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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기억

  • 작성자 당근매니아
  • 작성일 2006-04-08
  • 조회수 879

  이태리의 아름다운 수상 도시. 베네치아의 뒷골목에서 그 일은 일어났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녀는 알지 못했다. 소녀의 눈으로는 남자의 움직임을 쫓을 수 없었다.
  그는 바람에 흐트러진 재킷을 매만지더니 방금 쓰러진 남자 옆에 서있던 또 다른 소매치기를 응시했다. 왼손은 아까 같이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오른손은 모자가 바닷바람에 날릴 새라 챙을 잡은 채로.

  소녀의 가족이 묵기로 한 별장은 리도 섬에 있었다. 새하얀 백사장이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세계적인 관광지 한복판에 위치한 그런 해변을 개인 소유로 하고 있는 사람은 세계를 통틀어서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소녀는 그 아름다운 백사장에서의 모래장난과 수영에 질려 버렸다. 리도 섬의 또 다른 명물인 카지노는 나이가 어려 들어갈 수 없었다. 심심해진 소녀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베네치아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안전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소녀의 가문을 노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포기할 소녀가 아니었다. 부탁을 단칼에 거절당한 후 소녀는 별장을 탈출할 방법만을 찾았고 결국 몇 시간 전에 별장을 탈출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자신을 별장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으려 하는 집사를 교묘한 거짓말로 따돌리고 리도 섬과 베네치아 사이를 왕복하는 수상 버스를 잡아탔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아버지와 함께 섬 주변을 돌아다니거나 별장으로 돌아올 때는 항상 개인용 요트를 사용했었기 때문에 수상 버스의 가격은 잘 몰랐다. 소녀는 그냥 주머니 속에 있던 꼬깃한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내고 배에 올라탔다. 버스 기사는 이상한 꼬마가 다 있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구먼' 하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소녀가 탄 수상 버스는 베네치아 행이었다. 베네치아의 푸른 바다는 지중해의 따가운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고 갈매기들은 본격적으로 시끄럽게 울어대며 먹이를 찾기 시작했다. 배 양쪽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느껴지는 바람은 시원했고 배 앞전에 파도가 부딪히며 부서지는 소리는 경쾌했다. 소녀가 배의 창문을 통해 잠시 주변 경치를 즐기는 사이에 버스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베네치아에 도착한 소녀가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곤돌라였다. 이전에 어디선가 베네치아에서는 곤돌라를 타보아야 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소녀는 산 마르꼬 광장 옆 선착장에서 대기하던 곤돌라를 하나 잡아탔다. 곤돌라의 뱃사공은 인상 좋은 할아버지였다. 주름 많은 늙은 뱃사공은 관광객들을 상대하며 평생을 먹고 살아온 사람답게 친절했다. 소녀가 귀여운 손녀딸처럼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소녀가 베네치아를 둘러보고 싶다고 말하자 뱃사공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를 한 바퀴 빙 돌았다. 뱃사공은 도시 곳곳에 숨겨진 중요한 건물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그 유래와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 언제인지 하는 것 같은 사소한 것까지 소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베네치아의 상징과도 같은 산 마르꼬 성당, 카사노바가 갇혀 있었다고 하는 탄식의 다리와 화려하게 장식된 두깔레 궁전. 전부 소녀에게는 새로운 것들뿐이었다.
  베네치아를 구석구석 훑어보고 이제는 수로가 닿지 않는 골목들을 돌아다녀보기 위해 소녀는 곤돌라에서 내리기로 했다. 뱃삯으로 100달러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늙은 사공에게 건네고 친절한 안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늙은 뱃사람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곤돌라는 천천히 수로를 타고 바다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소녀는 베네치아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집들과 각종 기념품 가게들. 수백 년 된 나무 기둥으로 지탱되는 수상 도시는 소녀에게는 마냥 신기해 보였다. 길거리에서 먹음직한 냄새를 거리에 뿌리고 있는 먹거리들을 조금씩 맛보고 마음에 드는 작은 액세서리들에 얼마인가의 돈을 지불하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갑갑한 별장과 꽉 막힌 집사에게 벗어나 소녀는 실로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했다. 소녀는 방금 전에 산 특이한 맛의 꼬치구이를 입에 물고 주택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세계적인 관광지일수록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털어 먹고 사는 소매치기의 수도 다른 도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것이 보통이다. 거기다가 그 관광지가 속한 국가가 안 그래도 소매치기가 많은 이태리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수상 버스에서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100달러짜리 지폐를 꺼낸 보인 것이 화근이었다. 해봐야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주머니에서 그런 큰돈을 꺼내는 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특히나 소매치기들은.
