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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아들

  • 작성자 유쾌한
  • 작성일 2006-03-31
  • 조회수 310

 

1.

은빛으로 반짝이는, 날카로운 그것을 보고 소년은 중얼거렸다.

예쁘다.

-라고.


순간의 충동이었다. 약간의 호기심을 느끼며 소년은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에 손을 뻗었었다. 그 짧은 시간, 속으로도 아차 싶었던 그였지만,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몸조차 그 돌발적인 행동을 ‘해선 안 될 일’이라 여겼는지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찰나였다.

소년은 아무 생각 없이, 계획에 없었던 일을 해 냈다. 망설임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가 포크를 훔치는 모습은 너무나 능숙하게 보였다. 아, 그것은 남이 보면 이상하다 못해 웃기는 상황이었다. 어디하나 나무랄 데 없는 소년이,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 별 가치도 없는 식 기구를 훔치다니. 게다가 그는 동양인이었다. 고기가 주식이 아닌 그에게 포크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나이프도 없이.

길거리로 나온 소년은 주머니에서 살짝 자신이 훔친 포크를 꺼내어 본다. 그리고 누가 볼까 두려워 다시 깊숙이 집어넣는다.

처음이었다. 타인의 무언가를 훔친 것은. 가질 수 없는-그러니까 자신에게 ‘과분한 것’을 탐내는 것을 죄악시 하는 듯이 보였던 그였는데.

하지만 이 상황보다 더 이상한 것은 바로 이 심장 쪽이었다.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팔딱거릴 줄 알았던, 아니, 그래야만 했던 그의 심장은, 어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더 감각해 보면 다를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심장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제보다 더 평온하게 뛰고 있었다. 혼란스러워야 할 머릿속도 어제 이상으로 더 차갑게, 가라앉아있다.

무언가를 훔친 것.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시간이 지나자 소년은 그것을 이상하게 느끼는 자기 자신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생각 할수록, 무언가를 훔치고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건 마치 숨쉬어야만 살 수 있는 것처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것처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2.

년은 알고 있다. 겔다에게 패배한 거울조각이 다음 사냥감을 위해 여행을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냥감이 자신이 되었다는 것을. 또한 자신은 이미 먹혀버렸다는 것을.


소년은 눈을 비빈다. 최근 그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것은 흔히 도는 전염성 높은 눈병도, 그가 어려서부터 앓던 알레르기의 증세도 아니었다. 그럼 무엇 때문이냐, 하고 묻는 다면 무성의 하게도 ‘그냥’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정말이지 그저, 그냥, 가려울 뿐이다.

눈을 비비던 소년은 어려서 읽은 안데르센 동화를 떠올린다. 눈의 여왕. 악마의 장난으로 깨진 거울의 파편을 맞은 카일은 어느 날부터 차가운 아이가 되었다지. 그래, 그 파편 또한 그의 눈에 박혔다고 한다.

소년은 자신이 언제 그 파편을 맞았는지 기억한다. 눈이 간지러운 지 한 두 달쯤 되었으니, 아아, 분명 그 때였을 것이다. 그의 생일 날. 그 파편은 친할머니의 혀 밑에 숨어 있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 때 그 할머니의 말과 함께 그에게 날아 온 것이겠지. 평소 할머니가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왜 그런지는 알지 못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 날 저녁, 그는 알고 싶지 않은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더러운 아이를 주워 와 고생을 사서 하겠다는 이유는 뭐냐.

그러면서 할머니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그의 어머니를 욕했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만 소년이 신경 쓰이는지 그의 방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잘 걸. 자버리고 말 걸. 소년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산산이 부수어 진다. 그래서 그의 조각들이 뒤섞여,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는 자신의 뿌리가 가짜인 듯해 힘 잃고 휘청거렸다. 허공에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발돋움도 한 적 없는데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추락밖에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이것을 처음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와 같은 식탁에 앉아있을 때에도 아주 가끔씩 이런 기분을 느끼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건 잠시의 ‘기분’이 아니었다. 이것은 몇 번이든 모습을 바꾸어 평생 동안 그의 주변을 맴돌, 그의 일부, 그의 가지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울고 싶지도 않았다. 그 한마디에 울 기운까지 없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소년은 우는 대신 눈을 비비었다.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 흘리지 않는 눈물을 닦는 듯이 보였다.

