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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 용병 이야기

  • 작성자 당근매니아
  • 작성일 2006-03-25
  • 조회수 904

  딸깍.

  나는 주머니 속에 처박혀 있던 지포를 꺼내 그 뚜껑을 열었다. 여기저기 흠집투성이인 지포는 이미 20년을 넘게 함께 지낸 녀석이다. 20년 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이 녀석이 불을 붙이는 것이 바뀌었다는 것 정도.
  라이터 옆구리, 길게 긁힌 자국에 오른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손톱으로 살짝 그 자국을 긁는다. 언제부턴가 불을 붙이기 전마다 하게 된 버릇이다. 라이터 옆이 긁힌 것이 13년 전 리비아의 반정부 게릴라 소탕전에서였을 테니 아마 그 때 즈음해서 가지게 된 버릇일 것이다. 매끈한 표면에 난 거칠한 부조리함을 즐긴다. 라이터를 오른손에 쥐고 긁다 보면 어느 순간 니코틴이 고파지는 때가 있다. 마치 갈증과도 같은 그 감각. 그 순간에 들이쉬는 타르의 끈적끈적한 쾌감을 위해 느긋하게 기다린다.
  도시 한복판에 마련된 공원은 공원이라기보다 공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바닥에 심어놓았던 잔디는 이제와선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곳곳에는 담뱃재와 휑하니 맨살을 드러난 땅 뿐이다. 매연이 가득하고 주변은 허름한 빌딩뿐인 이런 곳에 사람들이 휴식을 목적으로 올 리 만무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이 작은 공간은 쓰레기나 버리러 가끔 들르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오른손에 들려있는 지포를 손톱 끝으로 긁다가 왼손에 눈길이 갔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담배는 오늘도 완전한 한 개비가 아니다. 누군가가 피우고 가다 내 앞에 던지고 지나가는 반쪽짜리 꽁초들. 담배 살 돈이라고는 없는 빈털터리인 내가 니코틴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그 끝에 비록 남의 타액이 묻어있다지만 내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불쾌한 경험이 한두 번이어야 꺼림칙한 것도 있는 법이다.
  잠시 붉게 타올랐지만 지금은 하얀 재로 덮여있는 꽁초 끝을 내려다보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다. 손에 든 담배를 살짝 뒤집어 담배 옆구리에 써있는 상표를 읽었다. 혹시나 해서 확인한 담배는 역시나 고급이었다. 입가에 살짝 쓴웃음을 머금었다. 피우고 버리는 담배의 상표조차 그가 가진 돈과 연관이 되는 세상. 아까 이 꽁초를 버리고 간 사람은 검은 양복을 쫙 빼입은 중년 남자였다. 금으로 된 넥타이핀을 한 채 최신형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남자. 통화 내용으로 봐서는 어느 회사의 중역인 듯 했다. 길이라도 잘못 든 거겠지.
  어쩌면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지저분한 빈민가의 길가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온통 가난한 인간들뿐이기에 부드러운 맛의 이런 고급 담배는 입에 대보기조차 힘들다. 그저 가난할수록 한 개비 한 개비가 독한 담배를 찾고 부유할수록 부드러운 것을 찾는다. 전자가 더 해로움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건강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자들은 그저 니코틴을 바랄 뿐이다. 이 시대에 한 인간이 손에 넣은 돈의 양은 그의 수명과 직결된다.
  문득 니코틴이 고파졌다. 손에 들고만 있던 꽁초를 들어 입에 물고 손톱 장난을 그만 두었다. 지포를 오른손에 바로 잡고 톱니에 엄지를 올렸다. 힘겹게 지포의 톱니를 당기자 이윽고 미약한 불꽃과 함께 심지에 불이 붙었다. 불꽃은 투명하다. 은은하게 감도는 라이터 기름 냄새. 일회용 라이터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향기를 음미하면서 완전히 타지 않은 꽁초 끝에 불을 붙였다. 담배 특유의 매캐한 냄새와 함께 뿜어져 나온 희뿌연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맛은 부드럽다. 불길이 필터에 닿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지만 그 잠시의 시간을 즐긴다. 기관지를 지나는 연기에서 약간의 뿌연 몽롱함과 나른함이 느껴졌다. 눈을 반쯤 감은 채 그대로 앉아있는 벤치에 몸을 기댔다. 지난 추억들이 공기 중에 흩어져 가는 회색 연기에 투영됐다.
  나는 용병이었다. 용병. 돈을 받고 자신과는 상관도 없는 전투, 전쟁, 전장에서 싸우고 죽어가는 소모품들. 전쟁의 단순한 톱니바퀴 하나. 보잘 것 없는 나사 하나. 용병들은 누기를 팔아 치우는 군수업자들과는 다르다. 그 자들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자들에게 물건을 팔지만 용병들은 그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레이즈하고 목숨을 판돈 삼아 카드 패를 받는다. 미친 짓거리다. 사람을 죽이며 돈을 벌지만 그들은 결코 죽음의 상인이라 불리지는 않는다. 장사하는 상인의 투자 밑천이 그 자신의 목숨이래서야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그건 장사가 아니라 도박이니까.