  원래 버스 승객의 주머니나 털러 수상 버스에 올라탔던 6인조 소매치기는 소녀의 주머니에서 지폐가 나오는 것을 보고 목표를 바꿨다. 시시한 좀도둑질 대신 그 소녀를 납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생긴 것을 보니 이쪽에 사는 아이 같지는 않고 아마 이 주변으로 여름휴가를 지내러 온 어느 귀한 집 아가씨일 것이다. 할 일이야 간단하다. 소녀를 납치한 뒤 리도 섬의 호화로운 별장들을 주시하다가 그 중 난리가 난 곳을 찾아 협박 전화를 넣기만 하면 된다. 며칠만 있으면 소녀가 어느 집안 출신인지는 확실해질 것이다. 남자들은 조용히 소녀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소녀가 인적 드문 곳으로 가기만을 바라면서.
  그리고 드디어 소녀는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녀가 들어간 한낮의 주택가는 납치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소녀가 걸어가는 골목으로 두 명이 따라 걷고 나머지는 길 끝에 있는 갈림길을 막기 위해 앞서 갔다. 납치는 이전에도 몇 번 해본 적이 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 적당히 며칠 잡아놓았다가 돈이 오는 걸 확인하고 재빨리 도망치면 그만이다. 이걸로 몇 달은 놀고먹을 수 있을 터이다. 며칠 뒤에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의 허름한 지하실에서 아이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체로 발견되는 것은 남자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돈이 생기면 할 수 있는 일들을 각자 속으로 꼽으며 남자들은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소녀가 희한하게 생긴 건물들을 따라 골목 깊은 곳으로 들어섰을 때 남자들은 소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는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앞 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에 의해 봉쇄당했다. 소녀는 남자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태도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에 도움을 청했지만 거리에 그 앳된 소리를 들을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소녀가 들어와 있는 골목은 사람들이 이미 일터로 떠나 텅 비어있는 주택가였다. 저녁때라면 저녁식사를 만드는 향긋한 냄새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소녀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러댔지만 남자들은 느긋하게 거리를 좁혀왔다. 아무리 반항을 한다고 해도 겨우 예닐곱 살 먹은 소녀의 힘이 남자들을 이겨낼 수 있을 리 없다. 천천히 일을 처리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세 갈래로 갈라진 그 길의 중앙에서 소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아버지 말을 들을 걸, 이쪽으로 오지 말 걸 하는 후회도 지금 와서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이미 남자들은 그 우악스러운 손으로 소녀의 가냘픈 팔을 움켜 쥘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와 있었다. 조금 뒤면 소녀는 납치되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원래부터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남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골목으로 숨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하얀 색 연미복을 빼입고 있었다.
  "거기 그 아가씨는 저하고 좀 볼 일이 있는데요."