얼마나 비벼댔는지 소년의 눈은 토끼 눈처럼 빨갛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눈물이 나오지는 않는다. 거울의 파편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생각한다. 자신에게도 자신을 위해 울, 그리고 자신을 울게 할 겔다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고.


3.

소년은 미소한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를 비웃는 것 같이 보인다.


해선 안 되는 것. 강요된 약속. 금기. 그것은 절벽에 열린 열매처럼 위험한 것이지만, 그래도, 아니 그래서 너무나 달콤하다. 사람은 그 열매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그 열매를 먹는 것이 삶 그 자체인 사람이 있다. 그만큼 그것은 그 무엇에도 빗댈 수 없는 쾌락이다.

소년 열매를 따 먹고 있지만 발밑이 낭떠러지라는 것을 아주 모르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달은 자마저 유혹할 수 있는 그 핏빛의 열매는, 필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 말하면 위험한 것임을 알면서도 번번이 유혹에 넘어가는 그가 정상인이 아니라는 것도 틀림이 없지만.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옹호하지 않는다.

-나는 미쳤다.

그는 지금처럼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말을 되뇌어 본다. 그리고 소년은 곧 얼굴에서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워버린다. 그 조소가 자신을 향한 것인가 하는, 쓸데없는, 그답지 않은 감상적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년은 오늘도 아름답고 달콤한 열매에 손을 뻗는다. 그는 알고 있다. ‘유혹자’보다 더 악한 쪽은, ‘유혹을 기다리는 자’다.

그는 열매를 따 먹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먹을 수 없는 ‘씨’를, ‘찌꺼기’를 주머니에 쑤셔놓는다. 그럴 때면 기분이 참 좋았다. 존재조차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라  앉았던, 그의 죽었던 심장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쿵쿵거리는 심장의 노랫소리가 듣기 좋다. 이때만은 창백한 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돈다. 열매는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아니, 죽어있던 그를 살려주었지.

그는 조금만 더 이 순간을, 이 희열을 만끽하고 싶었다. 심장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른다! 살아있다! 살아있다! 살아있다! 아직 나는 살아있다고!

그때였다. 소년이 가게에서 나와 모퉁이를 돌다가, 낯익은 꼬마 여자애 하나를 발견했다. 하늘색 옷을 입은. 어머니와 함께 그의 집에 자주 놀러온 바 있는 그의 이웃이었다.

소년은 작은 아이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곧 움찔한다. 아이의 맑은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일까. 그는 갑자기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그 작은 입을 열어 또렷한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소년의 눈동자와는 달리 아이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너, 도둑질 했지?”

“…….”

소년은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는 마음속으로 카일이 깨끗한 겔다에게 느꼈을 법한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짧은 말 한마디로 이렇게 한 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 수 있다니. 소년은 이제야 카일을 이해한다. 자신의 추악함을 깨닫게 하는, 더 부각시키는 존재는 불쾌할 뿐이다.

아이만의 오만하고 위선적인 말투. 듣는 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그 순수함. 그 순수함을 내뱉은 아이는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년은 위로 하지 않는다. 지금 울어야 할 쪽은 자신이었기에.

태어날 적부터 정신이 성치 않은 아이였다. 자신의 나이에 곱절이나 되는 소년에게 ‘너’라 부르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밑도 끝도 없이 감정이 북받쳐 우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아아, 백치. 그들은 아는 것이 없기에 두려운 것도 없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소년은 그 소녀의 눈물을 놀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4.

소년은 금방 잠에 들지 못한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것들을 잊기 위해서는 잠을 자야 했는데 그는 그러지 못했다.


