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오래갈 리가 없었다.

밖의 바람은 차고 꽤 날카로웠다. 버스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던 발을 멈추고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그녀도 어딘가에서 이 바람을 맞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죽은 나무처럼 가만히 서서 기다리니 승객 한 명 없이 텅 빈 버스가 내 앞에 섰다. 전부 빈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습관처럼 내리는 뒷문 주변의 기둥을 잡고 섰다. 가벼운 버스는 덜커덩거리며 눈에 익은 풍경을 지나쳤다. 세 정거장 쯤 지났을까, 도서관 앞에서 버스가 멈췄다. 버스 정류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계단에 올라섰다.

버스가 멈춰있는 동안 나는 자세를 낮춰 도서관을 보았다. 내가 그녀와 처음 만난 제 2 열람실은 왼쪽 건물 3층에 있었지.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충 그 열람실이 어디인가를 찾아보고 있는데 네 번째 창문에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나는 그 쯤 있었을 거라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네 번째 창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을 자세히 관찰했다. 어쩐지 낯설지가 않은데. 따분해 보이는 그 남자는 하품을 하다가 뒤를 돌아 버스 안의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내가 놀라 굳어있는데 버스가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뒤늦게 부자를 누르며 기사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다. 기사가 짜증스레 문을 열자 나는 뛰어내려 다시 그 열람실 쪽을 바라보았다. 텅 비었다.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잘 못 본 건가. 분명 그곳에는 내가 있었다.


9.

나는 그녀를 만난 다음날도 들뜬 기분으로 도서관 열람실 문을 열었다. 나는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각에 집에서 나와 내 자리가 된 창 옆 자리에 빈 가방을 털썩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어폰을 귀에 끼고 창틀에 앉았다. 창이 높아서 저 멀리의 구석까지 다 보였다. 나는 창틀에 앉아 열람실 입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들어오는 사람들은 문을 열자마자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고는 했다. 나의 자리에서 열람실 안에 들어 온 모든 사람들이 보이듯, 그들도 나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벌써 스무 명은 그렇게 온 것 같았다. 인내심 없는 나는 서서히 지쳐갔고, 금세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 때 들어온 사람도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내가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있을 거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루해 하품을 하고 있을 때 또다시 문이 열렸다. 눈물 때문에 흐릿하게 인영이 번져보였다. 하지만 나는 ‘혹시’하고 눈을 비비고는 눈에 힘을 주었다. 아, 여자다. 어제 그 여자다. 사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확신이 섰다. 그녀는 언제나 앉았던 자신의 자리 외에는 다 관심 밖이라는 듯, 창틀에 앉은 괴상한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유령인 나를 존중하는 뜻으로 받아들이고는 창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자신의 책을 꺼내는 그녀 앞에 섰다. 그녀가 잠시 고개를 들면서 나와 눈을 맞추어 나는 기뻤지만 그녀의 눈은 빛을 막지 말라는 어느 옛날 철학자-나는 세 글자를 넘긴 긴 이름은 잘 외우지 못한다. 그것이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라도-와 같이 말하는 듯 했다. 민망해진 나는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하, 좋은 아침. 어제 일은 미안했어요. 사과의 의미로 받아 줘요.

 

이어폰에서는 여전히 크게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음량을 줄여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손을 뻗어 음료수를 받았다. 어제일로 커피에 대해서 좋지 않은 기억을 갖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원한 청량음료를 산 나의 배려를 과연 그녀가 알아줄지. 그녀는 짧게 감사인사를 했다.

 

-아,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내용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말투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밝게 미소했다.

뭐, 일단은 성공했다. 이정도면 무난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건들었던-흔히들 이런 걸 ‘작업 건다’고들 하지-여자들 중 한명은 너무 경계심이 많아 말 한번 거는 데에도 엄청 애를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약과다. 하긴, 그녀의 태도는 경계라기 보단 무관심에 가까워 보였지만. 아니, 그게 더 어려운 난관인가.