  이런저런 전장을 정말 많이도 떠돌아다녔다. 중동, 러시아, 발칸반도, 아프리카까지. 20년 내내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 내 아버지란 인간은 마약 중독자였다. 차이나타운의 싸구려 식당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푼돈을 들고 들어오면 어느 샌가 그걸 훔쳐내 그 빌어먹을 백색 가루로 바꿔오기 일쑤였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을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밤에 틀어박혀 있곤 했다. 다락방에는 언제나 술 냄새와 지린내가 진동을 했다.
  뭐 그런 인간도 젊을 때는 꽤나 잘나갔던 모양이다. 이태리 출신의 유망한 청년 실업가로 꽤 큰 의류 회사도 운영했었고 집도 상당히 좋았던 것 같다. 사실 그렇지 않고서야 허영심으로 가득한 내 어미라는 작자가 꼬일 리가 없었겠지만. 어머니는 클럽의 스트립 댄서로 일하던 프랑스인이었고 한 클럽에서 아버지를 만나 3개월 만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뭐 그 결혼의 처음은 화려했을지 몰라도 끝은 그렇지 못했다. 그 결혼식을 치룬지 2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회사는 문을 닫았고 둘은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한창 잘나갈 때 사 놓았던 패물, 집, 자동차, 옷을 전부 팔아도 빚을 다 갚지는 못했다. 갚은 빚보다도 남은 빚이 많았다. 날이면 날마다 자신들을 죽이려 드는 빚쟁이들. 결국 그들에게 남은 방법은 도피뿐이었다. 부부는 빚쟁이들도 찾지 않는 지저분한 빈민가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때 즈음해서 내가 태어났다. 빌어먹을.
  기억 속의 어린 시절은 빈궁하기 짝이 없었다. 남편이란 작자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약의 힘을 빌려 화려했던 과거의 기억 속만 떠다녔고, 부인이라는 작자는 더럽다는 이유로 이 일 저 일하다가 때려 치는 게 일상이었다. 어떻게 손을 썼는지 매달 정부 보조금은 타게 된 모양이었지만 나오는 족족 남자가 헤로인을 사서 전부 날려버렸다. 매일 같이 싸우고 매일 같이 욕설이 방 안을 떠다녔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문제로 죽이네 살리네 하는 악다구니가 벌어졌고 그 끝은 언제나 어느 한 쪽이 다치는 것으로 끝났다. 난 그런 걸 보고 자랐다. 아버지한테 꽃병이 날아가는 모습, 어머니가 국자로 맞는 모습. 의자로 내리쳐 테이블을 부수는 모습.
  그래도 꿈은 있었다. 언젠가 이 추악한 동네와 집을 벗어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학자가 되고 싶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빈민가에서 꽤나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고, 잘만하면 장학생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도 있었다. 등록금 전액 지원. 이거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공부하는 것 말고 내게 돌파구는 없었고 자연히 거기에 매달리게 되었다. 단 한 번도 학교 내에서 1등을 내주지 않았다. 유지만 한다면 장학생으로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을 6개월 앞둔 시점. 결국 아버지라는 인간이 사고를 쳤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 보려고 어머니가 서랍에 몰래 숨겨놓았던 돈을 발견한 것이다. 몇 번이나 있던 일이었다. 숨기는 자와 찾는 자. 아버지가 찾은 돈을 또다시 마약으로 탕진하고 어머니는 며칠 동안 울고불고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뭔가 달랐던 모양이다. 귀신이 쓰인 건지도 모르겠다. 그날따라 일찍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헤로인을 하고 정신이 몽롱해져 있는 아버지에게 악을 쓰며 달려들었고, 아버지는 엎치락뒤치락하며 몸싸움을 하다가 그 옆에 널브러져 있던 유리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머리에 병을 그대로 내려쳤다. 생각해 보면 묘한 것이다. 그렇게 죽어라죽어라 해도 안 죽던 사람이 어째서인지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는 죽어버리곤 한다. 쓸모없을 때는 바득바득 살아 있다가 정작 살아 있어야 할 때는 죽어버린다. 매일같이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어머니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일로 죽어버렸다. 혀를 내밀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장례식은 치르지 못했다. 비명소리에 놀란 옆집에서의 신고 때문에 몰래 시체를 버리려던 아버지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아내 살해에 시체 유기 현행범. 돈 없는 자에 대한 재판은 그리 길지 않았다. 1심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졌지만 변호사를 고용할 돈이 없었다. 1심의 판결은 그대로 최종 판결이 되었다. 아버지의 사형 집행은 그로부터 3년 후에 이루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도 시신을 수습하지도 않았다.