소년은 무엇 하나 모자라지 않았다. 어디에 놓아도 빠지지 않을 성적이며, 외모, 필력까지. 때문에 갑갑한 일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 그래서 그는 하나의 구멍을 만들었다. 숨을 쉬기 위한 일종의 배출구를. 들숨만으로는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 새카맣고 달콤한 장난으로-그 열매로 인해-일상에서 구원받게 되었다.

그렇게 소년은 둘이 되었다. 모범적이고 바른 학생, 그리고 도벽이 심한-더러운 손을 가진 길거리의 소년으로. 그러나 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었다. 둘 다 자기 자신이었기에 쉽게 죽일 수 없었다. 오래도록 고민하던 그는 가장 이상적인, 위험한 선택을 했다.

두 소년을 모두 살리는 것으로.

두 소년을 살리려면 그동안 억눌려 왔던 어둠의 소년도 살려야 했고, 어둠의 소년은 어둠 속에서만 살 수 있었으므로, 그는 어둠 속에 그를 감추었다.

그때부터 소년은 위태롭고 아찔한 일상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진심으로 기뻤다. 이제야 비로소 그 자신이 완전하게 된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가 영원히 두 소년으로 공존하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두 소년 중 한 명을 죽여야 될 날이 올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발각되고 말았다. ‘언젠가’가 오늘이거나 내일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꼬마 녀석이 오늘 당장 그 어수룩한 혀를 놀린다면 둘 중 하나를 피고로 재판을 시작해야 하고 곧 장 처형식을 치러야 한다. 재판을 알리는 종소리가 언제 울릴지 몰라 그는 조바심 쳤다.

소년의 심장이 요동친다. 낮의 그것이 심장의 흥겨운 노랫소리이고 환호소리였다면 이번엔 절규에 찬 비명소리이며 울음소리이다.

그는 아이를 저주했고, 자신의 더러운 손을 저주했으며, 자신을 낳은-얼굴도 모르는 부모를 저주했다. 그는 조용히 얼굴 없는 생부모를 목 졸라 죽이는 상상을 하다 잠이 들었다.


5.

늦은 밤, 두 소년이 다투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둘 중 하나는 아무도 그런 조그만 아이의 말을 믿지 않을 거라 했고, 또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아이의 입에서 ‘그 일’이 새어나와 소년의 일상이 붕괴되어 버린다면 둘 중 누구를 처형해야 옳은지 논쟁을 벌였다. 이성적으로. 공격적으로. 으르렁거리며.


새까만 하늘 아래, 어스레한 가로등불 아래, 아직까지 소녀가 남아 흙장난을 하고 있다. 소년은 소녀와 같이 공사장 주변 공터 아무데나 자리 잡아 말없이 그 모습을 본다. 반쯤 감긴 눈으로, 무표정하게. 소녀는 아직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 생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직도 소년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 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한 것을 보면 기억은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 일’은 평소의 그녀가 윗사람에게 잘 하는 주제 없는, 정리 안 된 이야기의 소재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다행이라 느끼다 못해 약간은 허무한 기분마저 들었다.

소녀는 자신 뒤의 소년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혼자서 웃는다. 그러면서 소녀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자 다시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아이의 노랫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면서 저번의 그 무거운 한마디를 기억하게 해 주었다. 동시에 소녀의 가벼운 입에 대한 불신, 불안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섣불리 건들었다간 아이는 울 것이고, 곧장 그녀의 부모에게 달려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었다. 물론, 처음엔 믿지 않겠지만 몇 번이고 그 일이 아이의 입에서 오르내리면, 주변의 어른들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겠지. 그들이 ‘그의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바로 내일 들통이 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래, 지금은 소녀가 말하고 있지 않는다고 해도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하잖아? 비밀이 풀리기 전에 빨리 묻어버려야 한다.

-아아, 그래, 차라리 여기서 아이를 말할 수 없는 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어떨까?

오랜만에 두 소년이 합의를 보았다.

양 손끝이 저려온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심장이 뛴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은 저번에 경험한 바 있듯,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속이 뒤틀린다. 역겨웠다. 더러운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역겹다-.

