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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

  • 작성자 지새는달
  • 작성일 2007-03-23
  • 조회수 444

 

#1.

 

 " …그래서 뭐, 그렇게 끝났어. "
 나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고 얼른 토스트를 한입 크게 베어문다. 그리고 빨리 얘기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승호에게 잔뜩 부푼 볼을 가리켜 보인다. 입에 가득차서 말을 못하겠어, 하는 의미로. 내 속을 빤히 알고 있을 승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설교를 시작한다. 그럼 나는 그 애가 무슨 말을 꺼낼지도 다 알고 있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했으니까.
 " 뭐든 질러보라고 했잖아. 니가 고3인건 알고 있지? "
승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진지하다. 이제는 할 변명도 없어서 입 속 가득한 토스트를 오래오래 씹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헤헤, 웃는다. 항상 이런 식이다. 승호한테 얘기하고 싶다, 고 문자를 보내면 이렇게 바로 나와서 설교를 시작해준다. 나는 결국 또 포기해버렸다면서 한숨을 쉬고 승호는 정신 차리고 니네 엄마 생각 좀 하라고 말하고. 나는 이렇게 턱을 괸채로 마주보고 앉아 승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게 좋다. 항상 충고에 설교지만 조금도 거슬리지 않는 진심어린 목소리. 토스트를 물고 창 밖을 보고 있는 내게 승호의 설교가 쭉 이어진다. 언제나, 늘 그래왔듯이.

 

 

 

#2.


 승호랑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만났다. 년수로만 치자면 거의 십년지기 친구다. 그 때는 그냥 조그맣고 웃기는 남자애였다. 사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는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다. 하긴 뭐, 미운 정도 정이라면 정이 들긴 했겠지. 매일 얼굴 보면 싸워서 둘이 여러번 불려다녔으니까. 우리 둘이서 깬 창문이 몇 개인지 모른다. 둘이 같이 복도에 손 들고 서 있었던 것도 한 두번이 아니다. 선생님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다. 다른 반이 되서까지 매일같이 만나서 싸우고 싶냐면서. 내가 워낙 괄괄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승호가 끝까지 내게는 지지 않으려 해서 그랬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한다. 사실 내 잘못이 더 크긴 했다. 쪼그맣고 까만게 쥐랑 똑같이 생겨서 내가 쥐새끼라고 엄청 놀리긴 했으니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승호는 내 편을 많이 들어줬다. 시비는 내가 다 걸었는데 혼날 땐 공평하게 혼나줬다. 다른 남자애들처럼 쟤가 먼저 그랬어요, 하는 말도 안 하고. 그 때도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지금은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 아마 정말 많이 친해졌던건 중학교 2학년 때가 아니었나 싶다. 반 배정을 딱 받았는데 같은 반에 아는 애가 하나도 없었다. 달랑 한 명, 신 승호를 제외하고는. 앞이 캄캄했다. 그 때만 해도 남녀의 친구 구분이 워낙 명확했던지라 같이 학교 가자고 부탁하기가 너무 민망했다. 그 것도 그 전날까지 맨날 치고박고 하던 애한테 내가 매달려야 한다니. 걔는 벌써 같이 앉을 친구도 있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어서 결국 전화를 했다. 그리고 내가 적선한다는 것처럼 무뚝뚝하게 한 마디 했다. 야, 학교 같이 갈래? 그게 다였다. 승호는 다른 친구한테 연락해본다던가 하는 말도 없이 그래, 라고 해 줬었다.
 " 여자 끝번호, 남자 끝번호 나와. "
 2학년 3반에서의 첫 날, 그 선생님이 얼마나 미웠었는지. 황씨를 이어 받은 것도 엄청 원망스러웠다. 제발 이거든 저거든 걸려서 앞에 나갈 일만 없어라, 하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필 끝번호를 부를게 뭐람. 첫 날부터 눈에 띄기 싫다고 투덜투덜거리면서 앞으로 나갔었다. -자, 교무실 가서 이거 정리하고 있어. 선생님은 내 내민 팔에 수북히 종이를 얹어주셨다. 맨 위에 '학생 기록 파일'이라고 적혀 있는. 나는 그 '학생 기록 파일'이라는 이름의 종이 뭉치랑은 어릴 때 부터 사이가 별로였다. 지금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 때보다야 훨씬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귀찮은 존재다. 모자가정 누구랬지? 쌀 모은 거 있는데 니가 가져갈래? 그 소리 참 듣기 싫은 소리다. 그 때는 더했다. 친구들 앞에서 꼭 한번씩은 겪는 그 일에 매일 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채 얼마나 입술을 깨물었던지. 그래서 그 학생 기록 파일을 내가 정리해야 된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신의 손으로 축복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좀 눈에 띄거나 주목을 받으면 어때. 내가 그 파일을 정리할 수 있는데. 교무실에 들어가자 마자 나는 자리를 잡고 파일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아직 이름도 모르는 눈 앞의 남자애한테 다짜고짜, 내가 이거 정리할테니까 니가 전화번호랑 이름 적어, 하고 선포했다. 그 애에게는 대답할 새도 안 줬다. 다행히 그 쪽에선 별 생각 없었는지 순순히 종이랑 펜을 들어 내가 불러주는 전화번호랑 이름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보다 즐거운 맘으로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이걸로 일 년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갈 확률이 높아졌으니까! 적어도 당분간 누군가 알아챌 일은 없는 것이다. 기분이 좋으니 손도 빨라졌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그러다가 신 승호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어, 신 승호?
「 신 승호, 부친 사망. 」
 응? 나는 내 눈이 의심스러워 그 글자를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내가 다른 글자와 헷갈린게 아닌가, 다른 애 이름과 착각한 건 아닌가. 내가 멍하니 있자 뭐 잘못 된 줄 알았던지 앞에 앉은 남자애가 고개를 쭉 내밀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얼른 종이를 내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은 채 태연히 다시 번호를 불렀다.
 " 신승호. 02 475…. "
 그 순간 이미 비밀을 지키겠다고 마음먹었었다.