  "쓰읍!"

  불에 덴 듯한 감각에 손에 든 것을 바닥에 있는 힘껏 내리쳤다. 따끔거리는 손을 후후 불었다. 잠시 정신을 팔고 있던 중에 화마는 잎을 태우고, 필터까지 잠식해 들어왔다. 옅어지는 담배 연기를 한껏 들이쉬면서 손가락이 데었는지를 확인했다. 유심히 살펴본 손가락의 화상은 다행히도 심각한 수준은 아닌 듯 했다. 몸을 일으키지 않고 벤치에 기댄 채 나는 눈을 감았다. 공원 옆 도로를 지나가는 인간들의 동정, 혹은 모멸이 담긴 눈동자를 마주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낫다.
  주변에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도 더 이상 발견하지 못했고, 그냥 앉아있기로 했다. 하루에 필요한 니코틴 양도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어머니는 죽었고 아버지는 감옥으로 끌려갔다. 돈이 들어오는 구석이라고는 쥐꼬리만 한 정부 보조금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얼마 되지 않아 끊겼다. 나는 관청에 등록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고등학교 진학은 자연스럽게 물거품이 되었다. 학교에서 대주는 것은 학비지, 생활비가 아니었다. 진학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학교생활은 불가능했다.
  세 식구가 살던 작은 월세 방을 정리했지만 손에 쥐여진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도시 중심의 빈민가 월세 방 보증금은 보잘 것 없는 액수였다. 집을 정리하고 거리로 밀려 나온 날, 평생 마셔본 적 없는 술 한 병을 사서 안주도 없이 병나발을 불었다. 돈이 없었기에 독하기 만한 것으로 골라 단숨에 들이키고는 캑캑대다가 결국 길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주머니에 들어있던 돈은 간 데가 없었다. 웃기는 이야기다. 그렇게 빈민촌에서 십 년도 넘는 시간을 구르며 자랐으면서 난 그런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어둠을 기는 좀벌레들. 그 벌레 중 한 놈의 주머니로 내 푼돈은 사라졌다. 주머니에는 한 끼 식사를 할 돈조차 없었다.

  "왕왕!"