  자신을 눈치 챈 남자들이 험악한 표정을 짓고 돌아보자 그는 인상을 찌푸리는 남자들에게 싱그럽게 웃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양인이라고 하기에는 이국적이고 서양인이라고 하기에는 정겨운 얼굴. 체형도 얼굴도 어디 출신이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었다. 어디 출신의 사람으로도 단정 짓기 힘들지만 그 누구보다도 인간 같은 외모. 하얀 모자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서글서글한 눈에는 철없는 어린 아이들이 가지곤 하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얹어져 있었고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팔의 각도는 절묘했다. 그는 하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였다. 작은 얼룩 하나 없이 새하얀 연미복 속에 검은 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외투처럼 새하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재킷과 달리 넥타이에는 검은 색의 세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그는 좁고 지저분한 골목길의 한 쪽 벽에 몸을 기댄 채였지만 어째서인지 입고 있는 연미복에는 전혀 때가 타지 않았다. 몸을 살짝 기댄 그 모습은 햇살을 피해 바오밥나무 위에 여유롭게 늘어져 있는 표범마냥 우아했다. 남자들은 그가 자신들을 방해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소녀를 납치하려 한 것을 들킨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처리해야 했다. 남자들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여유 있는 그의 미소와 살벌한 남자들의 표정. 그는 주머니에 넣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소녀를 가리키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데려 가도 되겠죠?"
  그는 그 말에 대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그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남자 한 명이 그대로 그에게 달려든 것이다.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지 십 년이 넘어가는 우락부락한 남자와 깔끔하게 차려입었지만 별로 싸움에 능해 보이지는 않는 그. 결과는 뻔해 보였다. 가만히 벽에 기대있는 그에게 남자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어 그대로 오른쪽 주먹을 그의 얼굴로 내질렀다. 웅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 정도의 펀치. 그는 벽에 기댄 그 상태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달려드는 남자를 응시했다. 마치 무모한 치킨 레이스라도 하는 듯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가 주먹을 완전히 뻗은 순간 그의 모습은 벽에서 사라져 있었다.
  주먹에서 당연히 느껴져야 할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자 남자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전까지 벽에 기대있던 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쫓아 남자가 뒤를 돌아본 순간 그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남자의 주먹이 허공을 내지르는 순간. 그는 어느 샌가 남자의 뒤로 돌아가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연미복의 옷자락. 하늘거리는 검은 셔츠. 그는 입가에 여전히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소녀의 눈에도,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남자들에 눈에도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남자의 등 뒤로 돌아가 자연스럽게 그 어깨에 오른손을 얹었다. 마치 오랜 친구의 어깨라도 두드리듯이 가볍게 올려진 손이었다. 그러나 그 손이 얹어지는 순간 남자는 픽하고 쓰러졌다. 마치 물을 뿌린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남자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보였다.
  그는 바람에 흐트러진 재킷 자락을 살짝 매만지더니 방금 쓰러진 남자 옆에 서있던 또 다른 소매치기를 응시했다. 왼손은 아까 같이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오른손은 모자가 바닷바람에 날릴 새라 챙을 잡은 채로.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본 남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 가장 가까이에 서있는 남자. 즉, 방금 쓰러진 남자와 조를 짜서 움직이던 소매치기는 주머니에서 슬금슬금 컴뱃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15cm 정도의 예리한 나이프의 끝은 파랗게 날이 서있었다. 남자는 나이프를 힘껏 움켜쥐고는 그대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남자의 움직임은 직선적이었고 칼을 다루는 솜씨 역시 허술했다. 그저 그의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드는 나이프는 그리 피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직선적인 움직임이 오히려 치명적이었다. 그와 남자가 대치하고 있는 골목길은 성인 남자 두어 명이 나란히 서면 답답해 올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남자의 칼이 날아드는 것을 보더라도 피해서 빠져나갈 방도는 없고 뒷걸음질 친다고 해도 칼을 완전히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나이프는 시퍼런 날을 뽐내듯이 그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었다. 피할 수도 받아 낼 수도 없는 칼날은 그의 가슴에 꽂혔다.
  아니, 꽂혔을 터였다. 남자는 분명 나이프로 그 가슴팍을 꿰뚫었다고 생각했건만 칼날의 끝에서는 살덩이가 찢어져 나가는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가 찌른 것은 단순한 잔상이었다. 놀란 남자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곳에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정면으로 칼날이 날아드는 순간. 그에게 피할 공간 따위는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남자의 등 뒤에 있었다. 아까는 분명 그가 빠른 몸놀림으로 주먹을 피해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는 공간을 뛰어넘고 있었다.