 

 

 

#3.


 집에 가는 길에 내가 무심코 말을 던졌다.
 " 너 아빠 없지. "
 무심코였는지 계획됬었는지…. 어찌 됬든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례한 말투였다. 두서 없이 그런 걸.
 " 아니. "
 승호가 대답했다.
 " 아까 기록부 정리하면서 다 봤는데. "
 참 싹수도 노랗다. 그 애가 나한테 화를 내는게 맞는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 그래. "
 그런데 승호는 짧게 그래, 라는 대답만 두고 답지도 않게 확 돌아서버렸다. 나는 당황했다.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릴 줄 알았다.  
 " 나도 없는데. "
 아무 반응이 없어서, 그래서였을까. 침묵이 싫어서? 승호가 대답하기 무섭게 내가 말을 내질렀다.
 " 나도 없어, 이유는 좀 다르지만. "
 모르겠다. 동질감에서였는지 그냥 어디에든 말을 하고 싶었던건지. 그 것도 아니면 승호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했던지. 어쨌든 그 날 우리는 집에도 안 가고 한참을 떠들었다. 아파트 앞 벤치에 앉아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웃었다. 어떤 내용으로 그렇게 오래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서로가 마주보고 웃고 있었다는 것 밖에 기억이 없다. 아, 집에 들어가니 엄마가 매를 들고 문 앞에 서 계시던 것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4.


 집으로 돌아와서 컴퓨터를 켜고 이 것 저 것 딴 일을 하다가 문득 고3인데 뭐든 질러, 하던 승호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검색창을 열고 백일장을 쳐본다. 여기까지는 매일 똑같다. 참가일, 참가 장소까지 다 훑어보고도 감히 도전하질 못한다. 무섭다. 떨어지는 것도, 내 글을 누구한테 보여주고 평가를 받는다는 것도. 넌 자격이 없어, 하는 말을 내 귀로 듣게 되는 것이 두렵다. 내가 이 말을 할때마다 승호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한마디 한다.
" 야, 보컬 할 때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게 더 쪽팔렸을거 아냐. "
 그러면 나는 준비한듯 핑계를 댄다.
" 그건 공연하는 동안 벌써 평가를 짐작할 수 있잖아. 반응이 보이니까. "
 검색창에는 여전히 여러 백일장 정보가 뜬다. 3월 24일 경춘 백일장부터, 12월 것까지 쭈욱 클릭하도록 되어 있다. 도저히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가슴으로 뭔가가 기어가는 느낌. 가슴을 열어 쓸데 없는 것들을 털어내고 싶다. 답답한 마음에 승호한테 문자를 한다.