  난데없는 개 짖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고 뜨고 내 앞에서 짖어대는 녀석을 응시했다. 아이리쉬 울프 하운드. 391년에 로마인에 의해 처음으로 언급된 늑대 사냥개. 한 때 검투사와 싸우는 용으로도 사용되었던 종자. 혼령을 본다는 전설이 있음.
  과거 훈련 캠프의 관리인이라는 자식이 저 개를 기르고 있었다. 크기는 지금 저 녀석보다 조금 더 클까. 그 개자식에게 물린 이빨 자국은 아직도 옆구리에 선명하다. 푸석한 햄 한 조각이라도 더 얻어먹어 보려는 행동의 대가였다.
  이 녀석의 주인은 어떤 녀석인가 하는 생각에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렸다. 대형견용의 투박하고 짧은 목줄. 그 끝을 잡고 있는 건 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이었다. 작은 키에 갈색 머리카락, 땅딸막한 몸매. 전형적인 프랑스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청년은 목줄을 왼손에 쥔 채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나를 보고 짖던 개는 어느 순간 조용해져 있었다.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청년은 그걸 멋대로 긍정의 의미로 해석했는지 내 왼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는 조금 여유를 두고 벤치의 다리에 목줄을 묶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맹렬하게 짖어대던 울프 하운드는 조용히 땅에 배를 붙였다.
  잠시간의 침묵.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때 청년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는 소리, 그리고 종이가 부벼지며 나는 소리. 그리고는 한참동안이나 헝겊이 스치는 소리. 평온을 침탈당한 내가 눈치를 줄까 고민하던 찰나 청년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죄송하지만 혹시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청년은 왼손에 담배 한 개비를 쥔 채로 난처한 표정을 하고는 내게 물었다. 잠시 청년의 얼굴을 응시했다. 요즘 세상 이런 빈민가에서 남의 라이터를 빌리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간단한 개조만으로도 라이터는 충분히 무기가 될 수 있으니까. 이런 거리에서 그것도 나 같은 사람에게 라이터를 빌리려고 하는 청년이 정상인가를 잠시 생각하다가 주머니에 들어있던 지포를 꺼내서 던져 주었다. 청년은 경계조차 하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입에 문 담배는 고급품이었다.

  "한 대 피우실래요?"