  빗나간 나이프를 재빨리 회수하며 남자는 몸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우아한 포즈로 서있었다. 소녀를 보호하듯이 등진 채, 그는 남자의 있는 데로 일그러진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그의 옷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렸다. 왼손은 여전히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였다.
  남자는 나이프를 고쳐 쥐었다. 아까는 어떻게 피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결코 피할 수 없다. 그의 심장에 칼날을 바로 꽂겠다. 그 일념만이 남자의 정신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분노를 머금은 그의 얼굴이 소녀의 눈에 들어왔다.
  잠시간의 대치 후, 남자는 괴성을 지르며 다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이프의 궤도는 정확히 그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이프는 목표였던 심장에 박히지 못했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남자는 그대로 쓰러졌다.
  이번에도 그는 희미한 잔상만을 남긴 채 남자의 나이프보다 빠르게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 어깨에 오른손을 얹었다. 그가 움직이는 모습은 옆에서 지켜보던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 쓰러진 남자의 동료와 마찬가지로 남자는 픽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오물에 처박힌 남자의 얼굴은 방금 전보다 훨씬 늙어 있었다.
  남자가 쓰러지고 그는 나머지의 처리를 시작했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거기에 서있던 네 명에게 달려들었다. 남자들은 다들 나이프를 들고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소용없었다. 남자들의 나이프가 스쳐 지나가는 곳에 언제나 그는 없었고, 남자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언제나 그는 있었다. 나이프는 공허하게 공기를 가를 뿐이었다. 결국 남자의 옷자락조차 단 한 번도 베지 못한 채 세 명의 소매치기는 먼저 쓰러진 자신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무너져 내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주름이 늘어 있었다.
  같이 온 동료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지자 마지막 남은 남자는 주머니에서 바들거리는 손으로 작은 권총을 하나 꺼내 들었다. 남자는 가까스로 그에게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에 손을 얹었지만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다. 남자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후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깊게 눌러쓰고 있던 모자의 앞 챙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리고는 그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주머니에서 빼지 않았던 왼손을 뽑았다. 왼손은 하얀 색의 가죽 장갑으로 덮여 있었다. 남자의 검은 색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그는 왼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왼쪽 눈을 가렸다. 새하얀 가죽 장갑의 손가락. 그 손가락 사이의 작은 틈으로 그의 오른쪽 눈이 붉게 빛났다. 남자의 얼굴은 공포에 질리다 못해 파랗게 굳어져 갔다. 총을 겨누고 있던 남자의 손은 이제 소녀가 보기에도 심각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눈이 붉은 안광을 사방에 흩뿌린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동료도 상관없다는 듯이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좁은 골목을 뛰쳐나갔다. 완전히 새파랗게 질려버린 남자의 얼굴은 흡사 인간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괴수의 눈을 본 자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그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매만져 가지런히 하고는 소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직도 놀라 굳어있는 소녀에게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며 오른손을 뻗었다. 마치 무도회에서 매력적인 레이디에게 춤을 청하듯이.
  "같이 가실까요. 꼬마아가씨."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소녀의 손을 잡고 간 곳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거리였다. 관광객들이 베네치아 역에서 산 마르꼬 광장으로 가는 길은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그 길을 주변으로 상점들이 들어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길 양 옆에는 각종 가게와 노점이 즐비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거리에서 그는 소녀에게 잠시 거기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소녀는 당황했지만 그는 금세 양손에 젤라또를 하나씩 들고 소녀에게 돌아왔다.
  "이태리하면 역시 젤라또지."
  그는 소녀에게 젤라또를 하나 건네고 소녀의 손을 잡고는 수로 옆으로 걸어갔다. 소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그는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수로 옆에 만들어져 있는 야트막한 턱에 앉을 것을 소녀에게 권했다. 물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턱이었지만 그 높이는 벤치 대용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소녀는 턱 위가 더럽다고 그에게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의 배려는 소녀의 말보다 한 박자 빨랐다. 그는 자신이 걸치고 있던 연미복의 하얀 상의를 벗어 턱 위에 얹더니 소녀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옆에 기대듯이 걸터앉았다.