 「 지금 뭐 해? 」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다. 뭐야, 오늘 내로 문자하라더니. 하여튼 본인이나 잘 할 것이지. 종알종알 불만을 내뱉으면서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니…. ’

 뭐야, 정말! 기분이 확 상한다. 방금 만나고 왔는데 그 사이에 휴대폰을 꺼 놓다니. 단비한테 문자를 한다.
「 야, 신승호 연락 안되지? 」
금방 휴대폰에 반짝 반짝 불이 들어온다.
「 걔 오늘 지민이랑 만나잖아. 」
아, 지민이. 그제서야 기억이 난다. 이번에 고2 되는 애. 신승호 좋다고 죽어라 쫓아다니던 단발머리 여자애. 사귈꺼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뭐. 데이트 한다고 휴대폰까지 꺼 놔? 둘이 뭘 하길래?
「 그런다고 꺼놓냐고! 짜증나 문자하래더니 」
쓰리고가 지금 그럴 때야? 내 말투에 짜증이 고스란히 묻어 난다.
「 너 좀 신경써야 되는거 아니야? 」
단비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 뭐가? 」
「 이제 지민이랑 사귀는 건데 니가 맨날 그렇게 전화하고 그러면 지민이 걔도 좀 그럴거아냐 니가 아무리 상담이니 뭐니 해도 」
기분이 팍 상한다. 걘 이제 겨우 사귀기 시작하는 거고, 난 몇 년을 알아온 친군데 뭐? 휴대폰을 저 멀리 던져버린다. 바닥에 탁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5.


 일주일이나 승호에게 문자가 없었다. 물론 전화도 없었다. 꼭 내가 먼저 우는소리를 하지 않아도 어쩔 거냐고 매일 같이 물어오는 애가 뭐 하고 있냐는 문자 하나조차 보내질 않았다. 속이 미식거린다. 화가 나는 걸 꾹 참는다. 내가 먼저 문자를 보내는 바보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만큼 자존심을 굽힐 생각은 없다. 기분 전환으로 컴퓨터를 킨다. 미니 홈피나 들어가봐야지. 친구들 홈피를 하나씩 클릭한다. 승호의 미니홈에다 몇 마디 남기려고 보니 지민이가 남긴 흔적이 눈에 띈다. 윤지민…. 궁금하다. 그냥 궁금한 것 뿐이다. 대체 어떤 애인지 좀 알고 싶을 뿐이다. 지민이 홈피를 클릭한다. 첫 화면에 귀여운 모양의 글씨가 뜬다.
- 크크 24일날 승호오빠랑 에버랜드감♡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 속에서 찌릿한다. 짜증섞인 얼굴로 전원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볼에 손을 갖다 댄다. 따끈따끈하다. 이유를 모르겠다. 난 지금 화가 난 걸까, 아님 그냥 짜증을 부리는 걸까. 한쪽 손으로 벽을 툭툭 친다. 승호랑 지민이는 24일날 또 만난다. 좋은가 보다. 나한테 문자하는 것까지 완전히 잊어버린 걸 보면, 지민이가 귀여워 죽겠나봐. 24일, 24일…. 그 순간 뭐 하나가 떠 오른다. 얼른 휴대폰을 연다. 이제 막 22일 밤 열시를 넘어가고 있다. 휴대폰을 열고 승호한테 문자를 한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평소보다 더 세게.
「 나 백일장 해볼려고. 」

 아주 못된 생각인지도 모른다. 아니, 못됐다고 할 것까지야 없지. 내가 먼저 이걸 기억 해 냈고, 그 다음에 지민이의 홈피를 본 것 뿐이다. 확실하다. 내가 먼저 생각해냈다. 그러니까 미안해하거나 잘못하는거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승호가 그 날 바쁘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실수를 하는게 아닐까 무섭다.