  옆에 앉아 연기를 한 모금 뿜어낸 청년은 담배곽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며 내게 권했다. 내가 돌려주지 않은 내 지포를 쳐다보는 것을 그는 내가 담배를 원한다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들이밀어진 담배와 여전히 청년의 손에 들려있는 지포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담배를 받아들었다. 고급인데다가 완전한 한 개비인 담배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담배를 입에 물자 청년은 라이터로 담배 끝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웃으면서 내게 지포를 건넸다. 나는 지포를 받아들자마자 품속에 재빨리 갈무리했다.
  한산한 공원 벤치에 두 사람이 앉아서 담배를 빨았다. 뿌연 구름 낀 공원의 하늘로 두 줄기의 연기가 올라간다. 내 옆에 앉아있는 남자는 입가에 미소만 머금은 채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도 더 이상 이쪽을 신경 쓰지 않고, 나도 청년에게 신경을 끊은 채 눈을 감았다. 담배 맛은 부드러웠다.
  돈을 전부 날린 후에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진 돈 없음. 최종학력 중학교 중퇴. 빈민가 출신. 그렇게 몇 년간 밑바닥을 굴렀다.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갈 뿐 지나고 나면 손에 쥐여 있는 건 없는 삶.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히려 빚만 쌓여가는 나날. 한 번도 제대로 배불리 먹어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벽에 붙은 광고를 우연하게 보게 되었다. 용병 모집. 고임금과 숙식제공.
  뒷골목 인간들에게 굽실거리는 것도 이 지저분한 거리도 따분한 일상도 싫증이 나있던 나에게 용병이란 건 꽤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거기다가 어린 나에게는 용병이라는 말이 주는 울림도 마음에 들었다. 그 단어에서는 화약 냄새가 났다. 4번가 52번지의 꾀죄죄한 사무실. 그 곳에서 나는 조잡한 적성검사와 병신이 아니고서야 누구나 통과할 수 있는 기준의 신체검사를 마친 뒤 빼곡하게 글씨가 들어찬 각서 하나에 사인을 하고 훈련 캠프로 떠났다.
  훈련 캠프는 섬에 마련되어 있었다. 몇 십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 훈련 캠프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석 달 남짓 계속된 훈련이란 것은 정상적인 군사훈련이 아니었다. 병사에게 칼을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병사를 칼로 만든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양심, 정신, 인성을 깡그리 박살내고 그 자리에 살인 기계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을 구겨 넣는다. 자기 극복? 도전? 지랄하지 말라고 해라. 하수구에서 굴러먹던 쓰레기들을 단순한 무기로 만드는데 그 따위 것은 필요 없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것이다. 식량 창고에서 음식을 훔치는 것은 총살이지만 동료를 살해해서 그에게 배급된 식량을 뺏는 건 허용한다. 아니 오히려 권장한다는 게 옳다. 그 쪽이 걸러내는 채로서의 역할은 더 좋았으니까. 빈민가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꼴을 자주 봐서 그런 것인지 피나, 죽음에 대한 거부감은 처음부터 별로 없었다.
  인간쓰레기 120여 명 중 훈련 중에 사망한 것이 3명. 동료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59명. 중간에 포기한 것인 31명이었다. 정신 나간 짓거리다. 아직도 나는 나를 고용했던 그 집단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거의 인신매매에 가까운 비용을 지원자에게 지불하고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듯이 인간을 굴렸다. 그럼에도 지원자들이 그 빌어먹을 곳에서 견디려고 한 것은 실전에 배치될 경우 회사 측에서 지불하겠다고 약속한 돈의 액수 때문이었다. 몇 년 만 버티면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환상. 그게 그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극한으로 몰아넣었다.
  이 시점에서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난 살아남았다. 그 지옥에서 몇 달을 견디고 나서야 나는 그 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어딘가의 전장으로 끌려 나갔다. 중동 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배에서 내려서도 한참이나 차를 타고 들어간 곳. 나는 그 곳에서 처음으로 실전이라는 것을 경험했고 첫 전투에서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차츰 이 일이라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나 자신이 두려울 정도로.