  "저기, 아저씨는 왜 나를 구해준 거야?"
  소녀는 가만히 앉아서 젤라또를 할짝거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그에게 물었다. 그는 소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하면 긴데. 뭐, 간단히 말할게. 어느 아가씨에게 줄 선물을 마련해야 하거든. 마침 꼬마아가씨가 그걸 가지고 있고. 구해준 대가로 그걸 받아 갈까 해서."
  그는 소녀를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장난기 넘치는 웃음이 걸려있었다.
  "헤에. 그 아가씨는 어떤 사람이야? 아저씨 애인이야? 예뻐?"
  아가씨라는 그의 말에 소녀는 대번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그가 소녀에게 무언가를 받아 가겠다고 한 말은 아예 귀에 들어가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소녀의 질문에 놀랄 만도 하건만 그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웃어보였다.
  "음,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는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야. 안타깝게도 내 애인은 아니지만."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라는 말에 소녀는 감탄하더니 다시 그에게 되물어 왔다. 그 눈에는 가장 아름답다는 그 아가씨를 만나보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다.
  "그럼 그 아가씨는 어디 있어? 아저씨랑 같이 온 거야?"
  소녀가 한손에 젤라또를 든 채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고는 그는 몸을 젖혀 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현명한 노인의 것과도 비슷한 웃음. 그는 다시 소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아리송한 대답을 했다.
  "글쎄. 지금 여기 같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소녀는 그의 대답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지만 조용히 남은 젤라또를 먹기 시작했다. 나이든 집사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어 놀리는 것은 소녀가 꽤나 즐기는 것 중에 하나였지만 어째서인지 이 사람에게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젤라또의 맛은 꽤나 훌륭한 편이었다.
  대화가 잠시 끊겼다.
  그는 일찌감치 자기 몫의 젤라또를 먹어치우고는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수상 도시를 보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소녀와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저 사람의 물결에 휩쓸려 갔다. 마치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 같다고 생각하며 그 행렬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문득 사람들이 지나가는 방향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행렬은 베네치아 역 쪽에서 산 마르꼬 광장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산 마르꼬 광장에서 베네치아 역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해를 바라봤다. 넓게 펼쳐진 수평선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를 조용히 지켜보던 그는 갑자기 셔츠의 왼쪽 팔뚝을 걷어 올렸다. 검은 셔츠 밑에서 드러난 그의 왼쪽 팔은 수십 개의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소녀가 의아한 눈길로 그의 팔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전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며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손목시계 중 하나를 유심히 지켜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순간 불어온 황혼빛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흩날렸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어버렸네. 미안, 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는 말을 마치고는 소녀의 앞으로 걸어가 소녀가 앉아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소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뒷짐을 진 채 천천히 허리를 숙여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소녀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다음 순간 그는 살짝 눈을 감더니 자신의 입술을 소녀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소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소녀의 작은 심장이 몇 번이나 콩닥거리며 뛰었을까. 그는 당황해 있는 소녀의 이마에서 입술을 떼고는 소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내가 가져가는 건 '진정한 사랑'이야. 꼬마아가씨한테는 미안하게 되었지만 그녀에겐 그게 꼭 필요하거든."
  그가 말하면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숨결이 소녀의 귀를 간질였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속삭였다. 소녀의 볼은 이미 새빨개져 있었다.
  "내 이름은 불가역자, 결코 실패하지 않는 암살자, 인과의 순례자. 네 곁에 언제나 함께 머무는 바람이야. 언젠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거야. 그럼, 그때까지 안녕. 에리."
  그것이 소녀가 들은 그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소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소녀의 옷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그가 건넨 새하얀 연미복 상의와 소녀의 오른손에 쥐여있는 젤라또. 그리고 따스하고 촉촉한 온기가 이마에 남아있었을 뿐. 저 멀리서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는 집사가 소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제 해는 수평선 아래로 서서히 지며 지중해를 붉게 수놓고 있었다. 정성스레 하나로 묶어 뒤로 넘긴 소녀의 금발이 베네치아의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이게 뭐야, 나카무라?"