하지만 내가 누구냐. 그 여자도 다른 이들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나에게 넘어오지 않았느냐.(그래놓곤 며칠 같이 놀다가 차버렸지만.) 그녀도 저번 여자처럼-혹은 그 이상으로-힘든 상대일 거라 생각했지만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유령놀이도 이제 다 끝났다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지? 아니, 스무 번, 백 번 이라도 상관없었다. 고생이 심할수록 나중에 쥐어 쥘 열매는 더 달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게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이제야 생각하는 건데, 나는 그녀를 만만히 봤던 것도 같다. 다른 여자들과 그녀는 확실히 달랐는데. 이제 말하는데 나는 그날 밤 그녀에게 한 짓보다 더 심한 장난을 친 적이 있었다. 당한 그녀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들이 나중에 내게 와서 뺨을 갈기고 화를 내도 나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콧방귀도 끼지 않고 그녀들을 관심 밖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아파서 누워있는 동안에도 그 일을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고, 미칠 수 없는 나 자신이 너무 저주스러웠다.

말을 정정하겠다. 나는 그녀를 만만히 본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만만히 보았다. 그녀가 다른 게 아니라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이 다른 거였다.


10.

이 길이었다. 그녀와 처음으로 같이 걸었던 길. 혼자 걷기에 이 인도는 너무나 넓었다. 혼자서는 견딜 수 없는 바람이 부는 이 곳은, 혼자서는 견딜 수 없는 추억이 있었다. 그녀와 자주 걸었던 길이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오늘처럼 홀로 시린 추억을 맞으며 걸어야 한다.

사실 그것도 자신 없다. 나는 혼자든, 다른 누군가와 함께든 두 번 다시 이 곳을 걸을 자신이 없다. 이 길에서 그녀 없는 추억을 만들어 의미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11

해가 질 무렵. 나는 벌써부터 가방을 메고 공부하는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계와 그녀를 번갈아 보며 앉았다 일어나기를 계속했다. 초침이 이제 막 6시를 가리키자 그녀가 허리를 펴더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동은 사실 좀 늦었다. 사냥꾼은 준비는 되었는데 사냥감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여유를 떠니 맥이 탁 풀렸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가 느릿느릿 가방을 작은 어깨에 메고 조용히 의자를 집어넣었다. 그녀가 다섯 발 쯤 걸었을 때, 나도 그녀와 비슷한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끄러운 음악을 껐다. 시간을 때우느라 노래를 들었는데, 그게 또 용량 때문에 저장량이 한정되어 있어 몇 번을 돌려듣게 된 것이다. 내일은 다른 놀 거리를 가져와야겠다고 다짐했던 나였다. 젠장, 노래 순서까지 다 외워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그녀가 1층 계단을 내릴 때 내가 달려가 그녀에게 아는 척 하며 옆에 섰다.

 

-또 만나네요.

-그러네요.

-나가서 집 방향이 어느 쪽이에요?

-왼쪽. 길 건너 버스 타요.

-아, 저도 그래요.

 

그녀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공부하는 게 힘이 들기도 할 테지. 거기다 공부를 할 때는 또 얼마나 고개를 숙이더냐.

그녀는 내가 물어오면 짧게 대답할 뿐 옆에 나란히 걷는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덕분에 나는 옆에서 그녀의 옆모습을 자세히 관찰 할 수 있었다. 처음엔 그녀가 한 번에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미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가까이서 하나하나 뜯어보면 볼수록 예뻤다. 흰 피부, 붉은 입술, 새카만 눈동자, 그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건강한 머리칼까지. 그녀는 화장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원래 화장을 하든 말든 예쁘고 어울리면 다 좋다고 생각했는데, 꾸미지 않고도 이렇게 생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녀들이 다 사기꾼 같이 느껴졌다.

나는 유난히 긴 그녀의 아래속눈썹을 바라보던 나는 오래지 않아 그녀의 얼굴은 나중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서서는 얼굴을 마주하고 뒤로 걸었다. 그러자 그녀도 나와 눈을 맞추었다.

 

-사실 별 인연도 아니지만, 통성명은 해야 예의죠? 전 이안이에요. 외자. 보시다시피 머리도 빨갛게 물들여서 별명은 빨강머리 안이고요.

-전, 윤소현. 별 특별할 게 없는 중성적 이름이라 이름과 관련된 별명은 없어요. 대신 제가 좀 둔하고 느려서 ‘말하기도 귀찮아하는 나무늘보’, 그러니까 귀찮은 나무늘보라고 불리긴 해요.

 

별명을 이야기하는 그녀는 이상하게 보일정도로 무표정했다. 그건 그렇다 쳐도 그녀가 엄청 느리기는 한가보다. 나무늘보를 별명으로 가질 사람은 흔치 않을 거라 생각하는 바인데. 나는 그녀에게 달리기는 잘 하냐고 물었는데, 들어보니 여자로서는 빠른 편이었다. 웃던 나는 그녀의 큰 가방을 보며 물었다.