  용병으로써의 생활은 결코 추천할 물건이 되지 못했다. 외인부대니 그런 것과는 다르다. 죽이고 파괴하는 일에 낭만 따위는 없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사랑, 명예, 돈, 자존심, 복수, 단순한 유희까지 기타 등등. 하지만 결국 용병은 돈 때문에 싸운다. 어떻게든 떵떵거리고 살아보고 싶어서 사람을 죽인다. 총을 든다. 나이프를 꽂는다. 용병이란 건 하나의 부품일 따름이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 나는 군수업체의 이익, 정권의 연장, 복수심의 해소 따위를 생산해 내는 거대한 기계를 가동시키는 자그마한 부품일 뿐이었다. 있어도 단순한 소모품, 내가 없다고 해도 대체품이 널려있는 그런 부품. 로망 따위는 끼어들 작은 틈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한 3년 쯤 되었을까. 2년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던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돈은 잘 모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 자신이 놀라울 정도로 일에 적응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위쪽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간단한 작전이었다. 단순히 상대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면 되는 미션. 그저 일방적인 소탕전이었다. 훈련 받았던 대로 수류탄을 던져놓고 몇 명인가가 돌입해 남아있는 적을 죽이면 끝나는 일. 정확히 말하자면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미 수십 번을 수행해 본 작전인데다가 그 보수도 비교적 짭짤한 편이었으니까.
  전날에 특별히 배급된 A레이션의 호화로운 식사를 마치고 낮의 휴식을 여유롭게 즐긴 뒤, 별빛만 남아있는 한밤중에 작전은 시작되었다. 대인 살상용 수류탄을 동굴에 던져놓고 폭발하기를 기다린 다음 AK를 들고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해 총도 제대로 잡지 못한 남자들의 심장과 머리에 총탄을 박아 넣고 복도를 옆으로 달리며 작은 방들에 수류탄을 던져 넣는다. 잡념도 없이 그렇게 죽여 나갔다. 반격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억울한 표정으로 죽어가는 남자들 따위 어떻게 되도 좋았다. 그러다 몇 번째 방이었는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아무 생각 없이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갈겨 대고 나오다가 뭔가를 발견했다.
  15살 쯤 된, 파편이 잔뜩 박힌 채로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아이의 모습. 그 모습이 순식간에 물에 부은 한 방울의 잉크처럼 퍼져 내 머리 전체를 침식했다. 시체 옆에는 조잡하게 인쇄된 수학 교과서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때 묻은 몽당연필은 부러져 있었다. 현기증이 났다. 어떻게든 고등학교에 진학해보고 싶었던 한 소년의 모습과 공부할 제대로 된 책조차 가지지 못하고 죽은 소년의 모습이 겹쳤다. 연필을 버리고 총으로 돈을 벌어 보려는 나의 모습과 내가 던진 수류탄에 맞아 제대로 크지도 못한 채 죽어버린 소년. 머리가 하얗게 되는 그 순간에도 뇌리에 스친 건 임무와 그 보수에 대한 추악한 생각뿐이었다. 나는 몸을 추스르고 곧바로 다음 방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갈겼다. 복도를 달리고 AK를 난사하며 그저 눈물만 났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회한에.
  그 일이 있고 나서도 나는 총을 버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일 자체를 잊으려 애썼다. 그리고 어떻게 기억의 밑바닥에 그것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걸 생각해 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작전이 끝나고도 나는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녔다. 물을 놓고 전쟁이 벌어진 곳에 달려가 한 모금의 물을 위해 싸우던 고용주의 적을 죽였고, 골육상쟁에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에 팔려가 그 추악한 학살에 동참했다. 같이 싸우던 동료가 죽는 것에도 슬픔을 느끼지 않았고, 적이라고 생각한 것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나는 그저 한 정의 총이었다.
  돈은 모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 따위에 들어가는 돈은 나날이 늘기만 했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려는 꿈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살인에 무감각해지고 죄책감이라는 가시가 무뎌지다 못해 사라질 무렵. 이 일로 돈을 벌어서 떳떳하게 살아가겠다는 생각은 잊힌 지 오래였다. 그리고 4년 전 나는 처음으로 전장에서 쓰러졌다. 벙커에 숨어 있다가 습격을 당해 정신을 잃었다. 어떻게 정신을 잃었고 어떻게 이곳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필름 중간이 검게 변색되어버린 영화처럼.
  깨어보니 나는 이미 내가 자라난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빈민가의 거리. 내가 처음으로 그 포스터를 본 곳으로. 최종적으로 지불된 임금은 0 프랑. 돈 따위 이미 용병단의 창녀들에게 퍼다 준 지 오래였다.
  담뱃불이 필터를 태우고 있다. 빠르게 타들어 오는 담배를 옆에 있는 깡통에 가볍게 던져 넣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앞을 바라보았다. 내 옆에 앉아있던 땅딸막한 청년은 어느 샌가 내 앞에 서있었다.