「 진짜지? 너 이번엔 진짜 하는거지? 이제 진짜 문예창작과 준비하는거야? 」

「 응. 근데 같이 갈 사람이 없다ㅜㅜ 」
 분명히 내가 나쁜게 아니다. 난 아무 잘못도 없다. 답장이 왔다.
「 넌 친구도 없냐 」
「 그게 아니라 너랑 가면 잘 써질거 같단말야. 」
 반은 진심이다.
「 며칠인데? 」
 이제 이 답장만 하면 된다. 꾸욱, 꾸욱. 오늘따라 버튼 눌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가슴 밖으로까지 뛰는 것 같은 심장 소리만큼.
「 24일. 」
 그래, 24일…. 24일이야, 신 승호. 전송을 누르고 몇 분이나 됬을까. 나는 휴대폰만 계속 째려본다. 짧은 대답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다시 핸드폰 불빛이 깜빡깜빡. 승호의 답장이다.
「 오케이. 몇 시에 어디로 나가? 」

 

 

 

#6.


 승호는 어떻게 당사자인 나보다 더 심하게 압박을 받은 것 같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서 나타날 때부터 알아봤다 했더니, 버스에 타자마자 슬슬 졸기 시작했다. 불안하게 꾸벅꾸벅하는게 아무래도 곧 앞 의자에 머리를 박을 것 같다. 나는 심심해서 창문에다 입김을 불고 낙서를 한다. 생각나는 글자들을 마구 쓴다. 빙…빙…빙. 신…승…호 일…어…나! 글자들이 금방 사라진다. 나는 다시 후 하고 입김을 분다. 신 승 호. 세 글자가 희미하게 어른거리고 있다. 그 이름 사이로, 며칠 전 단비의 마지막 문자가 함께 연하게 떠오른다.
「 너 생각 좀 잘해봐. 나중에 피토하지 말고.. 솔직히 승호가 맨날 너 챙기다가 지민이 만난다니까 싫지? 내가 너네 둘 답답하다고 백년 전부터 말했다!! 」  
 못 본 척 답장은 하지 않았다. 그냥 오래오래 쳐다만 봤었다. 문자 한 글자 한 글자가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만큼. 창 밖에 흰 구름이 빽빽하다. 하늘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고개를 돌리니 승호가 고개를 완전히 떨군 채로 잠들어 있다. 나는 흘러내리는 승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 볼까 말까 하다가 포기한다. 생각이 많아진다. 정말 모르겠다. 지민이 만나는게 싫은건 사실이다. 하지만 왜인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승호를 좋아하는거야 당연 아니다. 그랬으면 지금껏 몰랐을리가 없지. 승호랑 만나면서 사귄 남자애들이 몇인데. 몇 년인데, 벌써…. 그리고 승호도 날 좋아한다면 지민이랑 만나기로 결정하지는 않았을거다. 그래. 사귄다는 행위는 좀 덜 아까운 사람이랑 해야하는거다. 승호는 사귀기에는 아까운 애니까.
 승호가 잠시 눈을 찡그린다. 응?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나는 그 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정말 많이 크긴 했구나. 어릴 땐 나보다 훨씬 작았는데, 지금은 내 머리 위에 머리가 하나 더 있어야 비슷할 정도다. 목소리도 엄청 두꺼워지고….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러고보면 승호는 화이트데이 때마다 날 챙겨줬었다. 생일 선물도 꼬박꼬박. 그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남자애들이 그렇게 챙기기 힘든데, 라고 단비가 묘한 어조로 말했을 때도 웃어 넘겼다. 거기에 비해서 나는 발렌타인 때마다 깜빡했다면서 며칠이나 지나서야 겨우 챙기곤 했다. 
 다시 창 밖을 쳐다본다. 그리고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로 오른 손을 살짝 내민다. 손 끝에 승호의 손이 닿는다. 따듯한 느낌이 온 몸으로 퍼져 온다. 제발 깨지 마, 그냥 계속 자…. 주문을 외우면서 손을 천천히 거두는데 승호가 내 어깨를 친다. 아, 난 몰라. 결국 깨버렸나 보다.