 

-대학생이신가 봐요. 실례되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쪽은 몇 년 생이죠?

-86년생이요.

-어, 그럼 나랑 동갑이네? 그럼 말 놓자.

 

그녀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나를 이상하고 무례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게 눈에 보였다. 그녀가 포커페이스인 데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녀의 기분이 전달되는 건 그녀의 기가 강하기 때문인 건가?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날아갈 듯 가벼운 미소로 덮어버리고는 그녀의 눈을 맞추었다. 상대가 나에게 호감을 갖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며. 그때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말 놓자니까.

-아.

-그래, 말해.

-뒤에,

-응.

-전봇대 조심.

 

콰앙!!

쓰읍, 나는 신음을 하며 뒤통수를 감쌌다. 엄청 아파서 눈물까지 쏙 빠졌지만 그녀 앞에서 어디 분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억지로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충청도 여자냐고. 그러자 그녀는 아니라며 고개를 휘저었다.


12.

강의가 끝났을 시간이었다. 점심때라 대학교에선 학생들이 하나 둘 씩 밖으로 나와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학교 지하에도 매점이 있었을 테지만 나는 안다. 그녀는 밖에서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나 매점 같은 곳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녀는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프면 교외 식당으로 갔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식사를 거르곤 했다. 나는 교문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오늘도 점심을 그냥 굶을 작정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어떤 여대생이 나를 유심히 보며 지나쳤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게 오가면서 만났던 그녀의 친구인 것 같기도 했다. 그 여대생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고, 내 예상이 적중하여 그녀가 조금 있다 조용히 교문으로 나왔다.

얼굴이 많이 야위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머리가 아팠다. 열이 나고 입이 바짝바짝 말라 물을 마시고 싶어졌다. 역시 무리한 건가.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차분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왔으면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밖은 추웠다. 이가 딱딱거리며 부딪혀 나는 이를 악 물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그녀의 지갑을 꺼냈다. 사죄를 해야 했다. 용서를 받을 수는 없겠지만 감히 용서를 빌었다.

 

-미안.

 

빌어먹을. 제대로 된 어떤 변명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어떻게든 합리화 시킬 수 있는 구차한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머릿속에 그런 말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짧게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

용서 받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그녀는 나의 뺨을 세게 때리고 소리를 지를 것이다. ‘더러운 자식. 이제 와서 용서를 빌어?’라고.

나는 유죄. 지금 절대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녀가 지금 나를 죽이길 바랐다. 나더러 죽으라고 소리치길 바랐다. 그래야 마땅했다.

그녀는 잠시 내 손에 들려 있는 자신의 지갑을 보더니 나와 같이 짧게 말했다.

 

-괜찮아.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밝지 만은 않은.

나는 갑자기 그 대답으로 인해 내부에 균열이 이는 것을 느꼈다. 목이 더 아파온다. 알 수 있다. 그녀는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벙 쪄있던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낮은 톤으로 질문했다.

 

-괜찮…아?

-솔직히 아주 괜찮지는 않아. 그런데 너도 그렇게 보여.

 

내가 너랑 같아? 나는 죄인이고, 너는 피해자라고.

 

-너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점심때인데, 점심은 먹었고?

 

그녀는 그날 밤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이 조심스레 나의 안부까지 묻는다.

기분이 이상하다. 이 상황. 사실 내가 원했던 것인데, 용서를 받았는데 마음이 하나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그런 짓을 당하고도 누군가를 용서 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에 대한 증오심에 미친 것이 틀림이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목이 아팠다. 숨쉬기도 힘들어 진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그럴 테지. 괜찮은 척 하지 마. 미안. 미안. 다시 용서를 빌게. 하지만 날 용서하지 마. ……나는 네 이름을 부를 자격도, 네 곁에 있을 자격도 없어.

 

그녀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나는 정신없이 내뱉었다. 목이 메어 온다.

 

-난 쓰레기야. 사람들이 그러더군. 나는 재활용도 안 된다고.

-이안?

-미안. 미안. 정말로 미안해. 전과 같이 돌아 갈 순 없겠지. 그러니까… 다음에 지나다 만나게 될 땐 다 잊고…….

-이안!

 

참다못한 그녀가 큰 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잘랐다. 울음을 참으려는 그녀의 눈이 붉어졌다. 나는 당황하여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놓았다.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잠시 딴 곳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러는 동안 나도 호흡을 가다듬으며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이름모를 감정을 가라앉혔다.