소년은 공사장 주변에서 아무렇게나 뒹굴던 각목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린다.



콰앙!!


6.

몸은 소년이 명령하지 않은 일을 했고,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소년은 쓰러진 소녀를 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분명, 비록, 그가 시킨 일은 아. 니. 었. 으. 나…….


소년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헉, 허억…….

꿈이었다. 어디서부터 꿈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것은 꿈이었다. 꿈이었으나 지독했다. 그 스스로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밝혀지는 것이 두려웠다고는 하나, 반쪽의 죽음이 두려웠다고는 하나, 그랬다고는 하나, 그렇기는 하나…………, 소녀를 죽이다니. 그런 꿈을 꾸다니.

머리가 아프다. 숨쉬기가 힘들다. 울렁거린다. 역겹다. 죽고 싶다. 죽을 것 같다.

그는 입을 손으로 가린 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욱, 우욱!!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헛구역질은 멎지 않는다. 더러운 토사물이라도 나오면 조금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래야 하는데. 지친 그는 답답한 가슴을 몇 번이고 때린다. 세게. 세게. 그러나 아프지 않다. 문 밖에서 어머니가 그를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년은 한참 뒤에 중얼거리다시피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어머니는 문을 열고 들어오려 하지만 소년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가 다시 괜찮다고 말하자, 소년의 어머니는 그제 서야 주춤 물러서며 주방으로 갔다.

소년은 명치끝에 응어리 진 무언가를 느꼈다. 그러나 뱉어지지 않는다. 토할 수 없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파리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서 있던 소년은 입술을 깨물고 수돗물을 튼다.

씻고 싶은 곳은, 답답한 곳은 그 쪽이 아니었으나…….

씻고 난 소년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 창백해 보인다. 소년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문 밖으로 나온다. 소년의 어머니는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그는 그녀를 지나쳐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통약을 꺼냈다. 그 때 어머니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 옆에 섰다.

“괜찮니? 어떡하니, 아침부터……. 학교는 갈 만 한 거지?”

“네. 그럭저럭…. 그보다 아침 일찍부터 누구 전화가?”

“아, 그 은행나무 집말이야, 어젯밤에 그 집 아이가 또 사라졌다는 구나.”

소년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목에 약이 걸린 것 같은 기분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물 컵을 든 그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려온다. 답답하다. 그는 아까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다시 화장실로 달려가고 싶은-도망치고 싶은-마음을 억지로 참았다.

“아직도 못 찾았대요?”

“글쎄, 저번에도 이런 일이 많았으니까. 오늘도 대낮엔 찾을 수 있겠지.”

소년의 어머니는 웃으며 요리를 찌개의 간을 보았다. 그녀는 찌개의 간이 덜 되었다고 느꼈는지 소금을 찾으며 농담하듯 그에게 물었다. 그 여자아이가 걱정되느냐고. 소년은 조용히 물 컵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네, 하고.


7.

소년이 꿈속에서 만난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제겐 잊을 만한 추억도 없고요, 추억을 함께한 소녀도 없고요, 저를 데려가는 여왕도, 저를 구원해 줄 겔다도 없어요. 제가 가진 것은 오로지, 신에게 저주받은 거울 파편뿐이랍니다.


소년은 혹시나 싶어 학교 가는 길에 그 공터를 지났다. 그 곳엔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것에 안심하고, 또한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다시 학교로 향했다.

하늘을 올려보지 못하는 그는 고개를 숙이며 죽어가는 사람처럼 힘없이, 걸어간다. 그렇게 오랫동안 걷기만 하던 그는 전봇대 옆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다. 그의 작은 발은 아침의 분주한 다른 이들과 달리 멈추어 있다. 하지만 소년의 것처럼 죽어가는, 죽어있는 것은 아니다. 밝고 생기가 넘친다.

고개를 든 소년은 놀라고 만다. 상대가 그 하늘색 옷을 입은, 하얀 소녀였기에. 소년은 저번처럼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이지 못한다. 그런 그의 앞에서 소녀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소녀는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소년은 잡을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아이가 손을 뻗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눈이 간지럽다.