  잠자리에서 막 일어난 에리에게 집사가 건넨 것은 조그마한 상자 하나였다. 손바닥만한 크기였지만 상자는 꽤나 정성스레 포장되어 있었다. 집사의 말로는 새벽에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현관에 나가보니 그 앞에 이 상자가 놓여있었다고 했다. 상자의 귀퉁이에는 작은 글씨로 '사와치카 양에게' 라는 글귀가 적혀있었지만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온 상자를 싸고 있는 포장을 조심스레 풀기 시작했다.
  상자를 다 풀고 나서 뚜껑을 열었지만 상자 안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녀가 실망하며 상자를 집사에게 건네려는 순간 그녀는 상자 바닥에 종이 한 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종이에 쓰인 글씨를 읽었다. 아까 상자 겉에 쓰인 글씨와 같은 글씨체였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며, 당신에게 10년 전에 맡아놓았던 선물을 다시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안녕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당신의 오랜 친구로부터-'
  작은 종이쪽지에 적힌 글은 그게 전부였다.

 

 

  he's not a man, but…….
  yes, he's only a piece of wind, a moment of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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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럼블이라는 학원 코믹스의 등장 캐릭터 중 한 명인

 

사와치카 에리를 빌려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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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겨울, 문득 나는 방랑벽이 동해 길을 나서 특별한 목적 없이 길을 걷다, 겨울바람을 느끼며 한참을 그리 걸으니 무릎이 저려, 가장 먼저 눈에 띈 카페에 들어갔다. 잠시 자리에 앉아 쉬고 있으려니 웨이트리스가 와서 주문을 받는데, 처자가 입은 옷이 메이드복이기에 비로소 나는 내가 메이드 카페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오렌지 쥬스를 시키고 보니 내 앞 테이블에 어떤 남자가 앉아 있는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식식 거리며 화를 내고 있어 주변의 사람들이 그 불같은 형상을 두려워하였다. 나는 쥬스를 기다리는 겸 하여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 사람은 미처 분을 삭이지 못하고 내게 말하였다.  "내가 알바를 뛰어 돈을 모은 지 세 달, 코미케 안내서를 보고 루트 연구하기를 한 달이며 개장 행렬에 끼어들 방법을 고심한지 한 달, 또한 개막 전 밤샘 줄에 참여한 것이 또다시 12시간이오. 내 그리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건만, 러쉬를 이겨내 부스 앞에 서고 보니 내 앞에 선 자가 페이트 침대 커버를 남김없이 싹 쓸어가 나는 지난 다섯 달을 허투로 보낸 셈인데다 이제는 한정 프리미엄을 주고 그 약삭빠른 자에게 침대 커버를 사게 생겼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소."  그 말을 듣고 내가 물었다.  "내가 아는 페이트라 하면 몇 가지가 있으나, 그 중 코미케와 연관될 만한 페이트라면 지금 두 가지 페이트가 생각이 나네. 그러하다면 그대가 말하는 페이트는 타입문의 페이트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동포격소녀 나노하의 그 페이트를 말하는 것인가."  그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대는 웹도 들어가 보지 않는 것이오. 후자의 사재기가 한창 문제가 되었던 것을 정녕 모른다 할 것이오. 나는 그 광경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분노할 따름이외다."  