곧 격해진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는 눈을 감고 다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도 시간을 두고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눈을 떴다.

 

-너, 참 무책임 하구나.

 

목이 아팠다.

 

-그래, 그렇지만 만약 이번 일로 우리가 그렇게 끝을 낼 수밖에 없다면, 그 말을 꺼낼 수 있는 건 나야.


13.

나는 주말을 이용해 짧은 여행을 하기로 했다. 아무생각 없이 역 매표소에 섰던 나는 기차가 나의 목적지를 정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그리고 빨리 머릿속으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정리했다. 조건은 간단했다. 하늘이 넓은 곳. 혼란스러운 이 머릿속의 모든 것을 받아 줄 수 있을 만큼 탁 트인 곳. 공기가 맑고 시원한 곳. 그리고 단번에 그 조건을 충족시킬만한 곳을 떠올렸다. 그건 바로 겨울바다였다.

내가 대충 여직원에게 경치가 좋고 비교적 조용한 겨울바다를 소개시켜달라고 하자, 알아서 그 표를 끊어주었다.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바다를 아는 사람은 자주 찾는 곳이라고 소개하면서. 내가 보기에도 그 바다는 그리 유명한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이름도 내가 금세 잊을 만큼 생소했고, 무엇보다 기차에 탄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끄러운 것보단 그 편이 나았기에 나는 차창 쪽에 자리를 잡았다.

나를 실은 기차는 승객을 기다리게 하지 않고 철커덩거리며 빠르게 출발했다. 그러고 보니 혼자 하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전혀 들뜨지 않았다. 하늘도 맑은 것이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였는데. 내가 어디 놀러 갈 때에는 항상 비가 내렸었는데, 이번은 그렇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에겐 일종의 징크스였다. 시작의 길한 징조가 흉한 끝을 암시하는 것. 나는 그것을 악마의 장난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젠장.

 

또 목이 타는 듯이 아팠다. 벌을 받고 있는 건지 평소라면 이미 나았을 감기가 아주 심하게 걸려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덕분에 편도선이 부어 음식을 먹기 힘들었고, 지금처럼 가끔 참을 수 없이 아파왔다. 나는 미리 준비한 배를 섞은 꿀물을 들이마셨다. 아무리 달콤한 꿀물이라도 목으로 무언가를 넘기는 것은 참으로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칼칼한 목을 매만지고는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 때 작은 성당 지붕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유다는 죄책감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고 들었어.

 

이곳에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났다. 이건 내 기억 속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날의 기억. 내가 한참 그녀의 관심을 사려 했을 때 주장한-그녀는 이런 식의 한가지의 논제를 가지고 토론 따위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내용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었다. 어쩌다 나온 이야기꺼리였는데 내용은 대충 유다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야훼가 정말로 신이라면, 예수가 정말로 성자라면 그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의 말에 그녀는 조금 더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우리들이 이야기 할 범주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그만큼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배반자 유다는 결국 목매달아 자살했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그는 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자. 그런 자를 자애로운 얼굴로 용서하며 저 위의 하얗고 축복받은 곳에 가두는 것은 더 가혹한 일 아니야?

 

그녀는 이런 말을 자주 입에 담고는 했다. 빛을 위한 어둠. 선을 위한 악. 이제야 그녀의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나의 이복형제들이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은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리라.

그런데, 그런데 왜? 왜 그것을 아는 그녀는 나를 용서해 준 것일까. 그때 내가 필요로 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는데. 그것을 그녀가 모르지 않았을 텐데.


14.

역시 바다는 달랐다. 출렁이는 푸름도, 철썩이는 바다의 노래도 나를 편안하게 했다. 바다에서 모든 생물이 나왔다더니 정말이지 그런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태내 속에 있는 기분. 차지만은 않은 바람과 보는 이를 깊은 곳으로 빨아들이는 듯한 까만 밑바닥. 마치 고향 같았다. 까만 물 속에 뛰어들어 나를 실존하게 하는 전부를 털어놓고 싶었다.

다 잊고 싶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의 모든 기억과 나를 내리 누르는 무거움은 물론 나의 짧은 이름까지도. 어머니 바다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부수는 것을.