  "가실까요."

  청년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후회는 많지만 한은 없다. 전부 내가 부족했던 거니까. 내가 길을 잘못 택한 거니까. 내가 죽여 온 자들에 대한 대가라면 당연히 치러야겠지. 청년은 엷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가 데려왔던 개는 새하얀 색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담배 맛은 괜찮으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말없이 그 손을 쥐었다. 남자의 등에서 하얀 날개가 솟아났다. 남자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동굴 안에 쓰러져 있던 그 중동인 소년의 얼굴이었다.

 

 

  도로변에 있는 지저분한 공원. 길 건너에서 축구공 하나가 데굴거리며 굴러오고 얼굴에 검은 때가 가득한 남자아이 하나가 공을 주우려 그 공원으로 걸어왔다. 공을 줍고 친구들에게 다시 뛰어가려는 소년의 눈에는 빈 벤치에 정중하게 손을 내미는 한 남자의 모습이 비췄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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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겨울, 문득 나는 방랑벽이 동해 길을 나서 특별한 목적 없이 길을 걷다, 겨울바람을 느끼며 한참을 그리 걸으니 무릎이 저려, 가장 먼저 눈에 띈 카페에 들어갔다. 잠시 자리에 앉아 쉬고 있으려니 웨이트리스가 와서 주문을 받는데, 처자가 입은 옷이 메이드복이기에 비로소 나는 내가 메이드 카페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오렌지 쥬스를 시키고 보니 내 앞 테이블에 어떤 남자가 앉아 있는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식식 거리며 화를 내고 있어 주변의 사람들이 그 불같은 형상을 두려워하였다. 나는 쥬스를 기다리는 겸 하여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 사람은 미처 분을 삭이지 못하고 내게 말하였다.  "내가 알바를 뛰어 돈을 모은 지 세 달, 코미케 안내서를 보고 루트 연구하기를 한 달이며 개장 행렬에 끼어들 방법을 고심한지 한 달, 또한 개막 전 밤샘 줄에 참여한 것이 또다시 12시간이오. 내 그리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건만, 러쉬를 이겨내 부스 앞에 서고 보니 내 앞에 선 자가 페이트 침대 커버를 남김없이 싹 쓸어가 나는 지난 다섯 달을 허투로 보낸 셈인데다 이제는 한정 프리미엄을 주고 그 약삭빠른 자에게 침대 커버를 사게 생겼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소."  그 말을 듣고 내가 물었다.  "내가 아는 페이트라 하면 몇 가지가 있으나, 그 중 코미케와 연관될 만한 페이트라면 지금 두 가지 페이트가 생각이 나네. 그러하다면 그대가 말하는 페이트는 타입문의 페이트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동포격소녀 나노하의 그 페이트를 말하는 것인가."  그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대는 웹도 들어가 보지 않는 것이오. 후자의 사재기가 한창 문제가 되었던 것을 정녕 모른다 할 것이오. 나는 그 광경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분노할 따름이외다."  그 자를 다시 훑어보니 눈에는 미소녀계 오타쿠들이 가진다는 기이한 탐욕이 비추었고, 손과 가방에는 포스터, 게임타이틀, 동인지가 가득 들렸는데, 그저 로리 캐릭터들만이 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필시 아키하바라 구석의 동인샵을 들렀다 오는 길에 분통이 나 카페를 들린 것이리라 생각하며 나는 재차 물었다.  "그대의 이야기와 품새를 보아하니 그대는 분명 로리콘인 듯하네. 2D는 종국에 허무한 것이고 로리타 취향은 자칫 잘 못하면 숭악한 범죄로 번질 수가 있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그리 사소하고 기기묘묘한 것에 연연하여 이 카페의 훈훈한 분위기를 망치는가."  그러자 그 사람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나는 2D의 절대적인 미를 사랑하는 것이지, 현실에서 그를 행할 정도로 우둔하지 않소. 그대는 어찌 나를 업수이 여겨 2D가 하찮다는 말을 하시오. 그대의 말은 나를 모욕함과 동시에 수많은 게임라이터들과 일러스트레이터들을 동시에 조롱하는 것이니 게이머의 한 사람 되어 어찌 그대의 이러한 우롱을 그저 넘어갈 수 있으리오."  그러며 모카 커피가 담겨 있던 컵을 힘주어 쥐는데, 도자기 컵에 금이 후

  • 당근매니아
  • 2007-01-26
어둠에 가려도, 홍안 빛나도다

연작 「냉소자」 제 3막 「어둠에 가려도, 홍안 빛나도다」sequence 「derider」 act three 「Even Behind the Dark, Crimson Eye is Shining」    도시의 밤은, 밝지만 어둡다.  네온사인이 전기를 집어삼키어 자신의 몸을 불사르기에 도시는 밝고, 그러하기에 또한 어둡다. 그러나 그 도시의 이름이 베인vain이라면, 밝음은 단 한 줌도 없다. 아무리 오랫동안 그 칙칙한 밤거리를 쏘다녀도 거기엔 베일 정도로 날카로운 칠흑만이 살결에 스칠 뿐이다.   도시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크며, 가장 지저분하고 가장 역겨운 매춘굴은 '독수리의 송곳니'였다. 매춘굴이자, 투견장이자, 도박장이자, 마약굴인 '독수리의 송곳니'는 도시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자랑하는 위대한 쓰레기통이었다. 크다기보다는 도리어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실내는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에서는 피를 보고 잔뜩 흥분한 개가 피거품을 문 채 푸드덕거렸고, 다른 한쪽에서는 울긋불긋한 룰렛이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딜러의 손에서 굴렀다. 공은 0에서 멈췄고, 울긋불긋한 딜러는 한껏 팔을 뻗어 테이블 위의 울긋불긋한 칩을 싹 쓸어갔다. 사기라며 울부짖고 난동 부리는 사람들은 경비원의 억센 손에 잡혀 밖으로 내던져졌다. 조금 더 반항하면 즐거운 룰렛 대신 러시안 룰렛을 해야만 하기에 사람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룰렛과 포커에서 눈을 돌리자 구역질나는 인간군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저기 팔을 휘적대는 건 분명 환각제를, 축 늘어진 건 진정제를, 바들바들 떨며 눈이 돌아가는 이건 각성제를 양껏 처먹은 쓰레기들이다. 회색 벽에는 허연 아편 가루가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 바로 옆에는 붉은 빛이 가득했다. 치부만 어설프게 가린 여자들은 시뻘건 정육점 불빛 아래서 한껏 몸을 흐느적댔다. 약에 취한 머저리들은 천천히 흐느적대는 여자들의 출렁이는 젖가슴에 지폐를 꽂아 넣었고, 곧이어 으슥한 다락방으로 기어들어 그 추잡한 모습을 감췄다.  '독수리의 송곳니', 베인의 회색 파라다이스는 오늘도 그렇게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머저리들은 흥청망청 돈을 뿌리고, 평화로운 파라다이스는 유지된다. 돈과 쾌락의 교환. 윈 윈 논제로 섬. 그것이 이 도시의 평화이자, 파라다이스의 안녕이었다.  그러나 안정은 작은 소동으로 흐트러졌다. 입구 쪽에서 둔중한 폭발음이 들리고, 이어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비명 따위야 늘 있는 것이었기에, 머저리들도 매춘부도 딜러도 하던 일을 태연히 계속했다. 사소한 폭발이 불러오는 공포 따위는 쾌락에 미치지 못한다. 도베르만과 불독은 서로의 목덜미를 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곳곳에 부동자세로 서있던 검은 슈트의 남자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그들이 왼쪽 귀에 꽂은 이어폰이 청아한 목소리로 비상사태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침을 꿀꺽 한 번 삼킨 뒤 검지 끝에 있는 버튼을 누를지 말