그 때 움직일 수 없는 소년을 지나쳐 소녀 또래의 다른 남자 아이가 소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소년 앞에서 크게 웃었다. 그 모습을 소년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손을 잡고 돌아선다. 그리고 같이 달린다. 그 모습을 소년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아아, 눈물이 나온다. 하지만 거울조각은 나오지 않는다. 소녀는 뒤돌아 소년을 보지 않는다. 위로하지 않는다. 저번처럼 그를 대신해 울지도 않는다. 대신 다른 소년과 손을 잡고 그가 볼 수 없는 골목으로 달려간다.

소년은 길거리에서 울고 있다. 울 수 없어 울고 있는 소년은 자신에게서 이 저주스런, 저주 받은 파편을 빼 줄 소녀를 찾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를 원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그가 그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였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아무리 기다려도 그를 구원해 줄 겔다는 오지 않아. 아무리 울어도 소년에게 박힌 거울파편은 그대로.

괴이하고 아름다운 은색의 조각. 소년은 기억하려 노력한다. 정확히 언제 그에게 거울 파편이 박혔는지를. 언제부터 자신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는지를.

그래, 할머니의 혀는 파편을 자극시킬 악마의 도구였을 뿐이다.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박힌 이 ‘저주’가 빠지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할머니는 그에게 그리 영향력 있는 마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는 문득 생각한다. 그것은 소년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뱃속에서 박힌 것일지 모른다고. 아니, 그는…… 눈의 여왕의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

이 곳에 올 때마다-그러니까 다른 분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일종의 열등감이 느껴진달까요, 우울해진달까요, 기운이 빠진달까요...

그래도 나름대로 분발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답니다.

 

하지만 다른 글들에 비해 저의 글이 어설프다고 너무 비웃지는 말아주세요.

주말에 마구 휘갈긴 글입니다만, 저로서는 열심히 한 거거든요.(삐질)

 

여튼,

부족한 글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들 좋은 하루 되세요.^ ^

유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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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2-11
숲 속의 오두막 집

-숲 속 깊숙한 곳 작은 오두막집그곳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죠끊이지 않는 웃음소리잔잔히 퍼지는 평화마음까지 스미는 따스한 온기아아, 꿈만 같은 오후죠오늘도 감사하며 남자는 기도를 드립니다.‘이것이 꿈이라면… 오오, 전능하신 신이시여…이 꿈을 꾸다 죽을 수 있기를 이곳은 숲 속의 작은 오두막집이다. 산 아래의 마을까지 가려면 약 3시간 반쯤 걸어가야 할 만큼 외진 곳이지만, 몸이 약하고 푸른빛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이곳은 최적의 장소이다. 다른 이의 손이 닿지 않는 우리들만의 보금자리. 아아, 길고 검은 아내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그래, 아직 우리는 젊다. 우리는 아직 시간은 많고, 더 많이 즐길 수 있다. 그래, 사실 나는 이 평화가, 이 행복이 깨뜨려 질까 너무나 두렵다. 이것들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이니까. 그래서 모든 것이 평소와 같이 평화롭게 끝난 저녁때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응?”  그러고 보니 안방에서 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식기를 가지고 손장난 치던 나와 요리를 하던 아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내는 환을 들어 안았다. 조금씩 울음을 그치는 사랑스러운 나와 그녀의 결실. 내가 손가락으로 그 귀여운 볼을 찌르며 웃자, 그녀석도 어느새 방긋방긋 웃어보였다. 그녀를 닮았다. 웃는 입매까지도 그녀를 빼다 박았다. 나는 아이의 이마에 입맞춤 했다. 아이에게서 아내의 젖내가 났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토록 두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따뜻한 것들을…. 나는 둘도 없이 소중한 나의 가족들을 껴안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나의 행동에 아내는“우리 약속한 거 기억하지? 같은 날 같은 시각, 우리의 시간을 멈추자는 것.”“그래, 우리 환이 커서 우리가 필요 없어지면… 두 손 꼭 잡고 웃으며 함께 잠드는 거야.”   “빠압하아.” “밥을 부르는 거니, 날 부르는 거니.”  “하아?”  “아, 아니 형… 여긴 어떻게?” “여어. 이륜, 오랜만이구나.”  그의 위로에도 나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 붉은 액체가 너무나 무서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우는 것에 대해 짜증을 내던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집어 들었다.  “어때, 나도 똑같지? 하나도 안 아파.”   그러니 빨리 가서 치료를 하자, 이륜.”   “나의 허락도 없이 결혼하더니, 아주 잘 살고 있군 그래.”  집안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깨달은 것이지 갑자기 환이 울어재꼈다. 아내는 달려가 아이를 달려주었고, 나는 굳은 표정으로 형의 앞에 서 있었다. 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아이는 울고 있었으며 우리는 지금 오랜만에 만난 형제 사이였다. 지금까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침묵을 통해 대화한 형과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있었다. 시간이 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환의 점점 작아 들어가는 울음 소리였다. 그렇게 침묵에 묻혀 소음은 줄어들고 있었