 " 황윤정, 걱정돼서 그래? "

 내가 그렇게 많이 사고를 치고 잘못을 해도 항상 내 편이 되어주던 그 얼굴이 내 쪽을 향해서 웃고 있다.
" 그냥 니가 계속 자니까 심심해서. 근데 넌 오늘 바빴던 거 아냐? 학원간댔나? "
 나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화제를 돌린다. 아, 세상에. 말을 돌린다는게 한참 잘못 꺼냈다. 하지만 대답이 좀 궁금하긴 하다. 넌 뭐라고 말할까. 지민이랑 약속이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취소했다고? 아님 그냥 이거 끝나고 만나러 가기로 했다고? 나 때문에 곤란했다고…? 
" 아니. 오늘 어짜피 할 거 없었어. "

 ….
 그 애의 얼굴을 본다. 승호도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미 그 애의 성격을 안다. 나보다 훨씬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도 잘 안다. 자기가 찔려서는 괜히 뒷 좌석을 돌아보고 있다. 뱃속에서 묘한 즐거움이 꿈틀거린다. 가슴 속 답답한게 다 사라진 느낌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필요 없을 것 같다. 나는 웃음을 참고 다시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백일장을 하러 가는 길이 너무 즐겁다. 돌아가고 싶다거나 무섭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옆에 누가 있는데 걱정을 할까? 이제 구름이 많이 사라졌다. 파란 하늘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가까워 보인다.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내고 만다.

 

지새는달
지새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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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정선생님, 여깁니다. 예. 이 쪽에 볼일이 있어서 먼저 왔습니다. 아니, 오래는요. 저도 방금 왔지 말입니다. 하하, 그냥 담배나 한 대 태우고 있었죠. 신경 쓰실거 없습니다. 정말 방금 왔습니다. 한 오분, 십분 됬을라나요. 아, 이거요. 제가 좀 심한 골초라서요. 앉아서 시간 때울 일이 딱히 없어 물고 있다보니 좀 많이 했나 봅니다. 그 쪽으로 앉으시죠. 죄송하지만 말씀만 얼른 전해 드리고 일어나봐야 할 것 같아서요. 간만에 뵈었는데 실례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오후에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구랑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예, 대충 누나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뭣 떄문에 연락 하셨는지 말이죠. 정선생님 얘기야 평소에도 워낙 많이 들었으니 잘 알지요. 이번에 새로 영화를 준비하고 계신다구요. 그런데 이거야 뭐, 저도 술자리에서 반쯤 취해서 꺼냈던 얘기라…. 남의 얘기를 허락도 없이 멋대로 전하는 것도 맘이 편치는 않고. 워낙에 오래전 얘기라 기억이 확실해야 말이죠. 서른 반을 넘어가니 이십대 때  이야기는 까마득하더군요. 아,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언제 이런 이야기가 다시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 녀석들도 어디서 즐겁게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거구요. 어쩄든 다 지나간 일이니까 곤란할거야 뭐……. 담배 한 대 주시겠습니까? 아까 끝장을 봐서 말이죠. 예, 감사합니다. 아무튼 불확실한 기억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아는 한 말씀은 드려야죠. 제가 술자리에서 뱉은 한 마디로 큰 영화 하나가 기획되고 있다는데 모른척 할 수야 있습니까. 한 대 피우면서 얘길 시작하지요. L은 제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삼년을 같이 지낸 친구였기에 어떤 녀석인지는 잘 알고 있었죠. 아주 자세히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외모까지? 영화를 하신다고 하니까 이미지도 말씀드려야 하나 어쩌나 싶어서 말입니다. 어쨌든 평범한 애였습니다. 농구부였는데 키는 별로 큰 편이 아니었죠. 저희학교 농구부 같은 경우는 대회도 여러번 하고 해서 실력없는 녀석들은 퇴출도 잘 당했거든요. 그래서 주위에선 뭐하러 안될거 사서 고생을 하냐 했었는데 2학년 땐 결국 주장을 맡더군요. 애들 사이에서는 좀 독하다는 소릴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꼭 농구부 일이 아니더라도, 성적도 거의 꼴찌랑 비슷하던 녀석이 후반부엔 중상위까지 순식간에 치고 올라온 것도 유난스러워보였던 것 같구요. 녀석은 누나만 둘이었는데 그걸 감안했을 때 여자를 잘 챙기거나 대할 줄 아는 녀석은 못 됐습니다. 장난도 굉장히 심해서 좀 어린애 같은데가 있었죠. 그런데도 농구부라는 플러스 점수 덕이었는지 어쨌는지 여자들에게는 몇 번 고백을 받더군요. 다른 학교에 꽤 예쁘다 하는 여자애랑도 사귄 적이 있었고요. 아무튼 대충 그런 녀석이었습니다. 그러다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또 만나게 됬구요. 대학에 가서도 계속 농구를 했죠. 아무래도 이 이야기를 풀자면 P의 소개도 해야겠군요. P와는 대학을 들어가서 만났죠. P는 아주 키가 크고 까만 녀