어머니가 유혹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위로 올라와 출렁이며 말했다. 모두 잊고 어서 나의 품속에 뛰어 들라고. 나는 싫다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예전에도 느꼈던 거지만(나는 한참 사춘기 때 자실소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럴 때면 기분이 묘했다. 울렁거리면서 머리 한 구석이 맑았고 갑작스러웠지만 언제나 내가 원했던 것 같았으며, 슬픈 한편 기뻤다.

사람들은 나를 찾아 온, 내가 소원했던 이 것을 끝이라 불렀지만 나의 심장은 그 것을 믿지 않았다. 이 심장은 무언가가 크게 완성되기 전의 성취감으로 벅차올랐다. 이 의식은 불완전한 나를 영원으로 완성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에게 인도하는 나의 왼 발은 날개라도 달린 듯 가벼웠고, 그것을 저지하는 오른 발은 한 발짝 씩 옮기는 것도 힘들 만큼 무거웠다. 내가 나의 감각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상한 기분에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런, 예상치 못한 훼방꾼에 의해 바다가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바다가 물러설 만한 상대였다.

나의 시선이 머문 자리에는, 바다보다 더 크고 더 푸르른 그녀가 서 있었다.

그 때 내게 배반당한 바다가, 나에게 장난을 걸길 좋아하는 작은 악마 놈이 나의 귓가에서 중얼거렸다.

 

-너는 이제 도망칠 수 없어.

 

라고…….


내가 사랑하고, 또한 바라왔던, 그러나 내겐 과분한, 질식할 정도의 성스런 빛에 갇혀 고통스러워한다. 이럴 바엔 차라리 고독하지만 자유스러운 고향이 나을 거라, 어둠을 그리워하며.

나는 잔혹한 빛에게 붙잡혀버렸다.

 

++++++++++

실제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한 픽션fiction입니다.

 

여자를 찾으러 가는 동안 돌아본 주인공은 잊어야 할 과거를 뒤적이는데,

그 과거에서 저는 그 여자가 빛임을 드러내려 했어요.

쉽사리 다가서기 어렵고,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느린.

아, 느리다는 표현은 광속의 개념이 아니라 사람들이 느끼는 그것을 말합니다.

제 눈엔 대부분의 사람들 스스로가 

빛의 세계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이 보이거든요.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준비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도 없으면서 말이예요.

결국 주인공은 아직은 불완전한 빛에 겁먹고

(하지만 그 빛은 완전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을 자지고 있습니다),

이번엔 정말로 빛이 알아볼 수 없는 유령이 되려 하지만

마침내 빛의 구원 아닌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본래 제 성격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글도 지저분하고 쓸데 없는 내용이 많아요.

글의 흐름을 어떤 식으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오히려 끌려다닌다고 해야 할까...

 

에- 아무튼.

제가 이 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내용이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잘 드러났는지 읽고 비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두들 좋은 하루 되세요.

유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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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3-31
숲 속의 오두막 집

-숲 속 깊숙한 곳 작은 오두막집그곳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죠끊이지 않는 웃음소리잔잔히 퍼지는 평화마음까지 스미는 따스한 온기아아, 꿈만 같은 오후죠오늘도 감사하며 남자는 기도를 드립니다.‘이것이 꿈이라면… 오오, 전능하신 신이시여…이 꿈을 꾸다 죽을 수 있기를 이곳은 숲 속의 작은 오두막집이다. 산 아래의 마을까지 가려면 약 3시간 반쯤 걸어가야 할 만큼 외진 곳이지만, 몸이 약하고 푸른빛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이곳은 최적의 장소이다. 다른 이의 손이 닿지 않는 우리들만의 보금자리. 아아, 길고 검은 아내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그래, 아직 우리는 젊다. 우리는 아직 시간은 많고, 더 많이 즐길 수 있다. 그래, 사실 나는 이 평화가, 이 행복이 깨뜨려 질까 너무나 두렵다. 이것들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이니까. 그래서 모든 것이 평소와 같이 평화롭게 끝난 저녁때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응?”  그러고 보니 안방에서 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식기를 가지고 손장난 치던 나와 요리를 하던 아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내는 환을 들어 안았다. 조금씩 울음을 그치는 사랑스러운 나와 그녀의 결실. 내가 손가락으로 그 귀여운 볼을 찌르며 웃자, 그녀석도 어느새 방긋방긋 웃어보였다. 그녀를 닮았다. 웃는 입매까지도 그녀를 빼다 박았다. 나는 아이의 이마에 입맞춤 했다. 아이에게서 아내의 젖내가 났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토록 두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따뜻한 것들을…. 나는 둘도 없이 소중한 나의 가족들을 껴안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나의 행동에 아내는“우리 약속한 거 기억하지? 같은 날 같은 시각, 우리의 시간을 멈추자는 것.”“그래, 우리 환이 커서 우리가 필요 없어지면… 두 손 꼭 잡고 웃으며 함께 잠드는 거야.”   “빠압하아.” “밥을 부르는 거니, 날 부르는 거니.”  “하아?”  “아, 아니 형… 여긴 어떻게?” “여어. 이륜, 오랜만이구나.”  그의 위로에도 나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 붉은 액체가 너무나 무서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우는 것에 대해 짜증을 내던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집어 들었다.  “어때, 나도 똑같지? 하나도 안 아파.”   그러니 빨리 가서 치료를 하자, 이륜.”   “나의 허락도 없이 결혼하더니, 아주 잘 살고 있군 그래.”  집안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깨달은 것이지 갑자기 환이 울어재꼈다. 아내는 달려가 아이를 달려주었고, 나는 굳은 표정으로 형의 앞에 서 있었다. 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아이는 울고 있었으며 우리는 지금 오랜만에 만난 형제 사이였다. 지금까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침묵을 통해 대화한 형과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있었다. 시간이 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환의 점점 작아 들어가는 울음 소리였다. 그렇게 침묵에 묻혀 소음은 줄어들고 있었