그 자를 다시 훑어보니 눈에는 미소녀계 오타쿠들이 가진다는 기이한 탐욕이 비추었고, 손과 가방에는 포스터, 게임타이틀, 동인지가 가득 들렸는데, 그저 로리 캐릭터들만이 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필시 아키하바라 구석의 동인샵을 들렀다 오는 길에 분통이 나 카페를 들린 것이리라 생각하며 나는 재차 물었다.  "그대의 이야기와 품새를 보아하니 그대는 분명 로리콘인 듯하네. 2D는 종국에 허무한 것이고 로리타 취향은 자칫 잘 못하면 숭악한 범죄로 번질 수가 있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그리 사소하고 기기묘묘한 것에 연연하여 이 카페의 훈훈한 분위기를 망치는가."  그러자 그 사람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나는 2D의 절대적인 미를 사랑하는 것이지, 현실에서 그를 행할 정도로 우둔하지 않소. 그대는 어찌 나를 업수이 여겨 2D가 하찮다는 말을 하시오. 그대의 말은 나를 모욕함과 동시에 수많은 게임라이터들과 일러스트레이터들을 동시에 조롱하는 것이니 게이머의 한 사람 되어 어찌 그대의 이러한 우롱을 그저 넘어갈 수 있으리오."  그러며 모카 커피가 담겨 있던 컵을 힘주어 쥐는데, 도자기 컵에 금이 후

  • 당근매니아
  • 2007-01-26
어둠에 가려도, 홍안 빛나도다

연작 「냉소자」 제 3막 「어둠에 가려도, 홍안 빛나도다」sequence 「derider」 act three 「Even Behind the Dark, Crimson Eye is Shining」    도시의 밤은, 밝지만 어둡다.  네온사인이 전기를 집어삼키어 자신의 몸을 불사르기에 도시는 밝고, 그러하기에 또한 어둡다. 그러나 그 도시의 이름이 베인vain이라면, 밝음은 단 한 줌도 없다. 아무리 오랫동안 그 칙칙한 밤거리를 쏘다녀도 거기엔 베일 정도로 날카로운 칠흑만이 살결에 스칠 뿐이다.   도시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크며, 가장 지저분하고 가장 역겨운 매춘굴은 '독수리의 송곳니'였다. 매춘굴이자, 투견장이자, 도박장이자, 마약굴인 '독수리의 송곳니'는 도시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자랑하는 위대한 쓰레기통이었다. 크다기보다는 도리어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실내는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에서는 피를 보고 잔뜩 흥분한 개가 피거품을 문 채 푸드덕거렸고, 다른 한쪽에서는 울긋불긋한 룰렛이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딜러의 손에서 굴렀다. 공은 0에서 멈췄고, 울긋불긋한 딜러는 한껏 팔을 뻗어 테이블 위의 울긋불긋한 칩을 싹 쓸어갔다. 사기라며 울부짖고 난동 부리는 사람들은 경비원의 억센 손에 잡혀 밖으로 내던져졌다. 조금 더 반항하면 즐거운 룰렛 대신 러시안 룰렛을 해야만 하기에 사람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룰렛과 포커에서 눈을 돌리자 구역질나는 인간군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저기 팔을 휘적대는 건 분명 환각제를, 축 늘어진 건 진정제를, 바들바들 떨며 눈이 돌아가는 이건 각성제를 양껏 처먹은 쓰레기들이다. 회색 벽에는 허연 아편 가루가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 바로 옆에는 붉은 빛이 가득했다. 치부만 어설프게 가린 여자들은 시뻘건 정육점 불빛 아래서 한껏 몸을 흐느적댔다. 약에 취한 머저리들은 천천히 흐느적대는 여자들의 출렁이는 젖가슴에 지폐를 꽂아 넣었고, 곧이어 으슥한 다락방으로 기어들어 그 추잡한 모습을 감췄다.  '독수리의 송곳니', 베인의 회색 파라다이스는 오늘도 그렇게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머저리들은 흥청망청 돈을 뿌리고, 평화로운 파라다이스는 유지된다. 돈과 쾌락의 교환. 윈 윈 논제로 섬. 그것이 이 도시의 평화이자, 파라다이스의 안녕이었다.  그러나 안정은 작은 소동으로 흐트러졌다. 입구 쪽에서 둔중한 폭발음이 들리고, 이어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비명 따위야 늘 있는 것이었기에, 머저리들도 매춘부도 딜러도 하던 일을 태연히 계속했다. 사소한 폭발이 불러오는 공포 따위는 쾌락에 미치지 못한다. 도베르만과 불독은 서로의 목덜미를 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곳곳에 부동자세로 서있던 검은 슈트의 남자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그들이 왼쪽 귀에 꽂은 이어폰이 청아한 목소리로 비상사태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침을 꿀꺽 한 번 삼킨 뒤 검지 끝에 있는 버튼을 누를지 말