  • 유쾌한
  • 2006-02-01
하늘의 구멍

  1. 슬픈 아름다움을.나는 지금껏 그와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뭐, 사실을 고백하자면 그가 내가 만난 첫 번째 사람이었지만, 그 이후로도 그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이해하는데 문제는 없으리라본다.) 그는 이곳과는 특별히 다른 냄새가 나는 그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사람이었다. ‘이 곳’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사람. 이를테면 그는, 달에서 온 사람 같았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이 곳과는 또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가진 창백한 얼굴의 달의 아들. 그래서 그가 친구로, 그리고 연인으로 택했던 것은 달이었다. 그는 밤이면 촛불 하나만 켜고 아예 창가에 의자를 가져가서는 오랜 시간 달과 보내기를 좋아했다. 그는 의자에 앉을 때 항상-그것이 가장 편한 자세였는지-작은 나무판자 끝에 발을 올리고 깍지 낀 손으로 그 발을 끌어안았다. 창은 컸고, 그는 그 창과 가까이 있어서 그 불안정한 자세가 조금만 흐트러져도 그가 창에서 떨어져 저 먼 땅바닥에 곤두박이칠까 보는 사람이 다 아찔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있어서 달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를 봐 온 나만은 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곤 했다. -겨울이 좋아요. 겨울의 하늘은 까맣고 달은 창백하게 질렸거든요.  그가 좋아하는 겨울 밤,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그때가 얼마 전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대들을 그토록 즐겁게 했던 눈이 내렸다. 그 날은 함박눈이 내렸었다. 회색빛으로 변한 하늘은 빈틈없이 완전했다. 달의 머리카락이라도 찾는 것인지 소년은 그 날도 창 에서 떨어질 줄 몰랐었다. 바람이 차 그의 건강을 걱정한 가족들은 창문을 닫아주려 했지만 그는 한사코 사양하며 말했다. 오늘은 달을 찾고 있노라고, 아니, 오늘도 달을 보고 있노라고. 그는 달을 사랑하기에 달의 죽음을 슬퍼하는 한 편 기뻐할 수 있었고, 그런 자신을 자책하고 비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지, 아니면 그가 읽던 책에서 내가 지나가며 얼핏 보았던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와 비슷한 내용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또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날도 그는 홀린 듯 달을 보았고, 그날도 나는 홀린 듯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때였다. 달에 빠져든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것은 다름 아닌 달을 향한 말이었다. -달이 뜨지 않는 몇 번의 밤을 보내는 게 싫어졌어.  나는 이유 없이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래층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특별히 이상하게 큰 소리도 듣지 못한 그의 어머니가 정신없이 소년을 찾으며 주변 이들에게 그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모두들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을 때 위층에서 주무시던 그의 할아버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입을 뗐다. 잠결에 눈을 뜨다 놀라고 말았다고. 그는 창 밖에서 날개도 없이 하늘을 나는 소년을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 유쾌한
  • 200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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