  • 유쾌한
  • 2006-02-01
하늘의 구멍

  1. 슬픈 아름다움을.나는 지금껏 그와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뭐, 사실을 고백하자면 그가 내가 만난 첫 번째 사람이었지만, 그 이후로도 그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이해하는데 문제는 없으리라본다.) 그는 이곳과는 특별히 다른 냄새가 나는 그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사람이었다. ‘이 곳’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사람. 이를테면 그는, 달에서 온 사람 같았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이 곳과는 또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가진 창백한 얼굴의 달의 아들. 그래서 그가 친구로, 그리고 연인으로 택했던 것은 달이었다. 그는 밤이면 촛불 하나만 켜고 아예 창가에 의자를 가져가서는 오랜 시간 달과 보내기를 좋아했다. 그는 의자에 앉을 때 항상-그것이 가장 편한 자세였는지-작은 나무판자 끝에 발을 올리고 깍지 낀 손으로 그 발을 끌어안았다. 창은 컸고, 그는 그 창과 가까이 있어서 그 불안정한 자세가 조금만 흐트러져도 그가 창에서 떨어져 저 먼 땅바닥에 곤두박이칠까 보는 사람이 다 아찔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있어서 달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를 봐 온 나만은 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곤 했다. -겨울이 좋아요. 겨울의 하늘은 까맣고 달은 창백하게 질렸거든요.  그가 좋아하는 겨울 밤,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그때가 얼마 전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대들을 그토록 즐겁게 했던 눈이 내렸다. 그 날은 함박눈이 내렸었다. 회색빛으로 변한 하늘은 빈틈없이 완전했다. 달의 머리카락이라도 찾는 것인지 소년은 그 날도 창 에서 떨어질 줄 몰랐었다. 바람이 차 그의 건강을 걱정한 가족들은 창문을 닫아주려 했지만 그는 한사코 사양하며 말했다. 오늘은 달을 찾고 있노라고, 아니, 오늘도 달을 보고 있노라고. 그는 달을 사랑하기에 달의 죽음을 슬퍼하는 한 편 기뻐할 수 있었고, 그런 자신을 자책하고 비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지, 아니면 그가 읽던 책에서 내가 지나가며 얼핏 보았던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와 비슷한 내용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또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날도 그는 홀린 듯 달을 보았고, 그날도 나는 홀린 듯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때였다. 달에 빠져든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것은 다름 아닌 달을 향한 말이었다. -달이 뜨지 않는 몇 번의 밤을 보내는 게 싫어졌어.  나는 이유 없이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래층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특별히 이상하게 큰 소리도 듣지 못한 그의 어머니가 정신없이 소년을 찾으며 주변 이들에게 그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모두들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을 때 위층에서 주무시던 그의 할아버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입을 뗐다. 잠결에 눈을 뜨다 놀라고 말았다고. 그는 창 밖에서 날개도 없이 하늘을 나는 소년을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 유쾌한
  • 200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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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아, 이런건 비극이라고 해야 하나요 해피엔딩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재미있게 읽었어요^-^

    • 2006-02-12 22:52:5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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