  • 당근매니아
  • 2007-01-19
어느 늙은 용병 이야기

  딸깍.  나는 주머니 속에 처박혀 있던 지포를 꺼내 그 뚜껑을 열었다. 여기저기 흠집투성이인 지포는 이미 20년을 넘게 함께 지낸 녀석이다. 20년 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이 녀석이 불을 붙이는 것이 바뀌었다는 것 정도.   라이터 옆구리, 길게 긁힌 자국에 오른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손톱으로 살짝 그 자국을 긁는다. 언제부턴가 불을 붙이기 전마다 하게 된 버릇이다. 라이터 옆이 긁힌 것이 13년 전 리비아의 반정부 게릴라 소탕전에서였을 테니 아마 그 때 즈음해서 가지게 된 버릇일 것이다. 매끈한 표면에 난 거칠한 부조리함을 즐긴다. 라이터를 오른손에 쥐고 긁다 보면 어느 순간 니코틴이 고파지는 때가 있다. 마치 갈증과도 같은 그 감각. 그 순간에 들이쉬는 타르의 끈적끈적한 쾌감을 위해 느긋하게 기다린다.  도시 한복판에 마련된 공원은 공원이라기보다 공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바닥에 심어놓았던 잔디는 이제와선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곳곳에는 담뱃재와 휑하니 맨살을 드러난 땅 뿐이다. 매연이 가득하고 주변은 허름한 빌딩뿐인 이런 곳에 사람들이 휴식을 목적으로 올 리 만무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이 작은 공간은 쓰레기나 버리러 가끔 들르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오른손에 들려있는 지포를 손톱 끝으로 긁다가 왼손에 눈길이 갔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담배는 오늘도 완전한 한 개비가 아니다. 누군가가 피우고 가다 내 앞에 던지고 지나가는 반쪽짜리 꽁초들. 담배 살 돈이라고는 없는 빈털터리인 내가 니코틴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그 끝에 비록 남의 타액이 묻어있다지만 내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불쾌한 경험이 한두 번이어야 꺼림칙한 것도 있는 법이다.  잠시 붉게 타올랐지만 지금은 하얀 재로 덮여있는 꽁초 끝을 내려다보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다. 손에 든 담배를 살짝 뒤집어 담배 옆구리에 써있는 상표를 읽었다. 혹시나 해서 확인한 담배는 역시나 고급이었다. 입가에 살짝 쓴웃음을 머금었다. 피우고 버리는 담배의 상표조차 그가 가진 돈과 연관이 되는 세상. 아까 이 꽁초를 버리고 간 사람은 검은 양복을 쫙 빼입은 중년 남자였다. 금으로 된 넥타이핀을 한 채 최신형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남자. 통화 내용으로 봐서는 어느 회사의 중역인 듯 했다. 길이라도 잘못 든 거겠지.  어쩌면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지저분한 빈민가의 길가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온통 가난한 인간들뿐이기에 부드러운 맛의 이런 고급 담배는 입에 대보기조차 힘들다. 그저 가난할수록 한 개비 한 개비가 독한 담배를 찾고 부유할수록 부드러운 것을 찾는다. 전자가 더 해로움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건강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자들은 그저 니코틴을 바랄 뿐이다. 이 시대에 한 인간이 손에 넣은 돈의 양은 그의 수명과 직결된다.  문득 니코틴이 고파졌다. 손에 들고만 있던 꽁초를 들어 입에 물고 손톱 장난을 그만 두었다. 지포를 오른손에 바로 잡고 톱니에 엄지를

  • 당근매니아
  • 200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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