  • 지새는달
  • 2007-04-01
안녕 아지

죽으려고 했다. 어짜피 삶도 죽음이라면, 그보다 더 나빠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옥상의 난간 밖으로 몸을 뺐다. 바람이 얼굴을 칼처럼 뱄다. 그래도 아프지 않았다. 차라리 구원처럼 느껴져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상상했다. 저 아래에 떨어질 내 모습, 내가 보지 못할 내 모습을 상상했다. 일초가 하루처럼 흐르고.  밖으로 더 고개를 뺐다. 꿈처럼 몸은 가벼웠다. 그대로 떠날 수도 있었다. 끝일 수도 있었다. 엄마의 얼굴은 아주 오래된 사진처럼 빛 바랜 색으로 머릿속에 흩어졌다.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끝이라면…. 그 순간 몸에 온기가 닿았다. 다리 옆으로 기대오는 따듯한 기운. 난간에서 몸을 떼고 옆을 봤다. 아래에 작은 강아지가 있었다. 길게 늘어진 하얀 털, 그마저도 군데 군데 빠지고 누렇게 되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하얀색인지도 잘 알 수 없는 강아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을 내 다리에 부볐다. 짖었다. 꼬리를 흔들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걸까, 주인은 없는걸까.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따듯한 혀가 손을 핥았다.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첫눈에 반해서….떠날 수 없었다.  아빠는 그 날도 술에 취해 들어왔다. 아지는 이제 겨우 우리집에 적응하고 잠이 들어 있었다. 불안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지를 가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강아지를 키우겠다는 말을 하기엔 지금은 타이밍이 별로다. 술을 먹은 아빠는 어떤 것에나 화를 내니까. 걱정하고 있는 사이, 일이 터졌다. 잡을 새도 없이 문소리와 동시에 아지가 튀어나갔다. 급히 쫓아갔지만 이미 한번 발로 걷어차인 뒤였다. 아빠의 입에서 욕이 이상한 발음으로 새어 나왔다. 나는 아지를 꼭 끌어안았다. 등 위로 아빠의 발이 마구 떨어졌다. 항상 그랬듯 신경질적이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새어나오는 어줍잖은 말들과 함께 주먹세례가 이어졌다. 그래도 나는 아지를 놓지 않았다. 끝까지 놓칠까 꼭 잡고 있었다. 등을 구부려 누구든 손을 댈 수 없게 안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십분, 아니면 그보다 더? 아빠는 휘청휘청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강아지가 있다는 것 신경도 안 쓴다는 태도. 그냥 언제나처럼 화풀이 뿐이다. 나는 겨우 일어서 아지를 안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웃음이 났다. 다른 날처럼 울거나 화를 삭히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이제는 아빠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 발길질이 두렵지도 않았다.  내 손으로 지켜야 할게 있으니까. 아지의 가슴에 귀를 댔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내 곁에도 살아있는 누군가가 있다. 그걸로 충분했다.  " 학생, 이미 너무 많이 아픈 강아지여서 어쩔 수가 없네. " 의사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아지가 며칠이나 그렇게 앓았다는데 약도

  • 지새는달
  • 2007-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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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번이다아

    • 2007-03-24 19:52:0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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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와 천번글 축하해요

    • 2007-03-24 19:51:3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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