  • 당근매니아
  • 2007-01-19
베네치아의 기억

  이태리의 아름다운 수상 도시. 베네치아의 뒷골목에서 그 일은 일어났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녀는 알지 못했다. 소녀의 눈으로는 남자의 움직임을 쫓을 수 없었다.   그는 바람에 흐트러진 재킷을 매만지더니 방금 쓰러진 남자 옆에 서있던 또 다른 소매치기를 응시했다. 왼손은 아까 같이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오른손은 모자가 바닷바람에 날릴 새라 챙을 잡은 채로.  소녀의 가족이 묵기로 한 별장은 리도 섬에 있었다. 새하얀 백사장이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세계적인 관광지 한복판에 위치한 그런 해변을 개인 소유로 하고 있는 사람은 세계를 통틀어서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소녀는 그 아름다운 백사장에서의 모래장난과 수영에 질려 버렸다. 리도 섬의 또 다른 명물인 카지노는 나이가 어려 들어갈 수 없었다. 심심해진 소녀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베네치아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안전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소녀의 가문을 노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포기할 소녀가 아니었다. 부탁을 단칼에 거절당한 후 소녀는 별장을 탈출할 방법만을 찾았고 결국 몇 시간 전에 별장을 탈출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자신을 별장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으려 하는 집사를 교묘한 거짓말로 따돌리고 리도 섬과 베네치아 사이를 왕복하는 수상 버스를 잡아탔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아버지와 함께 섬 주변을 돌아다니거나 별장으로 돌아올 때는 항상 개인용 요트를 사용했었기 때문에 수상 버스의 가격은 잘 몰랐다. 소녀는 그냥 주머니 속에 있던 꼬깃한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내고 배에 올라탔다. 버스 기사는 이상한 꼬마가 다 있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구먼' 하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소녀가 탄 수상 버스는 베네치아 행이었다. 베네치아의 푸른 바다는 지중해의 따가운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고 갈매기들은 본격적으로 시끄럽게 울어대며 먹이를 찾기 시작했다. 배 양쪽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느껴지는 바람은 시원했고 배 앞전에 파도가 부딪히며 부서지는 소리는 경쾌했다. 소녀가 배의 창문을 통해 잠시 주변 경치를 즐기는 사이에 버스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베네치아에 도착한 소녀가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곤돌라였다. 이전에 어디선가 베네치아에서는 곤돌라를 타보아야 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소녀는 산 마르꼬 광장 옆 선착장에서 대기하던 곤돌라를 하나 잡아탔다. 곤돌라의 뱃사공은 인상 좋은 할아버지였다. 주름 많은 늙은 뱃사공은 관광객들을 상대하며 평생을 먹고 살아온 사람답게 친절했다. 소녀가 귀여운 손녀딸처럼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소녀가 베네치아를 둘러보고 싶다고 말하자 뱃사공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를 한 바퀴 빙 돌았다. 뱃사공은 도시 곳곳에 숨겨진 중요한 건물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그 유래와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 언제인지

  • 당근매니아
  • 200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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